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1) 기독론과 삼위일체론(3)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1) 기독론과 삼위일체론(3)

아리우스의 잘못된 기독론 : “성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니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가 둘이라는 것은 원리상 인정할 수 없다.”
3. 니케아신조와 아리우스주의 논쟁
(1) 아리우스 당시의 삼위일체론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Pope Alexander I of Alexandria, ?-326 or 328)는 아리우스(Arius, 256-336)에 대항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삼일신(三一神)의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로고스가 인격(person, πρόσωπο) 또는 품성(nature, φύση)에서 아버지와 구별이 된다고 이해했다. 그러면서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 184-253) 식으로 로고스(Logos)를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 중재하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유일한 품성으로 서술했다.
알렉산더는 아들의 영원성을 말하나 아버지에게서 시간 이전에 나셨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는 말씀이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同一) 하거나 두 품성(nature)이 실제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양자 간에 모든 면에서 닮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 ?-341)는 오리겐의 성자 성부 종속설(從屬說)을 이어받아 유일하고 초월하시는 성부(聖父) 아버지는 실재 위에 계신 분할될 수 없는 단자(單者, monad)시며, 만물의 원인이시며, 그분 홀로 자존(自存)하시고 나시지 않은 분이시라고 했다.
그러나 로고스(성자)는 아버지에게서 만세 전에 난 구별되는 실체로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에 중재자(仲裁者)라고 한다. 로고스(성자)는 완전한 독생자이며, 영원한 빛의 반사이요, 아버지에게서 나신 자로서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된다고 한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아들이 영원에서 나신 것은 인정하나 아버지와 동등(同等)하게 영원하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의 특별한 의지적 행위에 의존한다고 하며, 아들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한다. 아들은 단지 한 분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일 뿐이며,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본체를 공유하신다는 오리겐의 견해를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단일성을 한층 더 강조하였다.
(2) 아리우스의 기독론
아리우스는 모든 실재의 근원(根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唯一性)과 초월성(超越性)을 강조하는 나머지 하나님은 분할(分割)될 수 없고 불변(不變)하는 분이시라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아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로고스(성자)는 피조물(被造物)이 틀림없으니 아버지의 명령으로 무(無)에서 형성되었다. 로고스에 적용하는 ‘나시다’는 ‘만들다’의 비유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로고스가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피조물인 것은 사실이나 스스로 존재하신 것은 아니다.
- 로고스는 틀림없이 시작이 있었다. 그는 시간 이전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시간 세계의 창조자이시나 그 자신은 시간 밖에서 나셨다.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니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가 둘이라는 것은 원리상 인정할 수 없다.
- 아들은 아버지와 교제도 없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직접적인 지식도 없다. 그는 로고스요 지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로고스와 지혜와는 구별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므로 로고스는 아버지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 아들은 변할 수 있고 심지어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는 마귀가 타락했듯이 타락할 수도 있다. 아리우스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들은 본질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존재지만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그가 죄를 짓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에게 미리 은혜를 베푸셨다고 한다.
아리우스파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예로서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나를 가지셨으며”(잠언 8:2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갈 1:15),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만드신 이에게) 신실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같이 하셨으나”(히 3:2)하는 말씀들과 하나님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구절(요 17:3 참조), 혹은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구절(요 14:28)을 인용한다.
(3) 니케아 신조(Nicene Creed, 325)
아리우스가 속한 교구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불러 심문하고 모든 공적인 활동을 못 하도록 제재했다. 그리고 325년 초에 안디옥에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the Great, 272-337) 황제의 종교 자문 호시우스(Hosius)의 사회로 노회가 열렀다. 노회는 니코데미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출교(黜敎)의 징계를 했다.
그런지 수개월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칙령으로 니케아에서 최초의 교회 공의회가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니케아신조(Nicene Creed, 325)를 작성 채택했으며, 참석한 모든 감독은 아래와 같은 이 신조에 서명했다.
니케아신조 : 전능하신 아버지시요, 가시적이거나 불가시적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으며,
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에게서 독생자로 나셨으니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니 나신 분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혹은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 위에 존재하는 만물이 있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며, 이 땅에 내려오셔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그가 나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시지 않았다거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든지,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유래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모되고 변질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하나인 사도적교회가 정죄한다.
(4) 니케아 신학과 아리우스파의 논쟁
니케아 공의회의 주된 관심사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항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同一)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한 본질이심을 말하는 고백을 신조로 삼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라고 표현하는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두고는 알렉산더가 중심인 정통파 사람들이나 유세비우스파 사람들이다 같이 받아들였으나 해석은 제가끔 달리하였다.
정통파 사람들은 –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였다. 서방의 학자들은 – 하나님 아버지처럼 아들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unius substantiae’에 대치할 수 있는 편리한 말이라고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同一本質)를 환영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파는 양보하는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였지만 – 실은 그 말이 나중에 등장하는 ‘호모이우시오스’((ὁμοιούσιος, homoiousios, 類似本質)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로마제국 내의 통일과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적 의견 대립이 혹시라도 정치적 분열의 불씨가 될까 봐 염려하는 마음에서 어떻든지 간에 모든 신학자가 피차 관용하는 가운데서 이 신조를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황제의 뜻이 다소 반영된 셈이었다.
그러나 니케아신조에 서명한 참석자들이 제가끔 자기 나름대로 해석으로 이를 받아들인 만큼 사실상 니케아의 결정은 아들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의 종결이기보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이후 정치적인 권력자가 어느 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여러 노회의 결정이 좌우되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 후 제국은 그의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337-340)와 콘스탄스(Constans, 337-350)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337-361)에 의하여 셋으로 분할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리아(프랑스)와 브리들과 스페인을 통치하였으며,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지역을 통치하다가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를 퇴치하고는 서방의 전역을 통치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통치하였는데 350년 이후 제국의 동과 서를 다시금 통일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로 361년까지 통치하였다.
337년에서 350년까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통치하는 동방에서는 아리우스파가 황제의 지지를 얻어 다시금 세력을 구축하였다. 특히 유세비우스가 득세를 하는 바람에 정통파의 거장 아타나시우스는 감독의 자리를 떠나 무려 다섯 번이나 망명을 떠나는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콘스탄스의보호 아래 니케아의 결정을 계속 견지하였다.
그러나 안디옥(Antioch, 341년),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 342년) 그리고 다시금 안디옥(344년)에서는 유세비우스파가 우세하여 아리우스파를 비판하는 한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하여 정통파들이 사용하는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배격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온 제국을 통일하여 361년까지 다스리게 되자 아리우스파들은 시르미움의 제3차 회의(357년)와 니케아(359년)와 콘스란티노플(360년) 노회에서 세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교리를 교의화(敎義化, dogamatics) 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와중에 바실(Basil of Ancyra, ?-362)의 주도하에 유세비우스가 주장하는 성자(聖子)는 그 본질에 있어 성부(聖父)와 동일(同一)하지 않고 유사(類似)하다는 타협적인 ‘유사본질’(ὁμοιούσιος, Similarity, 類似本質)이라는 말이 부각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를 중심 한 정통파가 비록 소수였으나 투철한 신앙과 서방교회 지지를 얻어 니케아의 결정을 고수했다. 이들 끈질긴 노력으로 361년부터 아리우스의 세력은 서서히 물러가고 ‘유사본질’을 주장하던 중도파들이 점차로 성자는 그 본질에 있어 성부와 동일하다는 ‘동일본질’(ὁμοούσιος, Consubstantiality, 同一本質)을 받아들여 마침내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니케아의 결정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인 권력자가 어느 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공의회나 노회의 결정이 좌우된 것이 역사의 현실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의 전통적 신조를 채택하는 일이 정치 권력자의 개입에 따라 결정되었다거나 혹은 후원을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후 반세기 이상 니케아의 기독론(성자의 본질) 결정에 대해 아리우스파들이 정치적 힘을 빌어서까지 극렬하게 반대했으나 대다수가 중도 노선을 취하다가 이중도 노선을 취한 대다수가 결국 많은 논쟁을 통해 니케아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니케아의 결정이 오랜 시간 그리고 격렬한 반대와 충분한 토의를 거쳐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것을 신조로 받게 되었으므로 더욱 귀하고 확고하게 진리를 대변하는 신조가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