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구두 수선공 윌리엄 케리 근대선교의 아버지가 되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를 오늘날 사람들은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40년여 년의 인도 선교사역 중 수 없이 많은 난관과 고난에 부딪쳤으나 끝까지 인도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평범한 삶을 주님의 위대한 사역이 되게 한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 놀스햄프톤(Northampton)에서 한 가난한 직조공(織造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둣방 도제(徒弟)로 들어가 28세가 될 때까지 구두 수선공의 일을 했다. 그는 1781년 20세 때 도르시(Dorothy)라는 구둣방 주인 처제와 결혼했다. 그녀는 케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항상 배움에 굶주려 있는 케리와 달리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결혼 초부터 그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빈곤과 비참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한동안 캐리는 아내와 자식들뿐 아니라 전 주인의 미앙인(未亡人)과 4명의 그의 아이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케리는 10대에 회심하여 침례교 교인이 되었는데 여가 시간에는 성경공부에 주력했다. 1783년 10월 5일 23세 때 침례를 받고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후 환경적인 악조건 하에서도  목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성경공부와 경건생활에 더욱 힘쓰는 한편 자기 발전을 위해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독서에 열중했다. 드디어 그는 목사가 되었고 1785년 시골의 한 작은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후에 레스터(Leicester)에 있는 좀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그곳에서 헌신적인 목회를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영적 부흥운동이 전국을 뜨겁게 휩쓸고 있었으나 해외선교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조차 없었다. 캐리도 목회에 전념하느라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캐리는 한 권의 책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며 태평양의 많은 섬들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에 대해 쓴 ‘쿡 선장의 항해기’(Captain Cook’s Voyages, 1768-1771)라는 책 내용 중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인의 외침과 “아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목에 가슴이 뜨거워져 그의 시야를 세계로 돌리게 되었다.

캐리는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도 읽었고 이어 미국 인디언들 가운데 존 엘리엇과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작품도 탐독했다. 또 교회역사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큰 세계지도를 만들어 자신의 집 벽에 붙이고 이미 알려진 각 나라의 인구와 종교 등을 표시하며 선교의 관점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 세계선교를 위한 정보들을 모아 선교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캐리는 해외선교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고 곧 해외선교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님의 명령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외선교에 눈을 뜬 캐리는 해외선교에 눈감은 교회들을 일깨우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이 곧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고 해외선교에 대한 원대한 비전과 그의 심령의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 캐리의 이런 생각은 과히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18세기 영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지상(至上) 명령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도 케리는 가슴에 불타는 해외선교의 꿈을 그대로 덮어둘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가 해외선교에 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을 펼쳐 보이자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젊은 목사, 앉게나! 만약 주님이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 하신다면 자네나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럼에도 캐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1792년 봄 그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봄’(An Enquire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이라는 87페이지의 책을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 결과 당시 이 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유럽에 해외계선교의 뜨거운 열풍을 일으켰다.  

그 후 케리는 노팅검(Nottingham)의 침례교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의 “네 장막 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전하며 여러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원대한 세계선교의 비전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때 케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다음날 이 같은 케리의 설교에 감동과 도전을 받은 목사들이 즉시 선교회를 조직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1792)였다. 캐리를 가장 열렬하게 지지했던 앤드류 풀러가 이 선교회의 초대 총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직접 자신이 인도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하자 그가 담임하고 있던 하비레인교회의 성도들도 캐리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반대했으나 곧 해외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기도로 캐리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이 캐리가 오랫동안 해외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준비한 대로 막상 선교지 인도로 떠나려 할 때 뜻하지 않은 큰 어려움이 생겼다. 그것은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까지 한 마당에 인도까지 가려면 어린아이들과 5개월이나 걸리는 위험한 항해를 해야 했는데 그래서 아내 도로시가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캐리는 아내의 반대로 좌절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면 혼자라고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당초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며 여덟 살 난 아들 펠릭스(Felix)의 배표까지 예약해 놓았다.

해외선교회가 조직 된지 수개월 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1793년 3월 캐리와 동역자 토마스는 선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영국의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토마스가 돈 관리를 잘못해 재정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여행 허가증을 얻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출발이 지연되자 케리 일행은 초조했지만 뜻밖에 좋은 소식도 있었다. 3주 전 해산한 케리의 부인 도로시가 만약 그녀의 누이동생 키티를 동행시켜 준다면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다.  

마침내 1793년 6월 13일 캐리는 온 가족과 함께 인도로 향하는 덴마크 배에 올랐고 5개월의 힘겨운 항해 끝에 11월 19일 인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인도는 선교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인도 현지의 모든 통치권을 갖고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British East India Company)가 혹시 선교사들 때문에 회사가 손해를 볼까 염려하여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도회사는 캐리 일행이 캘커타(Calcutta, the capital of India’s West Bengal state.)로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리 일행은 인도 내륙의 벽촌 오지(奧地)로 이동했다.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도로시와 큰아이 둘이 심한 병에 걸려 캐리는 이들을 간호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선교를 잘 해보려 했던 캐리의 꿈은 이 같은 역경으로 시들어 갔다. 후에 캐리는 450km 인도 북쪽에 있는 말다(Malda)로 가서 한 농장의 지배인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말다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캐리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배우고 전도할 수도 있어 좋아했지만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내 도로시의 건강과 정신병은 깊어지기만 했다. 그러던 중 1794년 총명한 눈을 가졌던 5살 된 아들 피터(Peter)가 죽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도로시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녀는 정신병에서 죽을 때까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이렇게 아내가 도리어 선교활동의 무거운 짐이 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어려움도 많았고 농장일도 바빴지만 그러나 캐리는 자신이 왜 인도에 왔는지 한시도 그 목적을 잊지 않았다. 온갖 시련과 고난 중에도 그는 날마다 성경 번역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열심히 벵갈(Bengal)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1795년 최초로 인도에 벵갈 원주민교회가 세워졌다. 날이 갈수록 벵갈 원주민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자 캐리는 자신 있게 “이제 이 근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벵갈에서 7년 가까이 땀을 흘렸지만 정작 인도인은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캐리는 본국으로부터 그를 돕기 위한 새로운 선교사들이 오자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캘커타(Calcutta) 가까이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Serampore)로 선교본부를 옮겼다. 세람포는 곧 영국 침례교회 인도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캐리와 그의 동역자인 죠수아 마쉬맨, 윌리암 워드는 세람포의 3인(Serampo Trio)이라고 불린다. 세람포 선교본부에는 10명의 선교사와 9명의 아이들이 함께 숙식을 했는데 마치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온 초대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유했다. 능력에 따라 일을 분담하였으므로 선교사역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세람포에서의 큰 성공은 캐리의 높은 인격이 첫째로 작용한 결과였다.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선교의 임무 수행을 위해 모든 것들을 희생하는 그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감싸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선교 비를 유용하여 피해를 끼친 토마스에 대해서도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린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세람포는 성공적인 선교 팀의 모범이었으며 그 결과가 이를 대변해 주었다.

캐리는 여기서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 3개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언어로 성경이 완역되는 것을 돕고 또 다른 많은 언어와 방언들로 신약성경과 쪽 복음을 번역했다. 힌두어, 마하라스티아어, 오리아어, 텔링가어 등 인도 방언들과 보탄어, 버마어, 중국어, 말레이어 등 44여개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아쉬운 것은 양보다 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세람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첫 번째 개종자가 생겨 모두를 기뻐했다. 계속 개종자가 생겨났지만 전체적으로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케리가 인도 선교를 시작한 지 25년이 지난 1818년 무렵 약 600명의 침례를 받은 교인들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큰 업적은 교회 지도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1819년 세람포대학(Serampore College)을 세운 것이었다. 이 학교는 37명의 인도인 학생으로 개교하였는데 그중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교육 부분에서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세속 교육에 있었다. 그는 세람포에 온 직후 캘커타에 있는 포트 윌리알 대학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결과적으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선교비를 충당하였으며 동인도회사에 대해서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언어 실력도 향상되었다.  

1807년 51세의 나이로 도로시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람포에 요양와 있던 덴마크 왕족 출신의 살로테 루머(Charlotte Rumohr)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원래 불신자였던 그녀는 회심하여 1803년에 캐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시간과 재산을 선교사역에 아낌없이 바쳤다. 1808년 캐리는 살로테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평온했던 선교팀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지만 결혼은 성사되었다. 살로테와의 13년 결혼생활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난생 처음 캐리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언어에 탁월하여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전에 받아보지 못한 깊은 사랑을 주었다.

휴식 없는 케리의 사역 중 가장 큰 불행은 1812년 화재로 귀중한 원고가 다 소실된 것이다. 다국어사전, 문법책, 완역한 성경 등이 타버렸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일을 계속해 나갔다. 세람포에서의 처음 15년은 좋은 팀웤으로 일했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사들이 많아지고 선교회도 변화를 겪으면서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신임선교사들은 독립적인 생활과 사역을 희망했고 선교본부는 사역에 직접 간섭했다. 이로 인해 잠시 캐리는 선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는 곧 심각한 재정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결국 캐리는 선교회의 요구를 수용함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의료사역도 재개하였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은 캐리는 1834년 73세를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고 헌신한 인도 땅에 묻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선교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영국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이처럼 평범한 구두 수선공이었던 케리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복음에 사로잡히게 될 때 주님을 향한 그의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 인도에 복음이 전해졌고 많은 교회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언어학에 대한 업적과 사회교육과 의료분야는 물론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을 함께 화장하는 뿌리 깊은 사회적인 악습과 유아살해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나가는 사회개혁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가 남기 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그의 인도선교를 통해 근대선교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즉 케리가 조직한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1792)가 도화선이 되어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선교회, 네덜란드선교회, 영국 해외성서공회, 미국 해외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선교협회, 미국 성서공회가 설립되는 등 오늘날 수많은 선교의 기틀이 된 것이다. 그는 과연 ‘근대선교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선교의 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  또한 케리의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18세기와 19세기 세계선교의 불을 댕겼으며 19세기 ‘선교황금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항상 외쳤던 캐리는 이렇게 자신의 묘비에 새겨줄 것을 부탁했다. “윌리엄 캐리, 1761년 8월 17일 생, 여기 잠들다. 가엾고, 불쌍하고, 무력한 벌레 같은 인간이 주님의 친절한 팔에 안기나이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오직 캐리의 구세주 주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편집 / 정은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