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

기독교 순교사화(23) 체코와 독일에서의 학살

기독교 순교사화(23)
체코와 독일에서의 학살

The burning of Jerome of Prague, John Foxe's Book of Martyrs(1563)
The burning of Jerome of Prague, John Foxe’s Book of Martyrs(1563)

7. 제롬의 삶과 고난 그리고 순교

진리를 위한 이 영웅은 프라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곧 그의 학식과 웅변으로 유명해졌다. 공부를 마치자 그는 유럽의 많은 곳을 여행했으며 학문으로 이름난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특히 그는 파리, 하이델베르크, 콜로뉴, 옥스퍼드 대학 등지를 방문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는 위클리프의 작품을 접하게 되자 보기 드문 그의 지지자가 되어 스스로 영어를 습득하여 그중 많은 저서들을 자기 나라말로 번역했다.

프라그로 돌아오자 제롬(Jerome of Prague, 1379–1416)은 공개적으로 위클리프의 교리를 선포했고 후스(Jan Hus)의 근면과 열정으로 보헤미아가 상당히 크게 발전한 것을 알고는 그의 종교개혁의 동조자가 되었다. 1415년 4월 4일 제롬은 콘스탄츠로 갔다. 그것은 후스가 죽기 3개월 전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그 도시에 들어가 자기편 지도자들과 상의한 후 자기 친구 후스가 사역을 회복할 수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가 콘스탄츠에 왔음이 알려져 위원회에서는 그를 체포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제롬은 신중하게 콘스탄츠에서 조금 떨어진 황제 도시 아이베르링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황제에게 만약 안전 통행증을 준다면 위원회에 출두할 용의가 있다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위원회에도 제안했지만 역시 불리한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후 그는 호소문을 콘스탄츠의 모든 공공장소에 특히 추기경 집의 문 위에까지 붙였다. 호소문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과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콘스탄츠에 출두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는 추기경의 신앙과 교리가 모두 허위로 증명되었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만약자기에게서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그의 안전을 위해 위원회의 신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이 호소문에 대해 아무 답변도 받지 못한 그는 그 당시 콘스탄츠에 있던 몇몇 보헤미아귀족들이 서명한 증명서를 가지고 가라는 경고를 밭고 자기가 알현을 하기 위해 모든 권한을 다 사용했음을 증언하고는 보헤미아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허르소에서 설츠바흐 공작에게 소속되어 있는 한 장교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 공작은 그로 인해서 위원회로부터 호의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 설츠바흐 공작은 즉시 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자기가 한 일을 알리면서 그가 제롬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원회는 공작에게 제롬 체포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를 콘스탄츠 감옥으로 보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제롬은 콘스탄츠에 있는 한 탑으로 이송되어 다리는 묶여 단단히 갇혔다. 제롬은 그의 친구 후스가 순교할 때까지 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 그 후 그는 끌려나와 신앙을 돌이키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무서운 고문대 앞에 선 제롬은 겁에 질렸고 연약해진 그는 자기가 주장하는 교리를 취소하고 후스는 그런 처벌을 받아 마땅하며 그와 위클리프는 이단이라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를 결박했던 쇠사슬을 풀어주고 가혹한 취급도 일시 중단했다. 그러나 제롬의 적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제롬에게 다른 형태의 취소 선언을 요구했다. 제롬은 공개적 하도록 해 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제롬이 위원회 앞으로 다시 끌려 나왔다. 그러자 제롬은 듣는 이들이 놀랄 선언을 했다. 진리에 영광이 돌아가도록 자기 이전에 교리를 버리겠다고 한 것을 취소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유를 진술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위원회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제롬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야만적인 짓인가? 340일 동안 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서 나는 온갖 비참함과 억울함을 맛보았다. 당신들은 나의 적들에게는 나를 고소하도록 최대의 기회를 허용하고 내게는 변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도주지 않았다. 당신들은 내가 주장하는 교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더러 이단자라고 했다. 당신들은 내가 공언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나를 믿음의 적이라고 했다. 당신들은 총회의 일원이다. 당신들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모든 중대한 것과 지혜와 성스러운 것이 오고 간다. 그러나 당신들은 역시 사람이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유혹을 받는다. 지혜에 대한 당신들의 인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당신들은 잘못된 곳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지금 진술하는 진실은 나 자신만의 진실이 아니요 모든 사람의 진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진리이다. 그것은 우리 후손들의 권리에 영향을 미칠 진리이다.”

그로부터 3일 뒤 제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소송 사건을 지지하는 증인들이 장황하게 여러 가지 거짓 증언을 했다. 제롬은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일 년 넘게 외로운 감옥에 홀로 갇혀서 햇빛도 보지 못하는 어둡고 열약한 환경에 속에 있었음에도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변론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완악한 자들은 제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제롬이 진술하려는 것을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론을박 끝에 과반 수 이상의 찬성으로 위원회는 그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제롬의 자기변호는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롬의 유창한 웅변은 아무리 돌 같은 마음이라도 녹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제롬은 말하기를 지금은 이단으로 정죄 받은 개혁자들이 역사가 지나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고 순교한 순교자들을 열거했다.

제롬은 위원회을 비롯한 자기 앞에 둘러 선 대적 자들에게 조금도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없이 자기가 믿는바 진리를 선포했다. 제롬은 그들의 손에 희생 된 개혁자들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 오해와 편견과 영적 무지로 인해 그들 손에 억울하게 죽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제롬은 후스에 대해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파수한 주님의 진정한 종이었다고 찬사를 보내며 자기도 그 같은 후스의 뒤를 따라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제롬은 영국의 샛별과 같았던 위클리프의 신앙과 교리를 옹호한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교회를 거슬릴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다만 성직자들의 악폐를 반대하는 것뿐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 교회의 세습제란 확실히 경건치 못한 일이며 교회란 원래 복음 전파와 자선과 사랑을 목적으로 세우신 것인데 지금 교회가 온갖 축제와 성직자들의 화려한 옷과 사치스러운 행사들로 안목의 정욕에 팔려있다고 했다.

방안에 분노가 가득한 가운데 재판이 끝났다. 제롬을 불에 태워 죽이라는 판결이 났고 즉시 사형 집행인들 손에 넘겨졌다. 그러나 제롬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였기 때문에 면직하는 의식은 없었다. 사형 집행인들은 마귀라고 쓴 붉은 색의 종이 모자를 준비했다. 제롬은 그 모자를 머리에 받아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흉악한 죄인인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실 때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그러니 나도 이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이 모자를 쓰겠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제롬은 시편을 노래했다. 그리고 후스가 화형당한 그 장소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아주 꿋꿋하게 화형 당할 말뚝에 섰으며 장작에 불을 지피자 이렇게 말했다. “이리 와서 내 눈 앞에서 불을 피워라. 만일 내가 두려워했다면 나는 도망갈 기회가 많아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길이 그를 휩싸자 그는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불길 속에서 내 영혼을 그리스도 당신께 드리나이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