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33)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7. 테스트우드와 그의 동료들의 유죄 판결
헨리 왕이 캐서린 파와 결혼하고 나서 다시 공중 앞에 나타났을 때 가드너는 아주 기술적으로 그 기회를 잘 이용하여 남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그가 개혁신앙에 적대감을 가진 자로 알려져 있던 만큼 결과적으로 그에 의해 체포된 사람이 많았다.
그 동안 서너 명이 체포되어 윈저에 있는 도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들의 이름은 앤소니 피어슨(Anthony Pearson), 헨리 필머(Henry Filmer), 테스트우스(Testwood)였다. 그 다음 목요일에 재판이 열렸고 유명한 재판관들이 주관했다. 그들은 제단의 영성체(領聖體, 로마 가톨릭 성찬의 떡을 말함)를 “성찬의 떡은 상징적이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배심원들은 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었고 그래서 당연히 테스트우드와 그의 동료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들은 사형장으로 가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랐고 지금 그들이 당하는 일은 성도로서 가장 복되고 행복한 일이므로 그들의 고난을 보고 믿음이 동요되지 말고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설 것을 부탁했다. 그들이 사형장에 오자 앤소니 피어슨이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여 어서 오라! 이날 나와 너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 가운데 같이 결혼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세 사람 모두 사형대에 묶였다. 테스트우드는 손을 위로 쳐들고 눈을 하늘로 향한 채 주님께서 하늘에서 자기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아주 겸손하게 한결같은 태도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했다. 그들이 이 같이 고난을 꿋꿋이 이겨내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들 마음이 그들과 함께 죽었음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성체를 거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8. 아담 댐맆의 순교
또 한사람의 정직하고 학식 많은 사람이 곧 앞에서 열거한 순교자의 뒤를 따랐다. 흔히 아담 댐맆(Adam Damlip)이라 불리는 조지 부처(George Bucher)는 로체스터 주교 피셔 당시 정직한 로마 가톨릭교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주교가 죽은 뒤 대륙으로 여행하며 로마까지 갔고 교황의 도시인 그곳에서 진정한 신앙과 경건함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 사람들의 충격적인 생활을 목격하고 너무나 큰 공포와 전율을 느껴 폴 추기경이 그에게 강사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도 가능한 속히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칼레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에 지치고 혐오하는 몇몇 사람을 만나 그들의 요청에 따라 만약 당국 허가만 얻는다면 머물면서 설교할 것을 약속했다. 그 당시 왕의 대리인이었던 리슬 경이 즉시 허락하고 그에게 설교 자격증과 주교 대리 존 버틀러 경의 자격증을 내 주었다. 그 귀족은 댐맆의 설교를 아주 기뻐하면서 그가 만약 그 도시에 머물며 설교해 준다면 자기 집을 제공하고 책을 살 돈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댐맆은 그 모든 후한 제안을 사양하고 편안히 거처할 수 있고 자유롭게 연구할 조용한 숙소만 제공해 준다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설교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에게 월리엄 스티븐스의 집이 숙소로 제공되었고 그는 그를 칼레에 머물게 한사람들 중하나였다. 거의 한달 가까이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 특별히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과 미사(Missa)를 반대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의 설교를 경청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화이트프라이어스의 대성당에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타운 홀 앞에 있는 공중모임 장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부들이 곧 분노하기 시작했고 화이트 프라이어스의 부수도원장이 리슬 경의 담임 목사와 협력하여 영국에 있는 성직자들에게 그를 반대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댐맆은 캔터베리 대주교 앞에 출두하여 그에 대한 송사에 답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즉시 송환명령에 순종하고 그에 대한 송사에 매우 재치 있고 담대하게 답변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던 주교들은 그의 지해에 놀라기도 하고 그들이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재능이 없음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날 그는 일단 석방되고 다음날 다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대주교 크랜머는 그에게 비밀리에 다시 출두하면 틀림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도시를 빠져나와 다른 지방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다시 칼레로 압송되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사형을 내리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그를 이단이라고 하는 죄명은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적들은 그가 여행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폴 추기경으로부터 프랑스 크라운을 받았다고 그에게 반역자라는 죄명을 씌웠다. 그러한 사소한 고소로 인해 그는 교수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의 시신(屍身)은 넷으로 토막을 내어 버리라는 판결도 받았다.
이 판결은 곧 시행 되었고 아담 댐맆은 이렇게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과 미사(Missa)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다가 로마 가톨릭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9. 성경을 번역한 죄로 순교 당한 틴데일
종교개혁의 횃불이라 불리는 월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의 이야기와 순교를 살펴보자. 그는 비록 영국에서 고난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순교자의 대열에 서야 할 것이며 그의 큰 열의와 인내와 진리의 전파로 볼 때 그는 사도로도 평가될 만하다.
월리엄 틴데일은 웨일즈 국경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그는 학문을 익히고 지식을 쌓고 성경말씀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케임브리지로 옮겼고 다시 글로스터셔로 갔다가 거기서 웰치라는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족의 식탁에는 종종 수도원장들과 성직자들과 또 사회 지도자들이 초대되었는데 틴데일은 자연스럽게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대해 식탁대화에 끼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틴데일은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과 예리한 논리로 당시 로마 가톨릭의 모순들을 지적하여 식탁에 둘러앉은 자들이 입도 열지 못하도록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폭로했다.
이에 토론에 참여했던 자들이 당국에 이 사실을 고발했고 곧 주교단이 회의를 열고 그 토론에 참여했던 자들 모두 주교회의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가운데 틴데일이 있었다. 틴데일은 그에 대한 모함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가기로 하고 가는 길에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틴데일이 짐작했던 대로 주교 중 하나가 첫 대면부터 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고소할 증거를 잡지 못했다.
틴데일의 친구인 문마우스 박사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틴데일은 그에게 가서 자신의 찹찹한 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교황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말을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목숨이 위험한 일이니까요. 나는 교황의 사무원이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그와 모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논쟁하게 되었는데 틴데일이 심하게 그를 몰아붙이자 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교황을 모독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는 교황의 법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 없이 있는 편이 더 났겠소!” 그러자 틴데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수년 더 연장해 주신다면 한 소년이 자기보다 좀 더 성경을 잘 알도록 하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 그 후 신부들은 틴데일에게 더욱 심하게 굴면서 그에게 이단자라고 말했다. 신부들이 너무나 괴롭히자 틴데일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 길드퍼드 경은 런던으로 돌아온 틴데일을 런던의 주교 톤스톨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틴데일은 거의 일 년 동안 런던에 있으면서 성직자들의 허영과 자만심과 무지에 크게 실망했고 그런 만큼 그는 주교의 집에서 그가 신약성경을 번역할 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국 전역에는 그를 위한 안전한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가서 독일에 있는 영국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했다. 그런 가운데 틴데일은 사람들이 맹목적이 되고 교회가 오류와 미신에 사로잡혀 있게 된 원인이 성경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리가 죽은 언어의 무덤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신부들은 성경을 묻지 보지도 못하게 했고 혹 누가 성경에 대해 물으면 소위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박사라는 사람들은 묻는 사람들을 오히려 당황하게 만드는 황당한 대답을 했고 성경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목적에 맞도록 왜곡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틴데일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아 영국의 평범한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527년경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 책마다 짤막한 서문을 썼다. 그 후 모세오경을 번역했고 여러 다른 경건한 작품들도 썼다. 그의 책들은 출판되어 영국으로 건너갔고 성전 제단에서 나온 거룩한 불길처럼 암흑기에 빛을 던져 주었다. 틴데일은 후에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옮겨가 주로 안트워프에서 살았다. 거기서 모세오경 번역을 마치고 다시 함부르크로 가 그것을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배가 파선되어 그는 모든 원고와 거의전 재산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틴데일은 결코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틴데일은 함부르크로 돌아가 다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고 1525년 신약성경의 번역판이 처음 나왔을 때 틴데일은 혹시 실수한 부분이 있었을까 하여 학식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교정을 보았다.
그러나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성경을 자기들 외에 일반 사람들이 소유한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은 이단과 속임수와 오류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하며 사람들이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을 읽지 말라고 선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을 반대하는 것이 믿음 있는 자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질투의 현미경으로 영어로 번역 된 성경을 탐색하여 어쩌다가 철자 하나만 빠져도 그것을 악의에 찬 의도적인 성경원본의 곡해라고 공격했다. 영국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은 분노로 가득 차 왕이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에 대해 금지조치를 내릴 때까지 틴데일에 대한 이 같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왕의 명에 의해 틴데일이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일이 정죄되고 누구든지 영어성경의 구독을 금지했다.
그러나 틴데일의 적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틴데일을 함정에 빠뜨려 파멸시킬까 계속 연구했다. 결국 그들에게 매수당한 필립이라는 사람이 틴데일을 배반하여 틴데일은 체포되었고 필퍼드성으로 호송되어 거기서 그는 죽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1년 6개월 후 황제는 틴데일을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장으로 끌려간 틴데일은 기둥에 묶인 채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주님!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그러자 그는 목이 졸렸고 그의 시체는 불에 던져지고 타서 재가 되었다.
틴데일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자기를 밤낮으로 지키던 간수와 그의 딸과 감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회심케 했다. 그리고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틴데일 같은 사람이 참 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참 된 그리스도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검찰총장은 틴데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는 학식 있고 선량하였으며 누구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