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첫번째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소!

선교사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6-1890)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힌 첫 번째 선교사이다. 헤론은 영국에서 태어나 1870년 14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 테네시로 이주한 이민 1.5세였다. 언더우드나 에비슨도 10대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1.5세였다. 헤론은 영국에서 14년, 미국에서 15년, 한국에서 5년간 나그네로 살고 영원한 고향으로 갔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기회를 다 포기했다. 그가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20대의 젊은 나이에 모교인 테네시대학 의학부 교수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22세 때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기 때문이다. 또 사랑하는 약혼녀 의과대학 학장의 딸 해터 깁슨(Hattie Gibson)의 만류도 있었다. 그러나 헤론은 조선의 첫 번째 의료선교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조선에 파송한 첫 선교사였다. 그는 극동의 미지의 나라 조선에 파송되는 첫 선교사가 가져야 할 복음적 신앙, 건강, 의지와 용기, 전도열, 탁월한 의술, 판단력과 인격 등을 골고루 갖춘 준비 된 선교사였다.
헤론이 조선 선교사로 파송 되게 된 배경은 1884년 1월 일본에서 보낸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 편지가 뉴욕 크리스천 위클리(Christian Weekly)에 실렸는데 이 기사를 본 선교본부 실행위원 브루클린장로교회의 맥윌리엄스 장로가 선교본부에 조선선교를 위해 선교사 2명의 2년 봉급인 5,000달러를 헌금했다. 선교본부는 1883년 5월 의료선교사를 지원한 헤론을 1884년 4월 28일 조선의 첫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는 1885년 6월 21일 조선의 한양에 도착했다.
헤론은 선교는 전도, 의료, 교육, 문서, 여성 등이 함께 가야 한다는 선교신학을 가진 선교사였다. 1887년 9월 알렌의 후임으로 구리개 제중원 제2대 원장 겸 고종의 시의(侍醫)로 임명받아 1890년 죽을 때까지 그는 복음을 전하고(전도와 문서), 가르치고(의학조수 교육과 고아원학교), 치료(의료)를 통해 조선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첫 선교사였다. 그는 1890년 7월 26 5년이 지났을 때 이질로 병사(病死)했다. 여름이라 빨리 시신을 매장해야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마련했다. 헤론은 부활을 기다리는 양화진 언덕에 묻힌 첫 외국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신마저도 선교의 백 년 대계를 위해 사용된 자였다.
그럼에도 헤론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선교사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정규선교사 개념은 ‘죽을 때까지 평생 전임으로 헌신한 선교사’만을 의미했다. 그것은 결혼처럼 일생을 건 선교부와 계약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가 헤론처럼 은퇴 때까지 선교사역을 하지 못하고 요절(夭折)하면 정규선교사 명단에 넣지 않았다.
헤론은 5년짜리 선교사였기 때문에 선교본부의 정규선교사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헤론을 기억하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된 헤론의 아내는 후에 게일 목사와 결혼하여 원산과 서울에서 사역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두 딸과 함께 스위스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1908년 서울에서 죽었다.
헤론은 모교의 의학부 교수 청빙을 정중히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의 첫 번째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소!” 헤론 부부는 정든 부모와 형제가 있는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생면부지의 조선인들을 위해 주님 맡기신 사명에 죽도록 충성하다 생명을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