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독교 이해와 우리의 대응

   

PART Ⅱ

from left, Vladimir Lenin(1870-1924, Russian), Friedrich Engels
(1820-1895, German), Karl Marx(1818-1883, German),

시작하는 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는 ‘세계철학사’에서 “레닌 시대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인 ‘과학적 무신론’이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된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다”고 기술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무신론의 원형이고, 레닌 시대에 이것은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1917년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에 의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세계에 혁명의 열기를 불어 넣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가 창시(創始)한 ‘과학적 무신론’으로서의 공산주의는 20세기에 과학주의 바람을 타고 온 세계에 확산되었다.  

여기서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용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과학’이라는 말은 ‘가시적 물질로 구성된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무신론’이라는 말은 신(神)의 존재를 전혀 부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과학주의 밑에 감추어진 무신론 주장은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어도 결국 과학적 무신론이 되는 것이다.

이 논문은 과학적 무신론의 원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신학(神學)은 이로 인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과학적 무신론’으로서의 공산주의의 영향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쓰이길 기대한다.

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독교 이해

1. 마르크스의 명제: ‘종교는 민중의 아편’

마르크스는 1843년 ‘독-불연보’에 발표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이라는 논문에서 종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명제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미신적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고 있는 것이며, 특히 기독교가 ‘천국’이라는 ‘아편’으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의 혁명의지를 마비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봄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2.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에게 최고의 경전이 되는 한편, 어느 나라 공산당에게나 기본 강령이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 이외의 모든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대신에 폐기하고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반대로 행동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인류 사회의 유일(唯一) 사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사상(思想)을 폐기하고 공산주의 사상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미신(迷信)이며, 다른 모든 철학적 사상들에 대해서는 게으른 부르주아지(자본가무리들)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실험도 허구적으로 조작하고 과학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과학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유물사관도 과학적 사회주의로 인정받기 원했다. 왜냐하면 그때 과학이라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험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 또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은 물질주의(物質主義)에 기초하고 있는 무신론(無神論)이다. 유물사관이 과학으로 인정받게 되면 유신론적인 관념론이나 종교는 미신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적극적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끌어들여 유물사관을 유물(唯物) 진화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강변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다 레닌주의를 덧붙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종교 폐지 정책을 추진했던 사례는 1871년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이 최초지만 파리코뮌 자체가 곧 붕괴되어버려 현실적 실천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되던 시기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파리코뮌이 내걸었던 종교 폐지정책은 곧 기독교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에 성공하여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면 반드시 가장 먼저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말살정책이 추진되었던 사실은 이러한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와 공산당은 유신론(有神論) 진영과 무신론(無神論) 진영의 투쟁에서 각각 사령탑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결코 양립(兩立)할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양보할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敵)을 아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3. 엥겔스의 기독교 이해

엥겔스는 1853년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이 소위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대 아라비아인들의 종교적 전통과 부족의  전통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엥겔스는 1855년 ‘신오데르신문’에 맥주법(Beer Bill)과 일요일 상업법(Sunday Trading Bill)의 통과를 계기로 일어난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의 시위를 반(反) 교회운동으로 보는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더러운 이윤으로 지탱되는 거대한 양조장 주인들과 독점화해가는 도매상들에 의해 방탕하고 타락한 쾌락을 추구하는 귀족계급과 교회의 동맹이 어제 하이드 파크에서 발생한 대중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는 열성적인 남녀 챠티스트(Chartist Movement는 19세기 중엽, 1838-1848 영국에서 있었던 사회운동)들이 ‘챠티스트운동을 재조직하자!’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고 썼다. 이후 공산주의 문서가 부르주아지(자본가집단) 사회를 지탱하는 세력이 기독교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엥겔스는 자신의 동지 마르크스의 스승이었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것을 계기로 1882년 바우어의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고찰하는 ‘부르노 바우어와 초기 기독교’라는 논문을 썼다. 왜냐하면 엥겔스가 보기에 바우어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흥미진진한 문제’ 즉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어느 신학자들보다 더 많은 일과 더 가치 있는 연구를 해내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기만적 행위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엥겔스에 의하면 그 종교의 기원 및 발전의 역사적 조건을 밝혀내는 역사적 고찰 없이는 그 종교를 폐기할 수 없다. 이것이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기독교에 엥겔스가 관심을 가지는 된 이유이다. 그런데 바우어는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고 복음서가 쓰여진 연대를 규명했고, 순전히 언어적 고찰을 통해 복음서들의 내용적 상관성을 밝혀냈다.

엥겔스는 주후 4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25 B.C.-42 A.D.)가 ‘기독교의 진정한 시조’이고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 3 B.C.-65 A.D.)가 ‘기독교의 삼촌’ 정도에 해당 된다는 바우어의 주장을 인용한다. 바우어는 필로가 이미 서방의 관점과 동양적 사고방식을 결합하여 ‘원죄’라든가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말씀 즉 로고스’ 등의 기독교적 개념과 희생제물을 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신(神)에게 의탁함으로써 속죄(贖罪)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기독교의 근본적 원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유한한 인간으로 나타나고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악으로 가득 찬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필로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필요로 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발전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필로의 사상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엥겔스에 의하면 바우어는 이런 점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우어는 스토아철학 특히 세네카의 철학이 사도서(使徒書)에 문자 그대로 인용되어 기독교 윤리에 반영되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바우어는 기독교가 왜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엥겔스는 바우어의 이 같은 견해를 기초로 고대의 모든 종교는 각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여 민족종교로 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엥겔스는 기독교가 민족종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 유대 민족종교 고유의 의식(儀式)을 폐기해버린 것이다.

둘째, 죄의식을 가진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으로 타락한 세상으로부터의 내적 구원과 인간이 오랫동안 갈망해 온 의식의 위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것들이 기독교가 모든 민족종교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4. 레닌의 종교 이해 

하지만 공산주의에 실천적으로 생명력을 부여한 자는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다. 공산주의는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실질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레닌은 종교에 관련해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의 종교 사상은 러시아와 국제무대에서 노동자계급이 적과 맞서 벌인 정치투쟁 및 사상투쟁의 새로운 조건에 따라 참된 마르크스주의적 종교관을 더한층 발전시킬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그의 저작들에서 진술되고 있다.

‘사회주의와 종교’(1905년)에서 그는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인 싸구려 술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년)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과학적 무신론으로 확립했다. 또한 ‘종교에 대한 노동자당의 태도에 대하여’(1909년)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주장이 종교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종교와 교회에 대한 계급과 정당의 태도’(1909년) 등에서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학교를 교회로부터 각각 분리시키고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도 기독교적 전통이 뿌리 깊었던 서구에서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수정주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말하자면 유로-코뮤니즘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주의자들에게 레닌의 말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세계를 과학적 무신론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종교 폐기정책을 실천하여 종교가 없는 공산주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는 논쟁이나 연구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그저 폐기되어야 할 낡은 미신일 뿐이다.

Ⅱ. 기독교 신학에 미친 공산주의의 영향

공산주의 창시자와 공산주의 제국을 창건했던 레닌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현실적으로 실천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 이후 공산당이 집권했던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공산주의를 수용 또는 융합시켜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입장은 대표적으로 스위스의 노동자 출신 목회자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 1868-1945)에 의해 시작되어 블로흐(Ernst Bloch, 1881-1977) 등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은 판이하게 달랐다. 라가츠는 1906년부터 ‘Neue Wege’(새로운 길)을 창간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 종교사회주의를 모색했다.

라가츠는 1929년에 ‘그리스도로부터 마르크스에게로, 마르크스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를 출판하여 진정한 기독교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에 접붙여서 하나님 나라 아닌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적 입장에 서있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에 접목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제안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기독교는 사회주의가 하나님의 뜻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적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그리스도의 제자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아예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 입장에 서있었다. 블로흐는 일찍이 23세의 나이로 철학박사를 취득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때마침 득세한 나치를 피해 전전하다가 결국은 193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하고 소련에 분할된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라이프치히대학 초청을 받아 1948년 동독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저술한 ‘희망의 원리’(1959년)를 이곳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으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동독 정부를 비판하다가 쫓겨나서 다시 서독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서독에서 ‘기독교에서의 무신론’(1961년)을 저술하여 진정한 무신론자만이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괴상(怪狀)한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중간 어딘가에서 그의 희망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은 위르겐 몰트만(J & uuml;rgen Moltmann, 1926- )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희망의 신학자’로 만든 업적은 남겼다.    

얀 밀리치 로흐만(Jan Milic Lochman, 1922-2004)은 체코에서 태어나 학생 때 1939년 독일 나치의 침공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물리친 틈을 타서 체코는 1944년 해방되었으나, 곧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지도를 받는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신학교를 졸업한 로흐만은 잠시 있었던 해방기를 틈타 영국으로 유학했다. 여기서 만난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체코로 돌아와서 프라하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자격 논문을 쓰며 약 20년을 지냈다. 그리고 1967년 바젤대학교 교수로 초청 받아 총장까지 지냈고 그동안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해 설교와 강의를 했다.

로흐만의 신학에 의하면 ‘철저한 유산’을 공동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냐?’를 선택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프로메테우스적인 유사(類似) 메시아적 구원론으로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류사회에서 혁명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해야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화는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참여하여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기독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하기 위한 우회 통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우회통로를 통해 공산주의 쪽으로 가는 사람은 있어도 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쾌락은 사람을 프로메테우스의 사슬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종교관에 대한 연구를 하고나서 이렇게 지적했다. “보수적 종교 세력들은 내세(來世)에의 희망을 이용하여 역사의 부당함을 사기(詐欺) 치려고 했던 반면에 마르크스주의는 메시아주의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니버는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 “반(反) 종교가 다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종교로 변화하는 단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니버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뒤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들의 저작들이 마치 경전처럼 읽혀지고 혁명적 사회변혁이라는 기각할 수 없는 교의(敎義)를 실현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또한 상황에 따라 필요한 교리로서 발전되어 간 것이다.”라고 했다. 니버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선구자들은 메시아주의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사용한 17세기 영국의 크롬웰과 당시 청교도혁명을 이끌었던 급진파들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지적에 유의하고 있다.

그러나 니버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 휴머니즘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의미를 가졌으나 경험적 검증이 충분하지 못했고 또 무신론을 새로운 종교로 변형시킨 혁명적 예언자의 수단이자 계급투쟁의 무기로 삼았으며 노동자의 소외가 산업기술 과정 자체 내에 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사회 체제 안에 잠재하는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구분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고 했다.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영향의 또 다른 현상의 하나는 남미에서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 1928- )가 ‘해방신학’(1971년)을 발표함으로써 이름 붙여진 ‘해방신학’(解放神學, Liberation theology)이 있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 신학에 수용한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가난한 자와 피압박 민중에 주목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해방을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방법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해방신학은 1980년대에 발생지였던 남미 가톨릭에서 로마 교황청의 탄압을 받아 주춤했으나 이후 세계경제의 양극화로 빈곤국으로 분류되는 제3국가들에서 소생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해방신학’의 실천적인 면은 가톨릭 지학순 주교가 1974년 유신체제를 반대하면서 결성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보여주고 있다. 이 단체의 함세웅 신부는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저술하여 해방신학을 국내에 소개하였다. 개신교에서는 김재준의 자유주의적 신학을 토대로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시기에 안병무와 서남동 등에 의하여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고, 분단된 남북한의 통일운동을 신학에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문익화, 문동환, 박순경 등에 의해서 ‘통일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통일신학 등에 관련해서는 연구서들이 여러 가지 나와 있으나 이 논문에서는 이렇게 개략적인 소개로 그치고자 한다. 그러나 이상에 열거된 신학적 그룹은 ‘해방신학’의 경향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학적 연구보다는 가난한 자와 피압박 민중을 위한 사회적 구원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와 개인의 구원이 기독교적 구원론에 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실천론에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 선언’에서와 같이 공산주의 유일사상(唯一思想)을 주장하는 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선적(獨善的)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공산당이 집권하여 모든 진리(眞理)와 종교(宗敎)와 도덕(道德)을 폐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그것들을 대체할 것으로는 유일하게 공산주의(共産主義)만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의 범주 내에서 사고(思考)하고 행동(行動) 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대의 가치는 자유(自由)라고 인식하고 있는 근대 이후 인류 사상에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불허하고 절대적 유일사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에는 ‘사상(思想)의 자유’와 ‘소유(所有)의 자유’가 가장 큰 가치(價値)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위해 근대 사상가들은 독재적 통치계급에 맞서 피를 흘리며 투쟁했었고, 우리는 그들의 유산(遺産)을 향유(享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게 인류사회는 공산주의적 집단사상으로 일원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당의 정책에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개인에게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적 세력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정치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해방 후에 한반도는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에 의해 남한에서는 미국적 자유민주 체제가, 북한에서는 소련의 소비에트적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패했던 조선공산당은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 박헌영 등에 의하여 1945년 재(再) 창당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은 1948년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으로 월북하고 말았다.

결국 이로 인하여 한민족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6. 25사변이라는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참극을 겪어야 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이 전쟁에서 실패하자 박헌영 등 소위 월북 공산주의자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자유시 참변’(1921년) 또는 ‘스탈린 대 탄압’(1930년대)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1955년경) 소련군 점령 시절 및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 북한 기독교인들 역시 처참한 핍박을 당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과학적 무신론의 본거지 소련에서는 이제 공산주의가 과거의 역사로 지나갔지만 한반도 북쪽 절반은 아직도 공산주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다. 그 이웃에 있는 중국은 일부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산당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공산주의에 의한 박해를 겪었고 지금도 그 위협을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절대적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무신론으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면 교회는 폐기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교훈은 거짓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각국의 공산당 정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사례는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공산주의 운동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실패하고 있지만 그 ‘변종’인 ‘과학적 무신론’은 계속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 과학적 무신론의 실체인 공산주의를 더욱 분명히 알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공산주의 교조들의 기독교 이해와 이것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글쓴 이 / 허정윤 박사(총신대 사회교육원,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신학석사 Th. M.,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철학박사 Ph.D.) 원제; ‘마르크스와 엘겔의 기독교 이해’(The Understanding of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on Christianity)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vidycho&log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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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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