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말씀의 횃불을 든 틴데일

말씀의 횃불을 든 틴데일 

“Lord, open the King Englands eyes!,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시작하는 말

이것은 16세기 영국 최초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인간들의 교만함을 벌하시기 위해 원래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를 혼잡(混雜)케 하셨다. 언어의 혼잡은 단순히 인간의 흩어짐이라는 결과만 가져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접해야 이를 수 있는 영생에의 길로부터 인간을 멀리 떼어 놓았다.  

16세기 초까지는 라틴어 성경(Latin Vulgate)만 그것도 사제(司祭)들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성도들을 상대로 사악한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성경을 악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내어주셨던 하나님은 또 다시 그 사랑으로 윌리암 틴데일을 보내주셨다.

윌리암 틴데일은 1494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7개국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고전어를 비롯한 언어학습에 몰두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틴데일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전부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기독교의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어느 때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청년기 그의 행적을 보아 주님의 소명에 합당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1. 성직자들의 무지에 분노  

틴데일은 1512년 옥스포드의 막달렌대학(Magdalene College)에 입학하여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특히 이때부터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1515년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던 캠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으로 옮겼다. 그곳에 서 틴데일은 글로스터에 사는 웰치라는 사람의 아이들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당시 성직자들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부유했던 웰치 부부는 종종 훌륭한 만찬을 준비하여 수도원장, 학장, 박사 및 고위 성직자들을 초대했고 자연스럽게 틴데일도 그들 대화 속에 끼게 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면 루터, 에라스무스 등에 대해 또는 하나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틴데일은 다른 이들이 잘못된 주장을 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반박했다. 그의 반박은 적절한 성경구절을 찾아 제시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하는 논리 정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논쟁 때마다 성직자들의 무지와 신앙에의 맹목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양들의 영혼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틴데일에게 앙심(怏心)을 품기 시작했다. 더구나 틴데일이 나타난 이후로 웰치 부부가 성직자들을 자주 초청하지도 않고 혹시 그들이 방문을 해도 전처럼 쾌활하게 대하지도 않자 그에 대한 화살이 모두 틴데일에게 쏟아졌다. 그들은 틴데일의 말이 이단이라고 단언했으며 수많은 죄목을 덮어씌워 그를 주교의 종교법 고문관에게 고발했다.

그러던 중 틴데일은 어떤 유명한 신학자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없이는 살 수 있어도 교황의 법 없이는 살 수 없다.” 틴데일은 이처럼 불경한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어 교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던 그 당시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말로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두신다면 몇 년 안에 쟁기를 가는 소년이 나보다 더 성경을 잘 알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더 이상 글로스터에 머물 수 없게 된 틴데일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런던으로 향했다.        

2. 만인에게 성경을 

“몇 년 안에 쟁기를 가는 소년이 자기보다 더 성경을 잘 알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던 틴데일의 가슴 속에는 만인이 성경을 읽게 하겠다는  의지가 불꽃처럼 일고 있었다. 이는 그가 접한 모든 성직자들이 하나같이 성경에 너무나 무지한 것에 대한 분노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또한  틴데일은 교회 안에 팽배한 신앙의 모든 오류의 주된 원인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했다.

성경에 무식한 성직자들은 자기변명의 궤변으로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흐려 놓았으며 자기들의 입맛에 안 맞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성경을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교묘히 악용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성도들로서는 성직자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짐작만 할 뿐 잘못을 명확히 지적해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미혹 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일이라고 틴데일은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상 라틴어 성경 이외의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엄했는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틴데일은 어떻게든 성경을 읽지 못해 진리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진리를 바로 알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런 틴데일에게 1516년에 출판 된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은 그의 생각에 불을 지폈다.

런던에 도착한 틴데일은 런던의 주교 쿠드버트 턴스탈을 찾아갔다. 턴스탈은 에라스무스의 친구이자 에라스무스가 칭찬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틴데일이 턴스탈 밑에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틴데일을 세우신 목적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은밀히 움직이셨다. 턴스탈은 자기 집에 필요 이상의 인원이 있다는 이유로 틴데일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턴스탈 주교로부터 거절당한 틴데일은 런던 시의 참사회원인 험프리 멈무스의 집에 1년 정도 머물면서 영국 어디에도 자신이 들어앉아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멈무스를 비롯한 몇 사람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1524년 독일로 건너갔는데 이것이 그에게 영국과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3. 마침내 영어성경 출판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주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틴데일은 비교적 위험이 없이 자유롭게 헬라어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을 할 수 있었다. 틴데일은 비텐베르그로 가서 루터에게 격려를 받고 함부르크로 옮겨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독일로 건너 온지 만 1년만인 1525년 드디어 틴데일은 신약성경을 완전히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 영어성경은 밀고자의 고발로 즉시 출판되지 못하고 쾰른에서 보름스로 인쇄소를 옮기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1526년 최초로 3,000부가 인쇄되었다. 그의 성경 번역은 철저히 원문 위주의 번역이었고 그 번역 문체는 서민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였다. 틴데일의 성경은 그로부터 약 1세기 후에 나오는 영국의 흠정역 성경(A.V 혹은 K.J.V)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틴데일의 영역 신약성경이 나오자 경건치 못한 고위 성직자들은 틴데일이 자기보다 지혜롭다는 사실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디도 진리의 빛으로 인해 자기들이 이제껏 저질러온 어둠의 행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수하물 꾸러미 속에 숨겨져 영국으로 밀반입된 틴데일의 신약성경은 턴스탈 주교에 의해 성 바울성당 마당에서 모두 불태워졌다. 심지어 턴스탈은 네델란드에 잠시 머무는 중 그곳의 신약성경 영역본들까지 사들여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이때 중간에서 턴스탈 주교에게 성경을 구해다 준 어거스틴 패킹톤이라는 상인은 틴데일의 지지자로서 상황이 잘못 된 것을 발견하고 턴스탈에게서 받은 상당량의 성경 대금을 틴데일에게 은밀히 넘겨주었다. 턴스탈이 지불한 이 성경 대금은 성경을 다시 출판하는 데 틴데일에게 큰 힘이 되었다. 틴데일은 그 돈으로 신약성경을 다시 수정하고 대량 인쇄하여 도리어 무더기로 영국에 반입 할 수 있었다.

1530년 틴데일은 신약에 이어 구약성경 영어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의 사악함은 틴데일의 영역 신약성경을 불태우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틴데일의 손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구약의 모세오경을 번역하고 있던 틴데일을 1535년 체포했다. 틴데일을 밀고한 헨리 필립스는 틴데일에게 접근하여 친해진 후 마치 유다가 로마 군사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듯이 틴데일 뒤에서 걸으며 손가락질로 그가 체포당해야 할 사람임을 미리 잠복시켜 둔 군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네덜란드의 안트워프에서 체포 된 틴데일은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렇게 애원을 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제발 내 히브리어 성경과 문법책 그리고 단어집을 좀 갖다 주십시오.” 감옥에서도 그에게는 오직 성경번역에 대한 뜨거운 열망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그가 번역한 신약성경 맨 끝에 첨부한 “만일 나의 번역 성경 중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에 대해서도 무조건 성경을 변질 시키려는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성직자들이 안타까워 틴데일은 존 프리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우리가 주 예수 앞에 서게 될 날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나는 양심에 맹세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광과 기쁨과 부귀가 주어진다 해도 결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마침내 많은 논란 끝에 틴데일은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의 허락 없이 성경을 번역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536년 사형장으로 끌려나온 틴데일이 말뚝에 묶였다. 말뚝에 묶인 채 그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그러자 사형 집행인은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라 죽인 후 불에 태워버렸다.

그로부터 2년 후 1538년 영국 왕 헨리 8세는 전국 각 교구에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화형장의 말뚝에 묶여 간절히 기도하며 큰 소리로 외쳤던 틴데일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세우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영어성경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한국축구는 2002년 세계월드컵 때 당시 한국축구는 객관적인 실력평가에서 16강 정도였지만 히딩크라는 탁월한 감독에 의해 4강까지 올라갔다. 그 비결은 감독이 선수들 체력 향상을 과학적인 방법과 혹독한 훈련을 통해 강화시켰으며 포지션을 정하는데 선수 개인의 실력에만 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수 개인기가 떨어지지만 창의적인 감독을 만나면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대로 선수들 개인기는 월등해도 능력 있는 감독이 없으면 경기에서 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적용해 보았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도적 능력의 기름 부음을 받은 히딩크 감독과 같은 신앙의 지도자가 없거나 교회에 영적인 장로들이 부족하면 교회는 보다 효과적으로 성장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는 아무 죄 없는 틴데일에게 사형을 허락했지만 2년 후에 그가 각 교구에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결국 틴데일이 불에 타 죽어가면서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은 그의 간절한 마지막 기도가 영국 왕 헨리 8세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며 기도할 때 그 옆에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후에 회심하고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틴데일의 순교가 영국에 큰 영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영국 종교개혁이었다. 틴데일이 번역한 이 영어성경이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된 그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성경번역의 역사를 안다면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냄새가 진동하는 성경을 우리가 어찌 눈물 없이 읽을 수 있겠는가!(*) 글쓴 이 / 남기영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