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이 글에서는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몇몇 신앙 운동들의 용어, 역사적 배경, 사상적 특징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활동한 상황, 평가 그리고 한국교회와의 관계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Ⅰ.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
1. 복음주의의 발단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 Liberalism Theology)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생긴 신학이라면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는 17세기 이후에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신자들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 운동에서 파생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固定化)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 정통주의(正統主義, Orthodoxy)가 만연하게 되자, 슈페너(P. Spener, 1635-1705)와 후랑케(Francke, 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열정과 내적 생명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큰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외치며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이 바로 오늘날의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의 모체가 되었다.(복음주의, 신학사전, 개혁주의 신행협회 pp. 204~205)
‘복음적’이란 용어는 복음(福音)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란 말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분하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는 기독교회 기본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와 ‘성경 완전 영감’을 강조하고 의식적 예배 보다는 ‘설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2. 복음주의의 역사
위에서 말한 대로 ‘복음주의’는 17세기 이후에 생긴 운동이지만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경(信經)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성경의 교훈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변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음주의 신학은 당대의 사상과 손을 잡고 다음 내용을 확인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이다.
-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다.
- 하나님은 성육신(成肉身)을 통해 구속적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
-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다.
- 죄의 권세와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다 같이 실재(實在)한다.
- 하나님은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 역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반적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으로 이루어진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 초기 중세교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이 주장한 속죄론에서 만족설(滿足說)을 비중 있게 취했으며,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도 강조한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특징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을 강조하고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성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과 또 교리와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해 성경은 최종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과 가능한 한 성경 있는 그대로를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등에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또 복음주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功勞)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신뢰함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복음주의는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개인적으로 또는 항상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신자로 구성된 것을 기쁘게 고백했다. 이것은 사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로마 가톨릭과 비교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세월이 흐르면서 제도화된 여러 구조와 민족주의적 충동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성(多樣性)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는 성례의 본질, 개인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 작정(作定)의 위치, 천년 왕국의 시기, 교회의 정치형태, 성경 영감의 정확한 성격,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방법, 문화와 국가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해 이해의 차이가 생겨났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약간 이차적인 중요성의 문제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 대략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 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때 복음주의는 위대하고 표준적인 전통신학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나 회심의 성질에 대한 논의는 비록 회심의 시간에 대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르는 성질의 변화 문제와 함께 계속 전면에 나타났다.
복음주의(福音主義, 독일어: evangelikalismus, 영어: evangelicalism)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비되는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용어로써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기독교에서 16세기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의 찬성파인 전통적인 종교개혁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가들과 참여 교회들은 이 용어를 수용하였다. 이같이 복음주의 교회, 복음주의자는 초기 종교개혁 시절부터 현재까지 개신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 중 하나이다.
18세기 들어서면서, 개신교 내부에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수정을 주장하는 근대신학이 등장하면서 보수신학 계열과 진보신학 계열의 구분을 위해 복음주의라는 말이 18세기 이전과 다른 용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광의적(廣義的) 복음주의와 협의적(狹義的) 복음주의가 구분되었다.
광의적 복음주의 의미는 16세기 등장한 전통적 복음주의의 모든 개신교 전체 신학 사상을 지칭한다. 반면 19세기 이후 영미 지역에서 사용되는 ‘신복음주의’ (Neo-evangelism)는 협의적 복음주의로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와 연대하여 보수신학에 정면 대항(對抗)하는 신학 사상이다.
21세기 현재는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매우 주의하여 조심스럽게 광의적 의미인지 협의적 의미인지 구분해야만 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신학 흐름은 자연적으로 20세기 들어서면서 에큐메니칼 지지자들과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1974) 지지자들로 구분되는 결과가 되었다. (편집자)
성화의 수단과 그 가능성도 역시 강조되었는데 성화의 시간과 성취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공동의 영적 삶의 신학이 또한 강조되었는데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 신학은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서 벗어나 진지한 성경해석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을 통하여 다시금 중세 초기와 종교개혁 시대처럼 정통신학의 유산을 활기차게 선택하려는 증거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충돌하고 있었다. 이후 자유주의는 정통 복음주의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theology)은 옛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운동의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와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는 다리로서 인간의 자각(自覺)을 강조하는 후기 칸트 철학의 결합이었으며, 이 신학은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시대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배경 가운데 복음주의 신학은 그 새로운 견해들과 타협함으로 약화 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침체를 변호하려는 노력도 일어나고 있었다.
복음주의는 정통신학의 정수(精髓)를 옹호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도 자주 그 당시 사상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대한 독특한 복음주의적인 강조점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형성을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고백에 끼워 넣은 인상을 주었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를 느끼고 그 당시 발생 되는 문제들에 성경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 되었기 때문에 더욱 방어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가장 중요한 보루는 교회와 사회가 파멸을 향하여 돌진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이었다. 이들의 기독교는 ‘현재’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세적으로 ‘미래’에 두고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접근에 공헌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 변증학, 윤리학 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화란학파와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중요한 여러 종류의 출발점부터 사회적 행동의 신학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의 카리스마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통해 강하게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성령의 신학’(오순절운동, 五旬節運動, Pentecostalism)을 선언했다.
3. 영적신학
‘복음주의 신학’은 또 ‘영적 신학’(靈的神學, 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신학연구의 목표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학문적인 만족에 대한 유혹은 극복되어야 한다. 즉 신학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산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自覺)에서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의 작업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4.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전통적 복음주의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에 ‘개혁주의’가 가미된 신앙 운동이라 하겠다. 복음주의자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한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전호진, 총무 박형용)가 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준곤 별세, 총무 김명혁)가 있어 이들은 복음주의 사상, 신앙, 사업 확장에 힘쓰고 있다. 비록 사상과 교파의 배경은 다르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소망스러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가 불건전한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 복음주의 신학보다 유럽의 복음주의 신학이 약세에 있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가 내세운 생활 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가지 못해 교리적으로 신비주의로 빠지는 이질화(異質化)의 위험이 있으며 염려스럽게도 현재 한국교회가 점차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
계몽주의(啓蒙主義) 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강한 세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 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였고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대속(代贖) 교리, 육체(肉體) 부활 등에 대해 부인하거나 회의를 느꼈다. 모세오경의 저작권, 구약의 연대적 순서, 복음서 기록의 정확성, 바울 서신서의 저작권 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학적인 공격만이 아니라 과학을 이용한 공격도 아울러 퍼부었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進化論, Evolution)이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를 불신(不信)하는 공격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진보(進步)해 가는 존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기독교에 대한 내외(內外)의 공격에 맞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를 위해 일어난 것이 곧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은 다양하여 이 운동에는 칼빈주의자(장로교도), 알미니안파, 침례교도 그리고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20세기 초까지 공동의 적인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함께 싸웠다.
1. ‘근본주의’라는 용어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는 침례교기관지(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인 커티스 리 로우즈(Curtis Lee Laws, 1868-1946)가 1920년 북침례교 총회 내의 ‘정통 신앙’을 고수하려는 반(反) ‘현대주의’(現代主義, Modernism) 자들을 가리켜 비난의 의미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이 용어(用語)는 이같이 처음에는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문화’의 세속화(世俗化) 양상에 대항(對抗)하여 싸우는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총체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
- 반(反) 현대주의자들로서 그들은 전통적, 초자연적, 성경적 기독교의 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
- 앞서 말한 반(反) 현대주의자 혹은 세속화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
‘근본주의’라는 이 용어는 이같이 넓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고 좁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묘사는 다소 복잡하다. 때때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상의 반(反) 현대주의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로 복음적 ‘신앙부흥 운동’에 도가 지나치거나 반(反) 지성주의자(知性主義자者)들을 가리켜 막연하게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을 그렇게 사용하게 될 때는 ‘근본주의’와 ‘신앙부흥 운동’을 혼동하게 되고 따라서 ‘신앙부흥 운동가’들의 뿌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몇몇 신앙 운동과 혼동을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성결운동’(聖潔運動, Holiness movement)은 완전한 무죄(無罪) 생활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체험(體驗)을 강조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운동’(五旬節運動, Pentecostalism)은 영적(靈的) 능력을 극적으로 받아야만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반(反) 현대주의자인 근본주의자들의 호전성(好戰性)을 보였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교회와 관계는 독립성(獨立性)을 고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 운동의 공동 기원을 19세기 미국 신앙부흥 운동의 다양한 유산(遺産)에 두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그래서 그들은 보통 ‘근본주의자’로 불렸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과격한 신앙부흥 운동가들’이었다.
영국에서는 ‘근본주의’라는 말이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영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성경의 고등(高等)한 견해와 근본적인 주장들을 가진 복음주의적 ‘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제임스 팩커(J. I. Packer)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저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 London, 1958)에서 ‘근본주의’를 변호했다. 그러나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 London, 1977)라는 저서에서 ‘근본주의 운동’을 비판하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대부분의 분파를 하나로 묶어 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근본주의’가 호전적(好戰的)인 반(反) 현대주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스타일(style)에서는 부흥사이고 교리 면에서는 근본주의이며 윤리적인 면에서는 반(反) 현대주의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근본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2. 근본주의 역사와 특징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은 그 역사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어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 1931-1982)은 그의 중요 연구서 ‘근본주의의 뿌리’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 Chicago, 1970)에서 ‘근본주의’의 주요한 근원(根源)은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와 그 밖의 사람들 저작(著作)에서 볼 수 있는 ‘천년기전 재림예언운동’(千年期前再臨豫言運動, Millennial Adventure Prophecy Movement)이라고 지적했다.
비록 영국서 이 운동이 전통 교회를 떠난 ‘플리머스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을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19세기 후반 미국의 장로교와 침례교 같은 중요한 교파 안에서도 ‘근본주의’라는 표현이 나타났다. 즉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이 운동의 특징이었으며 세대주의자 스코필드(Cyrus Ingerson Scofield, 1843-1921)의 ‘관주성경’(Reference Bible)은 거의 정경(正經)처럼 인정되었다. 또 미국의 많은 세대주의자는 영국의 케직사경회(Keswick Convention)의 온건한 성결운동의 교리를 채택했다.
‘세대주의’는 이 시대에 교회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20세기 초 공격적인 ‘현대주의 신학’의 발생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고무하였다. 특히 ‘현대주의’가 강했던 미국에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세대주의자들’이 많았다. 북장로교는 보수주의자 프린스톤 신학교의 지성적인 지도자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핫지(A.A. Hodge), 워필드(B.B. Warfield), 메이첸(J.G. Machen)에 의해서 강하게 유지되었다.
보수주의적 장로교 교인들은 우선 근본교리를 옹호하는 전략을 전개했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12권으로 집필된 근본주의 총서로서 ‘근본원리들’(The Fundamentals)이 출판되어 전통적인 교리들이 옹호되었다. 이 총서는 라이만 스튜어드(Lyman Steward)와 밀턴 스튜어드(Milton Steward) 형제가 희사한 25만 불과 무디기념교회 딕슨(A. C. Dixon) 목사의 편집으로 출판됐고 집필자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국과 영국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 300만 권 이상이 무료 배부되었다.(George M. Marse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118)
이 총서는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無誤性)’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변호하는 총 90편의 논문들로 구성 되어 있다. 많은 근본주의 단체들이 비록 한 가지로 표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공통적인 근본주의적 교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장 공통된 요점은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리속죄’,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이었다.

1920년대에 이같이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운 ‘근본주의자’들은 주요한 북장로교와 침례교 교단들 안에서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작은 규모의 근본주의 논쟁들이 다른 교파들 내에서도 일어났으며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분열들이 미국과 캐나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도덕적 부패를 공격함과 동시에 교회와 문화의 부패도 공격했다.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 Bryan, 1860-1925)이 주도한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進化論) 교육 금지 운동은 그런 관심사들의 주요한 표현이었다. 그 결과로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Dayton) 시의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우프스(John Scopes)는 이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00불 벌금형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진화론 교육의 보급은 미국인의 생활에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며 도덕적 상대주의로 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은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로마 가톨릭교회, 술, 담배, 춤, 도박, 극장 구경 등도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또 다른 중요한 표적들이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근본주의는 미국의 남북부 전역과 그 밖의 영어권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역에서 여러 가지 전통을 가진 반(反) 현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연합으로 성장하였다. 그 연합의 중심에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근본주의는 다른 전통들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다.
1930년대에 와서 ‘근본주의’가 어떤 특수한 교회적 표현을 취하기 시작했다. 보다도 적극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점차로 현대주의자들이 함께 있는 단체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교회나 교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침례교도와 세대주의자들이었다. 그리하여 ‘현대주의’와의 분리가 참된 신앙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이 같은 1920년대 호전적 반(反) 현대주의자들의 광범한 연합이 1940년대에 와서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한 주요한 세대주의 집단은 그들의 호전성(好戰性)을 완화하고 다른 중요한 교파들과 접촉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집단은 해롤드 J.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칼 F. H. 헨리(Carl F. H. Henry), 에드워드 J. 카넬(Edward J. Carnell)과 같은 자들이 주로 이끌어왔으며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s)라고 했다. 이런 그들이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의 협력을 얻어낸 것은 장차 ‘복음주의적 전(前) 근본주의’(신복음주의)자들의 부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이에 맞서 존 라이스(John. R. Riee, 1895-1980), 밥 존스(Bob Jones, 1883-1968) 그리고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와 같은 호전적인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참된 ‘근본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초기의 근본주의 운동과 달라진 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 운동을 가리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간하베(Harvie Maitland Conn, 1933-1999) 교수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 불렀다.(Contemporary World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7. p. 120)
1960년대 이후의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 소수의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넓은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넓은 복음주의에는 전 근본주의자들과 여러 가지 전통의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에 침례교의 근본주의자인 제리 포웰(Jerry Lamon Falwell, 1933-2007)의 ‘도덕적 다수운동’(Moral Majority Movement)의 시작과 함께 미국인의 공적 생활에서 전통주의적 크리스천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관심은 1920년대에서처럼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본주의자들의 정치 운동은 역시 현재 세대주의 예언 해석에 있어 중요한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다.
3. 근본주의와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청교도적 개혁주의’를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전수(傳受)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 속에는 경건주의, 신비주의, 세대주의, 근본주의 등 성경 사상에 미흡한 여러 요소가 함께 들어와 신앙의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이 가운데 근본주의적 요소를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개혁주의적 한국장로교회는 세상 학문에 대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보니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무시하는 반(反) 지식주의에 흐르는 경향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신사도운동, 기복주의, 성공주의 등을 받아들이고 이단에 빠지기 쉬운 체질의 원인이 되었다.
계시종교인 기독교와 과학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칼빈은 계시종교를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로 알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영원한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유한한 것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믿고 아울러 존중하며 강조해야 한다. 자연 만물도 하나님이 내신 것이다.
한국교회가 또 다른 잘못된 경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도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천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 하나 경건함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日常)의 생활이 되지 못하고 특별한 체험만을 좇는 경건주의에 빠지게 될 때 형식적인 경건주의가 되고 율법주의가 된다.
이처럼 잘못된 경건주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자기 나름의 생활표준을 세우고 그 표준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는 논쟁을 일으켜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일반적인 도덕의 부패와 타락 현상의 만연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경건주의가 성경적이 아닌 잘못된 경건주의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4. 근본주의에 대한 평가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 super-naturalism)를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주의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1)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강조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은 다른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싸고도는 중심 태양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절대적인 최고의 통치자시며 작정(作定)과 창조(創造)와 섭리(攝理)와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
(2) 근본주의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했다.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律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寶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분법이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은혜 언약에 속하는 구원 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兩者)는 연속성과 통일성은 갖는 것이다.
(3) 근본주의는 일반 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근본주의의 약점은 위에서도 말한 바처럼 하나님의 일반 은총(자연 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일반학문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여 마침내는 반(反) 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4)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했다.
근본주의가 개인의 종교경험(宗敎經驗)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했다. 근본주의의 기독교는 개인의 기도 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 출석에 국한되고 너 넓게 경제, 사회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문화와 과학은 성경 신학에 의한 지도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5) 근본주의는 복음의 전파보다 복음을 옹호하려고만 했다.
초기 근본주의와 후기 신근본주의가 다 같이 복음을 전파하고 옹호하려는 열심만은 대단하나 복음을 옹호하려는 면이 전파하려는 면보다 더 강했다. 그 결과로 긍정적 자세에서 부정적 자세로, 당당한 싸움에서 사사로운 다툼으로, 은혜로움과 예절에서 비난의 언어로 그리고 신앙 운동에서 신앙 인물로 그 호전성을 나타냈다.(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p.165)
III.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
‘개혁’(改革)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가톨 릭교회의 오류(誤謬)와 폐단(弊端)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 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면 그 들은 모두가 교회 생활과 개인 생활에서 한결같 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그림, 종교개혁을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John Calvin, 1509-1564)
그러나 ‘개혁’이란 말은 또 매우 제한된 의미가 있다. 즉 루터의 신앙과 사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 짓기 위해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1. 개혁주의 사상의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칼빈이 창시(創始)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 사상체계의 중요한 제공자(提供者)이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개혁 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보다 몇 세기 전의 사도 바울 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해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 사상체계를 오늘날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5, p. 29)
이러한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있어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칼빈의 이 사상체계는 우리에게 성경적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위의 책 p.30) 개혁주의(칼빈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신학 사상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개혁주의의 성경적 성경관
개혁주의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성경적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Fred H. Klooster)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한 마디로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로마 가톨릭의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그 자체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부했다.
그리고 성경에서 새로 발견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과 그는 성경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과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늘날 이러한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이렇게 주시고 어떤 부분은 또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고 복음서들은 주님을 목격한 목격자들을 통해 영감으로 회상케 하여 쓰도록 하셨다. 그런가 하면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또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성경 기록자의 인간성(人間性)과 개성(個性)이 영감(靈感)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해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들을 보여주었으며 진리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표현했다. 그들은 이렇게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하게 나타내면서도 다 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기록했다. 이처럼 성경 기록자들이 각양각색(各樣各色)임에도 신비롭고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가 한결같이 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파 전통에서는 성경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 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를 더 많이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權威)가 있되 그 권위는 궁극적(窮極的)이며 절대적(絶對的) 권위를 가진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으며, 더욱 우리를 옳지 않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Inst. I.7,8,9 = 기독교강요 제1권 7,8,9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우리의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을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한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서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의 신학자라 불리는 칼빈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칼빈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가 담겨 있었다.
성경은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統一性), 위엄 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一貫性),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成就) 등 이 모든 사실이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성경의 신적(神的) 권위를 받아들이고 또 감동을 받게 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중에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 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分離)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싸늘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신앙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Inst. I.7.1, I.7.5, I.8.13 참조) 칼빈은 또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Inst. I.7.4)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正確) 무오(無誤)한 객관적(客觀的)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 3:16,17)
그러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아래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망언(妄言)을 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不成文) 계시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엡 2:20)
또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 種子)으로 삼으시려고 주신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개혁주의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처럼 계시의 객관성(客觀性)을 부정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 동일시(同一視)될 수 없고 성경은 단지 계시의 증거(證據)요 표(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客觀化)하는 것이요 형체화(形體化)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相逢)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또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新福音主義, Neo-evangelism) 자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分離)하지 않는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은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무오’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神的)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信憑性)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 없이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직접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딤후 3:16,17)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믿기 때문에 이런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성(完全性)을 주장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필요에 충족(充足)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전(遺傳)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개혁주의 하나님 주권 사상
개혁주의 특징은 또 ‘하나님 주권 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 보편성’을 각각 강조(强調)한다고 한다면 개혁주의는 단연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부터 출발한다.(Pressly, Mason W. , Calvinism and Science, Articlein Ev. Repertoire, 1891, p. 662. quoted from H. Hemey Ma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1975, p. 32, 33)
따라서 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이 말씀을 생활의 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은 많은 연구가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術語)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그래서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 있어서는 자아(自我)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 24)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大) 교리로써 다른 모든 교리의 중심(中心) 태양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創造), 섭리(攝理),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신다.
(3) 개혁주의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恩惠)’이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구원(救援)이 불가항력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抵抗)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갖게 되면 인간의 구원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ULIP)이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堅忍) 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며(창 6:5, 렘 17,9, 시 51:5; 롬 3:10),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영적(靈的)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 1:4) 이 선택은 선행(善行)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속을 완성하셨다. 이것은 전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피택 된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救贖)이다.(마 1:21, 요 10:14, 행 20: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칼빈은 이 선택교리에 대해 다른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했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해서도 높였으나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를 충분히 논하지 않았다.(Inst. III. 21~24)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選擇)이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彼擇者)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적용(適用)이라는 성령의 중생(重生, 거듭남)의 역사(役事)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고 또한 즐겨 사용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결단코 실패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사,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다 함께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예정)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택함을 받은 죄인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적용(適用)하여 저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4) 개혁주의의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한 적극적 자세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학자들 간에 늘 동일(同一)한 것은 아니었다. 또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해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함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變革)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해왔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이런 사실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칼빈에게 복음 선포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못지않게 제네바시민의 성화(聖化)였고 이는 사회와 국가 전반에 관련 있었다. 이같이 칼빈의 관심은 제네바에 복음 선포에 그치지 않았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칼빈의 이 관심에 대하여는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Richmond: John Knox Press, 1971를 읽을 것)
개혁주의는 이처럼 우리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 명령’에 대해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28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주시지 않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의 사회악(社會惡)과 하나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임신중절(妊娠中節, 落胎)의 그 무서운 악(惡)과 도처에서 보게 되는 도덕적 부패와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복음을 증거 하지 않거나,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행하지 않거나, 비전을 갖지 않거나 또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처신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만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해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천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곧 성경적 신앙의 삶에서 타락(墮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 5:19) 우리는 악한 세상과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교회 역사를 보면 개혁주의 성도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William of Nassau), 오랜지 공(the Prince of Orange), 존 낙스(John Knox), 존 파임(John Pym),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리쳐드 카메론(Richard Cameron), 스코틀랜드의 언약론 자들(Scottish Covenanters and John Witherspoon) 그리고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등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리의 유산(遺産)이며 또 이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폭군의 광포(狂暴)도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이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계 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럽의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주의 영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 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교의(敎義)와 규례(規例)의 표준으로 채용(採用)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제43권 3집, 1976. p. 11 참조)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 ‘문화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 등으로 전개된 개혁주의와 여기에 독특한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도 자유주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1938년 9월에는 교회가 신사 참배 결의라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6.25 사변, WCC운동, 교단의 분열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국에서의 칼빈연구 100년’(이상규,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1924년 칼빈이 처음 한국에 소개된 이래 1984년까지 60년 동안 칼빈의 저서 번역과 칼빈에 관한 저술과 논문 등을 모두 합쳐 240편 밖에 나오지 않은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한국교회는 스스로 노력도 부족했거니와 외적 여건에도 상당한 지배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 강요’가 우리 말로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우리는 앞서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3대 신학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복음주의’가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며 ‘근본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운동이라고 한다면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에 칼빈에 의해 체계화(體系化) 된 신학(神學)과 신앙(信仰)의 사상운동이다.
‘복음주의’가 경건을 강조하고, ‘근본주의’가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대속 교리,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 강조했다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이 근본원리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신학 등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노력한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신앙 운동이 다 귀중한 운동이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교리적(敎理的) 균형(均衡)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 있는 균형을 중요시하고 있다.(딤전 1:9, 6:3, 딤후 1:13)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문화 명령’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건설에 힘쓰는 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신복윤 박사
신복윤(申福潤, 1926-2016) / 개신교 신학자이자 목사 호는 남송(南鬆)이다. 한국 최초로 장 칼뱅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이종성, 한철하와 함께 한국의 칼빈신학을 주도해 왔다. 한국 칼빈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총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조직신학이며 2009년 요한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칼빈연구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예배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칼빈은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회개를 통하여 진정한 개혁을 이루며, 칼빈 신학으로 새롭게 출발하자.”
내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존 칼빈
< 종교개혁 주요 연대표 >
1378-1417 두 경쟁자가 서로 교황직을 주장한 서방 교회의 대분열
1384 교황을 비판하고 롤러드파 이단에 영감을 준 잉글랜드인 존 위클리프 사망
1409 피사 공의회
1414-1418 콘스탄스 공의회
1415 반체제 사제 얀 후스를 처형한 사건이 보헤미아에서 후스파의 반란 촉발
1423-1424 파비아-시에나 공의회
1431-1449 바젤 공의회
1453 튀르크족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6 구텐베르크 성서 인쇄
1478 에스파냐 종교 재판소 설립
1483 마르틴 루터 출생
1484 훌드리히 츠빙글리 출생
1485 잉글랜드 튜더 왕조 시작
1491 콩고 왕이 가톨릭교로 개종
1492 에스파냐가 무어인의 근거지 그라나다 정복, 에스파냐서 유대인 추방, 콜럼버스의 아 메리카 발견
1497 포르투갈에서 유대인 추방
1505 루터가 에르푸르트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가 됨
1509 장 칼뱅 출생, 잉글랜드에서 헨리 8세 즉위
1517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95개 논제 게시
1519 루터가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에크와 논쟁, 카를 5세가 신성로마 황제가 됨
1520 루터가 파문당하고 교황의 교서를 불태움
1521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에게 항거하고 프리드리히 현명공이 바르트부르크로 루 터를 피신시킴
1522 루터가 신약성서 번역,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사순절에 소시지 식사 주재, 루터가 비 텐베르크에서 카를 슈타트의 혁신을 되돌림
1523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두 명이 브뤼셀에서 화형당함,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들
1524 루터와 요한 발터가 신교의 첫 ‘찬송가집’ 편찬
1523-1526 취리히 종교개혁
1524-1525 독일 농민 전쟁
1525 루터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 에라스뮈스 의지의 자유 문제 둘러싸고 루터와 결별
1526 헝가리 모하치 전투에서 튀르크족 승리, 윌리엄 틴들의 영어 신약성서 인쇄
1527 개혁가들이 재세례파를 처음 처형(취리히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바사가 로마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
1529 슈파이어 제국의회의 결정에 항의한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음. 마르 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성찬식에 관해 합의하지 못함, 스위스에서 최초 의 종교 전쟁 발발
1530 루터교 신앙을 진술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작성
1531 카를 5세에 맞서 루터와 슈말칼덴 동맹 결성, 제2차 스위스 종교 전쟁서 츠빙글리 사망
1532-1535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됨
1534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신교도 탄압, 칼뱅의 도피, 이그나티 로욜라가 예수회 창설, 아일랜드에서 킬데어 반란
1534-1535 뮌스터의 재세례파 왕국
1536 칼뱅의 ‘기독교 강요’ 초판 발행, 제네바에서 칼뱅주의 종교개혁 시작, 덴마크에서 루 터파 국가 수립, 헨리 8세에게 대항한 ‘은총의 순례’
1540 교황이 예수회인가
1542 로마 종교 재판소 설립
1543 루터의 팸플릿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1545-1547 트리엔트 공의회 제1차 회기
1546-1547 슈말칼덴 전쟁
1547 루터 사망, 뮐베르크에서 루터파 제후들 패배, 헨리8세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 잉글 랜드에서 신교 체제 수립
1548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약이 체결되어 신성로마 제국에서 가톨릭교 재차 강요
1550 바야돌리드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귄리에 대해 논쟁
1551-1552 트리엔트 공의회 제2차 회기
1553 제네바에서 세르베투스 화형, 잉글랜드에서 메리 1세가 가톨릭교 복구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그의 영토에 그의 종교”
1556 카를 5세 퇴위
1558 잉글랜드에서 메리1세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신교도) 즉위
1559 프랑스 앙리 2세 사망, 파리에서 칼뱅주의 전국 시노드 개최, 교황의 금서 목록 발표
1559-1560 존 녹스가 고무한 스코틀랜드 종교 혁명
1562 프랑스에서 종교 내전 발발(1598년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짐), 폴란드에서 사실상 다종 교 용인, 멕시코 유카탄 지방에서 기독교 ‘타락자들’ 박해
1562-1563 트리엔트 공의회 제3차 회기
1563 독일 팔츠에서 프리드리히 3세가 칼뱅주의를 국교로 확립,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 초판 발행
1564 칼뱅 사망, 셰익스피어 출생, 갈릴레이 출생
1566 네덜란드 성상 파괴 운동
1567 에스파냐에 대항한 네덜란드 반란 시작
1568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로 도피, 에스파냐에서 모리스코(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 반란
1570 교황 비오 5세가 엘리자베스 1세 파문
1571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군이 오스만군에 승리
1572 파리에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1577 협화 신조로 독일 루터파의 내분 해소
1579 필리프 뒤 플레시 모르네가 ‘폭군에 대한 권리 주장’에서 신앙심 없는 통치자 타도 를 정당화함
1582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역법 개혁
1584 위그노교도인 나바르의 앙리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됨
1589 프랑스 앙리 3세 암살됨. 나바르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왕위 계승
1593 앙리 4세가 가톨릭교로 개종
1598 낭트 칙령이 공포되어 프랑스 위그노파가 제한된 자유를 용인받음
1603 엘리자베스 1세 사망 제임스 1세 즉위하여 스코틀랜드 왕위와 잉글랜드 왕위 통합
1605 잉글랜드 의회를 폭파하려던 화약 음모
1609 에스파냐에서 모리스코 추방
1616-1617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에서 혹독한 마녀 박해
1618 30년 전쟁 발발
1619 도르드레흐트(네덜란드) 시노드에서 칼뱅주의 정통 신조 채택
1622 교황청 포교 성성 설립
1629 페르디난트 2세가 반환 칙령을 공포하여 제국에서 칼뱅주의를 금하고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전하도록 유발함
1633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서 이단 판결을 받음. 뱅상 드 폼과 루이즈 드 마리약이 애덕 자매회 창설
1639 스코틀랜드인이 종교개혁을 지키고자 국민 맹약에 서명
1641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반란
1642 잉글랜드 내전 발발
1648 베스트팔렌 조약체결로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신성로마 제국에서 종교적 용인 법제화
1649 잉글랜드 찰스 1세 처형됨
1660 찰스 2세의 왕정복고와 성공회 재건
1685 루이 14세가 낭트칙령 철회
1688-1689 ‘명예혁명’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인 가톨릭교도 제임스 2세 퇴위, 성공회가 아 닌 신자들 용인
1692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마녀 박해
1702-1711 프랑스 위그노 반란
1704 교황이 ‘중국 전례’ 금지
1731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에서 루터파 추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