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성경사본학과 성경번역 문제

  PARTⅡ

시작하는 말   

사람들은 학자(學者)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한다. 여러 가지로 때 묻고 혼탁한 세상에서 그래도 학자는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진리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비록 권세도 없고 부귀도 못 누리는 학자이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존경을 표하게 되고 그의 말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특별한 가치를 두고 경청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학자는 그 신분상 사회나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참된 진리를 말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특히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분들에게서 그 기대가 깨어질 때 실망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 중에는 신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신학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편견과 불공평이 있는가를 깨닫고 나면 그 실망은 참으로 클 것이며 이 실망은 나아가 분노로 바뀌게 될 것이다.    

소위 성경에 대한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불리는 ‘사본학’(寫本學)에 있어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본문 비평’이라는 것이 중립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미(英美)의 전통을 따라 ‘본문 비평’을 ‘하등 비평’(lower criticism)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보수주의 신학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나 똑같이 받아들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 신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수주의 개혁주의 진영의 신학교에서도 현대 사본학자들의 이론을 아무런 비판이나 유보 없이 그대로 가르쳐 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본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도대체 생각이라도 해보았던가? 또는 그런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기라도 했던가?

그래서 ‘사본학’하면 무조건 메츠거(Bruce Manning Metzger, 1914-2007)의 책을 교과서로 삼고 신약 원어성경으로는 네슬레(Nestle) 판을 최고로 여기고 사용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네슬레 26판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원본을 소유한 양 좀 우쭐대던 것이 그 동안 우리 한국 신학계의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최근 어느 정도의 각성이 일어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네슬레-알란트 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또는 현대 사본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듣지도 못한 상태로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비록 소수지만 일각에서 사본학의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막연하나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물론 그 중에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 극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올바른 사본학의 정립에 도리어 역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현대 사본학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훑어보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또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I. 네슬레-알란트 판의 지배

현재 전 세계의 신약 원어성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네슬레 알란트’(NA, Nestle-Aland, 헬라어 원어 신약성경)판과 ‘연합성서공회’(USB, United Bible Societies, 헬라어 원어 신약성경)판이다. NA 판은 1979년 26판이 나와 범세계적으로 사용되다가 1993년 이것을 다시 보완한 27판이 나왔다. 그리고 UBS판은 1975년 3판이 나와 널리 사용되다가 1993년 4판이 나오게 되었다. NA판은 19세기말 이래로 전통이 있는 판이고 UBS판은 성경 번역자들을 위해 1966년에 처음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래서 UBS판은 각주(脚註, apparatus)의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고 사본과 역본들의 기호가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NA판은 기호가 많고 식별하기 어려우며 각주의 설명이 라틴어로 되어 있는 것 등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두 판은 원리상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판의 편집진 5명이 모두 똑같으며(NA 27판과 UBS 4판에서는 B. Aland, K. Aland, J. Karavidopoulos, C.M. Martini, B.M. Metzger), 또한 편집 원리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두 판은 각주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본문은 동일하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 판에 이미 있었던 현상이다. 왜냐하면 UBS 3판의 수정판이 1983년에 나오면서 1979년에 나온 NA 26판을 따랐으며, UBS 4판과 NA 27판이 이 본문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문단 나눔과 구두점 정도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UBS 3,4판은 NA 26,27판과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NA 27판과 UBS 4판은 크게 보아서 그 이전 판과 크게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현금의 NA판이나 UBS판 헬라어 신약성경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다섯 명의 현대 사본학자들인데 이 중에서도 1994년에 작고한 쿠르트 알란트가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일 뮌스터에 있는 ‘신약 사본연구소’ 소장을 오랫동안 맡아 오면서 네슬레 24판(1960년) 이래 최근까지 헬라어 신약 편집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네슬레 26판은 사실상 ‘알란트판’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그런 경향은 27판에 와서 더욱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번역에 있어 과거 ‘공인본문’(公認本文, Textus Receptus, Greek New Testament)이 누렸던 지위를 오늘날은 이 알란트판이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인본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1516년 편집 출판한 헬라어 신약성경

II. 공인본(TR)의 붕괴 과정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1516년에 에라스무스가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 출판한 이후로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가 새로운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할 때까지 약 300여 년 동안 유럽에서 사용된 원어성경은 네슬레-알란트 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인본문’(TR)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300여 년 간 유럽교회가 사용했으며 또한 독일의 루터역(1522), 영국의 흠정역(King James Version), 화란의 국역(Staten-vertaling, 1630년대) 등 각 나라의 신약성경 번역의 모체(母體)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공인본문’(TR)이 붕괴되고 밀려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그 당시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성경에 대한 집요한 도전이 계속되어 왔었다. 물론 그 중에는 순수한 학문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도 있지만 수백 년간에 걸쳐 진행된 그 과정과 결과를 돌이켜 때 때로는 소위 학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7세기 후반에 살았던 존 밀(John Mill, 1645-1707)은 TR과 다른 3만여 개의 성경의 ‘상이독본’(相異讀本, variant reading)들을 모았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벵겔(J.A. Bengel, 1687-1752)은 평생 성경 사본(寫本) 연구에 몰두하였다. 물론 그는 경건한 학자로서 좋은 성경주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사본연구의 주요원리 몇 가지는 그 후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곧 그 원리는 (1) 본문의 증거력은 사본의 숫자를 셀 것이 아니라 그 비중을 달아보아야 한다는 것과 (2) 성경 필사 자는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첫 번째 원리에 의해 성경 사본을 그룹(계통)으로 나누게 되었으며, 두 번째 원리에 의해 사본 상 어떤 구절에 쉬운 독본과 어려운 독본이 있을 때에는 그 중에서 어려운 독본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 두 원리는 그 후로 사본학계에서 마치 지극히 당연한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시되는 이 원리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후에 그리스바하(J.J. Griesbach, 1745-1812)는 성경사본들을 1)‘알렉산드리안 그룹’, 2)‘웨스턴 그룹’, 3)‘비잔틴 그룹’ 등 세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그의 본문 선택원리를 살펴보면 그의 사본학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는 이것을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데  (1) 짧은 것이 더 어렵고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이상할 때에는 짧은 독본이 긴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2) 긴 독본이 불확실하고 거칠고 부연 설명하고 이상하고 역설적이고 불경건하게 들리고 오류적일 경우에는 긴 독본이 짧은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잘 살펴보면 결국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본 상 서로 다른 독본들이 있을 경우 그 가운데서 어쨌든 ‘더 어렵고 애매하고 이상하고 심지어는 불경건하게 들리고 오류적인 것’을 원본으로 봐야 한다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에 의해 편집된 신약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진다면 그것은 매우 어색하고 문장이 잘 안 통하는 본문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 다른 비평 학자인 라흐만(K. Lachmann, 1793-1851)은 1831년 소문자 성경 사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몇 개의 초기 대문자 성경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 그리고 벌게이트와 교부들이 인용한 것을 참고하여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해서 출판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4세기에 동방교회에서 통용되던 성경 사본을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소문자 사본과 후기 대문자 사본들이 취하고 있는 본문 형태인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이 제외 당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티쉔도르프(L.F.C. von Tischendorf, 1815-1872), 트레겔레스(S.P. Tregelles, 1813-1875), 알포드(H. Alford, 1810-1871)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현대 사본학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1881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동료 교수인 웨스트코트(B.F. Westcott)와 홀트(F.J.A. Hort)가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이라는 두 권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한 사건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두 사람의 공동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젊었을 때에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회원으로 훈련받은 바 있는 홀트가 주로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헬라어 신약성경의 제2권은 ‘서론’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서론’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본이론을 체계적으로 진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태까지의 TR의 기본이 되었던 비잔틴 사본들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배격되고 새로운 사본들 곧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산 사본(א)을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바티칸 사본을 주로 따랐는데 웨스트코트-홀트의 성경은 몇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바티칸 사본을 수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신약 편집 판에 대해 그 당시 교회로부터 거센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차 유럽에서 그 뿌리를 내려갔다. 에버하르트 네슬레(Eberhard Nestle)는 1898년에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성서공회를 통해 간편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은 새로운 사본 연구나 이론을 가지고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출판되어 있던 티쉔도르프(Tischendorf) 판과 웨스트코트-홀트(Westcott-Hort) 판과 웨이마우쓰(Weymouth) 판 가운데서 다수의 독본을 취하는 방식을 따랐다. 이 중 웨이마우쓰 판은 제3판부터 봐이스(Weiss)판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면 이 네슬레 판의 성격이 어떠했겠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티쉔도르프 판은 잘 알려진 대로 그가 시내 산 수도원에서 발견한 ‘시내 산 사본’(א)을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다. 그래서 이 티쉔도르프 판은 ‘시내 산 사본’을 지나치게 선호했다고 종종 비판받고 있다. 그리고 웨스트코트-홀트 판은 앞서 말한 대로 ‘바티칸 사본’의 대변자다. 또한 베른하르트 봐이스가 소위 주석적 근거에서 편집했다고 하는 ‘봐이스 판’도 결과적으로는 ‘바티칸 사본’에 근접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네슬레 판이 어떠한 성격을 띠게 될지는 자명하다. 네슬레 판은 그 작업 원리상 애초부터 ‘바티칸 사본’을 주로 채택한 편집 판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다가 ‘시내 산 사본’이 약간씩 추가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에도 계속되다가 제17판부터 위 ‘다수 본문’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전에는 참고할 수 없었던 파피루스 사본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사본’ 중심의 기조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1960년의 제24판부터는 독일 뮌스터의 신약사본연구소의 소장을 맡은 알란트가 책임을 맡아 편집하고 있는데 그의 주도 아래 네슬레 판은 많은 자료가 보강되었다. 그러나 그 기본 원리에 있어서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래로 큰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알란트 판이 주로 채택하는 사본도 역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사본’ 그리고 몇몇 ‘파피루스 사본들’이며 수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렉시오나리아(lectionaria) 증거들이 무시 또는 경시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7판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III.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문제점

그렇다면 TR(Textus Receptus)을 붕괴시키고 현재의 NA(Nestle-Aland) 시대를 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여전히 오늘날 사본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주요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첫째는 그의 계보론적 방법(genealogical method)이다. 

그는 벵겔(Bengel), 제믈러(Semler), 그리스바하(Griesbach) 등의 방법을 따라 사본들의 수적 우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사본들을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곧 시리아본문(Syriac text), 서방본문(Western text), 알렉산드리아본문(Alexandrian text), 중립본문(Neutral text)으로 나누었다.

이 중에서 ‘서방 본문’과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에서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웨스트코트-홀트가 주로 표적을 삼은 것은 ‘시리아 본문’ 곧 ‘비잔틴 본문’이다. 이 본문에 속하는 것은 대다수의 소문자 사본들과 후기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인데 그들은 이것을 4세기의 편집자(들)이 편집한 본문으로 보았으며 매끈하고 쉽고 온전하게 만든 ‘혼합 본문’(mixed text)이라고 하였다.

이 본문의 특성은 명료성(lucidity)과 온전성(completeness)이며 이렇게 수정 편집된 본문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서 비잔틴 제국 안에 널리 펴졌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웨스트코트-홀트는 교회 안에 보존되어 온 거의 대부분의 사본들의 본문 형태를 4세기 초의 어떤 편집자에 의해 수정 편집된 결과로 돌려버림으로써 그 본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바 4세기 초에 안디옥의 루키아누스(Lucianus)가 비잔틴 본문을 편집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가설(假說)에 근거한 이론을 가지고 수많은 사본들의 증거를 송두리째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비잔틴 본문’ 곧 대다수의 ‘비잔틴 사본’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 형태를 가치가 적은 것으로 돌려버림으로써 그것을 기초로 편집된 TR(Textus Receptus)과 나아가서 그것을 모체로 하여 번역된 대부분의 성경들이 불신 받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바티칸사본’(B)과 ‘시내산사본’(א)을 후대의 부패와 혼합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그래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들로 보아 ‘중립 본문’이라고 불렀다. 이 ‘중립(中立)’이란 명칭 속에 그들이 이 두 사본을 얼마나 편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강하게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곧 이 ‘중립본문’이란 명칭이야말로 그들의 이론이 중립적이지 못함을 분명히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두 사본(寫本)은 원본(原本)에서 멀지 않다고 보았으며 이 중에서도 특히 ‘바티칸 사본’은 원본에서 바로 온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웨스트코트-홀트가 편집한 신약은 사실상 ‘바티칸 사본’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1800여 년 동안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던 대다수 사본들의 증거는 무시되고 말았다.

그러면 그들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사본’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그들은 이 두 사본을 그토록 칭찬하고 선호했을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소위 그들의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 이론이다. 사본들이 제공해 주는 객관적인 증거를 외적 증거(external evidence)라고 부르는데 반해 본문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독본들의 상호 비교’에 의해 얻은 결론을 그들은 ‘내적 증거’라고 불렀다.  

이 명칭에도 또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슨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사실은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 또는 개인적 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객관적인 사본 상의 증거인 ‘외적 증거’와 같은 차원에서 ‘내적 증거’라는 말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외적 증거’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면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지면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구절에서 사본 상 서로 다른 두 독본이 나타난다고 하자. 한 독본은 매끄럽고 온전하며 뜻이 잘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한 독본은 엉성하고 무언가 빠진 듯하며 뜻이 잘 안 통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럴 때 어느 독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둘 중에서 뜻이 잘 통하지 않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웨스트코트-홀트의 ‘내적 증거의 원리’이다. 그 이유는 문장이 매끄럽고 온전하며 뜻이 잘 통하는 독본은 후대의 필사 자들이 수정 편집해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소위 그들의 ‘동화(同化, conflation) 이론’이다. 즉 필사 자들은 원래의 거칠고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본문을 가능한 한 매끄럽고 온전하고 조화되도록(곧 동화되도록) 수정해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독본을 취해서는 안 되고 대신 이상하고 어색한 독본을 취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어떻게 보면 매우 그럴 듯한 것처럼 보이며 현대 사본학에 있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기본 전제처럼 되어 있다. 벵겔 이래로 거의 모든 사본학자들 의해 당연한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소위 어려운 독본(lectio difficilior)이 쉬운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며 중대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위험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원칙은 소수의 필사자가 고의로 또는 실수로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60명의 학생들이 수업하고 있는 반에서 선생님이 어떤 문장을 불러 주고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 적도록 했다고 하자. 그래서 선생님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불러 주었다고 하자. 58명의 학생은 정확하게 잘 받아 적었는데 한 명은 띄어쓰기를 잘못해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적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중간의 말을 듣지 못해 “아버지가 들어가신다.”로 적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세 개의 ‘독본’ 중에서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깝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인가?    

오늘날 현대 사본학의 이론을 따르자면 문장이 자연스럽고 잘 통하는 것은 후대의 필사 자들이 수정하여 편집했다고 보기 때문에 원본이 아니라고 판정하고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고 뜻이 부자연스러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나 또는 뭔가 빼먹은 듯하고 이상한 “아버지가 들어가신다.”를 원본으로 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본학계의 진수를 잘 드러내 준다.

그래서 현대 사본학자들이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 곧 ‘내적 증거의 원리’에 의해 편집한 신약성경은 자연히 문장의 흐름이 이상하며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며 중간에 많이 빠진 듯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1881년 웨스트코트-홀트가 편집한 신약성경이 그러하며 오늘날의 NA(네슬레-알란트, Nestle-Aland) 판과 USB(연합성서공회, United Bible Societies) 판 또한 그렇다. 이것을 실제로 성경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익숙해 있다. 우리 개역 한글판에 그렇게 되어 있고 NA 판과 UBS 판에도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본 상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기도문 중 한 군데만 살펴보면 누가복음 11:2에 NA/UBS 판은 그냥 ‘아버지여!’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독본을 지지하는 주요 사본은 p75, א, B(사본들 이름)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에 A, C, D, W(사본들 이름) 등의 초기 대문자 사본들과 E, F, G, H, P, Δ, Θ, Ψ(사본들 이름) 등의 후기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소문자 사본들과 렉시오나리아들이 마태복음 6:9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NA/UBS 편집자들은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라 수많은 객관적인 ‘사본 상의 증거’들을 무시하고 극소수 사본들의 증거를 취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1:2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비록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마태복음 6:9의 본문에 의해 ‘동화(同化)’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한 군데만 살펴보았지만 수많은 곳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NA 판이나 UBS 판은 바로 이러한 ‘내적 증거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편집된 성경이며 이 점에 있어서 1881년의 ‘웨스트코트-홀트 판’과 편집원리 면에 있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르는 편집 판들은 결국 객관적인 사본 상의 증거를 무시 또는 경시하고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을 따르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본학계의 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NA/UBS 판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의 원본을 가지고 있는 냥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쿠르트 알란트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현대 사본학자들의 ‘비평적이고 주관적인 본문’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NA 판이 제시하고 있는 ‘각주의 증거’가 비록 학적이고 인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자료의 제시에 그칠 뿐 사실상 그 편집 판은 B, א(사본 이름들)과 몇 개의 파피루스를 중심으로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라 만든 주관적 본문에 불과하다.

IV. 웨스트코트-트 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모색

그렇다면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새로운 사본학 이론에 기초한 신약성경이 출판되었을 때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었는가? 아니다. 오늘날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은 별로 이의가 없는 정설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지만 이미 그 당시 교회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문제점이 지적되었었다.

특히 존 버건(John W. Burgon, 1813-88)은 그 당시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새로운 이론과 그것에 바탕 한 ‘새로운 신약성경’(Revised Version이라고 불렸음)을 비교적 상세히 분석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비록 현대 사본학계를 대변하는 메츠거는 존 버건을 “잃어버린 주장들과 불가능한 신념들을 옹호하는 챔피언으로 악명 높다.”고 소개하면서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조롱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도리어 현대 사본학자들이 얼마나 객관적이지 못하며 편견에 빠져 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버건이 런던의 잡지에 발표하였던 세 편의 글들은 1883년 ‘The Revision Revised’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버건은 웨스트코트-홀트의 ‘계보론적 방법’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선호한 א, B, D(사본 이름들)는 “현존하는 가장 부패한 사본들(the most scandalously corrupt copies extant)이며, 그것들은 가장 수치스럽게 절단된 본문들(the most shamefully mutilated texts)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또한 이 사본들은 조작된 독본들(fabricated readings)과 실수들(blunders)과 진리의 고의적인 왜곡(intentional perversion of Truth)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스크리브너(F.H.A. Scrivener)도 1883년에 나온 그의 책에서 “홀트 박사의 이론은 역사적인 토대를 완전히 결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그 이론의 토대는 교묘한 상상의 모래 땅 위에 놓여있다.”고 신랄하게 ‘웨스트코트-홀트’를 비판했다.

그러나 대세는 ‘웨스트코트-홀트’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 후로 학자들은 차차로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과 그들의 수정 본 신약을 지지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수많은 NA(네슬레-알란트, Nestle-Aland) 판이 거듭된 오늘날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NA 판이 20세기의 TR(公認本文, Textus Receptus)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NA 판의 독주에 대해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에 소수의 학자들과 목사들을 중심으로 이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그 뿌리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하나는 전통적인 흠정역(欽定譯, KJV) 옹호운동이다. KJV는 1611년에 번역되어 그 경건성과 아름다운 문체로 인하여 수백 년 간 사랑을 받아 온 번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수정 본(Revised Version)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되었다. 1901년에 이 RV(The Revised Version or ERV,  English Revised Version)의 미국 판이라고 할 수 있는 ASV(American Standard Version)가 출판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개정한 것이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71)이다. 또한 RSV(Revised Standard Version, 1952), NEB(New English Bible, 1961),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1978)도 출판되었으며 최근에는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도 나와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TR(公認本文, Textus Receptus)이 아니라 ‘웨스트코트-홀트’의 편집 판 또는 그 계승이라 할 수 있는 NA/UBS 판을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쏟아져 나오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영미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이 손상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뿐만 아니라, 1611년 이래 400년 가까이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고 있는 KJV(King James Version, 1611)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적 신앙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KJV(King James Version) 옹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Trinitarian Bible Society가 스크리브너(Scrivener)의 ‘희랍어 신약성경’(Scrivener’s Textus Receptus, TR 1894, 1902)을 재출판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스크리브너 판은 KJV의 모체가 되었던 TR(公認本文, Textus Receptus)을 제공해 준다. KJV의 번역자들은 그 당시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편집한 신약성경 그 중에도 특히 1598년의 제5판을 주로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스크리브너 판’은 이 베자 판과 미미한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다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말씀보존학회’가 1994년에 ‘한글 킹 제임스 성경’(신약 초판은 1990)을 내놓았는데 오늘날의 많은 번역들이 잘못된 사본에 기초해 있음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본문(TR)을 옹호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다소 감정이 앞서서 지나친 주장을 한 것들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늘날 추적하기 어려운 사본들의 전수 역사에 대해 너무 자신 있게 단정하고 있으며 또한 TR과 KJV을 지나치게 절대시하는 듯 하는 인상이 든다.

물론 KJV가 경건하고 좋은 것이긴 하나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KJV의 번역자들은 희랍어의 시상(時相, aspec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학문 수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일례로 KJV는 사도행전 19:2와 에베소 1:13 등에서 부정시상분사(aorist participle)를 한 시제 앞선 것으로 잘못 번역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로이드-존스 목사가 이 오역을 토대로 ‘믿음 후 성령 받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82년에 나온 NKJV(New King James Version)에는 이러한 오역들이 많이 시정되었다.    

(2) 다른 또 하나의 흐름은 차분하게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을 재평가하고 현대 사본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하는 학적 노력들이다. 주로 미국과 화란의 보수적인 학자들과 목사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인데 미국 내의 보수적인 신앙의 사람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그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피커링(Wilbur N. Pickering), 로빈슨(Maurice A. Robinson), 스터즈(Harry A. Sturz), 핫지스(Zane C. Hodges) 등이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을 옹호하고 있다. 화란에서는 판 브루헌(J. van Bruggen) 교수가 1976년에 출판한 조그만 책(‘The Ancient Text of the New Testament’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에서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문제점을 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 제자 중의 하나인 뷔썰링크(W.F. Wisselink)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래 현대 사본학의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화(同化) 이론’에 대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수많은 자료들을 컴퓨터로 처리해서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한지 여부를 검증하였다. 그의 결론은 “비잔틴 본문 형태는 그것의 조화적 또는 동화적 성격 때문에 열등하다고 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건전한 토대 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여러 사람들의 노력은 1982년에 핫지스(Zane C. Hodges)와 팔스타드(Arthur L. Farstad)가 편집한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가 미국의 최대 성경 출판사인 토마스 넬슨(Thomas Nelson)사에 의해 출판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희랍어 신약 성경은 1985년에 제2판이 나왔으며 현재 한국에도 조금씩 보급되고 있다.    

이 신약성경의 서문에 보면 오늘날 가장 유명한 두 희랍어 신약 편집판인 UBS(3판)과 NA(26판)은 이집트에서 기원한 적은 수의 고대 사본에 매우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주로 B, א와 몇몇 파피루스들), 따라서 이 편집 판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은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소수의 몇몇 사본들의 증거에 반해 상당히 많은 대다수의 사본들은 그 본문이 거의 일치하게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 대부분의 일치하는 사본들의 본문 형태는 ‘대다수 본문’(Majority Text)이라고 불리는데 토마스 넬슨사가 출판한 희랍어 신약성경은 바로 이 ‘대다수 본문’을 토대로 편집된 것이다.

물론 이 ‘대다수 본문’(다르게는 비잔틴 본문, 수리아 본문, 코이네 본문 등으로 불림)을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이집트 사본’들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의 것임은 사실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식하기 쉬운 파피루스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곳은 건조한 기후 조건을 가진 이집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다수 본문의 본문 형태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산 사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리아 역본’들이 거의 ‘비잔틴 본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당시에 ‘비잔틴 본문’ 형태를 가진 ‘희랍어 사본’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 ‘수리아 역본’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파피루스들 중에는 놀랍게도 ‘비잔틴 본문’을 지지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예를 들어 p46) 나아가서 ‘대다수 본문’ 형태를 가진 사본 또는 역본들은 고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다. 수리아, 비잔틴뿐만 아니라, 고딕,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으면서 일치하는 수많은 사본(寫本)과 역본(譯本)들의 존재는 곧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사본들에서 전수되어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 본문’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심지어 현대 통계학 이론을 동원하여 “현재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본들의 본문 형태가 가장 오래된 사본 전수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V. 우리의 방향    

그러면 이러한 사본문제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현대의 NA(네슬레-알란트, Nestle-Aland) 판과 USB(연합성서공회, United Bible Societies) 판이 ‘웨스트코트-홀트’의 잘못된 사본학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희랍어 성경을 택해야 할 것인가? 그냥 옛날의 TR(公認本文, Textus Receptus)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아니면 더 대안이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사본학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은 물론 쉽게 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을 위해 여기에 우리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먼저 사본학과 관련하여서 커다란 조심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사실 우리는 사본의 전수과정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어떤 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 사본의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는 있지만 누가 어디서 어떤 계기에 의해 필사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특히 제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어느 사본을 대본으로 해서 필사했는지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또한 필사 자가 어느 정도의 조심성을 가지고 필사했는지 그리고 필사 후에 다시 원본과 대조해서 점검했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사본에 대한 여러 이론들은 대개 불확실한 추측에 근거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사본의 연대가 빠르다고 무조건 우수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2,3세기의 파피루스라고 해서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파피루스는 그 당시에 비교적 값싼 종이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어떤 사람이 개인적 용도로 급하게 필사했을 경우에 많은 오자와 부정확한 것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9,10세기의 소문자 사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되는 것은 비록 후대의 사람이 필사했지만 초기의 좋은 사본에 근거해서 정성껏 필사하고 교정했다면 그것은 4,5세기의 ‘대문자 사본’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사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필자가 후대의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본의 필사 과정과 전수 과정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본에 대해 말할 때는 고도의 조심성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코트-홀트’와 그 후의 사본학자들이 ‘비잔틴 본문’ 형태를 가진 사본들을 너무 쉽사리 가치 없는 것이라고 배척해 버린 것은 큰 잘못이다.

(2) 그러나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NA(네슬레-알란트, Nestle-Aland) 판과 USB(연합성서공회, United Bible Societies) 판은 잘못된 사본학의 원리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을 무조건 지지해서도 안 되지만, NA판과 UBS판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오늘날의 NA판과 UBS판은 분명히 잘못된 사본학의 원리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과 몇 개의 이집트 사본들을 토대로 만든 ‘지역 판’이며 2천년 가까이 교회에서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던 대다수의 사본들의 증거를 불충분한 이유로 무시하고 있다.    

대신에 그들은 소위 가설에 불과한 ‘내적 증거’라는 원칙 아래 서로 조화되는 독본들을 ‘동화’ 되었다는 구실로 가능한 한 배제하고 서로 조화되지 않고 어색한 독본들을 본문으로 많이 택하였다. 이러한 ‘동화’ 이론의 배후에는 그리스바하에게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의 원본은 가능한 한 조화되지 않는다는 ‘원본부조화(原本不調和)’ 가설(原本不調和假說)이 놓여 있다. 그래서 서로 조화되는 독본은 후대의 필사 자들이 가필해서 수정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배격해 버린다. 이것이 소위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현대 사본학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하에 편집된 성경은 본문들 사이에 가능한 한 서로 충돌하고 맞지 아니하고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들로 많이 차 있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사실은 NA판과 UBS판이 이런 부조화 본문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서 NA판과 UBS판은 역사적인 어떤 사본의 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5명의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선택한 본문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은 몇몇 대문자 사본들과 파피루스를 중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위 ‘내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동화’ 되었고 어느 것이 ‘동화’ 되지 않았다는 판단은 결국 다섯 명의 편집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결국 투표로 결정하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작업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로써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본문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말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NA판과 UBS판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사본들의 ‘외적 증거’ 보다는 현대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을 더 따른 것이다. 따라서 NA판과 UBS판이 제시하는 본문은 현존하는 어떤 사본에도 근거하지 않은 다섯 명의 사본학자들이 만들어 낸 창조물(創造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편집진이 바뀌면 또다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변적인 것이다. NA판과 UBS판의 이러한 주관주의(主觀主義, subjectivism)와 절충주의(折衷主義, eclecticism)는 20세기의 현대 사본학이 외양적으로는 견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확실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준다.

(3) 이런 점에 있어 1982년과 1985년에 나온 MT판은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주가 되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대다수의 일치하는 사본들의 독본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견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의 몇몇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본문을 따르는 것보다 2천년 가까이 교회가 사용한 사본들의 본문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MT(Masoretic Text)판이 바로 원본의 말씀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MT판 편집자들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편집 판(1985)이 예비적(preliminary)이고 준비적(provisional)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대다수의 ‘희랍어 사본’들의 가치와 권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의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MT판은 아직도 많은 연구와 보완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이고 비평적인 편집원리에 의해 편집된 NA판과 UBS판에 비해 훨씬 객관적이고 역사적 증거가 있는 본문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사본학과 관련하여서 아직도 많은 연구가 진전되어야 하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MT 편집 판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TR이 가장 나은 대안이 아닌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TR도 ‘비잔틴 사본들’을 토대로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TR과 MT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TR판들은 아직도 ‘비잔틴 사본’들의 자료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TR은 하나의 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판들(Erasmus, Stephan, Beza, Elzevier 판 등)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인데 300여 년 간 유럽교회에서 받아들여 사용한 희랍어 신약성경의 본문 형태를 뜻한다.

그러나 최근의 MT판은 TR판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의 폰 조던(Von Soden)의 ‘비잔틴 사본’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대다수 사본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을 좀 더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MT 판은 옛날의 TR보다 한 걸음 더 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MT 판에는 TR의 본문과 다를 경우에 밑의 ‘각주 란’에 그것이 표시되어 있으며 대다수 본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4) 사본학의 장래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요구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본학 분야는 워낙 방대하고 복잡한 것이라서 아직 결정적인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주로 독일 뮌스터의 ‘신약사본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사본학의 원리와 신학적 전제이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도 많은 중요한 자료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경시한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NA 26판(UBS 3판)에서 NA 27판(UBS 4판)으로의 진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필자의 UBS 4판과 NA 27판에 나타난 현대 사본학의 동향, ‘개혁신학과 교회’ 4호, 1994, pp.53-66 참조) 비록 더 많은 자료들이 참조되고 각주에 실리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본문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전의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여러 군데에서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더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사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에 바로 선 학자들의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특히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며, 사본학의 기본 전제처럼 여겨지고 있는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과 ‘동화 이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증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소문자 사본’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여태까지의 사본학은 주로 몇 개의 ‘대문자 사본’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고 있는 방대한 ‘소문자 사본’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앞으로 많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렉시오나리아(lectionaria)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다. 교회에서 공적으로 낭독될 때 사용되었던 렉시오나리아 본문은 거의 모든 곳에서 ‘비잔틴 본문’과 일치하고 있는데 렉시오나리아는 교회의 공예배시에 낭독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상 보수성과 엄격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들을 연구하고 참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알란트는 NA 26판에서 이 자료를 거의 무시했으나, NA 27판과 UBS 4판에서 데살로니카의 렉시오나리아 연구소 소장인 까라비도뿔로스(J. Karavidopoulos)를 편집 위원으로 가담시킨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 자료들이 본문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파피루스 사본’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 2,3세기의 파피루스들은 ‘웨스트코트-홀트’의 기대를 뒤엎고 예상외로 비잔틴 본문 형태를 지지하고 있는 것도 많다.(특히 p46)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파피루스들의 증거는 대개 ‘웨스트코트-홀트’의 ‘중립 본문’을 지지하는 것과 ‘비잔틴 본문’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눠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파피루스에 대한 더 많은 연구는 사본 전수 과정에 대해 좀 더 밝은 빛을 비춰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오늘날 발견되는 파피루스들이 이집트지역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또 파피루스가 값싼 재질이기 때문에 조심성 없이 필사한 파피루스들은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리아 역본, 아르메니아 역본, 고대 슬라브어 역본, 에티오피아 역본, 페르시아어 역본 등에 대한 연구도 사본에 대한 좀 더 넓고 균형 잡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사본학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를 많이 지니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처럼 사본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의 차이가 크고 전혀 다른 편집 판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볼 때에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성이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본 상의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국한되어 있거나 의미상 큰 차이가 없는 것들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는 같은 의미이지만 단어가 다른 경우라든지 또는 같은 단어인데 시상이 다른 경우도 제법 있다. 그래서 성경본문의 뜻에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사본 상의 차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벵겔이 평생 동안 사본을 연구한 후에 내린 결론 곧 “상이(相異) 독본(text)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적고 또한 복음적 교리의 어떠한 조항도 변s동(變動)시키지 못한다.”는 결론을 오늘날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곧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5천여 헬라어 사본들 중 대다수의 사본들이 거의 일치하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보존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글쓴 이 / 변종길 교수, 서울대학교(B.A.), 고려신학대학원(M. Div.),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Drs.),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Th.D.)  출처 / 개혁신학과 교회, 1996, pp.6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