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정수(精髓)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

PARTⅠ
시작하는 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1) (All which are given by inspiration of God, to be the rule of faith and life)
성경은 하나님 의 감동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요 신앙과 삶 의 유일한 규범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이다. 성경 외에 다른 방법으로 사는 것은 신자(信者)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맄(Karlfried Froehlich, 1930- )에 의하면 교회사(敎會史)는 성경 해석사(解釋史)로 이해할 수 있다.2) 환언하면 성경해석은 교회의 신앙과 삶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며 교회의 신앙과 삶은 성경해석에 영향을 준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파형성의 주된 요인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보다 성경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 교파는 성경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교파에 속한 신자의 신앙과 삶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역사를 보면 수많은 여러 이단(異端)들이 있다. 그중에 아리우스(Arius, 256-336)는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同等) 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우주의 조성자인 그리스의 데미어즈(Demiurge) 신(神) 정도로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슈퍼맨 정도로 이해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회의(Concilium Nicaenum Primum, 325)에서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규정했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빛의 빛이시오,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 에 달리셨다.”3)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의 신성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논리를 성경의 신적 기원보다도 더 우위에 놓으려는 데서 잘못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해석에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논리적인 사고를 성경의 신적 권위보다 앞세우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그 결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행동은 해석된 것이라고 한 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간에 어떤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가령 요즈음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신당 창당이나 구당 모임이나 민주당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떠나 그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삶의 규범은 성경해석에 기인한다. 문제는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말씀한 대로 올바른 신앙을 갖고 그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문화적으로 다원화되고 사회적으로 혼탁하고 도덕적으로 부패되고 사상과 신앙으로 살기보다는 감정과 느낌으로 살려고 하는 풍조가 강한 시대에서 올바른 신앙과 삶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이들을 지도하고 교육해야 할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고 또 어떤 신앙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에 따라 살면 개혁주의 신자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고 자유주의 신앙에 따라 살면 자유주의 정체성을 가진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성경해석을 올바로 하고 교회가 그에 입각한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위기적인 상황에서 장로교의 창시자요 성경해석 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독보적 성경해석자로 알려진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성경해석 논리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큰 의의가 있다.
대다수의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칼빈을 성경신학자로 특성 지우고 있다. 예를 들면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는 칼빈은 독자적인 성경연구자로 봤다.4) 라잇(John Haddon Leith, 1929-2002)은 칼빈을 성경신학자(Theologian of the Bible)로, 후르맨(Paul Traugott Fuhrmann, 1903-1968)은 성경해석자(the expositor of Scripture)로, 패커(Thomas Henry Louis Parke, 1916-2016)는 최고의 성경해석자(the Biblical Exposition)로 특성 지운다.5)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칼빈신학은 그의 성경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6) 레잇(Leith)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신학자라고 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주석에서 왔다고 했다.7)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Reader in Holy Scriptul’e)로 그의 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네바교인들이 믿어야 할 고백(Confession of Faith which all the citizens and inhabitants of Geneva and the subjects of the country must promise to keep and hold 1536)에서 성경만이 믿음과 신앙의 규범(Scripture alone as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 고별사(告別辭)에서 칼빈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고백했으며 자신은 평생 성경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며 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성경의 단순성을 드러내는데 전념했다고 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살도레도(Jacopo Sadoleto, 1477-1547) 추기경에게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계속 말하기를 “왜 교회개혁이 필요한가?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8) 밀러(Richard A. Muller, 1944- )는 칼빈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9) 참으로 칼빈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장로교회 신학을 확립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그 시대를 타락케 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해석은 신앙과 삶의 규칙을 규정하는 기초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세상학문에서 해석방법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경관에 기초해 있으며 성경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말은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해석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글은 칼빈의 성경해석학을 조직적으로 전체를 다룬 것이 아니고 칼빈 이전의 해석학의 전통(고대)을 살피면서 칼빈 성경해석학의 독특성을 부각시켜 칼빈의 해석학의 논리인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natural and obvious meaning of Scripture)를 명료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며 이 성경의 의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목회자 갱신의 방향을 간접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Ⅰ. 칼빈 이전의 성경해석 논리
1. 유대인의 성경해석 논리
유대인들의 성경해석(Jewish Approach to Biblical Interpretation) 논리는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대인 랍비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반은 문서이다. 토라(모세 오경)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경의 핵심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해석 목적은 성경말씀을 인간 실존에 적용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10)
예를 들면 토라는 성문화된 49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 미드라쉬(Midrash), 폐샤, 알레고리칼, 모형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 문자적 의미
유대인 랍비의 문자적 성경해석은 과도한 문자주의(highper literalism)나 자구주의(lettrism)에 속한다. 쉐마이(Shammai)학파의 신명기 6:7 주석에서 그 방법대로 시행하기를 강조했다.(Impress them (the commandments) on your children. Talk about them when you sit at home and when walk along the road when you lie down and when you get up)11)
- 미드라쉬(midrash)
미드라쉬는 히브리말로 해석(interpretation), 사본연구(textual stud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드라쉬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랍비들의 해석이다. 블록(Rene Block)에 의하면 미드라쉬는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다섯 가지의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 해석의 기초는 성경이다.
- 설교적이다.
- 성경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성경의 텍스트를 현 상황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한다.
- 율법적인 것은 성경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율법과 율례에 숨어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12)
- 폐샤(Posher)
1947년 쿰란 동굴에서 사해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의 발견으로 알려진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유대인들이 인위적인 구성 방법으로만 계시될 수 있는 선지서는 숨어 있는 비밀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폐샤는 언제나 꿈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꿈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비밀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 믿었다.
- 알레고리(Allegory)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성경해석에 알레고리를 사용한 가장 탁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25 BC-47 AD)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첫째, 문자적인 의미와 둘째,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는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다른 것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3)
-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모형론적 성경해석 방법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과 사람 사이에 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모형론적 상관관계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형론적 해석방법은 예언과 알레고리칼 방법과 구별되는데 예언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주로 예견한다(predict)는 점에서 알레고리칼 방법은 상관관계를 숨겨진 텍스트에서 찾지만 그것을 표시하는 역사 속에 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형론적인 해석방법은 텍스트의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지 않으며 역사적인 의미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때가 차매 일어 날 때의 미래의 사건을 미리서 예표(prefigure) 한다는 것이다.14)
2. 사도들의 성경해석 논리
록케리(David S. Rockery)는 사도들의 성경해석은 대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Perspective)이라고 한다.15)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야기 식(narrative form)으로 다루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교회의 사정에 따라 복음의 핵심(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재해석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활의 역사성과 의미를 편지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변증(辨證)하고 또한 험증(驗證)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일상 언어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시고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묘사함으로서 부활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는 것도 헛되며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라고 했다. ‘만약 없다면’ 가정 부정법을 써서 부활 의미의 중요성을 변증하고 험증했다.
3. 어거스틴의 성경해석 논리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성경해석을 알레고리칼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을 병행했다.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3장까지 주석했다. 미르(Jitse M. van der Meer)는 어거스틴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생이었으며 그는 글자 그대로 성경 안에서 산 사람이라고 했다.16)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는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문자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성경해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명저 ‘기독교 교리’(De Christina Doctrina)는 이방인을 신자가 되게끔 하는 성경교육 방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제3권)을 제시하고 있다.17)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어거스틴의 ‘De Christina Doctrina’(On Christian Doctrine, knowledge)는 최초의 성경해석학이었고 고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며 그 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18)
이 책은 4부로 되었는데 처음 3부는 주후 397년 그리고 마지막 4부는 주후 426년에 완성했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책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저술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어거스틴은 그의 저술에서 성경해석의 논리를 제시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 AD130-202)가 성경해석 논리로 ‘진리의 척도’(the cannon of the truth)를 제시하고 터틀리안(Tertullian, AD160-220)이 ‘믿음의 규칙’(the rule of faith)이라 했다면 어거스틴은 성경해석 논리로 ‘사랑의 규칙’(the rule of charity)을 말했다 예를 들면 이레니우스는 이 교회는 비록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이 신앙을 전한다.”로 사도신경의 전신의 내용을 시작한다.
한 하나님, 전능하신 성부를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다. 그리고 한 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섭리와 강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수난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과 승천과 만물을 총괄(에베소 1:10)하고 인류 전체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일으키시기 위해 영광중에 하늘에서 장차 나타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즉 우리 주요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이시요 왕 되신 분께 하늘과 그 발에 만물 이 모두 무릎을 꿇게(빌 2:10,11) 하시고 모든 혀가 그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하시는데 악한 영(엡 6:12)과 타락으로 인해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사악하고 속된 자들과 함께 반역의 상태로 떨어진 천사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거룩한 자들과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이들은 회개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서 견인한 자들에게는 은혜로써 불멸을 주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을 두르실 것이다.19)
터틀리안은 “이제 신앙의 규칙에 대하여… 너희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규정한 것을 알아야 한다.”로 시작한다. 신앙의 규칙과 진리의 척도는 성경에서 도출되며 그래서 이 규칙이 올바른 성경해석을 컨트롤하는 원리로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정통신학의 시금석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아주 중요하다고 했으며 그 이유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여 가르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에 기초한 삶을 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점에서 성경 해석자는 책임성 있는 해석과 그 해석에 의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호소력이 있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으로 부터 오지만 세상적인 학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照明, divine illumination)을 통해 도우심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며 경건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1부에서는 성경해석에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찾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방법을 제1-3부까지 다루고 제4부에서는 둘째 방법을 다룬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모든 가르침은 사물(things)에 대해 가르치거나 언어(signs)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봤다. 사물과 언어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언어는 무엇을 표시 혹은 제시(signify)하는 사물이다.(signs are things which are used to signify something)20)
둘째, 언어는 우리 감각을 초월해서 무엇을 생각토록 하는 사물나다.(A sign is a thing which causes us to think of something beyond the impression the thing itself makes upon the senses)21)
이 사실로부터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언어를 통해서 배우며 언어는 사물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며 언어를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언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본다면 어거스틴은 언어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제2부에서 어거스틴은 언어에는 자연적인 언어(natural sign, signa naturalia)와 일상적인 언어(conventional sign, signa data)가 있다고 했다. 자연적인 언어는 언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지만 무엇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다. 예를 들면 ‘연기’(煙氣)라는 언어는 불을 연상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연기라는 언어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불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연기는 불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상 흑은 증상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 즉 사상, 감정,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가령 성경에 나오는 언어는 성경 저자의 의도, 사상,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분명한 성경 언어의 의미는 원문을 보거나 문맥을 통해서 또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제3부에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언어에 대해서 다룬다. 이것은 은유적(隱喩的)인 언어(figurative language)인데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든지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온다. 성경에 경건한 생활(purity life)과 올바른 교리(soundness of doctrine)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은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22)
여기서 경건한 생활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가 있으며, 올바른 교리 흑은 가르침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식과 관계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구절은 분명한 성경구절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23)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데 즐겨야 할 사물(thing to be enjoyed), 사용될 사물(thing to be used), 즐겨야 하고 사용될 사물(things which use and enjoy)이 있다. 우리가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그러나 사용의 대상은 우리를 만족과 행복케 하는 것을 돕는 수단이 된다. 우리를 만족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대상(對象)은 인간이 아니요 세상도 아니요 지고의 선이시요 참 인간의 행복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수단을 만족케 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 인생은 방황하게 되고 타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허무하게 되고 또 다시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 을 찾아야만 하며 그래서 평안이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그러나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신자가 행해야 할 삶의 규범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겨야 할 영원한 대상이요 이웃은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서로 교제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해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렇게 하는 성경해석은 설령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틀린 성경해석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 하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 보면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24)
어거스틴에 의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인정 한 것을 희망함으로써 살아가려 희망한 것을 사랑으로 소유하게 된다.25) 성경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지식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야 한다. 성경해석 자는 자기가 해석한 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성경해석 논리는 하나님 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기초한 사랑의 논리(the rule of Charity)이다.
4.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해석 논리
알렉산드리아학파(The Alexandrian School)의 풍유적(諷諭的)인 해석학(allegorical Hermeneutics)은 주후 2,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생겨난 학파로서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한 방법이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와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 185-254)이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살았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당대의 석학들이 사는 중심지였으며 당시의 최고의 도서관(70만 장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는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와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175-240)에 의해 창시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바실리데스(Basilides, 117138)의 영지주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25BC-50AD)의 사상을 따른 헬라적 유대주의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플라톤주(Platonism)의가 한데 엉켜 끓고 있는 도시였다고 한다.26)
풍유적 성경해석의 선구자는 헬라적 유대인 필로로서 그는 헬라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풍유적 성경해석을 통해서만 성경의 깊은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고 믿었다.27) 풍유적 성경해석의 대표자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을 믿음의 규칙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당시 영지주의 자들이나 헬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규칙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해석을 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가미한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성경해석학은 변증적인 측면에서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성경에는 한 가지 의미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며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경험에 의 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유적 성경해석에 의해 발견된 다고 보았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주된 의미가 아니라 이차적 의미라고 했다. 클레멘트는 플라톤의 철학과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을 조화하여 영지주의의 잘못된 지식(false gnosis)에 반대하여 성경의 진정한 지식(true gnosis)을 얻고자 했다.
최초의 조직신학자요 성경신학자인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클레멘트와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깊은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며 영적인 의미라고 봤다. 그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인식론의 기초로 하여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것같이 성경의 의미도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문자적 인 의미(literal or physical), 도덕적인 의미(moral or psychical sense), 영적인 의미(allegorical or intellectual sense)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깊은 의미는 영적인 의미라고 했다.28)
세 가지 차원의 성경의 의미는 성경에서 한 가지 차원의 의미(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한 안디옥 학파와 다르다. 문자적인 의미란 성경에 여러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 성경의 각 언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오리겐의 풍유적 성경해석은 그의 성경관과 신플라톤 철학에 의한 것이다.29)
알레고리는 헬라에서 기원되었고 신(神)의 메시지에는 신비스러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봤다. 알레고리칼 해석(영적 형이상학적)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신적(神的) 기원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다. 신적인 것은 영원하고 비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한 계성이 있고 현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오리겐도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30) 즈윁(Paul King Jewett, 1919-1991)에 의하면 알레고리칼 성경해석과 알레고리의 해석은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했다.31) 알레고리는 고정되고 인정을 받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 성경에도 알레고리가 있다. 은유적인 표현이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것은 은유적인 해석(metaphorical interpretation)이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해석은 알레고리의 해석이 아니다. 그렇지만 은유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이 알레고리의 해석과 알레고리칼 해석의 차이다.
하바드대학 헬라문학과 철학 교수였던 월프슨(Harry Austryn Wolfson, 1887-1974)은 그의 명저 ‘파일로’라는 책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알레고리칼 해석은 텍스트에 있는 무엇을 리스트와 관계없이 해석하는 방법이다.”(The allegorical method essentially meant the interpretation of a text in terms of something else, irrespective of what that something else is)32) 알레고리칼 성경해석의 가장 좋은 예는 어거스틴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9-37)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月)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이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도 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을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 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 이다.33)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문자적 의미를 초월한 영적의미가 있다고 봤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로 본 것이다. 환언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알레고리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신령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주로 성경에서 문자적 의미와 영적의미를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며 인간의 내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했다.34) 여기서도 오리겐은 문자적 의미와 영적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영적의미야말로 진정한 의미라고 한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도 말했다. 오리겐은 기독교를 반박한 ‘셀수스에 반대’(Against Celsus)에서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경은 사실적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는 평신도의 신앙을 북돋운다.
셋째, 문자적 의미는 변증적인 면이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도록 우리를 돕는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의 텍스트에 숨겨있는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성경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며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영해함으로써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17
5. 안디옥학파의 성경해석 논리
안디옥학파(the Antiochene School)는 역사적(歷史的) 그리고 모형론적(模型論的) 해석학(Literal- historical and typological hermeneutics)으로 특성 지워진다. 안디옥학파는 안디옥에서 기인된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 신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곳이며 동방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 의미 즉 문자적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레고리칼 방법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theoria, θεωρια)에 의해 얻어진다고 봤다.36) 다시 말해 성경에서 문법(文法, theoria)을 통해 모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救贖史)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이 있다.
안디옥학파의 선구자 디오도루스(Diodorus of Tarsus, -390)는 성경해석에 있어 성경은 문법(文法, theoria)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알레고리와 테오리아의 차이’(On the Difference between Theoria and Allegory, τιs διαφορορα και αλληyοpιαs)라는 책을 썼지만 아리안주의(Arianism) 자들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우리는 영적인 해석이나 theoria을 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이야기는 theoria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theoria는 탁월한 통찰력의 기초요 하부 구조이다. 그러나 theoria를 역사적인 고려가 없이 사용한다면
결국은 그것은 theoria가 아니라 allegory가 되어 버린다고 말했다.37) (We do not forbid the higher interpretation and theoria. for the historical narrative does not exclude it, but is on the contrary the basis and substructure of loftier insights… We must , however, be on our guard against letting the theoria do away with the historical basic, for the result would then be. not theoria, but allegory)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알레고리칼 해석이 된다는 것이며, theoria라는 말은 영적인 통찰력 혹은 관찰을 의미한다.38) 디오도루스의 두 제자가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350-428)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이다. 데오도레는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성경의 역사성과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은 알레고리칼 해석의 결과를 가져온다.
안디옥학파는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불가능할 때 모형론(模型論, typology)으로 해석했다. 모형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튜포스’(τυπο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닳음(resemblance), 유사성(likeness), 비슷함(similarity)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사로서 구약의 사건은 다소 불분명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자는 크리소스톰이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Plato)의 이데아와 그림자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에 중점을 둔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의 궁극적인 실제는 세상의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크리소스톰은 ‘신카타바시스’(synkatabasis, God’s gracious acceptance of human limitations, astheneia)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쓰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의 정확성과 단순성을 말한다.39) 그는 알레고리칼 성경해석은 올바르지 않으며 신자를 잘못되게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실례로 잠언 5:17-19, 이샤야 8:7,8 그리고 에스겔 17장으로 든다. 이들은 알레고리이지만 크리소스톰은 은유(隱喩)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4:22-24에서 사도 바울의 알레고리를 은유로 해석한다. “바울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예형(豫型)을 비유라고 하였다. 바울의 진의는 이것이다. 즉 역사 자체는 명백한 의미를 소유할 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일러준다. 그래서 비유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엇을 일러주는가? 현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By a misue of language he {Paul } called the type allegory. What he means is this: the history itself not only has the apparent meaning but also proclaims other matters: therefore, it is called allegory But what did it proclaim? Nothing other than everything that now is) 40)
그는 안디옥학파의 theoria를 예술과 비교해서 성경의 두 가지 역사적 의미와 모형론적 의미의 관계를 보여준다. “진리가 실현되기까지는 예형(豫型)에 진리라는 명칭을 준다. 그러나 진리가 성취되면 그 명칭 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회화(緖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왕을 스케치하지만 그 위에 도색되기 전에는 그 그림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색이 될 때 진리 때문에 그 형(型)이 감추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왕을 보라.’고 하게 된다.(The type is given the name of the truth until the truth is about to come, but when the truth has come, the name is no longer used. . Similarly in the painting: AN artists sketches a king, but until the colors are applied he is not called a king; and when they are put on the type is hidden by the truth and is not visible; and then we Bay, ‘Behold the King’) 41)
모형론의 의미는 윤곽(輪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의 최종적인 문자적인 의미는 모형론의 의미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는 성경은 분명하게 쓰여졌다고 봤다.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의 콘텍스트(context)에 의한 문자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6. 중세의 성경해석 논리
중세(中世)의 성경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을 네 가지 계층의 의미로 구분했다. 맥콘(Wayne G. McCown)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주며, 알레고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를 보여주며, 도덕적인 의미는 우리의 믿음이 생활의 규칙을 주며, 신비적인 의미는 어디에서 우리의 영적인 투쟁이 끝나는가를 보여준다.(The letter shows us what God and our fathers did. The allegory shows us where our faith is hidden. the moral meaning gives us rules of daily life. The anagoge shows us where we end our strife)
그러나 버러우(Mark S. Burrows)에 의하면 중세 후기에는 성경과 전통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으로 갔다고 했다.42) 전통과 성경의 동시적인 상관관계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한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두 지평의 융합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가 동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는 동시적이 아니라 텍스트와 성령님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중세 성경해석은 텍스트보다는 해석자의 관점(觀點)을 더 중요시함으로서 하나님 말씀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Ⅱ.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
레만(Paul L. Lehmann, 1906-1994)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보다 더 명료하고 단순하며 성경 해석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43) 플러톤(Kemper Fullerton, 1865-1941)은 말하기를 “칼인은 기독교역사에 있어 최초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해석한 사람이다.”라고 했다.44) 플러톤은 계속 말하기를 칼빈과 루터는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성경해석의 원리(exegetical principle of the grammatic-historical sense)로 삼았다고 했다.
루터는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모든 성경의 텍스트에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무리한 기독론 중심의 해석은 반대했다.45) 이러한 칼빈의 성경해석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칼빈의 성경의 필요성, 성경관, 칼빈이 받은 인문주의 영향, 말씀과 성령의 관계, 해석자의 자질 등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성경에서 도출(導出)했기 때문이다.
1.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필요성(必要性)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양심과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갖고 있다. 부적, 섬 지방의 많은 미신, 고사(告祀)를 지내는 행위 등은 왜곡된 종교성의 표출이다. 그러므로 사실 무신론(無神論)이라는 말자체가 모순된 말이다. 이미 그 말 속에는 신(神)의 존재를 전제(前提)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준다.(롬 1:19)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위엄(威嚴)은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함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기보다는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창조의 세계를 보이지 않은 것들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표상이 아니면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세계를 우리에게 표상하기 때문이다.(롬 1:20, 히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나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는 참다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타락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부패한 인간은 구속주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성령님이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칼빈은 또 성경이 안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46) 이 말은 메타포(隱喩, 은유, metaphor)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눈이 아프거나 시력이 약하면 실제로 잘 볼 수 없는 것처럼 타락으로 인해서 참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이 해할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은 진정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이 안경이라는 은유는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 이성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케 하여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성(理性)은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고 가르쳐 준다.
2. 칼빈의 성경관(聖經觀)
(1) 성경의 저자(著者)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지식(기독교강요 제1권 6-9항), 성령과 구원관계(기독교강요 제3권 2항), 성경의 권위와 영감(기독교강요 제4권 8항)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다 포함한다. 성경 66권은 표면상으로 보면 다 그 저자(著者)가 있다. 오경은 모세가 저자이다. 이사야 선지서는 이사아가 저자이다. 사도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자신의 기록을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을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증하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이 저자가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했겠는가? 그렇다!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은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文體)도 있다.47)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은가? 성경에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순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모순을 조정이론(調整理論, accommodation theory)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정(性情)과 능력(能力)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시고 또 어머니가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게 표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쉬운 말로 알기 쉽게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베틀(Ford Lewis Battles, 1915-1979)에 의하면 이 조정이론(God’s Accommodation to human capacity, caput)은 칼빈이 창안해 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교회사를 볼 때 오리겐,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00-368AD) 등이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이들과 달리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성경해석 원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꿀 수 없는 간격(間隔)을 좁히는데 적용했다고 말했다.48)
칼빈은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심을 역설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성경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있는 책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49)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 무오(無誤)하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 자신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딤후 3:16)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주며 율법과 선지서,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속 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과 증거’로써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구분하지 않는다. 칼빈은 성경을 삼위일체 적으로 설명한다.
-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 마음에 성경의 권위와 진리를 증거하며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주시며,
-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요 말씀으로 증거하며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며,
-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배우며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50)
(2) 성경의 권위(權威)
성경의 권위(權威, authority)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경이 신적(神的) 권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믿음과 진리의 은행으로서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수장(首長)이요 성경해석의 최후 재판관이 된다고 믿었다.
레만(Paul Lehmann, 1906-1994)은 말하기를 “장로교에서는 성경이 믿음과 신앙의 궁극적인 규범이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의 확실성도 성경 자체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성경의 신적권위를 약화시킨다.
이처럼 성경이 절대무오 한 진리라는 것을 만일 교회가 결정하게 된다면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경을 기초로 세워진다고 칼빈은 말했다.51)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확신 되어 진다. 성령님은 성경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증거 한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知性)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인(印)을 치셔서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으로 증거하며 확신케 한다. 이보 다 더 완벽한 증거는 없다.52)
성경의 권위는 성령님의 증거와 조명(照明)을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루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경의 자증에 기인하는 것이다.53) 성경의 자증성(自證性)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장 완벽하게 말해 준다. 성경이 스스로 그 권위와 진실성을 말한다.
성경의 자증성이란 성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성경말씀 자체가 말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설교나 해석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것이다.
(3) 성경의 내용(內容)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τα δυναμενα οε σοφιαι ει ο 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 τη εν Χ ριω Ι ηου, 딤후 3:15) 칼빈은 이 구절의 주석에서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성경에 대한 아주 귀한 찬사로서 다음 구절은 그 의미를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성경의 핵심이요 알맹이가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54)라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요 설계다. 또한 성 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설계요 핵심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구약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악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악의 통일성을 이루는 설계요 또한 신구약 통일성의 핵심이 된다.
신구악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이 없이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나 구속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래드(Gerhard von Rad, 1901-1971)는 신구약을 두 찬양대로 비유하여 신구약이라는 두 찬양대가 하나의 핵심인 예수를 지칭하면서 부르는 찬양이라고 했다.55)
(4) 성경의 명료성과 단순성
성경은 왜 단순(單純)하고 명료(明瞭)한가?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배려 혹은 조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제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쓰여졌을 경우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언어를 선택하시고 쉬운 말로 기록하도록 하셨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조정이론이며 바로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배려로 말미암아 단순하고 명료하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56)
둘째,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논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느 곳을 읽어도 성령님의 감동이 안 된 것이 없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고 각 성경의 개체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배려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칼빈의 성경관에 기초해 있고 성경으로부터 도출해 낸 것이다.57)
3. 인문주의 사상과 성경해석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은 프랑스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의 스타일을 레페브레(Jacques Lefèvre d’Étaples or Jacobus Faber Stapulensis, 1455-1536) 서클(the circle of Jacques Lefevre)로부터 배웠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교부들의 경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변적(思辨的) 논리나 전문적인 변증법에 의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요시하는 자세였다.58)
윌리스(Edward David Willis, 1933-2014)에 의하면 칼빈의 사상은 직설적 변증법(dialectical diastasis)이라기보다 수사학적(修辭學的) 상관관계(rhetorical correlation)라고 했다. 칼빈은 두 가지 수사학(修辭學)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변호나 토론하는 자가 토론이나 변호하는 것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기술로서 수사학(修辭學)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듣는 자가 이해토록 설득하는 수사학이다. 후자의 수사학적인 전통이 칼빈의 사상형성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칼빈이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사학에 능통한가를 시사해 준다. 칼빈의 사상에 후자의 수사학은 믿음을 설득으로, 지식을 효과적인 진리로, 계시를 하나님의 능력을 낮추어서 인간의 능력에 조정한 것을 통해서 보여 진다.”59)
칼빈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섭렵(涉獵)하는 가운데 인문주의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수사학적 방법이란 고전(古典) 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세상적인 수사학은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수사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된다. 세상적인 지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방법들은 간접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향에 목표를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볼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의미’(Of the sense and Right Exposition of Scripture)라는 그의 설교에서 다섯 가지 성경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 성경해석은 우리의 믿음에 동의해야 한다.
- 성경해석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 성경해석은 컨텍스트(contexts)를 고려해야 한다.
-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 성경해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60)
칼빈은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칼빈의 사 상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인문사회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말은 아니다. 역으로 칼빈은 인문사회학을 통해 인문사회학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성경에서 도출되는 성경해석 방법과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칼빈의 성경해석 원리
(1) 성경해석의 목표 28
칼빈은 1539년 ‘기독교강요’ 제2판 발행 후 ‘로마서주석’을 출판했다. 이 로마서주석 서문에서 칼빈은 주석자의 가장 좋은 목표 즉 성경해석의 목표를 이렇게 두 가지로 말했다.
- 성경해석에 있어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단순성(單純性)과 명료성(明瞭性)에 기초해야 한다.(lucid brevity)
- 성경 해석자는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61)
그리고 칼빈은 갈라디아서 4:22의 주석에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해석자의 목표는 성경에서 저자가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 혹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to show)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준다.
(2) 단순(單純) 명료(明瞭)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당대의 석학들의 성경해석 방법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의 ‘로마서주석’은 성경의 주된 개념을 중심으로 성경을 주석을 함으로써 로마서 전체를 보기가 힘들며 부처(Martin Bucer or Butzer, 1491-1551)의 주석은 너무 현학적으로 흘러서 평신도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성경해석은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에 기초하여 살기를 원했다.
투아(Pierre Imbart de la Tour, 1860-1920)도 말하기를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러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62)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 1918-2000)도 칼빈의 성경해석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 가운데 나타난 성경의 살아 있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하면서 여덟 가지 성경해석 방법을 제시했다.63)
이 같이 칼빈은 성경 속에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찾았고 성경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누구나 다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반은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29
5. 성경해석과 성령의 조명(照明)
성령과 성경해석의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올바로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 칼빈은 문자 자체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도 유익도 줄 수 없다고 했다.64) 이처럼 성령에 의한 영감은 종교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모든 것 위에 있다.
루터도 성경과 신자의 관계를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의하면 그것은 말씀과 성령이다. 이 말을 칼빈은 더 명료하게 설명했다. “성령 없이는 말씀은 죽은 문자이다. 말씀이 없이는 성령을 환상처럼 떠다닌다.”(Without Spirit, the word is a dead letter: without the Word, the Spirit flutters as an illusion)65)
성령은 성경의 기록자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동일한 성령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를 조명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하신다.66) 성령의 검(劒)으로서 말씀(ρακαιραν του πνευματο Ο εστιν ρεp α θεου)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라는 말씀이 논리적으로 되면 말씀은 곧 검(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말씀이 검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은 검은 검이로되 쓸 수 없는 검이 다. 말씀의 칼을 예리하게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세상의 해석학이 아무리 좋고 길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는 무용지물이 된다. 다만 세상학문들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에베소서 6:17 주석에서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베소서 6:17 말씀은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만’ 이라고 주장하면 신비주의에 흐르며 ‘말씀만’ 이라고 하면 이성주의(理性主義) 빠지며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라야 진정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히브리서 4:10 주석에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 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67)
6. 성경해석과 해석자의 자질
성경해석에는 두 지평(地平)이 있다. 성경과 해석자이다. 성경해석은 이 두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과 성경을 해석하는 자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이 두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관계를 디셀톤(Anthony Charles Thiselton, 1937- )은 두 지평이라고 했다.68)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 해석자의 한계성을 의미한다. 두 지평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지평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69)
그러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는 상관관계라기보다는 성경과 성령에 의존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석자는 늘 성경에 의존하여 항상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자의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 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의 관점은 항상 바꾸어져야 한다. 해석자가 살고 있는 시대상황이 변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 시대에 주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1451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것에 비추지만 소경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해하는 데 소경이며 그래서 우리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70)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한 본질상 항상 명료하다.71) 이 말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변할 수 없는 원리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료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성경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철학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 추론해 낸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다. 눈이 나뿐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만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관점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72)
성경의 제자(弟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제자라고 할 때 제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선생이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며 선생의 사상과 삶의 스타일을 배우며 또 그렇게 가르치며 사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또 제자의 특성은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칼빈은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일생동안 말씀을 주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살았다. 이 같은 삶이 성경의 제자로써 사는 삶이다
성경에는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구속 주 하나님에 대한지식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이해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태어난다고 했다.73)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2) 성령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學校)라고 했다.74) 성경은 학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령님이 운영하시고 주관하시는 학교이다. 학생은 성경을 배우는 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만하게 배우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다. 학교를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해한 그것에 의해서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라는 말이 인문(人文) 교육이나 신학(神學)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성경해석과 설교 그리고 가르침은 생명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 지고 해석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
칼빈은 경건(敬虔)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경건의 요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 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고 선포하신 대로 이해한다.”75)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신앙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참 경건한 생활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살도록 변증하고 험증(驗證)하는 자이다. 특별히 성경해석과 연관하여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깊게 영접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선포 하신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혹은 성경대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로 경건한 삶은 성경해석이요, 성경해석은 곧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성경해석 방법
(1)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
훌러톤(Kemper Fullerton, 1865-1941)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Prophecy and Authorety)에서 칼빈의 성경해석은 ‘역사적 문법적 방법’(historical grammatical)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컨텍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제가 성경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빈은 ‘여자의 씨’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원복음(原福音, Protoevangelium)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76)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에 투철하였으며 동시에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신학적인 전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루터처럼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지나친 예수님 중심의 성경해석은 구약의 역사적인 의미를 약화시킨다. 구약의 메시지는 구약시대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과 희망을 주며 동시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미리서 맛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77)
칼빈은 성경에 알레고리(Allegory, 은유)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알레고리를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 알레고리에서 문자적인 의미 즉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 칼빈은 고린도후서 3: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 이라.”의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부당성을 말한다. 알레고리로 성경을 해석한 자에게 ‘의문’(儀文)은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며 ‘영’은 알레고리칼 의미를 말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의문과 같으며 알레고리칼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 봤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본문은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불순하게 하며 알레고리칼 해석을 성경해석의 규범으로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78) 그리고 주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입으로만 전하면 그것은 죽게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음에 받아들이므로 전하면 생명을 준다는 말이라고 주석했다.79) 따라서 칼빈은 고린도후서 3:6은 성경해석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말하며 사도 바울이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키를 제시했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 이 칼빈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알레고리를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80) 칼빈은 비유(알레고리)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목표(目標)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고 했다. 크리소스톰도 마태복음 20:1 주석에서 우리는 비유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비유의 목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비유는 비교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13:34,35 말씀을 잘 보면 비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비유로 진술한다는 말이다.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 비유란 이 말씀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to show)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이다.”(the kingdom of heaven is)가 아니라 “천국은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will like(NIV, KJV, shall be compared to, RSV)이다. 천국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81)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은유(隱喩, metaphor)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에서는 천국 비유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경우는 목자를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 비유는 ‘이와 같다.’라는 말을 썼고 선한 목자의 경우는 ‘이다.’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해석을 할 때 언어의 사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칼빈은 은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은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이 아니다. 알레고리는 믿음의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방향에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5에 대한 설교에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언어가 어떻게 문장에서 사용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82)
여기서 성경 언어의 사촌은 문맥과 문법적인 구조를 살피는 것이며 언어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성경의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장르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현대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칼빈이야말로 현대 성경해석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2) 모형론적 성경해석
래드(Gerhard von Rad, 1901-1971)는 구약성경의 모형론적 성경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상관관계(相關關係, correspondence)에 있으며 이 상관관개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일시적이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원시적인 사건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라는 말이다.83)
알레고리(한국어 성경은 비유로 나와 있음)는 예표된 것과 이루어질 사건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를 설정하지만 모형론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관계이다. 래드에 의하면 칼빈은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했다. 래드는 모형론적인 해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한 한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역사 속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구약은 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 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따라서 모형론 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와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이라는 두 개의 찬양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두 개의 찬양대는 양편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래드에 의하면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지식은 구약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다.84) 동시에 신약이 없이는 구약의 이해는 의미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형론은 진정한 예언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역학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제도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모든 제사제도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85)
칼빈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맡아서 내가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렘 17:22)를 해석하면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명해졌으며 사도바울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정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에서 말함과 같이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模型, types) 혹은 그림자(shadow)이며 그리스도는 모형과 그림자의 본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과 본체(本體, substance)라는 말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림자란 본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본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림자는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제도나 예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진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 의 표상이라.”(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 παpαβαοε ω Αδαμ ο τυπο του μελλοντο)는 주석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반대하면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형인가? 유사성의 모형이 아니라 대조적인 모형이라고 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義)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義)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86)
아담 한 사람으로 죄(罪)가 세상에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의(義)가 회복되고 생명(生命)이 의(義)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다르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담이 죄(罪)의 모형이라거나 그리스도가 의(義)의 모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복음은 율법이 모형 아래 감추어진 것을 손을 가지고 지적해 준다고 했다.87)
칼빈의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안디옥학파의 이론과 비교한다면 칼빈의 이론(Theoria)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란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Ⅲ. 성경해석 원리의 적용
칼빈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성경해석 논리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해석이란 복잡한 이론이나 세상 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후에 중요한 것은 성경 언어 사용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두 텍스트를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 요한일서 4:7,8과 4:9,1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본문에서 여러 가지 주제로 설교도 할 수 있고 강의도 할 수 있다. 강의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기본은 본문 이해에서 출발한다. 요한일서 4:7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어로 보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love comes from God) 이 말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희랍어로 보면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다. 그래서 기독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즉 사랑의 기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인간이 가장 알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척이나 사랑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이 말씀 한 마디는 생명의 말씀이요, 목마른 자에게 생수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때문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사랑의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랑은 서로를 인격적으로 아는 가장 중요한 길이 된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했고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생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에서 ‘나타난바’라는 ‘에파네로데’(εφανερωθη)는 ‘파네로’(ψανεpοω)의 부정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사랑이 이렇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수동이라는 맡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졌다는 말이다. 4:10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심에 의해 보여지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졌다. 우리 죄를 사하는 사죄의 은총 가운데 보여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죄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며 우리도 이 세상에서 남을 용서하는 사랑을 할 때 참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죄의 사랑을 덧입을 때 우리는 원수까지도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이토록 깊고 넓은 사랑이다. 따라서 하늘을 두루마리로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죄의 사랑은 미움과 증오 가운데 갈등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랴!
- 에베소서 4:11-13
하나님이 우리를 사도로 선지자로 목사와 교사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목적은 첫째, 성도를 봉사케 하며, 둘째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목회자는 성도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성도가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도록 교육시켜야 하며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하시는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신자가 되며 그래야 이 세상의 교훈과 풍조에 떠밀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신자가 된다고 했다.(엡 4:14) 이런 신자가 성숙한 신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통일성을 이룬다고 했다. 신자가 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 않고 우리는 성숙한 신자도 목회자도 될 수 없다. 진정한 신자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인간학에서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 하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오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인정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이 신자라 했다. 이것은 우리 신자는 죄의 세력에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연약하여 넘어지기 쉬우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려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수양이나 요가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육신의 소욕을 죽여주셔야 우리가 믿는 것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예에서 살펴봤듯이 성경의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따라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경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해석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이 없는 설교나 강의는 감동력이 없는 것이다.
결론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그가 세상학문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경해석 논리는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제시된 것이요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에 맞게 올바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안디옥학파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풍유적인 해석은 성경언어 이면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모형론적인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안옥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다 버리지 않고 배웠다. 그 한 가지 예가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모든 학문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가려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연약하고 제한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이다.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의미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따라서 성경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성경을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한다. 환언하면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칼빈은 구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모형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모형론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언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해있다.
오늘처럼 혼탁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해석학이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대에 칼빈의 해석논리는 성경을 게시한대로 보게 하는 성경에서 도출한 성경해석 방법이요 나아가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장로교회의 대원칙을 새롭게 조명하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의 제자가 되고 성령의 학교에서 배워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들어내는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의 갱신이요 성경해석 논리라고 믿는다.(*) 글쓴 이 / 고광필 교수(조직신학, 전남대학교 졸업, Princeton 신학대학교 졸업 (M. Div), Yale University 대학원 졸업 신학석사(S.T.M), Drew University 대학원 졸업 철학석사(M.Ph), Drew University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Ph.D), 현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교목실장
< 미 주 >
1)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생명의 말씀사, 1992), 18.
2) Biblical Hermeneutics in Historical Perspective, Mark 5. Burrow & Paul Rorem Michigan: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15.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the 016 Testament(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ix.
3)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 10-11
4) ‘칼빈, 루터, 어거스틴’, 벤자멘 워필드 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기독교문화협회 1988), 39.
5) Paul Traught Fuhrmann, Calvin, The Expositor of Scripture, Interpretation, Vol.6(April, 1952). John H. Leith,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Interpretation, Vol. 25 (July 1971), 329-44. T.H.L. Parker, Calvin the Biblical Expositor, John Calvin, cd. G.E. Duffel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176-86.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hichard C. Gambia (Michigan: Garland Publishing, INC.,1992)
6) Richard 4. Huller,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Scripture as Reve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7)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Vol.25, Interpretation (July 1971),329-344.
8) Calvin:Theological Treaties. Ed. J.S.K. (London:SCM Press LTD, MCMLIV), 186-87.
9)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Richard C. gamble(New York&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398. Cited as CH.
10) David 5.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Baker Book House, 1992), 27.
11)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28.
12) Rene Bloch, “Midrash, ” in Approach to Ancient Judaism: Theory and Practice, ed. W.S. Green, Trans. Mary Howard Callaway, Brown Judaic Studies 1 (Missoula, Mont.: Scholars, 1978),29)
13) Harry 4. Wolfson, Philo 1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1968), 115, 134.
14) David 5.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Michigan: Baker Book House, 1992), 33.
15)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44.
16) Jitse M. van der Meer, Augustine the Bishop: the Life and Work of Father of Church, Trans. Brain Battershaw and G. R. Lamb (London and New York, 1961),343.
17) Collectanea Augustiniana, Melanges 7.J., Van Bavel, Publes Par (Leuven University Press, 1990), 1028. 기독교 교리에서 교리에 해당하는 희랍어 πατδεια는 교육이라는 말이다.
희랍인들은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18) A Select Library of the Nice and Pod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 Philip Schaff, St. Augustine’s City of God and Christian Doctrine, Vol.Ⅱ (Grna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xii. Cited as CD.
19) 프란시스 영, 『초대 기독교 신조 형성사』, 이후정. 홍삼열 역 (컨콜디아사, 1994), 26-28.
20) CD, Ⅰ. ii. 2, 11
21) CD, Ⅱ.i,1, 5-7.
22) CD, Ⅲ.10.14..
23) CD, Ⅲ.26.
24) CD, Ⅰ.36.40.
25) CD, Ⅰ.37.41,38,42.
26) Justo L. Conzalez,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1Vol. (Nashville: Abingdon Press, 1970), 187.
27) Donald 4. Hagner, “Philo,” New Dictionary of Theology, 509-10. 풍유는 비유법의 하나로 본뜻은 뒤에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방법, 속담 혹은 격언이라고 한다. 한자로 풍자는 빗되어 말할 課과 깨우칠 論라는의미로서 빗대어서 말함으로 깨우치는 수사학적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直輸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법으로서 같다 혹은 처럼 이라는 표현을 쓴다. 總輸(metaphor 숨을 隱)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원뜻은 숨기고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를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나타내는 방법으로 써 예를 들면 A는 B이다에서 A는 훤 관념이고 B는 보조관념이다. 또한 은유는 일 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그 이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방법 이라고 한 수 있다. 』Allegory is a narrative in which the agents and action, and sometimes the setting as well, are contrived so as to make coherent sense on the literal or primary level of signification, and also to signify a second, correlated order of agents, concepts, and event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5th ed. M.N. Abrahams,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4). Parable is a short narrative.
28) Origen, First Principles, 4. 1. 11-17(For as man consists of body, and soul, and spirit. so in the same way does Scripture, which has been arranged to be given by God for the salvation of man).
29) The Fathers of Church, A New Translation, Vol.80(Washin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89, 12. Cited as FC.
30) Dan G. McCarten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48 (1986), 281-301. Citedas WTJ.
31) Paul K. Jewett, Concerning The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WTJ.
32) H.4. Wolfson, Philo (Cambridge, 1947), Ⅰ., 134.
33) 『성 경주석학』, 헤이즈. 할러데이 공저, 김근수역(도서 출판 나단, 1993), 27-28.
34) FC, Vol.71, 63.
35) Dan G. McCartney, Litter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Orison’s Contra Celsum, WTJ, Vol.48 (1986), 281-301. Against Census, 3.43., 1.17; 18;27; 7.60), 288-89.
36)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 (contemplate)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 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W.K.C. Guthrie,4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396).
37) Cited by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th Rev. ed(San Francisco: Harper and Row,1978), 76-78.
38) Frederic W. Farra, History of Interpretation, Reprinted 1961 by Baker Book House from the 1886 edition published by E. P. Dutton, 213, 각주 3번.
39) , Vol. 74, 17-18.
40) John Chrysostom,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4.24.
41) John Chlysostom, In Epist. ad Phil. Hom., 10.
42) Biblical Hermeneutics in Historical Perspective, Ed. Mark S. Burmw & Paul Rorem, 152-72
43) CH, Vol.6, ed. Richard C. Gamble, Garland Publishing, 1NC, New York, 1992),412.
44) Kemper Fullerton, Prophecy and Authority: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New York: Macmillan, 1919), 133.
45)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10.
46)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Vol.1(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7), 1.6.1. Cited as ICR. 『기독교강요 요약』, 이형기박사 옮김(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86), 30-31
47) ICR, Ⅰ.Ⅷ.2.
48)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Donald K. Mckim (Baker Book House, 1984), 22.
49) ICR. Ⅰ.Ⅵ. 2.
50) Richard 4. Muller, The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 Scripture as Revealing C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51) ICR, Ⅰ. Ⅶ. 2.
52) ICR, Ⅰ. Ⅶ. 4.
53) ICR, Ⅰ. Ⅶ. 5. αυτοπιοτον(self-authenticated)
54) Calvin’s Commentary, Vol.21 (Michigan:Baker book House, 1986), 248-49. For this reason he directs us to the faith of Christ as the design, and therefore as the sum, of the Scripture for on faith depends also what immediately follows. Cited as CC. 성경에서 예수께서 직접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증언하셨다 Everything must be fulfilled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Luke 24:44-47).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며 선지자는 선지서를 의미하며 시편은 성문서를 의미함으로서 구약 전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55) Essays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 Trans. James Luter
Mays(Atlanta: John Knox Press, 1979), 14-24..
56) 「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 (성광문화사, 1991),427-29.
57) Donald Mck凉은 살아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이 가장 잘 해석되는 말씀 (The living word, Jesus Christ, is the One through whom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best interpreted)라고 했다. 이 말은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라 성경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별 하는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다.
58) What the humanists‥‥ admired in the piety of the Fathers ‥‥ was its simplicity and clarity(which avoided) emphasizing difficulties, nodi, openly opposing authorties sicet non, probing questioners in disputuations, and finally reconciling them by a subtle dialectic…(Eugene F. Rice., the humanist idea of Christian anitquity: Lefevre d’Etables and His circle,” in Wemer L. Gundersheime, ed., French Humanism, 1400-1600(harper Torch boots; New York, Harpe r& Row, Publishers,1969),169.
59) The Context of Contemporary Theology, eds. Alexander J. McKelway and E. David Willis, John Knox Press, 1974, 43-63.
60) The Decades of Horny Bullinger, ed. Thoimas Harding(Cambridge university Press, 1544), 70.
61) CC, Vol. 19, xxiii. Richard C. Gamble은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칼빈이 로마서 주석 서 문에서 밝힌 대로 성경의 명료하고 단순한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성경의 스타 일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Exposition and Method in Calvin, WTJ, 49(1987) 153-165, WTJ 47(1985), 1-17).
62) P. Imbart de la Tour, Calvin et 1’Institution Chretienne(Paria, 1935), 63.
63)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Interprelation. Vol.31 (Jan., 77), 8-18
64) Instituion of 1541, Vol.Ⅱ, 29.
65) Imbark do Ta Tour, Calvin et 1’Institution Chretienne, p.61f: J.Chartrou -Charbonnel, La
Reforms et les Guerres de Relgion (Paris, 1948), 85.
66) CC, Vo.20, 141.
67) CC, Vol..22, 103.
68) Anthony C. Thiselton, Tl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Michigan:Wi1iam B. Eermans Publishing Company,1980), xix.
69)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xix.
70) Institution of 1451, Vol.Ⅱ, Paris, 1937, 13
71) CC, Vol 16, 102-03.
72) ICR, 1.6.1-2.
73) ICR. Ⅰ.Ⅶ.2.
74) ICR, Ⅲ.21.3.
75) 존 칼빈, 「기독교강요 요약 」, 이형기박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29.
76) CC, Vol. 1, 170.
77) CC. Vol. 이사야 45:1 주석
78) CC, Vol. 20,172-75.
79) CC, Vol. 20, 175.
80) James Barr는 알레고리칼 해석은 성경의 콘택스트를 무시하는 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 The
literal context, the cultural background and the historical setting,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4(1989), 14.
81) 비유(παραβολη)이다. 나는 선한 목자에서 나는 비유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목축 업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맡은 확대된 은유 (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 παροιμια)이 다. 진실 된 은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에 기초하고 있다. 비유는 첫째, 비유를 듣는 자를 도전하며 책임감을 갖게 한 다. 둘째, 비유는 자기 자신을 그 비유에 의해서 들여다보도록 한 거울과 같다. 셋째, 비유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넷째, 비유는 적대감이 있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비유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많은 메타포를 써서 거룩한 순례자가 천성을 향하여 순례 길을 감에 있 어서 해야 한 일과 하지 말 아야 한 것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한다. 꿈속의 이야기지만 깨닫 는 자에게는 금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된다. 따라 서 우리주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했다. 들을 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번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비유의 중요성은 말 로 설명하 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진리를 보여 준다는데 있다.
82)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aory Nixo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Michigan, 1950), 13.
83)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John Knox Press, 1979), 20.
84)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37-35.
85) ICR, Ⅱ.Ⅶ.1.
86) ‘칼빈 성경주석’, 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역편(성서교제간행사, 1990), 로마서. 빌립보서,
173.
87) ICR, 2.9.3. Bates는 칼빈의 모형론적 해석은 칼빈 신학에 중요하다고 했다( Ed. Richard Gamble, Camlvin and Hermeneutics, 146-61). 칼빈은 강요에서 강요의 목표는 성경을 올 바로 일고 공부하는데 도움은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1560불어 판에는 강요는 성경을 올바 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키라고 했다.(a key to open a way for all children of God into a go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Holy Scripture). 강요는 성경주석에서 다루는 토픽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다. 이점에서 강요는 성경주석을 이 해하는데 도움 이 된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 강요 와 주서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창세기 1:16을 주석 하면서 모세는 철학자로서 혹은 과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 라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썼다고 했다.(이글은 안명준 교수의 칼빈신학 CD에 있던 글로서 퍼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