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과 그 의미
성육신과 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기독론(基督論, 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기독론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인물이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 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 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本質) 즉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罪)의 형벌(刑罰)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그는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셔야 했다. 만일 그가 죄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代身)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孕胎)되어 탄생(誕生)하심과 관계된다.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눅 1:35)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轉嫁)되고 유전(遺傳)되어 내려오는 원죄(原罪)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體驗)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代贖) 제물로서 속죄(贖罪) 사역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人性)이 범죄(犯罪)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 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贖罪)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또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靈)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本質)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主, κύριος, אֲדֹנָי)라는 명칭으로 불리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아도나이, אֲדֹנָי)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우주와 인간의 참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영광의 주’(고전 2:8)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롬 10:9)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1)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同等)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했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요일 5:20) (사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성경이 그를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誤謬)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屬性)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영원(永遠)하심에 대해 증거 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 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계셨다.)”(요 1: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 한다.
또 그는 신적지식(神的知識)을 가지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마 9:4)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요 2:24,25)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마 17:27)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이요 적신(神的)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能力)을 가지신 자로 증거 되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屬性)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 하고 있다. 골로새서 2: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했다.
-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먼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 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략) 다 그로 말미암고”(골 1:16)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 가진 자로 증거 한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도 피조물(被造物)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權威)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중략)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奇蹟)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님은 또 사람들의 죄(罪)를 용서(容恕)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自由)하게 하신다고 말씀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5,7,10)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히 1:3)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또 그는 참된 안식(安息)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 15:26) “내가 그(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하나님의 영(靈)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또 그는 마지막 날 세상 모든 사람을 심판(審判)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딤후 4:1)
-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榮光)을 받으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이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하니”(계 5:12,13)
이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神的)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인적(人的)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이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 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롬 5:15)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전 15:21)
- 인적(人的)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 고통당하시고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 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히 2:14)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그는 참으로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또 그는 지식의 제한(制限)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막 11:1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막 13:32)
- 인적(人的)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는 증거 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마 14:2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3.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 인격(人格, person)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질(性質, 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 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單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複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2)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 인격’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0-543)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 같은 이들은 ‘내(內) 인격’(interpersonal)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신적(紳的)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特質)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紳的意志) 뿐만이 아니라 인적의지(人的意志)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調和)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680-681 AD)는 이것을 이렇게 진술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性)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3) 신성과 인성 연합의 결과 : 삼중적 전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單一) 인격(人格)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三重的) 전달이 있다.
- 속성(屬性)의 전달이다.
예수는 신적속성과 인적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나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인적속성)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신적속성)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신적속성)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인적속성),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신적속성)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사역(事役)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사역들과 인적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은 신인적(神人的) 성격을 가진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 은혜(恩惠)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4.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1)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와 그에게 메시아(Messiah)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分離)시킴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2) 도케티파
도케티파(Docetism, 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했다.(요일 4:2,3, 요이 7)
(3)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했다. 초대교부 오리겐(Origenes Admantius, 185?-254)은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 했다.
이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의 거센 반박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同一)한 본질(本質)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5년 니케야회의(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동일본질)는 신앙을 바른 견해로 선언했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 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라.”(ὁμοιούσιος, 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 유사본질)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와 ‘아이’(i)자 하나만 다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 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 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310-390)는 사람이 영(靈)과 혼(魂)과 몸(肉)의 세 실체(實體)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靈)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魂)과 몸(肉)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완전한 ‘참 사람’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5)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신적(神的)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有機的)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6)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Eutyches, 378-456)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混合) 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區別)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7)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의지(神的意志)와 인적의지(人的意志)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질(本質)과 신적의지와 인적의지 두 의지(意志)를 고백한 것이었다.
(8)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Theodotus of Byzantium, 2nd century)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사람이며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Felix, bishop of Urgel, Spain, ?-818)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9) 속성(屬性)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이나 루터파(Luthera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sm)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10) 인성 중심의 기독론
-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理想的) 윤리적(倫理的)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救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인류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고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汎神論) 사상에 불과하다.
-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의식을 가지셨고 하나님은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11)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 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과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점진적 성육신설
도르너(Isaak August Dorner, 1804-1884)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漸進的)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意識)과 한 의지(意志)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 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 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 칼케톤 신조(Definition of Chalcedon, 451)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제8장 2항 :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8)
제21문 :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信條的) 진술들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 그의 참된 신성(神性)
- 그의 참된 인성(人性)
- 그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神人的) 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김효성 목사 /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 (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 (M.Div. equiv.); 미국, 페이스(Faith) 신학대학원 졸업 (Th.M. in N.T.); 미국,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 (Ph.D. in Theology);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 총회신학연구원(합동보수-냉천동) 교수 역임; 예수교 장로회 신학연구원 교수 역임; 현재,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 담임목사; 현재,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PART Ⅱ
동정녀 탄생과 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의미
예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이란 예수의 동정녀에 의한 수태(受胎) 즉 남자와의 성적 접촉이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에 공통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는 이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대한 반대 또한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이 조항은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경이 지닌 표준의 지위를 부정하고 때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추정한 데서 귀결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반대 교리에 대한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고찰 해보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초대교회 전승과 반대
(1) 사도 신경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셨음을 고백하는 오늘날 사도 신경의 형태는 5,6세기경 고울(Gaul) 지방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도 신경은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에 근거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사도신경의 후기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기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신경 초기형태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전 로마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북 아프리카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과 고울과 소아시아 지방의 이레네우스(Irenaeus, 140-202)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중요 교회들의 초기 고백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도신경이 다른 새로운 교리와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반대
2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증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歷史性)과 사실성(事實性)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 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支持)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기에도 반대(反對)가 있었다.
이교도(異敎徒)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주로 유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예수 관련 전승(傳承)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켈수스(Celsus)와 케린투스(Cerinthus),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 그리고 초대교회 때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에비온파(Ebionites) 등이 있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 문제에 대해 2세기 이후 부정적 증거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전체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로 오면서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Hans Erich Freiherr von Campenhausen, 1903–1989)은 마태의 족보(族譜)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Vincent Taylor, 1887–1968)는 ‘Proto-Luke’ 가정(假定)에 근거해서 누가복음 1,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揷入)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 1919–1983)은 동정녀 탄생 교리가 예수를 우리와 달리 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는 역사적(歷史的)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신앙적 기적과 초자연을 모두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은 스트라우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다. 케어드(George Bradford Caird, 1917–1984)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그리스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誤解)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도 동정녀 탄생은 유대적 맥락이 아닌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Hans Conzelmann, 1915–1989)은 이를 다신론(多神論)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異敎)에서의 신현(神顯)과 성육신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3. 동정녀 탄생의 교리의 중요성
많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한 일반생육법(一般生育法)에 의해 출생(出生)하셨다면 그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罪人)일 뿐이며 그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921)는 초자연적(超自然的) 그리스도와 구원이 초자연적 출생의 필연적 결과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과 ‘죄(罪) 없는 인간의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수태 교리는 정통 기독론의 중요한 골격 중 하나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과 혼동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영원하신 성자(聖子)가 인간(人間)이 되셨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 아버지를 두시지 않았음을 말한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는 성육신을 ‘선재(先在)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人間性, (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超歷史的)인 분이 역사(歷史)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보았다. 동정녀 탄생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예수는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태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10개월 동안 자라 태어나신 것이다.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省察)에 앞서 이미 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을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브루너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만약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아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브루너와 달리 동정녀 탄생 교리를 성육신 교리와 연관시킨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 속에서 성육신의 표징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사야 7:14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는 동정녀 탄생에서 상징화(象徵化)되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事實)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 반대에 대한 비판
(1) 동정녀 탄생이 신약에 두 단락에서만 진술된다는 문제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의 두 단락에서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다.(마 1:18-25, 눅 1:26-38)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다른 단락에서도 가끔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막 6:3, 요 1:13, 갈 4:4) 신약성경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때로 이 교리의 부족한 역사성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두 유아기 기사에 공통되는 부분이 동정녀 탄생 기사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기사가 초기의 공동 전승을 기초로 삼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마태복음 1:23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 7:14을 인용하고 있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예언의 배경은 유대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앗수르의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를 꾸짖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표적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어 ‘알마’(המלע)의 번역인데 일반적으로 ‘알마’는 처녀를 가리키기보다 ‘젊은 여성’ 혹은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약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LⅩⅩ)에서 명확하게 ‘처녀’라는 말인 ‘팔데노스’(παρθὲνος, 남자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정절을 지킨 처녀를 의미)로 번역했다. 그 말은 구약의 ‘알마’라는 말이 ‘처녀’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確證) 하는 것이다.
‘처녀’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베투라’(הꗚוּתꔶ)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요 예수님이 꼭 동정녀 탄생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마’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 처녀는 기능(機能)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를 ‘알마’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마리아는 젊은 여성으로 ‘처녀’였다. 그것은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자신이 처녀인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또 잔(Theodor von Zahn, 1838–1933)은 제롬(Jerome, 347-420) 시대 이래로 구약에서 ‘알마’(המלע)가 나오는 모든 구절은 항상 ‘처녀’(virgin)로 쓰여 왔다고 했다. 더구나 70인 역이나 마태는 젊은 여인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처녀는 미가 5:3에 언급된 특수한 처녀를 가리켰다.
‘가나혼인잔치 기적’(요 2:1-11)이 성경에 단 한번 소개되었다고 이 표적(標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가 기적(奇蹟)이었음과 인간 아버지를 두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다.
(2) 동정녀 탄생이 완전한 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
예수의 부모 중 한 사람만 인간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몇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성(人性)의 본질과 그것이 한 세대에 다른 세대에 대해 혼동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완전(完全)한 인간이었고 특히 아담의 경우는 어떤 의미든 간에 그에게 인성을 전해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남성 인자(因子)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견은 무시될 수도 있다.
이런 의견은 지나치게 자의적(恣意的) 해석이며 실제 그런 일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예수는 마리아의 유전인자(遺傳因子)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에 의한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여성(女性)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남성인자(男性因子)로 구성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정자(精子)가 마리아의 난자(卵子)와 결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실존하는 남성에 의해 제공된 정자가 아니라 이 경우를 위해 성령의 능력에 의해 특별히 생성(生成)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중요한 견해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선택(選擇)하면 다른 하나는 부인(否認)할 수밖에 없다. 선재(先在)와 현재(現在) 이 둘은 시간적으로 상호 배타적(排他的)이며 결코 보완적(補完的)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부정적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은 그의 신성(神性)과 관련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성(人性)과 관계된다. 삼위 중 제2위 하나님으로서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데 한 유한(有限)한 시간(時間) 속에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시작부터 순수한 성육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선재론’과 ‘동정녀 탄생’이 모순(矛盾)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 동정녀 탄생이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인간의 생물학적(生物學的) 지식과 인간 출생에 관한 지식에 상반(相反) 된다는 근거 하에 거부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이 받아들어지지 않는 인간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평주의(批評主義)는 기독교 신앙이 자연(自然)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규칙성(規則性)을 부인하여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적(異蹟)을 정의하는 데 있어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교부시대로 웅변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적은 언제라도 검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자연을 산발적(散發的)으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일이다. 자연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통일성(統一性)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과학(科學) 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 혹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구조(構造)에서 바라볼 때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인간 구속(救贖)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자연적(超自然的) 구도(構圖) 가운데 일부이다. 자신의 과학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신적계시’라고 하는 고차원적 근거 위에서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믿는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이 세대의 위대하고 장대한 ‘구원역사’(救援歷史)’ 드라마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면 그 교리는 지나간 민족 설화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동정녀 탄생’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고백하고 있다. 처녀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부터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다는 사실은 역사신학(歷史神學)에서 하나의 무언(無言)의 전제(前提)임이 분명하다. 우리들 의견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조들이 그의 인격과 그 진정성을 또한 확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현대의 심리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교리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증식된 개구리가 그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개구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인간됨의 뜻과 인간의 유전학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갖기까지는 위의 반대의견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5) 동정녀 탄생은 지엽적 문제라는 견해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신앙 가운데 지엽적(枝葉的)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한 증거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결코 신약성경 본문들 가운데 기록된 ‘복음’ 혹은 ‘케리그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신학적 내용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평가절하 하거나 제거(除去)하려는 것이 비평적 혹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다른 기준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동정녀 탄생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할 때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동정녀 탄생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다른 기준이란 ‘동정녀 탄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기준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침묵으로부터의 주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논법은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외의 부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면에서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최후만찬’을 흥미 있게 비교했다. 주님의 만찬보다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자료가 더 많다. 만일 어떤 사실의 중요성 여부(與否)를 그에 관해 기록한 본문의 구절 수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그처럼 평가절하 한다면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평가절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1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가 절수를 세는 방법으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신학적 중요성을 계산해낸 사람은 없다. 어떤 주어진 개념이 그에 관한 성경의 증언 가운데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풍부하더라고 그것을 신학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구약성경 가운데 존재한다. 어떤 개념의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의해서 이며 따라서 역사적 기독론의 방법론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 교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6) 타종교 전설과의 유사성 견해
성경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 기사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제안이 있다. 즉 다른 종교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유사(類似)한 기록들을 적용시켰다고 보는 견해이다.
플루타르크(Lucius Mestrius Plutarchus, 45-157)는 한 여인이 신적 영(靈, (Pneuma)에 접했을 때 임신(妊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의 ‘누마’(Numa) 전설에 관해 말하면서 누마는 자신에 아내가 죽은 후 신적(紳的) 존재인 에게리아(Egeria)와 관계를 맺기 위해 고독(孤獨)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제우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그리고 알렉산더를 낳았으며 아폴로가 어떻게 이온과 아스클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낳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동정녀 탄생’을 신화(神話)나 전설(傳說)로 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가 아닌 단지 신(紳)과 인간 사이의 간음(姦淫)에 불과하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은 전적으로 이와는 다르다. 무디(Dale Moody, 1915-1992)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성적 문란 신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고상한 일신론(一神論)의 간격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조심스럽게 연구해도 그 틈새를 메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둘 사이에 유사성은 적고 차이점은 크다.
그러므로 이방(異邦) 신화들이 복음서에 섞여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와는 다르게 성경기사를 이방종교 대신 유대교와 관련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유대적인 색채가 매우 강함으로 직접적인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유대교가 이방 종교로부터 나온 생각을 어느 정도 따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적인 특성을 띠고 기독교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는 유대교가 실질적으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정녀 탄생은 사실 이교도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수용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흘러들어 갔다가 점차 기독교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믿음이 들어가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가정한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6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묻고 이에 대해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영원하신 성자(聖子)는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無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볼 때에 유한한 인간은 늘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심과 시비를 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동정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은 여전히 신적 권위 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http://irt.kr(국제개혁신학목회연구원)
예언성구 | 예언주제 | 성취성구 |
창 3:15 | 1. 여자의 후손 | 갈 4:4 |
창 12:2,3 | 2. 아브라함의 씨 | 마 1:1 |
창 49:10 | 3. 유다의 홀 | 눅 3:33 |
사 9:7 | 4. 다윗의 자손 | 눅 1:32,33 |
단 9:25 | 5. 예수 탄생시기 | 눅 2:1,2 |
미 5:2 | 6. 베들레헴에서 탄생 | 눅 2:4-7 |
호 11:1 | 7. 이집트로 피신 | 마 2:14,15 |
사 9:1,2 | 8. 예수의 갈릴리사역 | 마 4:13-17 |
사 61:1,2 | 9. 상처 받은 자 치유 | 눅 4:18,19 |
사 53:3 | 10. 유대인에게 버림받음 | 요 1:11 |
시 110:4 | 11. 멜기세댁반차 제사장 | 히 5:5,6 |
슥 11:12,13 | 12. 은 30에 팔림 | 마 26:15, 27:5-7 |
사 53:12 | 13. 참혹한 희생 | 막 15:27,28 |
시 69:21 | 14. 초에 저린 쓸개를 줌 | 마 27:34 |
시 22:18 | 15. 그의 옷을 나눔 | 마 27:35 |
시 34:20 | 16. 뼈가 부러지지 않음 | 요 19:32,33,36 |
슥 12:10 | 17. 옆구리를 찔림 | 요 19:34 |
사 53:9 | 18. 부자의 묘에 장사 | 마 27:57-60 |
시 49:15 | 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 막 16:6,7 |
시 68:18 | 20. 하늘에 오르심 | 막 16:19 |
< 그리스도 안에 성취 된 메시아 예언 >
출처 / 이인석, 채천식 공저, ‘Charts of Systematic Theology’(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