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교리 바로 이해하기(3) 성육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

* 이 글의 내용 중 상당부분 본지와의 신학적 입장이 다름을 미리 알립니다. 편집자
PART Ⅲ
문제제기 23
- 하나님의 영의 영원한 말씀(요 1:1)이 어떻게 인간의 육신을 지닌 일시적인 아이가 될 수 있었는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갈릴리의 한 작은 나사렛 동네의 목수였던 이 분의 생애와 가르침은 오늘 날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런데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분에 관한 사람들의 견해는 일치되어 있지 않다.
- 대부분의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바대로 이 분을 고매한 선지자나 교사나 도덕가 중의 한 분으로 봐야 할 것인가?
- 아니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주장해 오듯이 역사 안에서 증언된 그 예수가 바로 인간의 생명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 그 자신인 것인가? 만약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이시라면 이 하나님의 아들이 그 자신을 비워서 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인데 어떤 의미로 그렇다는 것인가? 24
기독교 신앙은 그 이름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중심을 두고 있다. 영국교회의 신학자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는 그의 저술 가운데 한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다’(Christianity Is Christ)라고 붙였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도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로 요약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기독론의 핵심은 로고스(logos)가 마리아를 통해 출생함으로써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고백의 초점은 성탄(聖誕)의 사건 즉 초월적인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의 백성을 찾아와서 구속하신 사건이다.
이 같이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면 그가 기독교 신앙의 여러 교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컨대 로고스는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 안에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가운데 성부론(聖父論)에서 보았다. 또한 인류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정죄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없이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론(人間論) 가운데 인죄론(人罪論)의 결론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무엇인가?’하는 문제 즉 ‘그리스도는 과연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인가?’하는 문제와 그의 죽음의 의미에 관한 문제와 그의 부활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연구에는 많은 질문들과 문제들이 얽혀있다. 예컨대 기독론의 방법론을 생각해 볼 때 기독론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고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 다음에 그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달리 표현한다면 “기독론은 ‘위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아래로부터’ 시작해야 하나? 어떤 것이 더 합당한 것인가?” 전통적인 신학은 일반적으로 전자의 접근방법(형이상학적 방식)을 취했고, 현대의 비판적 신학은 후자의 접근방법(윤리적 방식)을 택했다. 25
또한 대부분의 정통적 신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 같이 “그리스도의 인격(Christ`s person)을 먼저 알아야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his work)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행한 일을 먼저 알아야 그의 인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벌카우어(G.C. Berkouwer) 같은 일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분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그는 무슨 목적을 위하여 살고 죽은 것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여겨졌던 것인가?”(고전 1:23)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수는 처녀 마리아에게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기독교의 주장이다.
본 장에서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인 존재의 성육신을 위하여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출생을 위하여 처녀로부터의 탄생은 필수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는 그의 처녀에게 잉태됨과 상관없이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기적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마리아 그 자신은 죄가 없는 인간이었는가? 만약 마리아가 죄 있는 인간이었다면 예수는 죄 없는 인간이었는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리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룰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선재(preexistence)의 의미와 그의 성육신에서 겸양(humiliation)의 의미와 마리아의 출생도 탐구할 것이다.
1. 케노시스주의 신학자들의 해석
먼저 독일에서 그리고 그 후에 영국에서 일부 신학자들이 성육신에 관하여 소위 케노시스 이론들(kenosis theories)을 발전시켰다. 케노시스(kenosis)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빌립보서 2:7에 나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Kenosis)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케노시스’(Kenosis, 비움, 소모)는 영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형상으로) 계신 분이 그 자신을 비워(Kenosis)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6
케노시스주의 신학자(Kenotic Theologians)들은 영원한 삼위일체 가운데 제 2위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과 또한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점증하고 있던 관심 이 두 가지를 모두 정당하게 다루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케노시스 이론들은 정통적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케노시스주의(kenoticism)는 성육신을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형된 것으로 또는 신성이 인성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케노시스 기독론들 가운데 주요 이론 두 가지만을 소개한다.
(1) 첫 번째 이론
이 이론은 독일의 토마시우스(Thomasius)와 델리취(Delitsch) 그리고 영국의 고어(Gore)와 페오번(Fairbairn)이 지지한 이론이다. 이는 두 번째 이론에 비하여 덜 극단적이다. 토마시우스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전능, 무소부재, 전지 등)과 그의 공유적 속성(거룩, 진리, 사랑 등)을 구분한다.
토마시우스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이신 성자(聖子)는 자기를 제한하는 행위를 할 때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입으면서 절대적 속성들을 벗어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는 피조물적인 존재형식을 입기 위해 신적 존재형식을 포기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인간적 의식을 갖고 살았고 정상적인 인간 발달의 전 과정을 모두 거쳤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는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재로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하늘로 승귀(昇貴, The State of Exaltation) 했을 때 그가 일시적으로 내려놨었던 그 절대적 속성들을 다시 입었던 것이다.
델리취도 이와 유사하게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로고스는 그의 신적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으로서의 절재적 속성을 포기했다. “성육신한 로고스는 영원한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요한복음 17:5에 보면 그는 그 영원한 영광을 그리움을 가지고 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전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 때의 날과 시를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막 13:32) 그는 전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한 후에야 만물을 통치하는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마 28:18) 그는 무소부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 가운데 충만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엡 4:10)
(2) 두 번째 이론 27
두 번째 이론은 케노시스이론을 논리적 극단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게스(Gess), 고뎃(Godet), 클라크(Clarke), 맥켄토시(Mackintosh) 등이 이 이론을 제시했다. 이들은 빌립보서 2:7을 이렇게 해석했다. “로고스는 성육신할 때 모든 신적 속성들을 포기했다. 그의 신성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게스(Gess)에 의하면 성자(聖子)가 인간으로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완전한 신적 속성들을 내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처음에는 그의 로고스 본질에 대한 의식도 없었고 그 자신 안에 성부와 성령의 상호 내주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우주에 대한 통치도 중단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성육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크게 변형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중에 하늘의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성육신 이전에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신적 존재방식을 다시 얻었다는 것이 된다.
고뎃(Godet)도 이와 비슷하게 ‘신성의 포기를 통한 성육신’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에서 ‘되었다’라는 동사는 그 주어의 존재방식에 심오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술어인 ‘육신’이라는 것은 완벽한 인간적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는 것은 “두 가지 본질들 내지 두 가지 상호 반대되는 존재방식이 하나의 동일한 주체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그 주체가 하나의 존재방식으로부터 다른 존재방식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고스의 인격적 주체 또는 자기 정체성은 변함없이 그대로였지만 그 본질적 존재방식에 있어서는 그 자신에게서 신적인 속성들을 다 포기하고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성자는 하늘로의 승귀(昇貴) 후에 야 원래의 신적인 신분을 다시 얻었다. 케노시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신성을 인정하며 대부분 그의 처녀 탄생을 인정한다.
2. 점진적 성육신 주장 신학자들의 해석
도너(I.A. Dorner)는 일단의 유럽 신학자들과 더불어 점진적 성육신(Progressive or Gradual Incarnationists)을 주장하는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예수에 관한 비판적 견해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성육신은 그 시작에서부터 완결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8
이들은 예수가 잉태되는 순간에 또는 출생하는 순간에 로고스가 인간의 본질 및 인간의 존재방식을 취하였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도너(Dorner)는 성육신을 발전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성육신은 로고스와 예수의 인성이 도덕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발전과 관계가 있는 점진적 도덕적 과정을 통해서 로고스는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 예수에게 점점 더 충만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그의 생애 시작에서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복종하는 삶과 기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그 자신을 양보해 드렸을 때 로고스는 점진적으로 그의 인성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복종의 결과로서 각각 분리되어 있었던 신적 주체와 인간적 주체가 점진적으로 완전한 신인적(神人的) 존재로 결합되어 들어갔던 것이다.
도너(Dorner)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성육신은 한 순간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육신은 지속적으로 심지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고스로서의 하나님은 ‘예수’의 인간적 발전의 새로운 측면들을 항상 파지하고 수용하며 그 반대편에서 ‘예수’의 인성은 로고스를 점진적으로 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로고스의 매 새로운 측면과 의식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통적 신학은 성육신을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으로 온 겸양의 사건으로 보는데 반해 점진적 성육신 이론은 성육신을 인간 예수의 점진적 신화(神化, deification)의 과정으로 본다. 또한 성육신에 대한 정통적 해석은 탄생과 함께 성육신의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도너(Dorner)는 성육신을 예수의 생애의 끝에 위치시킨다. 29
정통적 신학자들은 이 같은 점진적 성육신론 자들이 신성과 인성 사이에 비본질적인 연합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재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도너는 예수의 처녀 탄생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를 심각하게 손상시킨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해석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관은 적어도 세 가지 전제에 의해 형성되었다.
(1) 초자연적인 것 및 기적에 대한 반감
이 신학자들은 천상적 존재의 성육신을 현대의 과학적 정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화’(神話)로 보았다.
(2) 존재론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대체
칸트가 그의 책 ‘순수이성 비판’에서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비판한 이후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토론 자체가 마비되었다. 칸트에 의하면 성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오랜 전통의 개념은 기껏해야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영원한 이상(理想)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초월보다 하나님의 내재를 더 강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범신론적 혹은 모든 것 속에 신이 내재 한다는 관점(panentheistic)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계시한 인간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현존에 초점을 맞추었다.
- 리츨(Ritschl)
리출은 칸트를 따라 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제거했다. 특히 그의 기독론은 예수의 존재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판단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리츨은 로고스와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에 관한 이론적 질문은 포기하고 그 대신 실천적인 가치판단 즉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행한 기능에 관한 가치판단에만 집중했다. 30
이런 관점에서 리츨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기원 즉 그의 인격이 우리가 윤리적 및 종교적 차원에서 알게 된 그런 형태를 어떻게 해서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모든 탐구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츨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선재 개념은 신학적으로 탐구하기에 합당치 않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화한 것을 손상시키는 일종의 반(半) 이신론적 개념(semideistical concept)이다.
리츨의 재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선재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선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성육신이라는 것은 예수가 윤리적, 종교적 이상을 품은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성육신은 예수에게서만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주목할 만한 다른 종교적 인물들에게서도 반복되었던 것인지에 대하여 리츨은 명백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 하르낙(Adolf Harnack)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 교리는 그리스 종교철학이 기독교 안으로 침입해 들어 온 현상이다. 그리스의 로고스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헬레니즘화의 기점이다. 즉 초대 기독교의 신학자들 특히 변증론 자들이 소위 하늘에 선재해 있었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한 인간과 결합되어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했다는 로고스 이것을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로고스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한 것이 그리스 철학과 사도 전승을 혼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러한 헬레니즘화의 과정이 비극적으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일종의 종교철학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조들이 말하는 ‘헬레니즘화 된’ 그리스도의 배후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들은 상호 간에 형제라는 것과 인간의 영혼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 윤리적 교사인 예수에게로 돌아 가야한다고 하르낙은 주장했다. 31
- 반 두젠(Henry P. Van Dusen)
그는 모든 인간의 경험 안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내재해 계신다고 한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출한 성육신이 발생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의 영혼 안에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내주했었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육신이라는 것은 예수가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진짜 인간의 삶 안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로 자유롭게 하나님의 비전과 정결함과 목적을 함께 나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성육신이라도 예수 안에 하나님이 총체적으로 내주했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내주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하나님의 존재 전체가 임해 있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그를 통하여 완전하게 나타났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 존 힉크(John Hick)
존 힉크(John Hick)가 편집한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신화’(The Myth of God Incarnate)라는 책은 성육신에 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도를 잘 요약해 보여준다. 힉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 교리는 고대세계의 신화(神話)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에 관한 얘기로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문자적으로 사실은 아닌 그런 얘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소위 선재와 성육신의 신화는 어떻게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초대 기독교인들은 선재적 존재들과 그런 신적 존재들의 지구 방문을 흔한 일로 여기던 세계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라는 인물의 중대성을 표현하고자 할 때 초자연적 개념들 즉 신화적 개념들을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과학적 분위기는 기독교의 전승된 입장 전체에게는 낯선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성육신은 포기해야만 하고 종교적 주장으로서의 성육신만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힉크는 또 말하기를 전통적 성육신의 언어와 표상들은 본래 세상에 대하여 자기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신적 존재의 지구 방문을 더 이상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성육신이 의미하는 것은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라는 것이다. 힉크는 성육신을 양자론적 개념으로써 이렇게 해석 한다. 32
“예수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를 성육신한 하나님으로 즉 인간적 모습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가운데 제 2위로 보는 후대의 개념은 우리에 대한 그의 중대한 의미를 표현하는 신화적 내지 시적인 방식일 뿐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리스의 처녀 탄생을 거부한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주장한다.
- 처녀 탄생 교리는 과학 이전 기독교 바깥의 신화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 프란시스 영(Frances Young)에 의하면 처녀 탄생은 “예수의 기원을 말하는 문자적 진술로서는 … 사실상 유전자학과 생식에 관한 현 대의 지식의 빛에서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처녀 탄생 교리는 신성과 인성의 양자론적 예수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알드윙클(Russell Aldwinkle)은 처녀 탄생을 ‘인간 예수 안에서 이제 시작된 새로운 창조적 구원 활동’을 주시하라는 표식으로 재해석했다.
- 처녀 탄생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의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에 대하여 해로운 설일 뿐이다.
- 처녀 탄생은 구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또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처녀 탄생의 전통적인 언어를 유지하기는 해도 그 의미를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의 기원이다’라는 뜻이나 ‘예수의 현실은 하나 님의 선취적 행동에서 기인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재해석한다.
4. 실존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해석
실존주의 신학자들과 신정통주의 신학자들(Existentialist and Neo-orthodox Authorities)은 예수를 하나님이 양자(養子)로 삼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enfleshment)된 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神秘)로 여긴다. 그래서 이 신학운동에 속하는 신학자들은 신비한 성육신의 역사적 의미는 가능한 최소화하고 반대로 실존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래서 성육신의 초점은 신적 주체와 인간적 존재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33
- 킬케고르(Søren Kierkegaard)
그에 의하면 성육신과 처녀 탄생은 전적 타자(the Wholly Other)인 하나님이 시간 안으로 들어 온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신적인 존재 영원한 존재가 일정한 시점에 한 인간으로서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진술은 역사적 진술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때문에 성육신은 개념적 사고에게는 거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절대적 역설’로 여겨진다.
영원이 일시적인 것이 되고,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이 되고, 존재 그 자체가 역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실로 지성적으로는 추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킬케고르는 말한다. “말도 안 되는 것, 그것은 이런 것이다: 영원한 진리가 시간 안으로 들어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느 인간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킬케고르에 의하면 이성적으로 볼 때의 이러한 불확실성은 오히려 큰 유익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큰 역설에 직면해서야 진정으로 그리고 정열적으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브룬너(Brunner)
킬케고르의 하늘과 땅 사이의 변증법의 지도를 받고 브룬너(Brunner)는 그리스도 사건과 역사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 고리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역사의 의미는 모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믿음이 역사적 관찰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묘사로부터 발생한다는 관점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브룬너는 ‘육신을 따라서 보는 그리스도’와 ‘육신 안에 있었던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전자는 역사가들에 의하여 알려지는 그리스도인데 이는 상대적 영역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지식이다. 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가운데서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데 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본래적인 영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원역사(Urgeschichte, primal history)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나’로서의 주체가 인간의 ‘당신’으로서의 주체를 만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인간의 주체에게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하시며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그런 만남을 의미한다. 34
이렇게 실존주의적으로 정의된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신을 손수 계시하신다는 의미의 ‘계시’와 동의어이다. 계시는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손수 강림하시는 것이요, 말씀의 성육신이다.” 브룬너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성육신의 진정한 초점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existential) 또는 초역사적인 것(suprahistorical)이라고 그는 본다. 그가 보기에 성육신은 하나님의 주체와 인간의 주체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에 있는 것이다.
성육신의 그러한 뜻에 비추어 볼 때 브룬너가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 과거 역사에서의 사실이라는 주장은 ‘아무 유익이 없는 사변(思辨)’일 뿐이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라는 웅장한 기적은 한 성(性) 만을 통한 탄생이라는 생물학적 이론에 의하여 더 커지는 것도 더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브룬너는 처녀 탄생 교리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지켜낼 수 없는 교리라고 본다.
- 처녀 탄생 교리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kerygma)에는 없다.
- 이 교리의 근거가 되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없다.
- 예수의 부모가 이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증언도 남기지 않았다.
- 처녀 탄생 교리가 있어도 기독론에 있어서의 이단을 확실하게 막아 낼 수 없다. 즉 양자론자들 아리우스주의자들 소치니우스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인정한다.
- 처녀 탄생 교리는 가현설 이단 및 그리스 금욕주의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35
- 이 교리는 이사야 7:14의 70인역의 오역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 바르트(Barth)
바르트(Barth)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킬케고르의 주장을 갖고 그의 신학을 시작한다. 모든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christomonism). 즉 모든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 내재해 있으면서 세상의 모든 또는 여하한 현상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내재주의(immanentalism)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기독론의 방법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기적 즉 하나님이 위로부터 아래로 강림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바르트는 성육신을 하나님과 인간 ‘두 신분’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 두 신분의 상호관계는 전후의 순서적 관계라기보다는 변증법적인 관계다. 그는 이 두 신분에 두 본질 ‘거룩한 신성과 죄 된 인성’을 관련시킨다. 그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humiliation)와 승귀(昇貴, exaltation)를 설명할 수 있는 본을 보았다.
그 비유에서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겸손히 낮추어 죄 된 인류와 연대를 맺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높이 들어올리기 위하여 그만큼 깊이 아래로 인간에게로 내려온 분이 바로 그리스도다. 인간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먼 나라로 가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다.”
바르트의 변증법적인 설명에 의하면 성육신은 베일로 가리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계시하는 그 방법으로써 그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능력과 영광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자신의 진짜 신분을 감추고 어리석음과 연약함 속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결단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취한 육신은 중성적인 인간 본질이 아니라 아담의 본질 즉 불순종과 죄와 하나님에 대한 원수의 신분 안에 있는 인성을 취한 것이다.(바르트는 그의 저서 ‘교회 교의학’에서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주장함으로 성육신하신 인간 예수도 죄인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죄 없으신 참 사람이라는 성육신의 의미를 심히 왜곡한 것이다. – 편집자 주)
물론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죄 된 본질을 가진 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우리와의 연대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그가 행한 일이거니와 그렇다면 이는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육신’(롬 8:3)을 취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36
그리스도의 겸양의 다른 측면은 그의 승귀(昇貴)이다. 승귀는 이 비유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상응한다. 이 움직임에서 하나님은 인류(humanity, 또는 인성)를 하나님 그 자신에게로 들어 올린 것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는 진술은 그리스도가 한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하늘로 귀환했을 때 그는 인류를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가입시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들어 올려 진 것은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성(humanum)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교리는 존재론적(ontic) 의미보다는 인식적(noetic)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그러므로 실제로는 처녀 탄생 교리를 부인한 것이다. – 편집자 주) 하나님은 성육신을 다른 방식으로 초래시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녀 탄생을 통해서 초래시켰는데 이것은 그렇다면 영원과 시간 사이의 넘을 수없는 심연에 다리를 놓은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징조’(sign)이다.
사도신경에서 예수의 잉태에 관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존재가 하나님의 특별한 결정과 선도적(先導的)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5. 과정신학자들의 해석
과정신학자(Process Theologians) 화이트헤드(Whitehead) 추종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위가 문자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입었다는 것을 과학 이전의 주장이라 하여 거부한다. “신적인 존재가 땅으로 내려와서 인간 존재처럼 돌아다닌다는 그리스의 개념은 현대인의 정신으로는 믿을 수없는 것이요 불가능한 것으로서” 거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정철학의 세계관으로 볼 때 자연 질서의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우주적 세계 과정(cosmic world process)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육신에 대한 이러한 신고전적 관점은 로고스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로고스는 하나의 영원한 신적 인격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목적을 위한 비인격적 및 무시간적 원리이다. 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도구요 느끼도록 유혹하는 그런 것이다. 이 로고스는 세계 중심(the world nexus) 안에 내재해 있으면서, 모든 개체들로 하여금 가급적 최상으로 창조적 변형을 해가도록 유혹한다. 대략적으로 말하여 성육신이라는 것은 이 로고스가 인간 예수 안에 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37
- 존 캅(John B. Cobb, Jr.)
존 캅은 성육신의 실재론적 해석 모델은 과거의 다양한 경험들 내지 사건들을 가진 다양한 사회들이 상호 융합되어 창조적인 종합을 이루는 일종의 경험적 관계로 이해하는 해석 모델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육신은 로고스 즉 창조적 변형의 힘이 역사적 예수 안에 내주하는(indwelling) 현상을 의미한다. 물론 로고스는 모든 사람들 안에 그리고 모든 종교적 전통들 안에 성육신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로고스의 내주는 완전했기 때문에, 이 로고스가 그의 존재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 안에는 다른 경우와는 구별되는 특이한 성육신이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의 정체성 자체가 로고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성육신한 로고스를 즉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창조적 변형의 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피텐저(Pittenger)
피텐저(Pittenger) 교수에 의하면 오직 자연 바깥으로부터 자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세계와 연관되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은 일종의 이신론적(理神論的, deistic) 신관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성육신은 자연의 정상적인 운동방식을 무시하고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런 성육신관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 대신에 피텐저는 진화론적 관점에 일치하여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 안에서 지속적으로 그 자신을 성육신하며 그렇게 하면서 우주의 과정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는 것이다. 38
그런데 이러한 세계 과정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이 인간 예수 안에서 탁월하게 활동했다고 본다. 예수는 로고스가 그의 안에 내재하여 활동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행동하는 바의 그런 특별한 인간적 주체가 된 것이다. “예수의 존재의 매 시점 안에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작용하고 있다. 즉 그의 가르치는 행동, 설교하는 행동, 치유하는 행동, 위로하는 행동, 죽는 행동, 부활하는 행동 안에서는 하나님의 행동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 그는 실로 하나님의 자기 표현적 행동(the Self-Expressive Activity of God)을 나타내는 인격화된 도구이다.”
- 로빈손(J.A.T. Robinson)
로빈손의 주장은 인간 예수는 ‘순수 진화과정의 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하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들어 올려진 존재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개념은 ‘청천의 벽력’ 또는 ‘그리스도라는 혜성’을 타고 한 천상의 방문자가 땅에 착륙하여 한 동안 머물다가 그의 임무를 마친 다음에 다시 떠났다는 그런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인’이라는 신화적 개념은 ‘인간 안의 하나님’이라는 기능적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 바깥의 다른 곳으로부터 온 신적(神的) 내지 반(半) 신적(神的)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동료 인간들 가운데서부터 들어 올려져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의 도구가 된 존재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모범적 도구로 쓰이기 위하여 역사적 과정으로부터 등장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라거나 최종이 아니고) 특이하게 구별되는 존재이다. 39
과정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도 신화적이요 따라서 현대인의 정신에게는 무의미하다 하여 부인한다. 나사렛의 그 목수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잉태된 그들의 아들이었다. 피텐저는 처녀 탄생 전승에 대하여 이렇게 말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첫 두 장에서 언급된 이야기는 그 내용에 있어서 변증적 내지 기독론적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이야기로 받아들 수 없다. 생물학적 처녀 탄생을 강조해 온 것은 실수였다.”
6.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해석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Modern Roman Catholic Authorities) 가운데 소위 진보적 신학자들은 하나 같이 기독론에 ‘아래로부터’ 즉 예수의 진정한 인성으로부터 시작하면서 성육신론에 접근한다. 그러면서 정통적인 기독론의 언어를 기독교인의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선재, 처녀 탄생, 성육신과 같은 고전적인 교리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서 ‘시적 이미지’(Hellwig의 용어)이거나 또는 ‘신화적 표현방식들’(Carmody의 용어)이라고 본다. 그러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관심을 성금요일과 부활절로 초점을 옮긴다. 즉 그리스도가 처음에 누구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는 나중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의 비판적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예수를 존재론적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방법은 이제 기능적이며 인격주의적인 관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결국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다. – 편집자 주) 예컨대 근래의 한 연구는 성육신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하나님이 한 인간의 능력과 성향을 선택하셨고 그것을 채우시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무이하게 ‘성육신’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 쇼넨베르크(Piet Schoonenberg)
쇼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은 처음에는 나눠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며 선재적인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시간 안에서 어떤 특정한 순간 하나님의 두 번째 인격(제 2위)이 예수라는 인간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이것은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 성령 안에 존재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변한다. 실로 그는 구원을 위해 자신을 알려주심을 통하여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 즉 단 하나의 나눠지지 않은 인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의 양성론의 교리는 인정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성육신은 인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전체적인 임재요 활동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론의 초점은 육신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초점은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을 예수의 인간적 인격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는 이런 유형의 성육신론을 덜 신화적이며 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판단하면서 ‘하나님 임재의 기독론’ 또는 ‘기독론적 인본주의’이라 불렀다.
= 한스 큉(Hans Küng) 40
한스 큉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전개했다. 즉 그는 인간 예수의 생애와 행위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에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탐구한다. 그에 의하면 성자의 선재, 성령에 의한 잉태, 인간의 육신을 취했다는 것은 모두 헬레니즘의 신화일 뿐이다. 이런 신화적 이미지들을 사용한 이유는 믿음의 차원에서의 예수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역사적 나사렛 예수가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에 의하여 가려지고 빛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신화적 언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해 불가능한 것이므로 교회의 복음 선포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시대의 신화적 개념들 즉 시간 이전에 이 세상 너머에 천상적 상태로 존재했던 한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개념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신화적 ‘내려오는’(descending) 기독론은 예수를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의 신분으로 올라간 인간으로 보는 ‘올라가는’(ascending) 기독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고대세계에는 영웅들과 신들의 기적적인 탄생을 묘사하는 신화들이 흔했다는 사실에 큉은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기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처녀 탄생 신화를 사용했다. 그러나 어떤 초자연적 개념을 동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간적’ 대언자로서의 예수의 역할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처녀 잉태나 탄생이 생물학적인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41
- 브라운(Raymond Brown)과 맥브리앙(McBrien)
로마 가톨릭의 성서학자 브라운(Raymond Brown)도 처녀 탄생 기사들은 그 역사성이 의심스러우며 기독교의 메시지에 대하여는 이질적인 것이며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본다. 맥브리앙(McBrien)도 처녀 탄생의 교리를 ‘비역사적인 신학적인 것’(theologoumenon) 즉 ‘예수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삽입해서 읽은 일종의 신학적 신앙”이라고 규정한다. 이 노트르담(Notre Dame) 신학자에 의하면 예수의 처녀 잉태 교리는 예수가 잉태의 순간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신 존재였다는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초대교회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 4세기 이래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종신 처녀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처녀 잉태 교리를 확대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예수 탄생 이전에 뿐만 아니라 예수 탄생 시에도 처녀였으며(즉 예수는 産道를 통하여 나온 것이 아니다. 편집자 주), 예수 탄생 후에도 처녀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관계를 가진 적이 없고 따라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 가운데 어거스틴을 언급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마리아 자신도 기적을 통해 잉태되었으며 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에베소 공의회(431년)는 마리아가 하나님(=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공포했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반대를 묵살하고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렇지만 교부시대 동안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 동안 마리아론(Mariology)은 기독론을 돕는 부수적 기능으로만 사용됐었다.
- 중세기에 이르러 신학이 점차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더 나아가 점진적으로 마리아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로 되어갔다.
중세기에 이르러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인류 사이의 중재자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념은 아직은 도그마(구속력 있는 교리)라기 보다는 하나의 신앙 명제(경건한 신념)로서의 위치에 있었다. 클레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에 의하면 사람들에게는 “그 중재자(=그리스도)에게 중재해주는 중재자가 필요한데 이 중재자로서 마리아보다 더 효과적인 인물이 없다.”고 했다. 42
더 나아가 보나벤투라(Bonaventure),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등과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리아를 인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동등한 구원자(co-redemptrix)로 보았다. 그러면서 마리아 숭배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숭배의식에서 마리아는 ‘구원자(=그리스도)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으로 그녀에게 기도를 올리며 예배를 드렸다. 많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마리아가 흠 없이 잉태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마리아의 무흠(無欠) 잉태는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선택한 사실과 잘 맞는 마리아의 존엄성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다른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마리아 무흠 잉태 개념은 보편적 죄의 교리(the doctrine of universal sin)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 19세기에 들어와 마리아론은 독립된 신학적 위치를 확보했다.
1854년 교황 피우스(Pius) 9세가 교황의 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Ineffabilis Deus)에서 마리아의 무흠 잉태설(죄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주장 – 편집자 주)을 신앙의 교리로 공포했다. ‘하나님의 잉태자’로서 마리아는 그 자신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선언된 것이다. 그러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죄의 불가사의 안에서 마리아는 병과 죽음의 형태로 죄의 결과들을 감수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또 다시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나님’(Munificentissmus Deus)이라는 교서를 공포함으로써 오래전부터 전해온 마리아의 무흠 잉태설의 전설을 인증했다. 즉 이 교서는 마리아의 승천을 교리화한 것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마리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채 하늘로 옮겨져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앉아서 성도들의 기도를 중재한다는 것이다. 43
- 제 2바티칸 공의회와 많은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리아론을 당당하게 교회론 안에 위치시킨다.
현대 로마 가톨릭 사상은 물론 마리아를 변호자요 중재자로 여겨 헌신을 드리는 대상으로 여전히 삼고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마리아를 교회에 연관시켜 인간 구원의 구조에 있어 그녀를 그리스도 바로 아래에 놓고 있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믿음과 복종으로 인하여 교회의 한 모범이요 교회의 뛰어난 성원이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영속적 처녀성 즉 출산 시에도 처녀요 출산 후에도 처녀라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본다. 또한 이들은 마리아가 교회에서 존경받기 위하여 반드시 마리아 무흠잉태 교리와 승천 교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7.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해석
그러면 많은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육신에 대해 어떠한 입장인가?
-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가현설(假現說, docetism)에 반대하여 성육신의 객관적 실체를 주장한 것은 속사도 교부시대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영원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 또는 말씀이 다윗의 혈통을 타고 인간이 되었으며 그로써 성부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처녀 탄생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통일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만세전에 성부에 의하여 출생되었던 것인데 그 후에 어떠한 인간과의 성관계 없이 처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한 것이다.”
이그나티우스가 사용한 신앙고백의 언어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 처녀 탄생에 대한 신앙이 일찍이 제 2세기 초부터 널리 견지(堅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4
- 그 다음 시대의 기독교 변증론자들도 그리스도는 영원한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된 것이며 이로써 성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해 석한 것이라는 입장을 한결같이 견지했다.
- 저스틴(Justin Martyr)
예컨대 순교자 저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인격이신 말씀(=그리스도)이 선재했으며, 성부의 뜻을 따라 자신을 순종시키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몸을 갖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 속에 씨처럼 뿌려진 말씀(=로고스)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지만 성육신한 말씀(=그리스도)은 믿는 사람들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다.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써 또한 우리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려 한 것이다.”
저스틴은 마리아를 이브에게 연관시킴으로써 처녀 탄생 교리를 설명한다. 처녀 이브는 뱀의 말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죄의 어미가 된 것처럼 처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하여 죄를 감당하는 자 예수(=구원자)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아타나시우스는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라는 그의 중요한 에세이에서 성육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인류는 도덕적 부패, 죽음, 임박한 심판의 상태에 처하여 시들어가며 신음하고 있었다. 죄인인 인간의 육체적 존재를 괴롭히는 이 저주와 파멸은 오로지 성부의 형상이신 말씀이 우리의 굴욕의 몸을 취함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로고스가 우리의 본질 우리의 육신을 그 자신에게 취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육신이 되신 말씀이 성부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즉 성부 자신의 진리다운 말씀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세주는 처녀에게 잉태되었으며, 우리의 몸과 같은 몸을 그의 거처로 삼았으며,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가 예수 안에 다만 기능적 의미로만 내재했었다는 설에 반대하여 “로고스는 인간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말씀은 이런 겸비의 상태로 된 다음에 먼저 계시의 사역을 행하였다. 즉 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통하여 그 자신이 우주의 통치자요 왕인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몸을 죄인들의 영혼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화해의 사역을 행하였다.
만약 인류가 죄로 타락하지 않았었다면 성육신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타나시우스는 보았다. 그러나 인류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으므로 “그(=로고스, 말씀)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 어거스틴(Augustine)
어거스틴은 말씀을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선재적 제 2위라고 보았으며 이 말씀이 나사렛의 그 목수 안에서 인간으로 되었다고 보았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영원한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을 취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그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나 그 육체를 따라서는 즉 하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성부 하나님보다 작다.”
이레니우스(Irenae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따라서 또한 어거스틴(Augustine)도 다음의 사실을 강조했다. “인류가 죄와 저주 아래서 신음하며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중재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유일무이한 희생제물을 드릴 화해 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는 성령에 의한 기적적 잉태를 통하여 죄 없는 인간의 본질을 입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처녀로부터 출생했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다는 것을 복음서에서 읽었기 때문이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 사도신조(Symbolum Apostolicum)
기독교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의 진술들 가운데서 제 2세기 로마 교회의 세례 예식의 신앙고백으로부터 기원된 사도신조(使徒信條)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으로 묘사한다. 이로 보건대 초대교회 당시 세례를 받기 원하는 자들에게는 우리 주님의 처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요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신조에는 핵심적인 신앙의 교리들만이 들어있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처녀 탄생의 중요성이 확립되어 있었고 교회가 이를 신앙고백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니케아신조(Symbolum Nicaenum)
니케아 신조(325년)와 그것의 수정보완판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을 역사적 진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며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 인하여 성육신하셨다.”
- 칼케돈신조(Definition of Chalcedon)
칼케돈신조(451년) 역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을 역사적 진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소위 아타나시우스 신조도 성육신을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믿음으로 확인하고 있다.(제29조)
- 안셀름(Anselm)
안셀름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었나?’(Cur Deus Homo)라는 그의 고전적인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아담의 불순종은 전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다. 하나님의 정의는 속죄의 값을 치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벌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영원히 형벌해 버린다면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헛되게 하게 된다.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은 죄의 값을 지불하고 많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그들의 죄와 그로 인한 무능한 상태 때문에 요구되는 바의 죄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 값을 치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 죄 값은 죄인인 인간이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값은 어느 인간에 의하여 지불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존재는 완전히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히 인간인 존재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처녀 마리아에 의하여 잉태되었고 인간이 되었으나 아담의 죄책으로부터는 자유로웠으며 그런 상태에서 그는 그의 생명을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한 완전한 제물로 드렸던 것이다.
- 요한 칼빈(John Calvin)
칼빈의 성육신 설명은 위에 열거 한 많은 교부들의 설명을 따랐다. 우리의 죄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켰다. 그래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건널 수없는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엄 그 자신이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분명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올라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재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정복하고 죽음을 패배시키며 우리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중재자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인간의 육신이라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만족으로 드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재가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우리 인간의 몸으로부터의 몸과 인간의 육신으로부터의 육신을 그리고 우리의 뼈로부터의 뼈를 취한 것이다.”
칼빈은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인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인간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돌린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기적적 잉태의 사실에 돌렸다.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었다면 성육신이 일어났었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칼빈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 안에서 상호 분리 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죄의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긴밀하게 연결시킨다고 보았다.
- 워필드(B.B. Warfield)
워필드에 의하면 영원히 성부와 함께 거하고 있는 성자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질을 그의 신적 인격 안으로 취하였고 그리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으로 이 세상으로 들어왔다. 이 메시아는 “죄 된 인간에 대한 자비의 임무를 위하여 세상으로 들어 온 신적 존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겸비 즉 성육신을 기적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즉 초자연적 탄생을 통하여 출생한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초자연적 구원을 결과 시킨다고 보고 있다.
워필드에 의하면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처녀 잉태는 인간 구원에 있어 성경적 신앙의 본질적 요소다. “예수의 초자연적 탄생은 (중략)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의 표현이며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를 지키는 성벽이며 기독교의 구원 교리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 메이첸(Machen)
메이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만약 예수를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이요 구세주로 이해한다면 예수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잘 이해될 것이다. “오직 한 예수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소개되어 있다. 즉 그 예수는 일반적인 생식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처녀의 태에 잉태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에 관한 추가 자료들은 James Orr, Millard J. Erickson. 등을 참고하라.(*) 출처 / Gordon R. Lewis는& Bruce A. Demarest, ‘Integrative Theology’(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vol. 2, ‘God`s Eternal Son Incarnated’251-262의 내용을 발췌함.
< 미 주 >
1) Emil Brunner, The Mediator(Philadelphia: Westminster, 1947), 212; cf. ibid., 232: “기독교 신앙 전체의 중심이요 토대는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2) George S. Hendry, Christology, 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ed. Alan Richardson(London: SCM, 1969), 60.
3) Franz Delitsch, A System of Biblical Psychology(Grand Rapids: Baker, reprint 1966), 386.
4) Frederick L.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3vols. (Grand Rapids: Zondervan, reprint, 1969). 1:270.
5) I.A. Dorner, A System of Christian Doctrine, 4 vols.(Edinburgh: T. & T. Clark, 1880-82), 3:340.
6) Ibid., 3:328.
7) Albrecht Ritschl,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 Book Publishers, 1966), 451.
8) Adolf Harnack, What is Christianity?(London: Williams & Norgate, 1912), 208.
9) Henry Van Dusen, ‘The Significance of Jesus Christ’, in Liberal Theology: An Appraisal, ed. David E. Roberts and Henry P. Van Dusen(New York: Scnbner, 1942), 217.
10) Ibid., 221.
11) John Hick, ed. The Myth of God Incarnate(Philadelphia: Westminster, 1977).
12) Frances Young, “A Cloud of Witnesses”, in The Myth of God Incarnate, 32.
13) Hick, The Myth of God Incarnate, ix.
14) Young, “A Cloud of Witnesses”, in The Myth of God Incarnate, 47, note 45.
15) Russell F. Aldwinckle, More Than a Man (Grand Rapids: Eerdmans, 1976), 197.
16) Seren Kierkegaard, Kierkegaard’s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1), 512.
17) Ibid., 188; cf. 187, 528.
18) Emil Brunner, The Mediator(Philadelphia: Westminster, 1947), 158. 브룬너는 그의 역사 적 상대주의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역사적 연구의 일반적인 규범에 의해서는 예수가 실재했는가도 전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9) Ibid., 286.
20) Ibid., 325.
21) Karl Barth, Dogmatics in Outline(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49), 96; cf. CD, 11.2.7.
22) Karl Barth, CD, IV.2.43.
23) Barth, CD, II.1.397. Cf. ibid., IV.1.258:“그는 육신을 취했다. 즉 인간이 아담의 타락 으로부터 나옴으로써 취한 그 인간의 본질을 취했던 것이다.”; ibid., 1.2.151-53. 그리 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본질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가 구원하기 위하여 온 바 그 인류 와의 연대 속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24) Barth, CD, IV.2.49. Cf. CD, III.1.54.
25) William N. Pittenger, The Lure of Divine Love(New York: Pilgrim, 1979), 11.
26)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139.
27) William N. Pittenger, ‘The Incarnation in Process Theology’, Review and Expositor 71 (1974), 52-53.
28) J.A.T. Robinson, The Human Face of God(London: SCM, 1973), 148.
29) Ibid., 115.
30) Ibid., 184.
31) Pittenger, The Lure of Divine Love, 114-15.
32) John Tully Carmody and Denise Lardner Carmony, Contemporary Catholic Theology(New York: Harper & Row, 1985), 45.
33) Piet Schoonenberg, The Christ(New York: Herder & Herder, 1971), 88.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성육신은“오로지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문제일 뿐이다. 그로써 그는 하나님 의 독생자인 것이다.”
34) Ibid., 91.
35) Hans Kung, On Being a Christian(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1976), 446; cf. idem, The Incarnation ofGod (New York: Crossroad, 1987), 442.
36) Kung, On Being a Christian, 457.
37) Richard P. McBrien, Catholicism(Minneapolis: Winston,1981), 542.
38) Augustine, The Creed, III.6: “한 처녀가 잉태했으며, 한 처녀가 출산했으며, 출산 후에도 계속 처녀로 남아있었다.” Cf. Enchiridion, X.34; Sermon, 192.1.
39) McBrien, Catholicism, 875에서 인용함.
40) Ibid., 892. McBrien은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마리아는 교회와 기독교적 존재의 이미지, 모범, 표상, 형상이다.”Ibid., 896.
41) Ignatius, To the Magnesians, 8.1
42) Ibid., 11.1. Cf. To the Trallians, 9:“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중략)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처녀로부터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43)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48
44) Justin Martyr, Apoloey, 11.13.
45)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100. 저스틴에게 처녀 탄생은 침범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하나님으로부터 처음 태어난 그 말씀은 성적 결합 없이 태어난 것이다.”Apology, 1.21. Cf. Dialogue With Trypho, 84.
46) Athanasius,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11.70.
47) Ibid., III.30.
48) Athanasius, 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54.
49) Aueustine Letters, 137.40.
50) Augustine, Enchiridion, 33. Cf. Sermon, 192.1: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인 그들을 하나님처럼 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 분은 그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창조했던 피조물이 되고자 원하셨던 것이다.” Cf. The Creed, III.6: “하나님의 외아들 (중략) 성부와 동등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교만한 인간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신 것이다.”
51) Augustine, The Christian Combat, XXII.24.
52) Anselm, Cur Deus Homo, 11.7.
53)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12.1.
54) Ibid., 11.12.2.
55) Benjamin B. Warfield,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Philadelphia: Presbyterian & Reformed, 1970), 6-7; cf.ibid, 17: “그는 죽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 들어왔다.”
56) Benjamin B. 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Philadelphia: Presbyterian & Reformed, 1968), 167; cf. ibid., 166: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 사역은 그의 초자연적 탄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57) J. Gresham Machen, The Virgin Birth of Christ(New York: Harper & Brothers, 1930), 397. 다음 인용구는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 기독교의 세계관 및 인생관의 필수적 구성요 소라는 메이천의 입장을 잘 말해준다.“그리스도가 진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으 며, 또한 그가 진짜로 신약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존재였다면,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처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Ibid. 268.
58) James Orr, 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as Centering on the Incarnation(Grand Rapids: Eerdmans, 1948).
59)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3 vols.(Grand Rapids: Baker,1983-1985), 2:661-81, 73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