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을 관통하는 성경해석의 열쇠: 하나님 나라와 언약

시작하면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끈임 없이 성경을 배우며 또 배운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굳게 붙잡고 살뿐 아니라, 이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파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다.(딤전 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選擇)하기로 예정(豫定)하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은 결코 보편적(普遍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한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制限救援, limited salvation)을 강조한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8) 그렇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요 6:37, 눅 19:10) 성육신(成肉身)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되신다.(빌 2:6-8)
올바른 기독교신앙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올바른 계시관(啓示觀)의 정립에서 비롯된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어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롬 10:17)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선포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本意)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 의존의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恣意的)이고 자기기만(自己欺滿)의 설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설교는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한다.(마 7:21-23, 롬 10:2,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천상(天上)의 시각인 하나님의 관점이다. 따라서 성경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의 의미를 세상 관점과 세상 질서로 접근할 때 거기에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것은 넓은 신앙의 길일 수는 있어도 결코 신앙의 좁은 여정과는 무관하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의 양극화를 초래할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自己啓示書)이다. 이는 세상의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창세 전(前) 영원한 목적과 작정으로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啓示)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된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을 받아 범죄 한 아담과 하와의 죄(罪) 문제(창 2:17,3:6)가 ‘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 4:4)의 대속(代贖)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의 ‘문화명령’(창 1:28)의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었다.
이처럼 성경 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사역(救贖事役)에 집중 된다면(요 5:39, 딤후 3:15-17) 그렇다면 성경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제Ⅰ장 성경계시의 총화 ‘하나님 나라’
성경은 성경 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서 찾는다. 즉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말한다. 이 교리는 또 역사의 종국(終局)에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그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 계시에 무지(無知)하거나 왜곡(歪曲) 및 곡해(曲解)는 사이비 기독교 신앙과 사이비 교회 및 사이비 목회로의 귀결이 불가피하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이다.(롬 1:21-23)
총체적으로 그 결과는 우상숭배 신앙의 형성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유사(有事) 기독교의 모습으로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찾기 힘들뿐 아니라 불법(마 7:21-23)과 불복종(롬 10:2,3)의 자의적 우상숭배 신앙만 난무하게 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올바른 성경연구와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강력히 요구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 계시의 총화가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아는 일은 바른 신앙 형성의 척도(尺度)가 될 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목적 곧 우리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앞서 말했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천국 시민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의 추구를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마 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追求)하며 구현(具現)하려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고전 10:31)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가르친다.(전 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전 12:14, 고후 5:10, 히 9:27, 계 20:11-15) .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교리가 성경 계시의 총화(總和)인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교리는 인간이 공교(工巧)히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自證)하는 객관적 관점이며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고 살아갈 때 이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신앙의 본질(本質)은 이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실질(實質)을 맛보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현세(現世)와 단절된 사후(死後) 세계에 속한 죽어서 가는 그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예비적으로 천국을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진행(마 12:28, 눅 17:20,21, 마 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눅 17:22-24, 22:14-18, 마 25:31-33)의 이중적인 국면(局面)을 띠고 있는 나라이다.
1.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하나님 나라’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단 2:31-46)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을 접하게 된다.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神象)’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신적(神的) 기원(起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의 내용이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후자는 신적 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表象的)으로 보여준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한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된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한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神政) 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이 통치하는 세상 나라를 대치한다. 이는 세상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 하는 것을 통해 세상 역사의 종식(終熄)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到來)라는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示唆)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이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방편(方便) 삼아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値)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신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결국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진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다.
2. 성경의 기록 방향과 ‘하나님 나라’
성경의 기록 방향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경 66권의 첫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선언한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起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킨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天地)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히 3:4)
그런데 계시록 21:1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 1:1에서 언급한 태초의 천지창조 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再) 창조 사역으로 갱신(更新)되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이다.(벧후 3:10-13, 마 19:28, 사 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나님의 이 세상 창조 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宇宙的 經綸, 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다니엘의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3. 예수님의 공생애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到來)이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 시작과 함께 선언(宣言)하신 예수님의 선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天國, 하나님 나라)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이 말씀에서 “천국(天國)이 가까웠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 진행형인 ‘하나님 나라’의 능력(能力)과 권세(權勢)와 통치(統治)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이뿐만이 아니다. 마가복음 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罪) 사함 받은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 능력이 현재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진다. 따라서 예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異蹟)과 기사(奇事)와 병자의 치유(治癒) 및 축사(逐邪) 그리고 천국(天國) 복음의 증거와 죄(罪) 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명백한 표적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
4.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 6:33)을 천국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하셨다. 이는 앞서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4:17)고 선포하신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 나라’야말로 성도들의 존재 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있다.
5.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
주님의 동일한 산상수훈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 6:9,10)에 대해 우선적으로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을 강력히 명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 지향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 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 삶의 성격과 방향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 구현’(고전 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 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확실하고 극명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인 경륜(經綸)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오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의존(啓示依存)의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6. 사도 바울의 서신서와 ‘하나님 나라’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代贖事役)에 의해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하고 있다.(고후 5:17, 엡 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는 본질에 있어 천상적 보편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그렇다. 이 세상 성도는 본질에 있어 이미 천상(天上)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 백성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되어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한다.(엡 2:6) 즉 성도의 현재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의 삶으로 간주하여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宣揚)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하나님 나라’가 성경 전체의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이 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이고 불복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막 7:6-8, 마 7:21-23, 롬 10:2,3, 딤후 3:15-17, 딤전 2:4, 요삼 4절, 엡 4:11-13) .
제2장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 나라’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言約的) 구속사(救贖史)의 성격을 띠고 진행된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 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作定)과 계획(計畫)을 성경 기록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 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킨다.
-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 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 역사를 무대로 섭리적(攝理的)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 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언약 (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 한편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킨다.(엡 1:4-6)
이런 상호 불가분(不可分)의 정황상 계시사(啓示史), 언약사(言約史), 구속사(救贖史)라는 표현은 본질에 있어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적(豫示的)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模型)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신적(神的) 기원을 갖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更新), 확장(擴張), 발전(發展)을 거듭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언약을 중보적인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의 구속(救贖) 계시의 본의(本意)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엡 1:3-14) 나아가 이것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1. 창조 언약(창 1:28)
– 문화명령으로서 –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지으셔서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을 대리(代理) 해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위임하셨다.(창 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과 극치의 면류관으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통치자(統治者), 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타락 전(前) 에덴동산의 아담 부부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저들에게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주어졌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창조 언약’을 통해 주신 창세기 1:28의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을 통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28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 언약’의 중심 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指向)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한다.
2. 아담 언약(창 2:17)
– 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
그렇다면 창세기 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창조 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한가?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道理)로 붙잡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전 12:13, 요 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적(表象的) 사건이 선악과(善惡果)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이는 아담 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起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되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선악과 행위 언약’(창 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의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의존적 자유의지’이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는 이간이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이다.
창세기 2:17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들어난다.(창 2:19,20) 다시 말해 아담이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命名)한 것이 아니다. 동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또 다른 면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表出)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일 아담 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誤濫用)으로 월권(越權)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가 무시될 수도 있었다. ‘선악과 금령법’이 시험(試驗)의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따라서 아담 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 2:16)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17절의 관계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것이 된다.
3. 여자의 후손 언약
– 원시복음으로서 창 3:15의 –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簒奪)하려다 실패한 사단(Satan)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限時的)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영역이다.(요 12:31, 16:11, 마 4:8, 엡 6:12)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계획을 감지(感知)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 6, 벧후 2:4, 사 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공세(攻勢)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이 시험에 빠지고 만다.(창 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流入) 된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되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失樂園)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렸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의 조건인 죽음이 즉각(卽刻)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 3:8-10)은 본질에 있어 죽음과 방불한 형벌이었다.
따라서 사단이 승리한 것 같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이 보였다. 창세기 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神政) 왕국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의 언약은 파기된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지상에서 성취한 듯 보였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된다.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의 ‘창조 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없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 1:3-6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반드시 아담과 하와와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이를 어기면 불순종한 죄(罪)의 대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창 3:6)에게는 사망선고(死亡宣告)가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의 ‘창조 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창조 언약’과 ‘선악과 금령법’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대립과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된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즉 문화명령의 ‘창조 언약’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 언약은 이를 어긴 아담과 하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못하게 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 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修辭的)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창조자의 절대적(絕對的) 주권의 특성상 어떤 이유로든 파기(破棄)되거나 변개(變改) 될 수 없다.(민 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세기 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의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세기 1:28의 하나님의 ‘창조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神的)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김으로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 언약’과의 관계상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의 죄책(창 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문화명령의 ‘창조 언약’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갈 수 있는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상호충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으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 언약’을 복음의 원형(原形, prototype) 곧 ‘원시복음(元始福音)’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 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代贖)의 속죄(贖罪) 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른다.(갈 4:4)
4. ‘창조 언약’을 지속시켜 나가심
– 창 3:15의 구속원리를 방편으로 하여 –
이제 당초 ‘창조 언약’(창 1:28)에 근거해 타락 전(前) 무죄한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 건설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 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갱신(更新) 된 것 뿐이 며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엡 1:4, 행 2:23, 4:27,28)을 간파(看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 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자(聖子)의 성육신(成肉身)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 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 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근간(根幹)으로 작용하게 된다.
5.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
이상 창세기 1-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역사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言約的) 구속사(救贖史)’라고 한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方便)으로 삼아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系譜的)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이다. 세속사(世俗史)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 된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창세기 4장의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은 단순히 시기 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 행위가 아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悅納)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보다 본질적 의미는 ‘여자의 후손 언약’에 이미 예언 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 대립과 충돌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가인은 ‘뱀의 후손’이며 아벨은 ‘여자의 후손 언약’의 계승자였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 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창 6:8,9, 히 11:8, 엡 2:8,9, 고전 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감을 보게 된다.
창세기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記述)을 통해 묵계적(默契的)으로 시사한다. 창세기 5장에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 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이 구속사 진행에 있어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이자 여자의 후손 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다.
6. 노아의 보존 언약
(창 9:8-10,1,2)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신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 6:5)이라고 고발한다. 이후 성경 역사에서 ‘죄의 관영(貫盈)’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한다.(창 15:16, 18:20,21, 눅 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한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결과 노아를 포함 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전멸(全滅) 당한다. 여기서 창세기 저자는 노아와 그 가족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 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 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으신다.(창 9:8-10) 이 언약을 ‘노아의 보존 언약’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이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과 맺었던 ‘창조 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노아의 보존 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 언약’과 동질성을 띠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창 9:1,2) 물론 ‘노아의 보존 언약’의 궁극적 성취 역시 ‘여자의 후손 언약’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후 ‘노아의 보존 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 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Shem)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Arpachshad)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른다.(창 11:10,26)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창세기 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 있어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의 미혹(迷惑)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至尊思想, 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다.(창 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 사건에 담긴 사단의 미혹과 배신(背道) 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 번 가시화되었다가(창 11:1,2, 단 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계 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의 시험과 반역 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다.
7. 아브라함 언약
– 창 12:1-3 언약에 의한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 –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 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 여자의 후손 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 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 10:22, 11:10)과 그 후손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 11:24-26) 아브라함에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 대(大)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된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 4:-11:)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적(暗默的)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적(明示的)으로 바뀌며 은닉적(隱匿的)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라함을 불러내신다. 그리고 직접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창 12:1-3)
‘아브라함 언약’의 대(大) 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창 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現世) 지향적이던 삶을 천상(天上) 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를 신약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마 6:33)
예수님이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 부인(否認)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다.(마 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준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다.(고전 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오는 무한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다. 자손, 땅 , 왕(창 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이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네 가지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 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 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 땅약, 왕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질 없이 전개된다. 이제 이들 각각의 성취 내용을 요약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자손 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 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출 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세기-신명기)의 내용을 통해 전개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에 함축 된 ‘자손 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인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 되어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의 말씀이다.(창 15:12-17) 이 구원 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킨다.
(2)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 과정이 소개된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킨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주신다.(수 18:8-10) 그리고 이런 도면상의 가나안 땅 분배를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한다.(수 21:43-45) 이는 신적(神的) 언약의 특성상(주권성, 은혜성,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이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때에 이르러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된다.(창 15:18, 왕상 4:21,14,25)
(3)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는 사사기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 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 21:25), 룻기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默契的)으로 지목한다.(룻 4:18-22) 그리고 사무엘서를 통해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완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卽位)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된다.(삼상 16:12,13, 삼하 2:4,5:3)
‘왕 언약’의 성취가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명백히 천명한다.(왕상 4:20-25) 또한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언급하는데 이는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 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미 4:4, 슥 3:10)
(4) ‘열국의 복 언약’의 성취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왕상 4:21,24)
8. 시내산 언약
– 출 24:1-8, 이스라엘의 출애굽 –
출애굽 구원 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 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 언약(창 15:12-18)을 통해 맹세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 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이다.(출 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인간 편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실 때 지름길이 아닌 우회(迂廻)의 길을 택하게 하시어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 여정 길로 몰아가셨다. 이는 다분히 하나님의 의도적인 처사였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 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 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의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모세를 앞세워 이들을 시내 산까지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언약의 피’라고 말한다.(출 24:1-8) 이 피의 언약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인(印)을 쳐 주시는 ‘새 언약’에서 실체화 된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의 제정과 그 의미의 설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 해 준다.(히 10:1, 눅 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 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 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적 교회를 예표로 표상(表象) 한다 하겠다.(히 12:18-23)
하나님은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출 19:5-8) 이런 하나님은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 하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적(神政的)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顯示) 해야 한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 하사와 더불어 성막(聖幕)을 계시해 주셨다. 성막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政權)으로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로 보여준다.(출 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 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심을 통해 임마누엘이 실체화되기에 이른다.(고전 3:16, 6:19)
레위기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방식 특별히 속죄(贖罪) 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셨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실질(實質)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로 보여주는 표상(表象) 사건의 의미를 갖는다.
민수기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주신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의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 13:-14:)과 불뱀 사건(민 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本意) 및 율법의 재해석과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렇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섭리의 손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신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는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된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온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전 3:5,6)
9. 다윗 언약
(삼하 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 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간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수 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만일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살며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것은 신약의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후 하나님은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 하셨다.(삿 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 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된다.(룻 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셨다.(삼상 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 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즉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 다윗이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음
그러나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사울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 13:8-15, 15:9,12),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 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가를 우회적으로 증거 한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하신다.(삼상 16:1,11-13)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이것이 첫 번째이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비공식으로 왕의 등극 절차가 치러졌다. 하나님은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불가능한 골리앗과의 싸움을 승리하게 하심으로(삼상 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셨다.
- 다윗이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음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는 다윗을 공식적이며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상견례(相見禮) 자리가 되게 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하신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로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에게 받는 시련을 통해 그를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에 깊이 접촉시켜 주셨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한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왕으로 삼았다.(삼하 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이다.
- 다윗이 세 번째 기름부음을 받음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였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부음 받는 사건이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했다.(삼하 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 그것이 다윗 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의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代理) 통치자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 것이다.
- ‘다윗 언약’의 요지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과 ‘다윗 언약’을 맺어 주셨다.(삼하 7:11-17) ‘다윗 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이스라엘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셨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셨다.
셋째, 그 자식으로 여호와의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
넷째, 언약의 핵심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 쳐 주시겠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질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드렸다.(삼하 7:8)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삼무엘 하 7:29이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이 기도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여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한다면 다윗의 기도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로 전락하게 된다. 즉 말씀을 사욕(私慾)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과 불복종의 배도(背道)의 신앙이 된다.(마 7:21-23, 롬 10:2,3, 딤전 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큰 범죄 행위를 유발시킨다. 만의 하나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신앙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 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 된 것으로 인해 ‘예수 믿고도 지옥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마 7:21-23)
- ‘다윗 언약’ 성취의 이중성
이후 ‘다윗 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에서 ‘아브라함 언약’및 ‘시내 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된다.(왕상 4:20-25) 특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증거 한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 실현을 가리킨다는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된다.(미 4:4, 슥 3:10)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성취의 이중성(二重性)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통치역사 에서 실현된 ‘다윗 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윗 언약’ 자체에 미래 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妻妾)들로 인해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 왕조는 중도 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킨다.(왕상 11:1-13) 그럼에도 ‘다윗 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다윗 왕조를 아주 폐(廢) 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렘 31:31-34, 겔 36:26-28, 37:24-28, 사 9:6,7, 11:1,2, 52:13-15, 53:4-6)
이런 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 ‘하나님 나라’ 건설과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 지라도 ‘다윗 언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 기간에 건축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의 실체가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성육신(成肉身)하신 임마누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마 1:1,22,23, 요 2:19-2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들을 보여 달라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 성정의 실체가 되심을 친히 증거 하셨다.(마 12:42, 눅 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 결과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둘로 분열되어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쪽 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된다. 이는 ‘다윗 언약’에 명시된 대로이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몰랐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하게 종교를 수단화시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했다.(왕상 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하여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表象)으로 정죄했다.(왕상 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조기(早期) 멸망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왕상 14:16, 왕하 17:1-8)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왕상 12:25-33)
(1)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도구 및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의 지속적 유지를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이 남 유다의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했다.
이처럼 인간의 세속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手段)과 방편(方便)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되고 대신 여호와 신앙을 가장한 우상숭배의 사이비신앙이 성립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이다. 이러 상황에서는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과 불복종의 자의적인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이다.(롬 10:2,3, 마 7:21-23)
(2) 자의적 숭배신앙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이다.
특히 제사장을 모세의 율법대로 레위 지파 사람으로 세우지 않고 보통의 사람을 임의대로 세워 제사장에 봉직시켰다.(대하 11:13-16) 이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무시하는 패역한 범죄행위였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 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 배출과 목회 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 교인의 양산(量産)에 비교할 수 있다. 이들이 유유상종 하여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는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3) 신앙의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 문제이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드리는 성경의 7월 15일 초막절 절기를 자기 임의대로 8월 15일로 변경해 드렸다. 이 둘을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아무리 겉보기에는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과 불복종의 신앙으로 간주한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된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린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 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는다.
남 유다 왕국 또한 본질에 있어 북 이스라엘 왕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끝내 남 유다마저 바벨론의 3차(BC 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된다.(렘 25:1-9, 대하 36:17-20) 그러나 남 유다의 경우 북 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렘 25:8-13, 29:10-14, 30:1-3, 겔 37:21,22, 사 14:1-3)
이는 ‘다윗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 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뿐이 아니다. 동일한 연장선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 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고 축복한 야곱의 예언이 남 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된다.
이렇듯 ‘다윗 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제3장 구약의 ‘새 언약’ 사상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남 유다 왕국의 패망은 특별히 유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 및 통한의 슬픔을 안겨 주었다. 적어도 ‘다윗 언약’에 근거하면 남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징계는 받을망정 어떤 경우라도 결코 멸망당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이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 하박국도 유다의 패역과 간악함을 마땅히 징치(懲治)해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없는 이방 갈대아 인(바벨론)을 채찍삼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기막힌 사실 앞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거침없이 항변했던 것이다.(합 1:1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박국의 이런 질문에 명확히 답변해 준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렘 25:12,13) 이런 예언의 말씀은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들이 고토로 귀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른다.(스 1:1-4)
그렇다. ‘다윗 언약’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과 관련해 ‘다윗 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 구조적 성격에 대해 감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다윗 언약’을 포함해서 제반 신적 언약의 중심 사상들이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 속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들 중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맞춰 선포한 예언들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새 언약’이라 부른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이처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시내 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철저하게 멸망을 선고받을 지라도 ‘다윗 언약’에서 시사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조만간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해 주실 것과 아울러 보다 미래적인 종말론적 회복을 예시(豫示)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신(新) 다윗 왕조의 재건과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신정왕국의 회복을 지향한다.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특별히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등 세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
- ‘새 언약’의 역사적 배경
첫째,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이다.(렘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기 전 먼저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다. 그리고 이런 남 유다의 회복을 북 이스라엘에게 확대 적용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언약’ 안에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취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새 언약’에서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부각시킴으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셨다.(렘 25:7-10) 그러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고 70년으로 제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11절) 이는 유다의 회복을 보증하시는 말씀(렘 29:10-14, 30:1-3)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이다. 70년이 차게 될 때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 중 일단의 무리를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으로부터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남은 자’(remnant)라고 했다.(렘 23:3)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친 백성을 가리키는 언약 용어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을 ‘선택자’(選擇者) 사상과 동일한 의미이다.(엡 1:4-6) 신구약 역사를 막론하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은 자증한다.(롬11:4-6)
- ‘새 언약’이란?
아울러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공평과 정의를 행사하게 할 것을 약속하셨는데 이것이 ‘새 언약’이다. 이 때 비로소 참 된 구원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왕을 통해 여호와의 의(義)가 실질로 온 백성에게 전가(轉嫁) 될 것이기 때문이다.(렘 23:5,6, 롬 3:21,22) 그리고 이들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렘 23:7,8)
이상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전히 ‘다윗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은 자체 속에 처음부터 이중적 성격을 띠고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중적 구조를 띠고 진행됨을 보게 된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을 말한다.
이렇게 예레미야 23장-30장까지 걸쳐 집중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기술하던 예레미야는 31장에 이르러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선포한다.(렘31:31-34) ‘새 언약’의 내용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시내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나 괄목할만한 갱신과 발전을 통해 심화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심비(心碑)에 새겨진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고 있음은 시내 산 ‘옛 언약’에 비해 현격한 계시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과 실현
‘새 언약’의 발효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야 할 것이다. ‘새 언약’이 유효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출 6:2-9) ‘새 언약’의 성격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옛 언약’(시내 산 언약)과 비교해서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한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에 반응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행동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맺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외적으로는 불연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옛 언약’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불순종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순종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주시기 때이다. 이는 성령(聖靈)의 내주와 후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한다. 진리의 영(靈)이신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신다.(렘 31:34 상)
이로 인해 죄로부터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렘 31:34절 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사실상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에 있어서 종전의 언약과 비교해 괄목할만한 언약의 갱신과 발전을 가져 온 부분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죄용서의 시대’란 사실이다.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시대이다.(히 10:17,18) 물론 ‘옛 언약’ 하에서도 죄용서가 가능했다.(히 9:13)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향한 예표적인 제도로서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생했을 뿐이었다.(히 10:11) 그래서 해마다 거듭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새 언약’하에서는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once for all)를 드리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 안에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塗抹) 된 것이다.(히 9:12, 10:14,17,18)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성취된다. 마침내 임마누엘의 종말론적 성취가 실현된다. 여기서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표현은 언약의 본질로서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킨다.(계 21:3, 창 17:8, 출 19:5, 레 26:12)
이처럼 성경에 약속된 신적(神的) 언약(言約)의 핵심 사상은 한결같이 위의 주제를 본질로 삼아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상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이 찰 때 회복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이 다윗의 위를 좇아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 성취될 것이며(렘 23:5,6),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결코 다시 멸망하지 않으며 영속될 것이다.(렘 33:14-18)
하나님은 ‘새 언약’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자연법칙을 담보로 보증하신다.(렘 33:25,26) 이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은 필연적이고 영원할 것에 대한 확약이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일컫는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엡 2:14,15)
2. 에스겔의 ‘새 언약’ 사상
둘째, 에스겔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내용이다.(겔 36:26-38, 37:24-28, 11:19,20) 에스겔서에서는 언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에서 언약(베리트)이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전체 예언은 ‘새 언약’의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아직은 미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예언의 중심내용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보다 발전 확대시켜서 설명한다. 그러나 이 두 선지자의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에 모아진다.
에스겔 36:16 이하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설정된 미래적 이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실하게 된 요인들이 ‘시내 산 언약’을 배경으로 회고된다.(겔 36:16-20)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상실은 철저히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특별히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 설명된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실제로 가나안 족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호 8:4-7, 12:11, 13:1,2),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결핍돼 사사로운 종교적 감정만을 부추겨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이기적인 목적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섬긴 사실을 포함하기도 한다.(사 1:11-14)
에스겔 36:21-23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동기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상당히 예레미야적이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회복 및 갱신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 중에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덤브렐(W.J. Dumbrell)은 그의 저서 ‘언약과 창조’ (Covenant and Creation, 크리스챤 서적, 1999년)에서 에스겔 36:21-23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신적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信實性) 때문이다.(21절) 신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동시적으로 당신의 실추된 신실하심을 열방 중에서 영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다.(22절)
셋째,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국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열방에 서도 인정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다.(23절)
에스겔 36:24-25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체화될 수 있는 ‘외적’ 세부 내용들이 열거된다. 먼저 열국에서 취해 내신다. 그리고 고토(古土)로 데려가신다. 정결의식을 통해 더러운 행동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들을 깨끗하게 하신다.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이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한다. 이는 본질에서 옛사람의 삶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本意)처럼 옛사람을 떠나야 한다. 이것이 회복의 전제조건이다. 옛 것과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적극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하기 위해 26절 이후부터 본격적인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회복의 ‘내적 요소’들이 제시된다.
먼저 하나님의 신(神)을 내주케 하신다.(27절) 이로 인해 ‘새 영(靈)과 새 마음(心)’ 곧 거듭난 새 성품(性稟)을 소유하게 된다. 27절에서는 26절의 새 영을 주신 목적이 설명된다. 곧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롬 8:3,4) ‘옛 언약’ 하에서는 이 부분이 결핍되어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을 가리켜 ‘낡아지게 하신 것’(히 8:13)과 ‘개혁할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히 9:10)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실체를 위한 모형의 역할이다.
이런 식으로 에스겔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순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임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화시켜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동일한 하나님의 신적(神的) 기원을 갖기 때문에 당연히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이다.
35절에서는 회복된 가나안 고토가 마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회복될 것을 지적한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향하는 바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목적 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를 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의 성격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원리에 입각해 아담의 ‘창조 언약’, ‘여자의 후손 언약’,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 산 언약’과 ‘다윗 언약’의 갱신 및 발전적 확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에스겔 36:28에서 ‘새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선언적 말씀 속에서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확인된다. 이 말씀은 언약의 핵심적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사실과 임마누엘의 궁극적 완성인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29-38절에 기술된 ‘환경’의 회복기사 내용에 앞서 26-28절에 소개된 하나님의 신(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남과 영적 회복 및 이로 인한 순종의 발휘 기사를 소개함은 환경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한다.
그렇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당초 에덴동산의 천상적 환경은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보장받는다.(창 3:15, 롬 8:19-21) 지금 에스겔의 ‘새 언약’의 일차적 강조점이 하나님의 신(神)의 내주와 후원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들의 영적 회복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신(神)의 내주와 역사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새 영과 새 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에스겔의 ‘새 언약’(겔 36:26-28)의 내용은 에스겔서 37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특별히 에스겔 37:26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속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이 ‘화평의 언약’ 또한 내용적으로 아담의 ‘창조 언약’과 ‘시내 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갱신과 확대를 지향한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 31:31-34)의 내용이 그랬듯이 동일하게 신적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견지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할 새 신(神)(겔36:27)으로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에스겔은 이를 소위 ‘마른 뼈의 소생’ 사건을 통해 설명한다.(겔 37:1-14) 이는 ‘마른 뼈’를 통해 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영적 상태를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도 철저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현재적 영적 상태를 말이다. 이런 사실은 절대 타자(他者)로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소생(蘇生) 불가능한 절망의 상태를 극명히 기술함에 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단지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진 진흙 덩어리가 생령(生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창 2:7) 그렇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마른 뼈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먼저는 사람의 ‘외적 형태’를 갖춘다.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뼈 조각들이 상합(相合)하고 연락(聯絡)해 서로 맞춰진다.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지막으로 가죽이 덮인다.(겔 37:7,8) 이제 완연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생명이 없다. 아직은 죽어있는 시체나 다름없다.
다음으로 ‘생기(生氣)’가 불어넣어진다. 그러자 죽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즉시 소생(蘇生) 한다. 에스겔은 살아난 사람들을 군대(軍隊)라 칭한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설명해 주신다.(10,11절) 이는 남북이 연합된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 말한다.
이어서 보여주신 두 막대기의 상징적 비유(15-17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주신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神) 곧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고토(가나안)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부연해 약속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체화시켜 천명하신다.(12-14절)
다음으로 에스겔 37:15-28까지의 내용은 통한 ‘두 막대기’(15,16절)의 묵시적 비유를 통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정치적으로 통합돼 한 나라를 이룰 것(17절)과 이들을 가나안 고토로 인도해서 한 왕에 의해 영원히 다스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 보다 진전된 ‘하나님 나라’ 언약의 계시 내용이다. 이 약속을 소위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영원한 언약’(26절, 렘 32:40)이라고 한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문(겔 37:15-28)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 임금이란 다름 아닌 참 다윗 왕을 가리킨다. 곧 복권된 다윗 왕이 신(新) 다윗 왕조인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영속적인 보전(保全)을 가리킨다.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된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는 궁극적 구원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궁극적 안식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회복된 에덴동산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간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역사와 이로 인한 순종력(順從力)의 발휘 및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계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다름 아닌 재(再) 창조로서 에덴동산의 회복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1-3, 2:17, 3:6, 3:15)
이런 식으로 가나안과 에덴동산은 구속사의 경륜(經綸) 속에서 동질성을 함의(含意)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천상의 도성을 동일하게 지향한다.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고 성소(聖所)를 저들 가운데 둠으로써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을 약속하신다. 이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한다.(계 21:3) 그리고 이 사건은 성소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된다.(요2:19-21, 고전 3:16, 6:19, 12:13)
따라서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 31:31-34)과 더불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가 보장된다. 이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과 ‘새 언약’은 동일한 목적의 다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최종 목표로 삼아 진행된다.
3.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
셋째, 이사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이다.(사 40:-66:) 이사야(BC ?-681)는 예레미야(BC 628-586)와 에스겔(BC 595-572)이 포로시대 선지자로 활약한 것에 비해 포로기 전(前) 선지자로서 유다의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에 걸쳐 예언 활동을 한 문서 선지자이다. 남 유다 왕국 역사에서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와 군사의 격변기였다. 즉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 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키며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스라엘 전(全) 역사의 진행 형태이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 이어 가나안 실지(失地) 정복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사사기서에서 구속사 진행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순환 패턴(구원-타락-심판-회개)을 확인할 수 있다.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기록에 유다의 언약 파기(破棄)와 배역(背逆)의 죄악상과 관련해 원색적인 독설(毒舌)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지 사역을 시작한다.(사 1:24, 28-31) 그러나 이사야 1장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정화(淨化)의 차원에서 언약의 심판 성격을 띤다. 그러기에 심판의 예언 중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수반된다.(사 1:25-27)
이사야는 1장에서 먼저 과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재 유다의 패역에 대한 책망을 기록한다.(사 1:2-9) 유다는 그 죄악상의 격심함과 이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런 비교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은 이들 중 소수(小數)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심으로 아주 멸하시지는 않는다.(사 1:9) 이는 언약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이다.
앞서(사 1:2-9) 유다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며 책망하던 이사야는 이사야 1:10-17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죄악상을 지적한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유다의 범죄가 제의(祭儀) 영역에서부터 비롯됐음을 강조한다. 이는 당시 유다의 국가적 정체성이 내외적으로 심각히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 형식적으로나마 여전히 신정왕국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사의식(祭祀儀式)은 ‘시내 산 언약’에 근거해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제의(祭儀)에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시적(限時的)으로나마 대속(代贖)의 사죄(赦罪)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된다. 당시 이런 방식의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實體)로 성취될 구속사역의 예표(豫表) 성격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正)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만을 습관적으로만 반복했다. 나아가 이런 가식적인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심리를 발동시키기까지 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제사의 본질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BC 722)과 남 유다 왕국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는 유다 인들에는 경악할 일이었다. 이런 영적(靈的)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또 어용(御用) 선지자들에 의한 왕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때때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적잖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적극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혐오(嫌惡)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형식적인 예배 행위를 신랄히 정죄하셨다.
이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성애(父性愛)의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회개를 촉구한다.(사 1:18) 참으로 언약 백성의 특권이란 그들의 죄가 아무리 무거울 지라도 충심으로 드려지는 회개를 통해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다시는 기억됨이 없도록 영원히 도말해 주신다는 사실이다.(히 10:14-18)
이제 이사야는 이사야 39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다. 그렇다. 사역의 초기부터 유다의 범죄와 타락상을 책망하며 줄곧 심판을 경고해 오던 이사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이 당시 대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될 것임을 선포한다.
이사야 39장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침공과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는 이사야 40에서부터 66장까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의 내용을 예언한다. 이런 이사야의 ‘새 언약’ 속에는 비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까지 포함하고 있다.
먼저 이사야 40:1,2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메시지와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신다. 이는 다름 아닌 곧 다가 올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적 회복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이 선포된다. 이사야의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이다.(사 40:2)
예레미야의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의 때가 거의 찼다는 것이다.(렘 25:11, 29:10) 이제 가나안 고토로 포로귀환과 이로 인한 회복의 때가 다가온다는 얘기이다.(사 14:1, 겔 37:21) 이는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비교되기도 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제2의 출애굽 사건을 제1의 출애굽 사건의 실체로 암시하면서 포로귀환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동일한 계시적 관점에서 취급한다.(렘 23:5-8)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갖는 ‘새 언약’의 계시적 의미가 결국은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공동체와 불가분의 계시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게 됨을 가리킨다. 이때 두 공동체간 계시의 연속성이란 언약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성의 원리와 관련해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모형과 실체라는 관계성을 갖기 때문이며, 계시의 불연속성이란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반면에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갈 3:7,29, 롬 9:6-8)
따라서 이사야의 ‘새 언약’은 단순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만이 아니다. 이사야 43:19에서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집행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회복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의 경륜을 실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시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의 신(神)을 부어주신다.(사 44:3) 다음은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사 43:25) 이미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사 40:2, 44:22) 구약의 역사 속에 이런 일은 예표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가능했다. 그러나 이사야의 ‘새 언약’ 안에서는 보다 진전되고 확대된 구속사의 경륜이 집행될 것이다.(사 48:6,7) 그뿐만이 아니다. 파괴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사 44:28) 및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신다.(사 46:13)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렇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 및 시온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곧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화된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고레스(Cyrus the Great, BC 600-530) 왕(메데-파샤)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질 것이l다.(사 45:1-7)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판도 속에서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 부은 종으로 삼아 새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천명하셨다. 여기서 고레스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명(指名)하여 부르심은 그만큼 ‘새 언약’의 집행이 확실하며 사실적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역사의 주관자가 천지(天地) 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극명하게 현시하시는 대목이다.(사 40:5-7) 이 예언적 약속의 말씀은 에스라 1:1-4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어서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더 진전된다. 절정(絕頂)을 향해 달려간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통치적 왕권을 가져올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한다.(사 52:7) 그는 처녀에게서 잉태될 것이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컫는다.(사 7:14) 그의 본체와 속성은 하나님과 동일시 여김을 받는다.(사 9:6) 그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며 친히 참 다윗 왕으로 통치하신다.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될 것이다.(사 9:7, 32:1, 55:3)
더하여 다윗 왕으로 오실 구원자는 이새의 계보를 통해 오신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이다.(사 11:1,2) 이런 사실은 야곱이 임종에 즈음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예언적 축복을 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선언한 복의 내용 속에서 이미 확인되었다.(창 49:10) 이런 식으로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메시아의 가문으로 택정을 입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새 언약’이 성취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왕적 통치하에서 모든 피조물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난다. 허무한 데 더 이상 굴복치 않는다.(롬 8:19-23) 마치 회복된 에덴동산처럼 본래의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게 된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와 새 창조의 시대가 도래(到來) 하는 셈이다.(사11:6-9)
그러나 이런 새 시대는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근거해 본격적으로 출현한 교회시대를 거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런 식의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선언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그 진정한 실상(實像)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의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성격도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보다 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초림의 사역 및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재림의 사역까지를 포괄적으로 망라해서 전망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렇다. 성도의 지상(地上) 생애가 이렇게 오묘하신 하나님의 전(全)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호리(毫釐) 만큼의 차착(差錯)이 없이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섭리로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가장 큰 믿음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의 도래는 왕적 메시아의 신분(사 52:13,15)으로 확인되기 이전에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이사야의 ‘새 언약’이 간직한 구속사의 특징이다.(사 52:14, 53:1-12) 이는 동일한 메시아에 대한 이중적 예언이다.(사 52:13,15절과 14절의 비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먼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기에 마치 겹쳐진 두 산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서 하나의 산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각축장(角逐場)을 방불케 하는 가나안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자연히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이 당연하다 하겠다.
이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보자. 구원자로서 종의 승귀(昇貴, exaltation)와 함께 고난 받는 종의 처참한 비하(卑下, humiliation)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먼저 예고한다.(사 52:13-15) 이사야 53장에서는 종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끝내 싫어 버림을 받게 된다.(사 53:1-3) 그 종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는다. 그는 찔림을 받는다. 그는 심한 상처를 입는다. 그는 징계를 받는다. 그는 채찍에 맞는다.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사 53:8,9)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오직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독생자의 대속(代贖)의 고난이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애매히 당하시는 고난이다. 헌신적인 희생의 고난이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대속하여 짐지게 하심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영광스러운 고난이다.(사 53:4-6)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부활과 하늘 보좌로의 승귀가 보장된 대속의 죽음이다.(히 12:2, 롬 8:34) 결국 하나님은 고난의 종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며, 만인의 무릎을 그 분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이다.(사 53:10-12, 52:13,15, 빌 2:9-11)
나아가 이사야 61:1-3의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메시아 사역의 구속사적 성격을 이스라엘의 희년(禧年) 절기(레 25:10,11)의 종말론적 성취로 설명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의 성격이 이사야 61:1-3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하심으로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고난의 종 된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암시적으로 증거 하셨다.(눅 4: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새 언약’의 내용들을 특별히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이들이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다윗 왕조의 복권이 남 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복권은 미래에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현한 새 이스라엘로서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자연히 ‘아브라함 언약’, ‘시내 산 언약’, ‘다윗 언약’을 총체적으로 포괄(包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을 통해 성취의 실상을 드러내게 된다.(눅 22:19,20) 히브리서 기자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 진술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히 10:12-18)
제4장 신약의 ‘새 언약’ 사상
1.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
(1)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 구약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했다.(마 1:1)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되어 온 참 자손(창 22:18, 행 3:25,26, 갈 3:16, 삼하 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 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名實共)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한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므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민족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눅 24:27,44)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증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族譜)를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족보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 기록은 구약의 예표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의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했다.(마 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이었다.
이 점에 있어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눅 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이다.(눅 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족보의 기술(記述)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 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 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이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보다 구속사의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의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移住)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주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이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 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온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興旺期), 쇠퇴기(衰退期), 회복기(恢復期)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 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기술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 사상인 ‘여자의 후손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 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봄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오셨다.
마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의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 중보 (仲保) 사역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한 중보자로서 죽기 위해 오신 분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贖罪) 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이다.(요 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보았다.(사 52:13-15, 53: ) 하나님은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셨다.(사 53:5,6) 그 분의 이러한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되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 9:12,13, 막 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罪責)의 사면(렘 31:34) 및 죄의 도말(塗抹, 사 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대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赦罪)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先取的)으로 보증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이다.(렘 31:34)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의 성취자로 오셨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사역뿐만이 아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했다.(마 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에 의한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곧 구약의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 25:8)가 성막의 실체(實體)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 했다.(요 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시는 역사(고전 3:16, 6:19, 갈 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되어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 가운데 주관해 가신다.(욥 23:10) 그렇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의 생명과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신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 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 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 핵심 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이다.(계 21:3,7)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 사상과 신학적 상응성(相應性)을 띠게 된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언약하신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새 이스라엘(교회)의 머리로 오셨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았다.(마 2:1,2,11)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암시적으로 증거 한다. 곧 예수님은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다.
헤롯의 살해 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 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한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의 계시 안목으로 재(再) 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에 적용시킨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피신 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 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된다.(마 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된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신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의 금식 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시험 당하신 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한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과 첫째 아담의 시험 당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 하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험(先驗)적 효과를 가져 온다.
(2)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 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신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의 의미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이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다.(마 2:23)
마태는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한다.(마 3:1) 사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인다.(막 1:1-8, 눅 3:1-17, 요 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과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 하는 선구자로 구속사의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세례 요한의 출현
마태는 마태복음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한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이사야 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마 3:3)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 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헤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다. 이는 대부분 구약 선지자들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의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 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시기가 바로 마태복음 3:1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이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한다.(마 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 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킨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이다.(눅 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하나님은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신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다.
-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심
마태복음 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마태복음 3: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준다.
지금까지 은거(隱居) 해 계시던 참 다윗 왕 (예수)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 되었고 그 왕의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직접 인증(認證)하시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의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시는 사건이 소개된다.
먼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는가?
마태복음 3:15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이 굳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로 되어 진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義)’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 요구의 성취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 먼저 주님이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선구자로서 요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 둘째로 주님과 죄인들을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후 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책(罪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贖良)하시고자 대신 죽기 위해 스스로를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 의식은 단순한 성례전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 셋째 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위에서 ‘모든 의(義)’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 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태복음 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태복음 4:17부터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된다.
- 하늘 아버지의 재가(裁可)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사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이다. 특별히 요한복음 1:31-34에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授與者)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이렇다.
- 첫째, 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이다.
요한의 사역은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요 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 번 공인된 셈이다.
- 둘째, 예수님의 메시아 직무의 시작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 행사로 들어갔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메시아의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진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이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公證)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이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이 충만한 분이시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이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하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의 인성(人性)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과 능력과 복음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이다.(마 12:28, 눅 4:18, 행 10:36-38) .
- 셋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水洗) 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행 2:38)
- 넷째,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 광야로 나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마 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시험 받으신 사건이 동일한 성령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예수님이 마태복음 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그렇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 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마 4:1, 막 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 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다. 또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요일 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 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한다.(마 4:1) 여기서 ‘그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마태복음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 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 사건을 가리킨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인가?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는가?
먼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이다.
-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다.(창 2:16,17)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즉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義)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惡)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세기 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이다.(롬 5:12)
예수님도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이다.(롬 5:14, 고전 15:45, 막 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서의 대속(代贖)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신다.(행 4:12, 히 4:14-16, 벧전 2:22, 고후 5:21)
- 다음 두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도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 7:38)으로 광야 40년의 시험을 받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 8:2)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민 13:1,2, 25-26)은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시고는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같다.(창 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계시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攝理)의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비하(卑下)한 반면(민 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그들을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다.(민 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의 자세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민 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의 불신에 대한 심판의 일환일 뿐이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신 1:3)
지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또한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이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이다.(신 8:3,16,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신다. 구속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그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이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 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 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豫表)로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동일한 구속사의 원리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 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시게 된 것이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초점이 모아진다.
그렇다. 세 번에 걸친 사단의 시험(마 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이후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의 준비를 마치셨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같은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하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관계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로서 구원 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義人)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하나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塗抹)이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킨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동산의 당초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공히 약속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 재차 확약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동안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 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데서 발견된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예레미야 30:22에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언급되고 있듯이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한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암시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말이다.(계 21:3, 엡 2:14-16) 이제는 더 이상 구약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 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하나님의 신(神)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영’과 ‘새 마음’의 변화 곧 전인적인 거듭남에서 찾을 수 있다.(겔 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 귀환을 시도하셨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한 성전 재건도 시도됐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의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여전히 일삼았을 뿐이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기록 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인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약교회 공동체의 출현이다.(마 16:16-21)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로서 신약교회 공동체는 어떤 방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누가는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는 것으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롭게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가운데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하시는 내용을 기술했다.(눅 22:14-20) 이 말씀에서 유월절 예식은 분명히 성찬식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예표적 본의가 성찬식의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을 시사한다. 때문에 모형과 예표로서 유월절 예식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예표가 실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죄(赦罪)와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된다.(엡2:8,9, 1:7, 롬 3:22-24, 8: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양자) 그리고 ‘후사’(後嗣) 등으로 부른다. 이들을 집합적으로 부르면 바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새 사람 곧 하나의 천상(天上)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엡 2:14,15, 1:23, 4:12, 골 1:18)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출현은 성찬식에 암시 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천상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마 16:16-21) 상황이 이럴진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사역의 결과로 출현하게 된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天堂) 내지는 천국(天國)의 장소 개념이 아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 정체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이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 나라’를 밭에 감춰진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도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마 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天上)의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受納) 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逐邪) 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된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이다.(마 12:28, 눅 11:20) 예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한다.(마 4:11, 12:29, 요일 3:8)
물론 그 외에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명백한 증거(사 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 한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 9:1-8, 막 2:1-12)은 다른 치유 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 주시고 후에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풍병(中風病)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 해 준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미 도래한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즉 재(再)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실천적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수혜자(受惠者)로 하여금 시혜자(施惠者)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마련이다.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약 2:2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수납된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는다. 때론 사람들에 의해 부인되기도 한다. 심지어 거절당하기도 한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르다. 예외이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았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이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 있게 증거 된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질로 기능한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마 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이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의 정체성을 가시적(可視的)인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 및 대립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神政) 통치가 비록 예표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마 13:39-41,49,50, 눅 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의인은 복락(福樂)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이다. 영벌(永罰)의 지옥과 영생(永生)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마 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하시고”(눅 22:14-18)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다. 이 말씀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이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 5:7)의 대속의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이다. 성찬식 제정 경위(涇渭)가 이렇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18절)고 다짐하셨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 구원과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다. 이때 예수님은 축사(逐邪)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셨다.(눅 11:20, 마 12:28)
그렇다. 귀신을 내어 쫓으신 사건은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언급 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 하신 사례이다. 이 외에도 예수께서 죄(罪)를 사하시고(막 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 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이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셨다.(눅 22:18) 일의 전말(顚末)을 살펴보면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과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시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씀한 것이다. 즉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이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구원 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 노릇 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했다. 체질(體質)이 근본적으로 갱신(更新) 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계 21:4) 지금 예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2-25) 이 말씀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신다.
여기서 인자(人子)란 구약적인 표현으로(단 7:13,14)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人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했다.(계 14:14-16, 마 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 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永罰)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마 25:41-46)
누가는 이 인자(人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들었다.(눅 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태복음 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이며 또한 가시성(可視性), 즉각성(卽刻性), 보편성(普遍性)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초림(初臨)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는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 전 우주적으로 오신다. 각인(各人)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두려움과 원통함에 애곡하게 될 것이다.(계 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의 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이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基業)으로 상속해 주실 것이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마 25:32-33,41)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이다.(계 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先取的)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戰鬪)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엡 6:12)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능력 있게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확인 된 내용들이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 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의 유기체(有機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전 12:13, 엡 1:23, 5:30, 골 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양자(兩者)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 은닉 사상’(마 16:16,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셨다.(마 16:18)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 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 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셨다.(마 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이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마태복음 16:16에서 보면 천국 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된다.(마 16:18,19)
다시 말해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해 전파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또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中繼者, 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눅 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 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롬 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 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한다.(엡 2:14,15, 행 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이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同一視)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異質性)이 발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 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顯示)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양자(兩者)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다.”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이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종착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近似値)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 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이다.(롬 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하나로 통일될 것이며 동일시 될 것이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상적 나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신서 기자들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빌 3:20)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골 1:13)들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의존적인 관계상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천상의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귀속될 것이다.
마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 자체 속에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증하는 통전적(通全的) 주제이기도하다.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의 편집 구도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 사상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 해 준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려고 할 때 언약의 구속사란 관점은 성경의 본의를 밝히는 최선의 해석의 틀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해석의 관점이며 구조적인 틀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성경해석의 객관적 증거를 특별히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 언약’(문화명령), ‘선악과 언약’(아담언약), ‘여자의 후손언약’(원시복음)에서 발견되는 신적 언약간의 상호 불가피한 의존적인 관계성과 연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 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상의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마 6:33)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구속의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런 사실이 신적(神的) 언약의 총화(總和)요 모든 언약의 결국인 ‘새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를 지향하는 일과 관련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 안에서 언약적 구속사(救贖史)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총체적인 계시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데서 비로소 그 가능성과 실현성이 일차적으로 보장된다.
바라기는 본 강론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What the Bible Says)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적인 바른 신앙관, 바른 교회관, 바른 목회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 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2,3)(*) 글쓴 이 / 서철원 박사(역사신학,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석사,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신학박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및 신대원장 역임, 주요 저서, ‘하나님의 구속경륜’, ‘복음과 율법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 ‘기독론’, ‘성령신학’ 외 다수) 신학박사 학위논문, ‘예수그리스도의 창조-중보직’(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 1982)
< 편집자 주 > 원 제목 :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대부분 고어체로 서술되어 있는 원문을 편집자가 현대어로 다시 편집하였음을 부언(附言)하여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