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기 역사 메시아 초림의 여명(黎明)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계 22;16)
신구약 중간기 역사
메시아 초림의 여명(黎明)
70년 바벨론 포로시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BC586)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앙을 전적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 지역의 종교와 정치에 흡수될 것인가를 택일해야만 했다. 하나님만 전적 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율법에 유의해야 했고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적으로 모일 수 있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회당에 모여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포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항은 ‘디아스포라’, ‘회당’, ‘서기관’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대인들(BC586)
1. 디아스포라
(1) 디아스포라 명칭
하나님의 선민으로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그의 법도를 무시하고 방종하다가 모세가 신명기에서 수차 경고한 대로 마침내 이방인의 발아래 짓밟히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저 위대한 탈출 사건인 출애굽 이후 살아오던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렇게 포로로 잡혀가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을 일컬어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diaspora)이라고 한다.
(2) 디아스포라 분포 범위
애초에는 앗수르(Assyria)와 바벨론(Babylonia)에 의해 사로잡혀 간 자들이 디아스포라의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 외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자발적 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시리아(Syria), 이집트(Egypt), 파르티아(Parthia) 등지는 물론 소아시아를 넘어 이탈리아(Italia)와 서방세계까지 그들의 거주 지역이 확장되어 갔다. 더욱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된 이후 로마제국에 의해 강제로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더불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처에 두루 퍼져 독특한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다.
(3) 디아스포라의 특징
대부분 경우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누렸을 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적인 면에서도 본토인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민족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전세(聖殿稅)를 납부하거나 성지 순례를 떠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분산된 유대인들은 민족 고유의 전통적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우수한 헬라사상(Hellenism)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방인의 유대교로 개종(改宗)시키는 사역에도 어느 정도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4) 디아스포라의 의의
디아스포라는 땅끝까지의 복음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예비 된 일종의 교두보(橋頭堡)였다. 특히 기독교 예배당의 전신에 해당하는 유대인 회당(會堂)은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했던 셈이다. 그리고 디아스포라에 의해 구약성경이 ‘헬라어 70인 역’과 아랍어(탈굼역)로 번역되었는데 ‘70인 역’ 성경은 초대 교회 유일한 성경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2. 유대인 회당
(1) 회당의 기원
바리새파(Pharisees)의 기원과 동시에 회당(會堂, Synagogue)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이거(移居) 한 후 성전을 대체하며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성전 중심의 예배를 대체하여 회당에 모여 토라와 율법을 연구한 것을 회당의 기원으로 본다.
회당에는 제단이 없으므로 희생 제사 드리지 못하는 대신 기도와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회당은 중심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 유대인 거주지에도 늦어도 1세기까지 회당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사도행전 6:8,9에 의하면 각 회당 중에는 리버디노(해방 된 자, 자유인들)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약 480개에 달하는 회당이 있었다. 회당의 구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각 회당은 율법 두루마리를 담는 상자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계단 입구는 예루살렘 쪽으로 내었고 동편에는 베마(Bema)라는 강대상이 있어 이곳에서 성경 본문이 읽혀졌다.
주로 휘장이나 1층, 2층으로 나누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도록 하였다. 회당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 남자가 10명 이상 모여야만 가능하였고 10명 이하일 때는 기도처로 사용했다.(행 16:13, 빌립보 기도처) 회당 공동체의 목적은 예배, 자녀(소년) 교육 그리고 장로의 책임 아래 치리(治理)에 있었다.
먼저 자녀들의 교육은 주로 본당에서 이루어졌다. 본당이 교육관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회당의 본질적 목적이 교육임을 알 수 있다. 3세기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회당을 ‘책의 집’(낭송의 집)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미쉬나(Mishna, 랍비들의 전승) 연구를 위해 회당을 지었다고 되어있다.
(2) 회당의 기능과 직원
① 회당장
회당장은 상임 직원(질서 유지, 소란 제거가 임무)으로 토라(Torah, 모세오경) 낭독과 예언의 낭독 그리고 강론을 하는 것이었다. 회당 예배를 위한 성직(聖職)으로 임기는 1년이거나 때로는 선거를 통하여 평생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② 핫잔(Hazzan)
부(副) 회당장 격인 핫잔(Hazzan)은 치리자(治理者)의 보조 역할로 회당장을 보조하고 율법서 봉독 자에게 두루마리를 갖다 주고 돌려받는 심부름을 감당하며 회당장의 행정적 보좌역이다.
③ 전언자
전언자(傳言者)는 기도문을 크게 낭독하는 사람이다. 전언자의 낭독을 회중은 복창(復唱)한다. 관례상 회당장이나 핫잔이 전언자를 지명한다.
④ 쉐마 선포자
쉐마(שֵׁמַע, Shema) 선포자는 쉐마와 축복을 낭독한다. 쉐마란 성경에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시작되는 성경 구절로 이 쉐마를 이스라엘 민족은 기도문과 암송문으로 만들어 매일 암송했다.
⑤ 공인 성경 해석자
유대인 성경 해석자는 성경 번역과 구약의 히브리어를 회당이 있는 지역의 언어로 해석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 번에 3절을 읽고 해석(번역)하면 그것을 받아 문자화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규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에게 주어지는 성경 해석 자격과 같다.
3. 서기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깊은 율법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계급 즉 서기관(書記官, Scribe)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기에 각개 회중들은 자신의 성경 사본(寫本)을 구해서 구약 그중에도 율법을 베끼는 전문가들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성경학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서기관의 유래이다. 서기관의 대표적 인물은 에스라(Ezra)이다.
그런데 서기관은 흔히 율법 교사 혹은 교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갈릴리와 유대 각 지방에도 흩어져 있었다. 한편 서기관이 신약 성경에는 율법 학자와 권위자로 묘사되어 있다. 신약의 서기관은 제사장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대부분 서기관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어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막 2:16),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행 23:9)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 등에 힘썼다. 또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랍비 교리에 의한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후에는 현인(賢人) 또는 랍비(Rabbi)로 알려졌다. 그러나 제사장 파와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율법의 전통적 관례들을 어기고 무시했다고 해서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했다. 신약 시대 이후에 서기관들은 어린이들의 교사와 법률 문서의 구성자가 되었으며 ‘현인’과 ‘랍비’라는 명칭들은 율법 학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4. 포로 시기의 의미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시기는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겨’를 이스라엘로부터 까불러냈다. 바벨론 유수(幽囚)이래 한 번도 유대인은 우상숭배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들 안에 ‘메시아 대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기 시작했다.
선지자들이 가끔 ‘메시아’를 언급했으나 백성은 거의 유의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실재적 임재가 없는 성전으로 인해 그들은 계속 그들의 종교에 무엇인가 결여가 되어있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진지하게 ‘메시아의 오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5. 포로귀환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II. BC600–530)는 주전 559년에서 530년까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70년간 포로 생활을 할 것을 예언했다. 유대인들은 주전 605년에 1차로 바벨론에 잡혀갔고 1차 귀환은 주전 536년에 이루어졌으며 포수(捕囚) 기간은 70년이 된다.
고레스 왕은 그의 조서를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한정시키지 않고 옛날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왔던 이스라엘 열 지파의 후손들도 포함 시켰다. 북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경험한 지 이미 이 당시 200여 년이 흘렀다. 조서에 대한 반응은 예상치에 미치지 못했다. 열두 지파 중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족장들만이 큰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 열 지파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비롯한 몇몇 지파에 속한 열심 있는 사람들은 귀환에 참여했다. 대다수 유대인은 페르시아에 남아 있기 바랬던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대한 처우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여호와의 선민으로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보다는 현세의 안락에 더 안주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왕 호의로 포로귀환이 시작되고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이 민족적 존재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구속사의 진전인가! 그러나 역사의 궁극적 의미보다는 피상적 현실에만 국한되는 인간의 애매한 시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또다시 영적 헤이함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민족적 골격은 갖고 있었으나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스러운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페르시아, 마게도냐(헬라), 로마 등 이방의 열강들 손아귀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특히 주전 400년경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적 권위를 가진 예언이 중단되어 심지어 구속사(救贖史)의 맥락마저 끊어진 듯한 정도로 영적 고갈 상태가 지속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신음하는 민중들 사이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참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이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암담한 상황 가운데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이다.
메대와 페르시아 제국 시대 (Media & Persia, BC559-330)
주전 586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바벨론제국’(Babylonian Empire, BC605-539)과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 BC559-330) 사이에는 피정복민에 대한 정책에 큰 상이점이 있다. 바벨론제국은 피정복민을 바벨론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또 피정복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정책을 폈다. 반면에 페르시아제국은 바벨론에 의해 잡혀 온 포로들의 귀환을 장려하였고 민족의 전통을 용납하는 등 피정복민들의 충성심을 유도해 내는 유화 정책을 썼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 중 유대인들의 생활은 비교적 평안한 편이었다.

성경에 메대(왕하 17:6)와 바사(대하 36:22)로 불리는 주전 5세기 메대와 페르시아제국 군대의 모습, 상단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부조도 보인다. Apadana Hall, 5th century BC carving of Persian and Median soldiers in traditional costume (Medians are wearing rounded hats and boots)
고레스(Cyrus II. BC600–530) 황제가 예루살렘으로 귀국과 성전(聖殿) 재건을 허락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이 귀국하였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대로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리오 대제(Darius the Great or Darius I, BC550-486) 때 성전 재건을 끝마쳤다.(스룹바벨 성전) 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대 백성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굳게 세우려고 노력했다.
느헤미야 이후에도 약 1세기 반 동안 페르시아 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종교와 제사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받고 있었다. 이때 유대를 다스린 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제 직분과 정치적 공직의 겸임은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날 무서운 암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제사장직을 놓고 시기와 음모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느 12:22)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사마리아 : 사마리아는 앗수르 제국의 남자 강제 이주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방 민족을 이주시킴으로 이스라엘 여인과 이방인 남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엄격한 분리 정책은 이들의 감정을 자극했고 그들 나름의 독립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들은 그리심 산에 그들 나름의 성전을 세워 그들끼리 예배를 드리게 된다.(신 11:29) 그러므로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 산보다 그리심 산을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심 산의 성전은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sty)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1)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개심은 최고로 고조되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와 사마리아는 서로 전혀 교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갈릴리의 유대인이 예루살렘 지방을 방문할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빠른 길 보다는 요단강 동쪽으로 우회하는 우회 도로로 다녔다.(눅 9:51-53)
페르시아가 그리스 참략 전쟁에 실패하자 피정복민들은 독립을 쟁취하려고 동요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 온 반면 유대는 지리적으로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예속을 피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3세(Artazeres Ⅲ) 때 많은 유대인이 페르시아에 대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 정부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로 유형을 보냈다.
그리스제국 시대 (Greek Empire, BC 334-166)
그리스문화(Hellenism)의 영웅인 마게도냐(Macedonia)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356-323)은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권력에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의 제자인 그는 헬라문화야 말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Alexander the Great(BC356-323) on the mosaic from the House of Faun in Pompeii, c.100 BCE, possibly based on a lost Hellenistic painting by Philoxenos of Eretria, The Battle of Issus, c. 315 BCE,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Naples. / From Steven Zucker at flicker, Creative Commons
주전 333년 그는 마게도냐(Macedonia, 사도 바울의 유럽 첫 선교지, 행 16장)에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 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남부를 통과하여 이집트를 정복했다. 유대인과 마게도냐 정복자 사이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로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피정복민과는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구출해 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다시 되밟아 올라가 계속 동진하여 인도 펀잡(Punjab)까지 정복해 갔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승리거니와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은 그 통치 방식보다는 헬라문화(Hellenism)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각 지방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헬라문화를 좇아 생활 질서 전체를 갱신시키는 본보기가 되었다.
실제적 의미에서 볼 때 도시 건설이란 곧 생활 방식을 헬라적으로 변화시킨 웅장한 건물과 체육관 야외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은 헬라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헬라어 의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온 세상이 헬라화 되어갔다.
헬레니즘의 물질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매혹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상인 계층에게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높은 수준의 주거 방식과 식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 수준의 향상을 주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헬라문화의이 겉모습에 만족하였고 기꺼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장해였다고 하면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이 당한 가장 큰 유혹은 당시 세계를 휩쓴 헬라화였다. 많은 유대인이 스스로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조상의 신앙과 헬라식 지혜를 혼합하려 하였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스 반작용으로 헬레니즘에 반대하여 율법을 더욱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도 하였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夭折)하였다. 향후 수년 동안 근동의 미래가 불확실하였으나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계승하며 헬레니즘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었다. 광대한 그리스제국은 4명의 장군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으며 애굽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는 영토와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싸웠지만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서는 완전히 서로 일치했다.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 시대 (Ptolemaic dynasty BC303-198)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유대는 알렉산더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382-301)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곧이어 해방자란 뜻의 이름이 ‘소테르’라 불리는 다른 장군인 이집트의 프톨레미 1세(Claudius PtolemyⅠ, BC305-282)가 통치하게 되었다.
프톨레미 1세는 주전 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왕국의 중심을 둔 그는 처음은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많은 유대인이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도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대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Cleopatra II(ruled BC131-127) and Ptolemy IV(ruledBC 221-203) at left
프톨레니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308/309-246) 때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70인 역’ (LXX, Septuagint)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대에서 왔다는 72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팔레스타인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미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애굽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으나 지방 행정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통치 이래로 대제사장 책임하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 시대에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대제사장 시몬(Simeon the Just, BC310-291 or 300-273)이었다. 그는 프톨레미 1세 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으며 가뭄과 포위 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하는 수로 공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의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그러나 의인(義人) 시몬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역사적 문제로 남아있다. 시몬 1세로 알려진 대제사장이 3세기 중엽에 생존했고 시몬 2세는 주전 200년경에 실존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의인 시몬은 이 두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시대에 유대의 제사장 가문은 오니야(Oniah)가와 도비야(Tobiah)가 있었는데 이 두 가문 사이에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도비야가는 친 이집트파로 상류 계층을 대표했다. 이 도비야가는 느헤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관련되기도 한다.(느 2:10, 4:3-7, 6:1-19) 도비야가는 신약 성경에서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수세관(收稅官)이었던 것으로 사료 된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37-100)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야 2세가 프톨레 4세에게 바쳐야 할 조공인 은 20달란트를 거부함으로 그의 충성을 의심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도비야가 충신인 요셉이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세관 직무를 맡게 되었다. 수세관은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격을 갱신받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다녀와야 했다. 요셉은 프톨레미 왕조 시대와 그 후 시리아제국의 안티오쿠스 3세와 셀루쿠스 왕조 시대의 20년 동안도 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계속 누렸다.
시리아 셀류쿠스 왕조 시대 (Seleucid dynasty, BC198-165)
시리아의 통치자들을 셀루키드(Seleucid)라고 부른다. 왜냐면 알렉산더 제국을 계승하여 세워진 국가 중 하나인 그들의 왕국이 셀류쿠스 1세(Seleucus Nicator I, BC358-281)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초기 지배자들은 대부분 셀류쿠스나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은 오론테스(Orontes or Asi) 강의 안디옥(Antioch)을 그들 수도로 삼았다.
‘대제(大帝)’라는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 ruled BC223-187)는 주전 199년까지 이집트 톨레미 왕조와 수차례 전쟁을 했는데 요단강 발원지인 파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그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된다.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 새 장을 열어 놓았다. 그 이전의 프롤레미 왕조가 유대 관습과 전통을 용납했던 반면 셀류쿠스 왕조Seleucid dynasty는 유대인에게 헬레니즘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移植)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 중에는 헬라화를 지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제사장은 그의 고유 업무인 성전 제사의 주관보다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배 대표자로 변질이 되고 정복 국 황실에서는 돈이 필요하게 되면 유대의 대제사장을 주목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215-164) 치하의 대제사장은 율법 준수에 철저한 오니아스 3세(Onias III, BC185-175)였다. 그는 의인 제사장 시몬(SimonⅠ, BC280-260)의 후손 정통파 유대인이었다. 그는 당연히 헬라화를 지지하는 많은 제사장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들의 대표 격이던 야손(Jason, 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형제, BC175-172)은 황실에 거액의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으나 3년 만에 유대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안티오쿠스가 대제사장직을 정치적 권력으로 생각한 데 반해 경건한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직은 그 근원에서부터 신성한 것이며 돈을 주고 그 직을 매매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생각했다.
또 축출을 당한 오니아스 3세의 아들 오니아스 4세(Onias Ⅳ)는 이집트 톨레미 왕조에 망명하여 그들의 보호 하에 주후 154년 이집트에 성전을 건축하고 이집트 거주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편의를 제공했으나 찾는 이가 없어 유명무실한 성전이 되었다.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산 야손(Jason)은 헬라문화를 장려하였다. 경기장이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헬라식 이름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히브리적 전통주의는 반(反) 계몽적이거나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매도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이 성행하게 된다.(마카베오상 1:15, 고전 7:18)
그런데 열열한 헬라주의자 메넬라우스(Menelaus, BC172-162)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인데도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안티오쿠스에게 바치고 대제사장직을 받았다. 이후로는 사독 계열의 정통 대제사장이 소멸이 되고 대제사장직은 돈으로 사는 직위로 전락해 버렸다.
안티오쿠스 4세(Antiochos Ⅳ Epiphanes, BC215?-163)는 에게해(Aegean Sea) 지역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언제나 이집트 프톨레미의 지원 요청을 받은 로마에 의해 좌절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안티오쿠스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대제사장직을 잃은 야손이 다시 회복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에게 급히 도움을 구했다. 이집트와 대치하고 있는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효과적인 통제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원 요청을 받은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왜냐면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결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시리아 군대는 메넬라우스 반대 세력들을 다 학살하고 다시 한 번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임을 확증해 주었다.(마카베오상 1:1-24) 이때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정통 유대 신앙을 아예 일소해 버릴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리스 제우스(Zeus) 신(神)을 동격으로 여겨 턱수염 난 제우스 신상이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 건립되었으며 이 제단에 돼지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그리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유대의 절기를 지키는 일이 금지되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과 어떤 율법이든 지키면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런 가운데 메넬라우슨는 군대의 힘으로 대제사장직을 유지했으며 친헬라파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친헬라파들은 지나치게 극단에 흘러 옛 질서를 파괴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자신들의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난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이해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하나님 심판의 때가 신속하게 도래하리라는 믿음으로 율법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택했다.(마카베오 하 7장)
마카베우스의 반란 (Maccabeus Revot, BC 166-140)
이런 가운데 유대인의 헬라화에 반대하는 ‘모딘(Modein) 사건’이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안티오쿠스 4세(Antiochos Ⅳ-Epiphanes, BC215?~163) 사자(使者)들이 예루살렘에서 24㎞ 떨어진 모딘(Modein)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례대로 하스몬(Hasmone) 가문의 제사장인 맛티아(Mattathias, BC?-166)에게 자신들 앞에서 제우스신에게 제사 드려 유대 백성에게 좋은 본을 보여 줄 걸 요구했다.
맛타디아스가 이를 거절하자 겁 많은 다른 유대인이 대신 제사를 드렸다. 이에 격노한 맛타디아스는 그 배교(背敎)와 안티오쿠스의 사자(使者)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맛타디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제우스 제단을 완전히 파괴한 후에 보복이 두려워 광야로 피신했다.
그 후 정통파 유대인 중 ‘핫시딤’ 무리가 맛타디아스 일가와 합세 성읍의 이교도 제단을 파괴하거나 헬레니즘에 편승한 유대인들을 처형했다. 또 정통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 안식일에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맛타디아스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서는 안식일에도 적이 공격해 오면 싸울 수 있다는 새로운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중심이요 지도자였던 맛타디아스는 고령으로 혁명 초기에 사망했다. 죽기 전 그는 자기 셋째 아들 유다 막카베우스(Judas Maccabeus, BC?-160)의 지휘하에 혁명을 계속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명했는데 이 선택은 정확한 것이었다. 나날이 더 많은 유대인이 자발적으로 합세했다. 그리하여 시리아군에 대항할 만한 자체 군대가 이루어졌다.
유다 막카베우스는 누구보다도 전략에 뛰어난 인물로 숫적 열세에도 시리아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감행했다. 바카비 혁명군은 시리아군 장군 루시아스(Lysias)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예루살렘을 수복하여 입성(入城)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제단을 새롭게 봉헌했다. 이것을 기념해 유대인들은 매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the feast of the dedication)을 지킨다.(요 10:22, 마카베오상 4:45, 마카베오하 1:18)

막카베우스 혁명(Maccabeus Revot, BC166-140)은 주전 166년 시리아인들의 우상숭배 강요에 항거하여 모딘이라는 곳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사자들을 죽이고 우상의 제단을 허물어버린 사건(그림)이 발단되어 시작된 전쟁이다.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내 아크라 요새(Acra fortress)는 여전히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지배하에 있었다. 유다는 이 성채를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되고 이에 대항하여 루시아스는 더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한다.
그러나 시리아 내부의 정권 다툼은 루시아스의 군대를 철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고 이것은 유다를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한다. 루시아스는 명예로운 퇴진 명분을 얻고 유대인들은 종교적 자유에 대한 회복과 대제사장직이 회복된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유다 막카베오스를 따르던 많은 정통파 유대인에게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주후 162년 시리아에 데메트리우스(Demetrius I Soter, BC185-150)가 등극하자 예루살렘 내의 헬라화를 동조하는 자들은 시리아 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유다 막카베우스의 압제를 호소했다. 이것을 구실로 데메트리우스는 알키무스(Alcimus, BC162-159)를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그는 아론의 자손이었고 제사 의식이 율법에 정한 대로 회복되었다. 이 결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투쟁 목표들이 달성된 것으로 여겼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그러나 유다 막카베우스와 정치적 독립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시리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열망하여 대제사장 알키무스에게 대항한다. 이 전투 과정에서 주전 160년 유다 막카베우스가 살해당하고 그의 추종자들은 광야로 피신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제사장 맛타디아스의 막내아들이며 유다 막카베우스의 동생인 요나단 막카베우스(Jonathan Maccabeus, BC?-143)를 지도자로 세웠다.
요나단은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주후 160년 시리아가 세운 대제사장 알키무스 사망 후 요나단은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자신이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나 이러한 상황을 하시딤은 깊이 우려했다. 그러나 주후 143년 요나단 막카베우스 역시 시리아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그러자 맛타디아스의 둘째 아들이며 요나단의 형인 시몬 막카베우스(Simon Maccabeus, BC?-135)가 군사 지휘권을 이어받아 대제사장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시몬은 꽤 나이가 든 때였다. 그의 빛나는 승리는 외교에 있었는데 그가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1세(Demetrius I of Macedon, BC 337-283)를 시리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세금의 면제야말로 결과적으로 유대인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 되는 것이다.
또 시몬 막카베우스는 예루살렘의 아크라 성채(Acra fortress)를 점령하고 주둔해 왔던 시리아군을 굶어 죽게 함으로 욥바와 벧술의 모든 도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현명한 통치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시몬 막카베오스를 가리켜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이시니 이는 신실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 까지니이다.”라고 찬양했다.
그리하여 맛타디아스의 둘째 아들 시몬 막카베오는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라 하는 새로운 유대 왕조를 열게 되는데(마카베오상 14:44) 이는 그의 조상 하스몬(Hasmone)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하스모니안 왕조의 첫 번째 왕 시몬은 주전 134년 그 두 아들과 함께 권력의 야망에 눈이 먼 그의 사위에게 살해당했다.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BC164-104)만이 겨우 달아나 목숨을 건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시몬 막카베오의 치세(治世)는 성공적이었다. 왜냐면 그의 치세하에서 시리아로부터 독립이 성취되었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마카베오상 14:8) 이러한 시몬의 치세를 종말론적 때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으나 제사장들과 신실한 유대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에 반발했는데 그 이유는 시몬이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고 다윗의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스모니안 왕조’의 통치에 반발하는 율법을 독실하게 지키고자 하는 한 무리가 광야로 은거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이들을 ‘쿰란 공동체’라 부른다.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Hasmonean Dynasty, BC140-37)
시리아(Syria)는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종속(從屬)할 것과 시리아 군대 출정에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 1세(John Hyrcanus Ⅰ, BC164-104)의 왕위를 승인했다. 그리고 유대는 요나단과 시몬이 점령했던 일단의 지중해 연안 도시를 시리아에 양도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시테투스가 파르티아 전쟁(Parthian Wars)에서 전사하게 되었고 요한 힐카누스는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또 힐카누스는 1세는 용병을 이용하여 이두매(에돔)와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다시 점령 유대 영토로 귀속시켰다.
해안 도시 정복은 상인들에게 그들의 옛 상로(商路)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힐카누스가 이두매인들에게 종교적 일치를 종용한 것은 이두매 인들에게는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힐카누스는 또 사마리아에 출정하여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했다. 유대 군대의 승리를 민족주의자들이 환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초기 ‘마카비 혁명’ 때 가졌던 종교적 열성은 더 이상 확실하게 찾아볼 수는 없었다.
특히 하시딤 바리새파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대제사장직 겸직에 이의(異義)를 제기하면서 하스모니안 왕가와 심각하게 대립하게 된다. 그러자 하스모니안 왕가는 새로운 정치의 지지기반을 얻기 위해서 사두개파들과 손을 잡았다.
주전 104년 요한 힐카누스 1세가 사망하기까지 유대의 영토는 전 국경에서 확대되었다. 그러나 마카비의 투쟁의 의미는 이미 오래전 일로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경쟁자들이 권력을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도한 과거의 헬라주의자들은 마카비 혁명에서 배척당했으나 그들의 사상 역시 사두개인들 가운데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마카베우스 시대의 정통파들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기득권 획득을 위해 다투었다. 또한 힐카누스 1세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데 헌신적이었으나 신세대인 그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히브리 사상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구별된 귀족으로 간주했으며 철저한 정통파 바리새인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이같이 세월이 지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혁명을 주도했던 맛타디아스의 후손들은 철저하게 헬라화되갔다.
요한 힐카누스 1세의 사망은 이러한 그의 자녀들 간의 분쟁을 재촉했고 결국 네 아들 중 장남 유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Judah Aristobulus I, BC?-103)가 권력을 쟁취했다. 그는 유다라는 히브리식 이름보다는 헬라식 이름인 아리스토불루스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그는 권좌에 오르자 자기 어머니와 동생을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고 또 다른 한 명의 형제는 궁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주전 104년에서 103년까지 겨우 일 년 남짓했던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통치 중 영토를 레바논산 북편까지 확장하고 스스로 왕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생에는 술과 질병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끝없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곧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 같은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주전 103년 죽자 권력은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Alexandra Salome, BC141-67)에게 넘어갔다. 살로메는 감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죽은 남편의 동생 요나단(Jonathan)을 풀어 주고 그와 결혼하여 그로 대제사장직을 맏게 했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안네우스(Alexander Janneus, BC127-76)라고 역사에 알려져 있다.

그 또한 영토 확장 정책을 계속 펼쳐 나가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을 따라 이집트 국경과 트렌스 요르단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다윗왕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 크기와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스모니안 왕국에 병합된 지역들은 빠르게 유대화되어 갔다. 이두매가 유대인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갈릴리 또한 유대주의의 주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저항했고 아볼로니아와 스구 디아와 같은 도시는 약간의 유대적 요소를 갖기는 했지만 그들의 비(非) 유대적인 성격을 계속 지켜나갔다.(지도, 하스모니안 왕조 알렉산더 안네우스 치세 하의 유대 영토는 솔로몬 시대와 거의 같은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대제사장은 이혼녀나 과부와 결혼할 수 없는데도 알렉산더 안네우스가 형수와 비정상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급기야 수리아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도움을 청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알렉산더 안네우스가 승리했다. 그는 보복으로 바리새인 8백 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이 일로 바리새인의 종교적 열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와 존경은 오히려 더 커졌다.
주후 76년 알렉산더 안네우스는 자신의 왕권을 왕후 알렉산더 살로매(Alexandra Salome, BC141-67)에게 넘겨주고 죽게 되는데 살로매는 바리새파와 화해를 위한 정책으로 산해드린(Sanhedrin) 공회에 바리새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고 사두개인들은 이로 인한 자신들의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살로메는 주전 76년부터 67년까지 유대를 다스린 후에 자신의 두 아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장자인 힐카누스 2세(John Hyrcanus Ⅱ, BC164-104)에게는 왕과 대제사장을 겸직하게 하고 둘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Ⅱ, BC?-49, last of the Hasmonean kings)는 군의 총수가 되게 했는데 둘째 아들은 이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한편 알렉산더 살로메의 오빠인 시몬 벤 세타(Simon ben Sshetah)는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는데 이점이 유대주의의 적대 당파들 사이의 화친을 유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빠로 인해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치하에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사회에 건설적으로 공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영역에서 특히 차세대인 자녀들 신앙교육에서 두드러진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시몬 벤 세타가 산헤드린의 의장일 때 모든 젊은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런 광범위한 초등교육 제도로 유대의 큰 마을이나 촌락 및 도시에서 교양있고 학식 있는 사람을 육성하게 되었다. 이 교육은 히브리 성경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같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이루어 낼 여러 측면의 권력에 만족하였으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건 알렉산더 안네우스가 바리 새인 800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피를 흘리게 되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사두개인들은 알렉산더 안네우스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지지했다. 왜냐면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군인이었고 나라의 팽창과 자기들만의 절대 권력을 꿈꾸는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장자며 그의 정식 후계자인 힐카누스 2세를 옹호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 가운데 어머니 알렉산더 살로매가 죽자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두 아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힐카누스 2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로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사두개인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올 때 힐카누스 2세와 바리새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결국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대제사장과 왕위를 찬탈하고 힐카누스 2세는 겨우 목숨을 건져서 이두매의 권력자 안티파터(Antipater)에게 도망쳤다.
이렇게 나라가 내란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주전 63년 로마제국의 품페이(Pompey) 장군은 유대를 평정하고 나아가 로마제국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무적의 로마군 군단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에 나타났다.
이상에서 서술한 막카베우스 가문 즉 하스모니안 왕조의 권력 승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 연도는 재위 기간)
< 유대 막카베우스 가문, BC165-140 >
• 맛티아(하스몬 후손,BC 167-166) —> 유다 막카베우스(BC 165-162, 맛티아 셋째 아들) —> 요나단 막카베우스(BC 152-142, 맛티아 다섯째 아들) —> 시몬 막카베우스(BC 142-135, 맛티아 둘째 아들, 시몬 막카베우스 때부터 하스모니안 왕가가 시작된다.)
<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 BC140-37 >
• 시몬 막카베우스(BC 142-135, 맛티아 둘째 아들) —> 요한 힐카누스 1세(BC 134-104, 시몬 막카비우스 첫째 아들) —> 유다 아리스토불루스(BC 104-103, 요한 힐카누스 1세 첫째 아들) —> 알렉산더 안네우스(BC 103-76, 요한 힐카누스 1세 둘째 아들) —> 살로메 알렉산드라(BC 76-67, 알렉산더 안네우스의 왕후) —> 힐카누스 2세(BC 67-66, 알렉산드라 살로메 첫째 아들) —> 아리스토불루스 2세(BC 66-63, 알렉산드라 살로메 둘째 아들) —> 안티고누스 맛타디아스(BC 40-37,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하스모니안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유다 독립시대 막이 내리고 헤롯 왕조 시대로 이어진다.)
헤롯 왕조 시대 (Herodian dynasty, BC47-100 AD )
1. 유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종말
주후 67년 로마의 폼페이(Gnaeus Pompeius Magnus, Pompey the Great, BC 106–48)가 시리아제국(Syrian Empire)을 점령했다. 이때 유대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동시에 폼페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주전 63년 폼페이는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힐카누스 2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대제사장에는 임명됐으나 더 이상 유대의 왕일 수는 없었다. 유대가 로마제국에 종속(從屬)된 것이다.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단지 일개 족장(族長)으로 유대, 갈릴리, 베뢰아를 통치하게 된다. 유대는 다시 독립을 잃은 것이다.
폼페이는 군화를 신은 채로 지성소까지 들어가 누가 숨어 있는가 확인한 후 성전 의식의 재개를 허락했다. 폼페이는 유다로 매년 로마제국에 조공을 바치게 했고 자신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로마로 끌고 갔다.
호송 도중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가 도주하여 폭동을 일으켰지만 힐카누스 2세는 로마군의 도움으로 이들을 진압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 형제가 내분을 일삼고 있는 동안 유대 로마 총독 이두매(에돔)인 안티파터 1세(Antipater I the Idumaean, BC100-43, 헤롯 왕 아버지)는 유대의 이 같은 정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안티파터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매우 반대했는데 이는 힐카누스 2세와 화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힐카누스 2세는 이런 로마 총독 안티파터를 매우 신뢰했으므로 사실상 유대의 지배자는 안티파터였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증오하는 만큼이나 안티파터의 세력을 혐오했다. 이두매(에돔) 지역이 명목상 유대에 귀속되어 힐카누스 2세가 다스리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그들은 결코 유대에 동화되지 않았고 자신들의 오랜 적대감도 잊지 않고 있었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100-44)가 암살되고 다시 유대에 위기가 닥치자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들(Phasael, Herod, Joseph, and Pheroas)은 유대로부터 엄청 세금을 거둬들여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 BC85-42)의 새 로마 정권에 바치고 충성을 다짐하자 그 대가로 안티파터의 아들들을 언젠가는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밀약을 받고 유대 지방의 수세(收稅) 관직에 오른다. 그러나 안토니(Marcus Antonius, BC 83-30)가 부루터스(Marcus Junius Brutus, the Younger, BC85-42)와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를 빌립보에서 패퇴시키자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은 재빨리 안토니에게 달려가 많은 뇌물을 바치며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그런데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던 동부지역에 로마에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 족(Parthians)이 있었는데 주전 41년 이들이 예루살렘을 점령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왕과 제사장으로 세웠다. 이에 헤롯은 힐카누스 2세 사후에 자신이 계승하려던 왕위를 빼앗기자 로마로 달려가 다시 뇌물로 안토니(Marcus Antonius)의 환심을 사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유대의 왕이라는 칭호가 파르티아인이 쫓겨나기까지는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로마가 파르티아인을 몰아내자 주전 37년 헤롯은 로마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당당히 입성하여 왕좌에 올랐다.
2. 헤롯 왕조의 시작
헤롯 왕조(Herodian dynasty, BC37-100AD)의 시조인 이 헤롯(Herod the Great and Herod I, BC74/73-4, ruled BC37-4)은 이방 에돔인으로 주전 37년부터 4년까지 유대인들을 통치했으며 그동안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을 능가하는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해서 예수가 탄생할 즈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영아들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헤롯이 정말 영아를 학살했는지 성경 외의 문헌으로 검증 되지 않았으나 그의 평소 잔악성으로 보아 충분이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열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아구스도(Augustus) 로마 황제는 그의 사생활을 가리켜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났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계획에 방해되거나 그 왕권에 대한 도전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돼지보다도 더 쉽게 자기 아내와 자식까지도 가차 없이 살해한 그의 잔악성을 가리켜 비웃으며 한 말이었다. 실제로 헤롯은 자기 아들은 물론 아내까지도 자신의 왕좌에 위협이 된다고 느껴지면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대 헤롯의 번영기라고 할 수 있는 주전 25-14년에는 로마와 유대인의 요구 사이에 조심스러운 중도 노선을 취하여 유대 신하들이 자신을 몹시도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노력했다. 전국에 새 도시를 세우거나 재건하는가 하면 요새와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 및 헬라의 사치스러운 문화 시설들을 건설했다.
주전 19년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전의 주요 건물은 제사장들이 1년 반에 걸쳐 건축했으나 성전의 복잡한 구조의 새 건물과 화려한 장식들은 주후 63년 헤롯의 증손자 아그립바 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27-100)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그러나 80여 년의 공사를 거쳐 완공된 새 성전은 그 후 10년도 채 안 되는 주후 70년 티투스의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마 2:2)를 죽이려고 유아 학살을 명했던(마 2:16) 헤롯(Herod the Great and Herod I, BC74/73-4, ruled BC37-4) 왕가는 이방 에돔인으로 유대인을 137년(BC37-100AD) 통치했으며 헤롯의 아들 안티바(Herod Antipass, ruled BC4-39AD)는 세례 요한을 참수한 적그리스도라 불릴만한 왕가였다.
헤롯은 임종에 앞서 세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고민했는데 결국 그는 그의 왕권을 3명의 아들에게 유대를 셋으로 나누어 물려주었다. 큰아들 아켈라오에게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를, 둘째 헤롯 안티파에게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막내 빌립에게는 왕국의 북쪽과 요단 동편을 다스리게 했다. 이러한 헤롯의 유언은 로마의 승인하에서만 효력이 있었기에 헤롯의 세 아들은 로마를 방문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들의 세습을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중 갈릴리의 반란이 가장 심각했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공회는 로마로 대사를 보내 헤롯 왕가의 통치가 합당치 않음을 주장했다.(눅 19:12-15) 그러나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BC64-14AD)는 예루살렘의 청원을 거절하고 헤롯의 유언을 인정하여 그의 아들을 왕이 아닌 족장(族長, Tetrarch) 즉 분봉왕(分封王)으로 임명했다.
(1) 분봉 왕 헤롯 아켈라오
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Herod Archelaus. BC23-18AD, ruled BC4-6AD)의 폭정과 일관성 없는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예루살렘 공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를 로마에 보내 탄원하게 했다. 이들의 탄원이 받아들여져 아켈라오는 직위 해제되어 갈리아(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추방당해 그곳에서 죽었다.
(2)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부임
헤롯 아켈라오가 직위 해제되자 유대 지방은 이때부터 로마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헬라화 된 도시인 가이사랴에 거주하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반란, 폭동 등에 대비했다. 총독은 군사, 사법의 권한을 가졌고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종교 등 실제적 문제에 관여했으나 사형 선고와 집행 권한은 없었다.(요 18:31)
이후 성전 제사 등 모든 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예루살렘 성전의 가이사 초상(황제의 초상)을 철거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BC?-37AD, ruled AD26-36)가 부임하면서 가이사의 기(황제의 군대 깃발)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려다 유대인들의 반발과 대규모 폭동 위협에 빌라도는 군기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빌라도는 예루살렘 수로 건설 기금 조성을 위해 성전 세를 요구했고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나 빌라도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징수하여 군중 시위를 유발시켰다. 이 시위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다.(눅 13:1)
또 사마리아의 그린심산 성전에서 사마리아 순례자들도 무차별 처형되었는데 이는 모세가 사용하던 기구를 보여 주겠다는 자의 말을 믿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반란으로 착각하고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의 총독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주후 36년 빌라도를 직위를 해제시겼다.
(3) 분봉 왕 헤롯 안디바
헤롯 안티바(Herod Antipas, BC20-39AD, ruled BC4-39AD)는 재위 기간 큰 소요가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일개 족장과 같은 분봉왕이었으나 그의 신하들은 그를 왕으로 불렀다.(막 6:14) 그는 건축가로서 디베랴를 건축하였는데 디베랴는 게네사렛 서쪽에 있는 도시로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했으나 공동묘지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거기에 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랍비 학교가 세워져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그림, 헤롯 왕가의 팔레스타인 분할 지배)
그는 아라비아 나마테아(Nabataea)의 아레카스 4세(Aretas Ⅳ, BC 9-39 AD)의 공주와 결혼했으나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사랑하여 공주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재혼했다. 이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반발했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또 버림받은 자기 딸로 분노한 나마테아 왕은 베뢰아를 침공했고 헤롯 안디바는 참패를 당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다.
그 후 헤롯 안디바는 칼리굴라(Caligula Caesar Augustus, AD12-41) 로마 황제를 설득하여 진짜 왕의 칭호를 받으려 했으나 오히려 황제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주후 39년 갈리아로 추방당했다.
(4) 분봉 왕 헤롯 빌립
헤롯 빌립(Herod II or Herod Philip, BC27-33/34AD, son of Herod the Great and Mariamne II)은 트렌스 요르단 북쪽 지역을 통치했고 가이사랴 빌립보를 세웠다. 이곳은 이방 지역으로 유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황제의 형상을 새긴 동전을 사용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평온했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관할 지역은 사마리아의 총독의 관할로 편입하게 된다.
(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Ⅰ, BC11-44AD, 아리스토불루스 아들)는 칼라굴라(3대 로마 황제)에 의해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헤롯 안티바스가(Herod Antipas, ruled BC4-49AD) 추방당한 뒤엔 그의

< Herodian Dynasty BC37-100AD >
관할 구역도 아그립바 1세의 통치권에 편입된다. 칼라굴라의 사망 이후 황제에 오른 클라디우스(4대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까지 그의 통치권에 편입하게 된다. 그의 부계(父系)는 비록 이두메인이었으나 모계(母系)는 미리암네로 하스모니안 왕조의 혈통이었다.
이같이 분봉왕 헤롯 빌립은 미리암네 공주의 자손으로 제사장 혈통이었고 유대지역 내에서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반응은 좋았다. 그는 또한 바리새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는데 이때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처형당하고 사도 베르도가 옥에 갇히게 된다.(행 12장)
그의 경건은 유대 지역 내에서만이었고 그 외 헬라도시에서는 친 헬레적이었다. 그는 또한 황제나 자신의 형상을 새긴 화폐를 사용했고 헬라의 도시들에 공공 극장이나 목욕탕을 지어 하사했다.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 그의 행위들을 용납하게 된 이유는 35년이 넘는 로마 총독의 통치에 반발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인이 통치자로 임명됨(유대인들은 아그립바를 그리 생각했다)으로 만족하여 아그립바 1세의 헬라화 된 일들은 묵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그립바가 1세가 죽은 후 로마는 그의 통치 지역을 시리아 관할로 편입시켰다.
(6) 로마 총독들의 횡포
시리아 관할로 재편입 된 후 최초의 두 총독의 재임 기간은 평안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두 총독의 재임 기간은 상황이 악화가 된다.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AD48-52) 총독은 사마라이에서 갈릴리인이 살해되자 유대인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 소요의 책임을 물어 해임된다.
벨릭스(Antonius Felex, AD52-55)는 노예 출신 총독으로 직책 수행이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은 수많은 소요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시골의 도적 떼를 잡아 십자가에 처형하지만 많은 자가 메시아로 자처하며 소요 사태를 더욱 가중시켰다. 메시아로 자처하던 자들은 토벌을 당하나 산적과 반란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베스도(Porcius Festus, AD55-57) 총독은 사려가 깊고 인품이 고귀한 자이지만 전임자에 의해 발생 된 소요 사태를 평정하는데 실패했다. 알비누스(Lucceins Albinus, AD57-60) 총독은 공공 기금을 약탈하는 등 벨릭스 보다도 더 형편없는 통치자였다. 플로루스(Gessius Florus, AD60-?) 총독은 도리어 산적과 함께 약탈한 도시의 탈취 물을 함께 나누며 성전 기물들을 약탈했다. 이에 민중의 분노가 가중되어 불만이 분출되면서 본격적인 반란이 시작된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베시파시우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79, 후에 9대 로마 황제)가 로마 군대를 이끌고 유대로 진격해 오는데 갈릴리 출정 기간 중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황제에 등극하게 되고 대신 자기 아들 디도(Titus Flavius Vespasianus, AD39-81, 후에 10대 로마 황제)를 진군하게 했다. 주후 70년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분노한 로마 군대는 살인, 약탈, 방화와 함께 예수님의 예언 말씀대로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했다.(눅 21:6-8)
(6)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든 그날
㈜ 이 글은 하바드대 소장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가 쓴 ‘유대 전쟁사’ 영어판 일부를 번역 발췌한 것이다. – 편집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의 모든 성문이 막혀 성 밖으로 도망칠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또 먹을 것이 없어 가족이 죽어갔다. 옥상에는 못 먹어서 완전히 탈진한 여자와 갓난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길에는 노인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이들과 어른 그리고 청년들은 못 먹어서 부은 얼굴로 시장 거리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다 아무 데나 쓰러져 죽어갔다.

주후 70년 로마군(총사령관 Titus)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성전이 불타며 철저히 파괴되고 몇 년째 이어지는 전투에 독이 잔뜩 오른 로마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유대인들을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는 주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다.(눅 21:6-8)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 역시 너무나 먹지 못해 자기 아들을 잡아먹고는 남은 걸 숨겨 두었다. 강도들이 구운 구수한 냄새를 맡고는 음식을 달라고 협박했다. 나중에 사람 고기라는 것을 알고는 강도들은 기겁하고는 그 집에서 도망쳐 달아났다.
강도들은 칼이 잘 드나 시험하기 위해 시체나 겨우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찔러 보았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같은 동족인 강도에게 죽은 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시체가 도시안에서 썩어 냄새가 진동하자 처리를 못 해 강도들은 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안 주민들이 금화를 삼키고 탈출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군과 강도들은 금을 얻기 위해 산사람의 배를 갈라서 금화를 끄집어냈다. 어떤 때는 하루에 2,000여 명이 이런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했다. 반란 중 성에 갇혀 미처 탈출 못 하고 죽어 성 밖으로 운반된 시체는 115,800여 명에 달했다. 특히 힘없는 하층민은 죽어서 성 밖으로 던져졌는데 무려 60만여 명이나 되었다. 시체를 옮기다가 힘들면 큰집에다가 차곡차곡 시체를 쌓은 후 그 집 문을 아예 잠가버렸다.
그리고 성안의 풀과 소똥도 사람들이 다 먹어치워 남아있지를 않았다. 성안의 이런 처참함은 그 잔인무도한 로마군의 동정심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자 중에 17세 이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포로가 되어 상품처럼 팔리거나 이집트의 작업장에서 평생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사람을 지인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77
멀리 로마까지 끌려간 포로들은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으로 주어지거나 강제로 로마 시민들의 구경거리 검투사가 되어 죽어갔다. 심지어 잡힌 포로들을 로마군이 노예로 분류하는 하루 동안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기도 했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음식을 주지 않는 로마 군인들을 저주하며 죽기도 했고 어떤 유대인은 스스로 음식을 끊고 굶어 죽기도 했다.
로마군에게 포로 된 자는 9만 7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안에서 로마군을 대항하여 항전하거나 어쩔 수 없이 성안에 갇혀 있다가 죽은 자는 무려 1백 10만 명에 달했다. 당시는 유월절 축제 준비 기간이라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과 여행객이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안에는 무려 2백 70만여 명이 구름같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뿐 아니라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분노한 로마군이 지나간 도시에는 무자비한 학살로 시체가 즐비했다. 어느 지하동굴에서는 2,000여 구의 시신이 나오기도 왔다. 로마군 병사들조차도 시체가 썩는 악취로 고통스러워했는데 그 와중에도 시신 속에서 금은보화를 찾기 위해 뒤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주후 73년 유대 총독이며 폭동 진압군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는 유대 전체의 반란을 진압했다.(*) 편집 / 정은표 목사(월간 개혁신앙 편집 발행인) 참고, 아래 웹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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