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의미와 분류방법

Origen(c.185–c.254) Born in Alexandria, Egypt, Origen was the first theologian to expound Christian doctrine in a systematic way.
PART Ⅰ
신학의 의미와 분류방법
개혁주의 신학개요
시작하는 말
이 글의 목적은 ‘개혁신학’(改革神學, Reformed Theology)의 윤곽(輪廓)을 제시하는 것이다. 장로교회가 증거 하는 ‘개혁신학’은 뿌리 깊고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으로 검증된 신학이다. 우리는 개혁신학이 성경적 신학이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개요(槪要)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적 개혁신학’의 윤곽 안에 있는 것이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믿는다.
아울러 신학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방법론을 가지고 간명한 조직신학(組織神學, Systematic theology)을 정리하기 원한다. 복잡한 이론의 나열과 변론을 피하며 인간적 견해의 제시를 최소화하고 성경 교리들을 간단명료하게 해설하며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원한다. 따라서 이 글은 ‘성경적 신학개요’(神學槪要)를 제시하려는 것이며 더 깊이 연구하기 원하는 독자는 여기에서부터 더 깊고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조직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기본적이다. 왜냐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체계적으로 해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신학’과 ‘신앙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왜냐면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하다. 단지 그의 신앙 지식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옳으며 체계적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신학은 또 교회 목회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목사에게 바른 신학의 정립은 필수적이다. 바른 신학에 근거하지 않는 설교나 목회는 무자격하고 무책임하다. 왜냐면 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 체계적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설교하며 교회를 바르게 목회할 수 있겠는가? 목회의 정로(正路)는 ‘바른 신학’을 가지고 설교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바른 신학 사상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만 오류와 탈선 없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고 가르치며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改革神學)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상당히 안정되게 정립되어왔다. 이러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의 표준적 교훈은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직도 한국 장로교회서 그의 교의신학(敎義神學)을 능가하는 성경적 체계적 진술서는 없다고 본다.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근면한 신학자였다. 본서는 박형룡 박사의 이러한 교의신학을 기초로 하여 간략히 정리하고 그 외에 저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을 약간 보완했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 서문에서 자신은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의 책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여러 신학자의 저술들을 참고한 편집자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말했다. 그러나 그가 참고한 서적들과 연구범위가 넓고 깊기에 그는 확실히 편집자 이상이었다. 그가 기본으로 삼았던 벌코프의 책이란 ‘조직신학 서론’(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과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가리킨다.
개혁신학 역사의 기본적인 조직신학 참고서들은 개혁교회의 영속적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및 칼빈(John Calvin, 1509 -1564)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1820-1898), 헬만 훽스마(Herman Hoeksema, 1886-1965) 등의 ‘조직신학’과 제임스 돈웰(James Henley Thornwell, 1812-1862), 워필드(B. B. Warfield, 1581-1921),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등의 신학 저술들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며 또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다. 조직신학 서론은 신학의 개념(槪念), 방법(方法), 역사(歷史) 등을 간략히 논한 후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정경성(正經性), 본문(本文, text), 속성(屬性), 및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에 관한 진리들을 논한다.
1. 신학 용어의 개념
(1) 조직신학(組織神學)
신학(神學)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이란 체계적 연구로 얻어진 사실들이나 원리들에 대한 지식 즉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흔히 ‘조직신학’(組織神學, systematic theology)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같이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은 ‘조직신학’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特別啓示)의 기록인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에 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정통신학’(正統神學, orthodoxy theology)과 달리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theology)은 신학을 단순히 신(神)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主觀的) 신앙이나 종교적인 경험(經驗)의 학(學)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主觀的)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客觀的)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올바른 신학의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의 입장이다. 촬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신학을 바르게 서술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것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C. Van Til,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
(2) 교의(敎義), 교리(敎理)
신학은 또 교의학(敎義學, dogmatics)이라고도 불린다. 교의(敎義)는 ‘니케아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같이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公式的) 진술(陳述)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교의(敎義, dogmatic)란 교리(敎理,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는 말로 표현된 진리를 가리키며 진리와 거의 동일시되지만, 교의는 보다 더 공식적 권위적 진술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공적 진술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의(敎義, dogmatic)가 교회 회의(會議)나 전통(傳統)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개혁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이같이 교의(敎義, dogmatic)는 성경 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학은 내용이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했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중략)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라고 했다.(교의신학, 1권, 21, 44쪽) 이같이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3) 조직신학(組織神學), 성경신학(聖經神學)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의 체계적 지식을 위해 여러 가지 용어들이 사용되었다.(sententiae, summa, loci communes, institutio 등) 그러나 12세기에 아벨라드(Peter Abelard, 1079-1142)에 의해 최초로 ‘신학’(神學, theologia)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부터 ‘교의신학’이라는 말도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교의신학’ 혹은 ‘교의학’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경신학’(聖經神學, Biblical Theology)은 처음부터 그 연구방법에 있어서 조직신학과 달랐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主題別)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 하지만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歷史的)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고, 그것이 성경만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 하려 한다면 ‘성경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신학’이라는 용어는 즉시 합리주의자(合理主義者)들에 의해 채용되었고 그들에 의해 교의학과 대립(對立)하고 그것을 비평(批評) 수정(修正)하려는 방향으로 진행이 돼 왔다. 그러기에 오늘날 자유주의 ‘성경신학’은 때때로 ‘성경의 중심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경의 중심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성경은 구주 예수에 대해 증거 한다.(요 5:39)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은 능히 너로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라고 했다. 이같이 성경의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구원(救援)이라는 주제 아래 ‘왜 구원이 필요하였는지?’,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을 논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신학’(神學)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교회사나 목회학에도 ‘역사신학’(歷史神學), ‘실천신학’(實踐神學)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또 자유주의(自由主義)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狀況) 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나 분야에서의 하나님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2. 신학의 성격
신학(神學)을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할 수 있다.
(1)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 된 성경 안에만 명확히 계시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오직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 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補助物)에 머물러야 한다. 따라서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하기에 성경적 신학만이 참된 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槪念)과 사상(思想)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誤謬)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자료가 되는 성경을 불신임(不信任)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 잘못이었고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성경에 기초시키는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에 있어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이의 신학 사상이든지 비성경적 요소가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排除)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2)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 구약의 이스라엘 회중이든지 신약교회이든지 간에 – 공동체(共同體)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한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견해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교회 공동체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그것의 공동체 신앙고백의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가 가진 ‘신앙고백’은 전(前) 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희생과 수고의 결실이며 우리는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와 ‘역사적 신앙고백’을 중시해야 한다.
이같이 신학은 ‘교회적 성격’이 있고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正立)과 성실한 전달(傳達)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이 난립(亂立)하여 성경적 신학을 알 수 없고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오늘 시대에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다.
(3)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權威的)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神的)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最終的)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誤謬)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校正)될 수 있고 교정이 돼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4)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不變性)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內容)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方式)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의 정돈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다.
개략적으로 볼 때 주 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辨證學)의 시대였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神論), 5세기는 기독론(基督論)과 인간론(人間論), 중세 시대에 이어 16세기 종교개혁 기에는 구원론(救援論)과 교회론(敎會論), 근대에는 성령론(聖靈論)과 종말론(終末論)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았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不變的)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에도 초대교회의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 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 오늘날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신학자들의 책들과 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신학의 그 근본 내용인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
3. 신학의 필요성
(1) 인간의 지적 욕구
신학은 왜 필요한가? 사람에게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신학이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의 단편들뿐 아니라 그 전체를 알기 원한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그것은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된다. 최고의 개혁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건 하나님이 주신 우리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2) 진리의 효과적 전달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나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정연하다. 그것들은 앞뒤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秩序)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진리 제시는 설교나 강의를 더욱 힘 있고 효과 있게 만드나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논리를 무시하고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말하기를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결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천박한 신학생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3) 신앙과 사상의 일치
교회의 신앙과 사상적 일체성(一體性)을 위해 신학이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有形的)이기 전에 먼저 영적(靈的)이며 교리적(敎理的)이다. 교회는 공통적(共通的) 기독교 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다 같은 말을 하라.”(고전 1:10)고 권면했고 또 “믿음은 하나이요.”(엡 4:5)라고 말했다. ‘같은 믿음’(딛 1:4, 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은 모든 그리스도인 연합(聯合)과 하나 됨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의 불완전함과 상호 간의 차이가 오늘날과 같은 교파(敎派)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되었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媒介物)이요 접착제(接着劑)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해 상호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적(公的) 신앙고백과 찰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반틸, 박형룡 등 교회의 인정된 조직신학들은 교회 일체성(一體性)의 표시(標示)요 증거다.
(4) 이단으로부터 교회 보호
이단(異端)들을 배격하여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守護)하기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사실 이러한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이단들은 성경 일부분을 부정(否定)하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誤謬)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배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진리들의 부분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이며 전체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날은 목사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체계적인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하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요 완전(完全)하고 무한(無限)하신 분이시며 사람은 피조물(被造物)이요 불완전(不完全)하고 유한(有限)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욥기에 소발이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 11:7)라고 말했고 엘리후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 36:26)고 말한 것은 정확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는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렸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더욱이 사람은 범죄 한 이후 양심이 흐려지어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제한(制限)되고 왜곡(歪曲)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창 1:26,27), 그리고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비록 부분적이고 제한적이기는 하나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사 11:9)을 예언했다. 주님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지식론(知識論)이나 인간이 진리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 사상은 정당하지 못하다. 특히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들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신념을 가지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그들 신념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그들의 사상에 반대가 된다.
5. 신학하는 방법
신학을 하는 방법(方法) 즉 하나님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은 흔히 세 가지 원리로 표현된다.
(1) 존재의 원리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存在)하심이 신학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학자 중 학자요 과학자 중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源泉)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렇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하나님의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를 떠나서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고 말했다.
(2) 지식의 외적 원리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로 보나(Francis, Turretin, Herman, Bavinck 등)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혹은 중심적 원리로 보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부수적 원리로 본다.(B. B. Warfield 등) 하나님은 역사상 여러 특별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特別啓示)와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聖經)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원천(源泉)이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完全)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셨다.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3) 지식의 내적 원리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信仰)과 이성(理性)을 가리킨다. 죄인(罪人)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참지식의 시작이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으로 생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성경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이같이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確信)의 근거도 또한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5항)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고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하였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믿은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인간의 이성(理性)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手段)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활동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
둘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2,3)고 했다. 바울은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講論)했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 증명하다’라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말하기를 “성경은 결코 적절한 증거에 근거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중략)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恩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란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다.
셋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정돈(整頓)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활동이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며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6. 잘못된 신학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1) 교권주의(敎權主義)
신학의 잘못된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敎權主義, clericalism)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최고(最高) 권위로 본다. 그 대표적 예는 로마 가톨릭교회 입장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론적으로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傳統)을 함께 권위 있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본다. 그들은 교회(교황과 주교회의)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最終的) 무오(無誤)한 해석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無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황들은 실제로 무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遺傳)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 15:3)라고 말씀하셨고 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고 책망하기도 하셨다.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도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상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교황 무오(無誤)의 교리에 반대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Pope Pius IX, 1792-1878)가 마리아의 ‘무죄 잉태’(孕胎)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Pope Pius XII, 1876-1958)가 마리아의 ‘승천’(昇天)을 선언했으나 이는 다 성경에 없는 말이다. 또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 540-604)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했으나 교황 보니페이스 3세(Pope Boniface III, 540-607)는 그 칭호를 받았다. 또 교황 씩스투스 5세(Pope Sixtus V, 1521-1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Pope Pius VII, 1742-1823) 등 여러 교황은 이를 정죄했는데 이런 모순된 선언들은 어느 한쪽이 분명 오류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해 오류 없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일 때만이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 교훈의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
(2) 이성주의(理性主義)
이성주의(理性主義 또는 合理主義, rationalism)는 인간 이성(理性)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진리의 최종(最終)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요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非)진리가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최고 권위가 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構造)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한 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 11:7)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책망하셨다.
더욱이 자연 이성(理性) 즉 타고난 대로의 인간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源泉)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고 했고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전 2:14)고 했다. 또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인간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는 신학을 철학화(哲學化)한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에 근거하나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3) 경험주의(經驗主義)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는 사람의 종교적 경험(經驗)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이성주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나머지 다수가 이 사상을 갖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신학을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源泉)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 계시 된 천지의 창조나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7-29)라고 하셨다.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誤謬)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Baal) 숭배자들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라고 했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Areopagus)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라고 했다. 이같이 인간의 종교적 감정(感情)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의식(道德意識)도 그러하다. 양심(良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해 어두워졌고 무디어졌기에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神觀)이나 도덕적 종교는 완전하지 못하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했다.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經驗主義的) 방법은 신학과 종교심리학(宗敎心理學)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4) 신비주의(神秘主義)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는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交通)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가 이런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이다. 왜냐면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사 8:20, 원문 직역)라고 했다.
또 신비주의는 인간 이성(理性)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또 신비주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빈번히 탈선(脫線)으로 빠진다.
7. 신학의 분야들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다섯 분야로 나뉜다.
- 구약 : 구약 원어(히브리어, 아람어), 구약개론, 구약 강해 등
- 신약 : 신약 원어(헬라어), 신약개론, 신약 강해, 본문비평 등
- 교리 : 조직신학, 현대신학, 비교종교학, 기독교윤리 등
- 역사 : 교회사, 교리사 등
- 실천 : 목회학, 설교학, 선교학, 기독교 교육학 등
구약과 신약은 성경 자료를 그리고 교회사는 역사 자료를 제공해 교리와 윤리의 체계적 지식을 확립하게 한다. 또 구약, 신약, 교리, 역사는 이론적 분야이고 목회학, 설교학 등은 실천 분야이다. 위의 다섯 분야 중 본래 신학이 의미했던 조직신학은 다시 일곱 개 주제로 구성된다.
- 서 론 :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방법, 계시, 성경의 정경, 신적 권위성, 본문 문제, 명료성, 해석 원리, 영감, 무오성 등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해 논한다.
- 신 론 : 하나님의 비(非) 공유적 속성들, 삼위일체, 예정, 창조, 섭리, 기적 등에 관해 논한다.
- 인간론 : 인간의 기원, 구성 요소, 행위언약, 죄의 본질, 구별, 형벌, 회복, 은혜 언약 등에 관해 논한다.
-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일인격성(一人格性), 그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그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등에 관해 논한다.
- 구원론 : 하나님의 은혜, 부르심, 중생(重生), 회개와 믿음, 칭의(稱義),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忍)과 영화(榮華) 등에 관해 논한다.
- 교회론 : 교회의 본질, 속성, 참된 교회의 표, 교회의 권세와 임무, 조직과 정치, 은혜의 수단, 성례 등에 관해 논한다.
- 종말론 : 육체적 죽음, 죽음 후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천년왕국, 최후 심판, 천국과 지옥 등에 관해 논한다.
8. 신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
(1) 신학과 변증학과의 관계
신학과 변증학(辨證學, apologetics)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변증학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는 변증학이 신학 체계의 서론적 분과로서 하나님, 종교, 계시, 성경 등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이성적 변호(辯護)의 학(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같은 학자는 변증학이 기독교 진리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성경적 답변의 학(學)으로 이해했다. 이 견해는 신학 내용이 변증학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
(2)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
철학(哲學, Philosophy)과 신학은 우주의 근원, 인간의 존재 의미, 도덕적 선(善) 등 공통적 주제들을 다루지만 그 접근(接近)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 경험, 직관(直觀)에 의존하나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에 의존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 어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양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영생(永生)의 존재를 논증했다. 또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기본적 난제(難題)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3)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
심리학(心理學, psychology)은 사람 행위(行爲)의 동기(動機)와 방식(方式) 등 사람의 심리 작용을 연구한다. 심리학도 종교경험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빈번히 종교 현상을 단순히 자연적 현상으로 해석하며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죄악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과 일치하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신학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 신학과 윤리학과의 관계
윤리학(倫理學, Ethics)은 사람의 바른 행동 원리를 연구한다. 이것은 또 무엇이 선(善)인가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계가 된다. 칼빈, 촬스 핫지, 로버트 댑니 등의 신학자는 교리적 신학적 논술에서 십계명의 해설 등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윤리학과 구별된다. 조직신학은 ‘믿음의 내용’을 논하고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를 논한다.
9. 신학의 역사
(1) 구(舊) 가톨릭 시대
- 3세기 초
오리겐(Origen, 184-253)의 저술 ‘원리들에 관하여’(de principiis)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적 문서라고 생각된다. 그가 이 문서에서 다룬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 : 하나님, 말씀, 성령, 천사,
2권 : 세계와 사람,
3권 : 죄와 구속,
4권 : 성경과 전체 요약
그러나 오리겐은 대 학자이었음에도 그의 사상에는 영원 전의 창조, 인간 영혼의 선재(先在) 및 선재 상태에서의 범죄, 사탄의 회복을 포함한 보편 구원론 등 많은 이단적 요소들이 있다. 또 오리겐의 풍유적(諷諭的, allegorical) 성경해석 방법은 후대에 큰 해를 끼쳤다.
- 4세기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사상적으로 대체로 건전했다. 비록 그가 교회에 관한 감독주의 견해를 가졌고 성례를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로마 가톨릭적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의 죄악성과 은혜의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은 매우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주의는 원죄, 인간의 전적 부패성,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을 믿는 입장이다.
그는 ‘라우렌티움을 위한 안내서 :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 (Enchiridion ad Laurentium: De Fide, Spe, et Caritate)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믿음의 제목 아래 믿음의 주요 조항들을 논했고, 소망의 제목 아래 기도를 논했고, 사랑의 제목 아래 윤리 문제들을 각각 논했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삼위일체(三位一體)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등 교리적 저술들을 남겼다.
- 8세기 중엽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6-749)은 고대 동방교회 최고 신학자며, 그의 ‘정통신앙 정해’(Ekdosis Akribes tes Orthodoxou Pisteos)는 동방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서(敎理書)였다. 이 책은 그의 ‘지식의 원천’(The Fountain of Knowledge)이라는 책의 제3부로 그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 : 하나님과 삼위일체
2권 : 창조, 사람의 본질
3권 :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음부에 내려가심
4권 : 그리스도의 부활, 다스리심, 믿음, 세례, 성상 숭배
그의 책은 고대 동방교회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사색적이며, 신학적으론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혹은 신인(神人) 협력설이며, 성례(聖禮)를 중요시 하는 입장이다.
(2) 중세 스콜라신학 시대
- 11세기 말
안셈(Anselm of Canterbury, 1033/1034-1109)은 이탈리아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였으며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의 시조’ 또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렸다. 그는 경건과 지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독백과 대화’(Proslogium; Monologium)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논한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삼위일체의 믿음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라는 책과 예정론을 다룬 ‘조화에 관하여’ 그리고 속죄론을 다룬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 12세기 중엽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1100-1160)는 이탈리아 출생으로 파리의 대주교를 지낸 자로서 서방교회 최초의 대(大) 교의학자(敎義學者)였다. 그의 ‘선언서’(Sententiarum Libri IV)라는 책은 스콜라 시대의 최초의 주요한 교의학서(敎義學書)로서 중세 시대 여러 세기 동안 신학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책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 : 하나님(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삼위일체 등)
2권 : 창조 세계, 천사
3권 : 기독론, 구속
4권 : 성례(최초로 일곱 성례로 분류함), 종말
그리고 13세기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70–1245)의 ‘신학대전’(Summa universae theologiae)은 롬바드의 선언서(Lombard‘s declaration)에 대한 주석으로서 많이 읽혀졌다.
- 13세기 후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탈리아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대 인물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 권위자이며 표준적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대전’(Summa Totius Theologiae)은 미완성 작품이고 그의 ‘신학대전’ 중 성례와 종말에 관한 부분은 다른 곳의 그의 글 중 발췌하여 추가한 것이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 : 하나님과 그의 사역들
2권 : 사람, 윤리학
3권 : 그리스도, 은혜의 수단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의 신학의 형식으로 삼았고, 어거스틴주의를 그의 신학의 기본적 내용으로 삼았으나 중요한 많은 점에서 자기주장대로 그것을 수정했다.
(3) 종교개혁 및 신조 작성 시대
- 16세기 중엽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영향 아래 어거스틴주의(Augustinism)를 부흥시켰다. 사도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성경적 정통신학은 고대에 어거스틴을 거쳐 칼빈에게서 밝히 정리되었다. 그의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혁교회의 ‘대전’(쑤마)이라고 불렸다. 칼빈은 또 많은 성경 주석들을 남겼다. 그의 책에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고 교리와 윤리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기독교강요’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권 : 하나님
2권 : 그리스도
3권 : 성령과 구원
4권 : 교회와 성례
1625년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 Netherlands)의 네 명의 교수들(Johannes Polyander, Andreas Rivetus, Antonius Walaeus and Anthonius Thysius)이 쓴 ‘순수신학 개요’(Synopsis of a Purer Theology, 1625)라는 책이 개혁교회에서 많이 읽혀졌다.
17세기 후반 이탈리아 출신 스위스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의 신학은 권위 있는 정통 개혁파 신학이며 그 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에서 계승되었다. 그의 ‘논변신학강요’(Institutio Theo logiae Elencticiae)는 프린스턴신학교의 중요 신학 참고서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파 정통신학의 흐름은 투레틴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 17세기 후반
코체유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전통적 개혁파 신학의 형식과 내용에서 이탈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들을 중심으로 진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 당시 프랑스 소우물신학교(Academy of Saumur, French)의 아미랄더스(Amiraldus, 1596-1664)는 ‘가설적(假說的)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개혁교회는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경계할 오류라고 판단했다. 그의 견해를 아미랄더스주의(Amyraldian) 혹은 소우물학파(School of Saumur)라고 한다.
이 외도 화란의 기스베르트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적 대 신학자 죤 오웬(John Owen, 1616-1683)과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등이 있다. 죤 오웬은 가장 엄격하였으나 ‘신학자들의 신학자’로 알려졌고 리차드 백스터는 가장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자였다.
이 시기 작성된 주요 개혁파 신조로는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년), ‘벨직 신앙고백’(1561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도르트 신경’(161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1647년),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1563년) 등이 있다.
16세기 후반의 필립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은 루터의 제자였고 그의 저서 ‘신학 통의’(通義, Loci Communes, 공통구절)는 최초의 루터교 신학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교리 체계 속에 성경의 기본 구절들과 그 해석을 모았다. 초판은 루터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어거스틴주의였으나 그 후 판들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의 영향을 받아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로 변질되었다.
17세기 초의 존 게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는 17세기 루터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 ‘신학 통의’(新學通義, Loci Communes)라는 책을 썼다. 그는 멜랑톤의 입장에 반대했고 루터의 사상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1530년)의 사상인 어거스틴주의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루터파 신조는 ‘루터의 요리문답’(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년) 등이다.
17세기의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는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 신학 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설했으나 실상 그의 선생보다 더 나아갔다. 그는 ‘신학강요’라는 책을 썼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도르트대회(the Synod of Dordt, 1618-1619) 결정들에 항거하여 ‘항론파’(抗論派, Remonstrants)라고 불렸고 후에는 알미니우스파(Arminian)로 불렸다.
파우스투스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604)의 ‘라코 요리문답’(Rakow Catechism, 1605년)은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의 신학서이다. 그는 삼위일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 ‘타락과 원죄’ 등을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사랑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근대 유니테니안파(Unitarians)의 선조(先祖)였다.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Robert Bellarmine, 1542-1621)은 이 시대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변자였다. ‘기독교 신앙 논쟁에 관한 변론’이라는 그의 책은 로마 가톨릭 신학의 완성된 해설서이었다. 그는 교황 지상주의(至上主義)를 옹호했고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하여는 반(半) 펠라기우스적이었다.
(4) 근세 시대(18세기 이후)
- 개혁주의 신학자
촬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구(舊)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871-73년)은 오늘까지 개혁파 신학의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 : 서론, 1부 신론
2권 : 2부 인간론, 3부 구원론(기독론 포함)
3권 : 3부(구원론 계속, 성화론에 십계명 해설과 성례론을 포함함)
4부 : 종말론
아치볼드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는 촬스 핫지의 아들로 ‘신학개요’(Outlines of Theology, 1879년)라는 그의 책에서 부친(父親) 촬스 핫지의 신학 사상을 이어받아 어려운 신학을 평신도들을 위해 평이하게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1820-1898)는 미국 남장로교회 조직신학자였다. ‘조직신학강의’(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1871)라는 책은 그의 사후 그의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다.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도 탁월한 조직신학자이었다. 그의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1888-1894)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 : 서론, 성경론, 신론
2권 :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례론 포함), 종말론
3권 : 보충 설명 및 교리사적 참조 등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1895-1901)은 지금까지 네덜란드에서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팩커(J.I. Packer, b.1926) 박사는 말하기를 “벌콥(Berkhof)의 교과서와 벌카우어(Berkouwer)의 ‘교의학 연구’는 작은 언덕과 변방의 것에 지나지 않으나 바빙크의 명작 ‘개혁교의학’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Everest)와 같다.”라고 평가했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도 훌륭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39)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敎義神學)의 기초가 되었다. 벌코프는 전통적, 정통적 개혁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잘 정돈하여 전달했다.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 1886-1965)는 미국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의 학자로서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1966)이라는 깊이 있는 개혁파 신학서를 남겼다.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는 벌코프의 ‘조직신학’ 책을 기초하고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교의신학’(전 7권, 1964-1973)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그는 책 서문에서 그 책의 성격을 ‘편집’이라고 겸손히 표현했으나 그의 책은 실로 편집서 이상이다. 그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위해 남겨진 신앙의 귀한 유산이다.
- 기타 신학자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소위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라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랑게(Johann Joachim Lange, 1670-1744) 등이 경건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의학을 스콜라주의적 형식에서 해방하여 성경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세기 초의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Christianity)의 시조(始祖)로서 사람의 종교적 감정(感情)과 경험(經驗)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기독교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종교에 관한 강연과 신앙의 교리’ 등의 책을 썼다.
19세기 후반의 릿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독교의 본질로 보았으며 ‘윤리적 기독교’를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 도덕 감화설을 취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기독교의 칭의와 화목의 교리’이다.
피이퍼(Franz August Otto Pieper, 1851-1931)의 ‘기독교 교의학’(Christliche Dogmatik, 1917-1924)은 보수적 루터파 조직신학이다. 루이스 쉐이퍼(Lewis Sperry Chafer, 1871–1952)는 미국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 설립자이며 그의 ‘조직신학’(1947-1948)은 세대주의(世代主義) 입장을 반영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 신학의 시조로서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13권, 1936-1962)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적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매우 자유주의적 신학자로서 ‘조직신학’(1963)을 썼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명백히 부정한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 b.1932)이 쓴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83-1985)은 가장 최근 복음주의 진영에서 쓰여진 조직신학이다. 그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입장에 맞게 그는 책 첫 페이지에 그 책을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Bernard Ramm, 1916- 1992), 자유주의자 윌리엄 호던(William Hordern, b.1920),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에게 바친다고 썼다.(*) 글쓴 이 / 김효성 박사(연세대학교 철학과(B.A.), 총신 신학대학원(M.Div. equiv.),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Th.M. in N.T.), 미국 Bob Jones University(Ph.D. in Theology, 현 합정동교회 담임목사, 계약신학대학원 교수) 출처 http://www.oldfaith.net/02sy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