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0) 구원과 하나님의 주권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0) 구원과 하나님의 주권

Ⅲ. 구원과 성령 하나님의 주권
성령 하나님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위(位)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나머지 두 위(位)와 언제나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이시는 게 확실하다.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選擇)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성자 하나님의 죽음에 담긴 제한적 의도,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한정된 범위는 완전히 일치한다.
성부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지금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일하시는 게 아니다. 성령께서 지금 수행하시는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결과를 적용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논의하려는 문제는 성령의 능력의 한계가 아니다. 성령의 능력은 무한하다. 성령의 능력과 사역이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방금 말했듯이 성령의 능력과 사역은 하나님의 지혜와 분명한 주권의 인도를 받는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예수께서 요한복음 3:8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주님은 여기서 바람과 성령을 비교하셨는데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둘 다 주권적이다. 둘째는 둘 다 신비롭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중략) 성령으로 날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인간 맘대로 다스리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람은 인간의 조언(助言)을 구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조종(操縱)당하지도 않는다. 성령도 이와 같다.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분다. 성령도 이와 같다. 또 바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조절되나 인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바람은 나뭇잎조차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부드럽게 불기도 하는가 하면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만큼 거세게 불기도 한다. 사람이 거듭날 때도 이와 같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부드럽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거의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성령께서 아주 강력하고 철저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분명하게 느낄 때도 있다.
바람이 한 곳에만 불 때도 있고 폭풍처럼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불 때도 있다. 성령도 이와 같다. 성령께서 오늘은 한두 영혼을 구원하시고 내일은 오순절 때처럼 한 무리의 마음을 찌르실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소수에게 역사할지 다수에게 역사할지를 두고 인간과 상의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성령의 주권적인 뜻에서 기인한다.
이같이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우리의 구원에 관여하신다. 성부는 예정으로 관여하시고, 성자는 유화(propitiation, 속죄, 화목제물)를 통해 관여하시며, 성령은 거듭남을 통해 관여하신다. 성부는 우리를 선택하셨고 성자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죽은 우리를 살리신다. 성부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성자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으며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성부께서 하신 일은 영원하고 성자께서 하신 일은 외적이었으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내적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즉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 특히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의 주권적 역사이다. 성부는 우리의 거듭남을 목적하셨고 성자는 우리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거듭남을 성취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영(靈)으로 났다.”라고 말한다.(요 3:6)
거듭남(born again)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며 인간은 여기에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임을 우리가 아는 것은 육체적 출생(出生)을 알기 때문이다. 육체적 출생은 태어나는 자의 노력이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적 출생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듯이 자신의 영적 출생에서도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거듭남은 영적 부활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 5:24)
그리고 분명히 부활은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超越)한다. 죽은 시체(屍體)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다 살리지 않으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대답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만 살리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주객(主客)의 전도(顚倒)이다. 믿음은 거듭남의 원인(原因)이 아니라 결과(結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믿음(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인간의 마음에 타고나는 게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믿음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산물이거나 인간의 본성으로 가능한 원리의 시행이라면 성경에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는 구절이 없었을 것이다.
믿음은 영적 은혜이며 영적 본성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 따라서 이런 죽은 자가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나 육신이 믿을 수 있다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것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는 히브리서 11:6과 비교해 보라.
이같이 하나님에게서 기원(起源)한 게 아니라면 그 무엇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만족하시게 하지 못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믿음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증한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여기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거듭남이다. 성경의 ‘거룩하게 하심’은 항상 ‘분리’(구별)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무엇을 위한 분리 즉 그 무엇이나 그 누구에게로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거듭남에 해당하며 거듭남으로 인한 변화를 가리킨다는 우리의 주장을 설명해 보겠다.
하나님의 종이 구원받지 못한 백 명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전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는지 전한다. 어떻게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위해 죽으셨는지 전한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용서가 전파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아들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라고 촉구하면서 끝을 맺는다.
집회는 끝났고 사람들이 돌아간다. 이들 중에 아흔아홉은 그리스도께 나오길 거부했고 아무 소망 없이 하나님 없이 세상의 밤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지막 한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말씀의 써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땅에 뿌려졌다. 그는 복음을 믿었고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걸 기뻐하며 돌아갔다.
즉 그는 ‘거듭났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매달리듯이 갓 태어난 영혼도 그리스도께 매달린다. 사도행전 16:14은 이와 똑같은 패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주께서 그(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우리가 가정했던 경우처럼 여기서도 성령께서 루디아가 복음의 메시지를 믿기 전에 그녀를 살리셨다. 그다음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있다.
또 우리가 가정한 경우에서 거듭난 한 영혼은 거듭남을 통해 나머지 아흔 아홉에게서 분리(分離)되었다. 거듭난 자들은 성령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에게서 분리된다. 죄인이 ‘진리를 믿기’ 이전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패턴이 창세기 1장에 나온다. 2절을 보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부분의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땅은 황량한 폐허가 되었고 어둠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다.” ‘태초에’ 땅은 2절이 묘사하는 대로 창조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무서운 재난이 있었다.(아마도 사탄이 타락했을 것이다) 그 결과 땅이 해를 입어 ‘황량한 폐허’가 되었고 ‘어둠’에 덮였다.
똑같은 패턴이 인간 역사에도 적용된다. 인간의 현재 상태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다르다. 무서운 재난이 일어났고 이제 인간은 영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황량한 폐허’ 상태이며 완전히 ‘어둠’ 가운데 있다. 그다음으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폐허가 된 땅을 어떻게 다시 빚으셨고 거기 거할 새로운 피조물을 어떻게 지으셨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靈)은 수면(水面) 위에 운행(運行)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순서는 한 영혼이 거듭날 때와 똑같다. 먼저 성령의 활동이 있고 그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낸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고 그 후에 말씀과 빛이 황폐와 어둠의 무대에 등장한다. 한 영혼이 거듭날 때도 똑같은 과정이 일어난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시 119:130) 그러나 빛이 어두운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려면 하나님의 영(靈)이 먼저 그 마음에 역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로 돌아가 보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곳에 나오는 순서가 깊은 통찰을 준다.
-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거듭남)
- 진리를 믿음
정확히 똑같은 순서가 베드로전서 1:2에도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여기서 ‘순종함’은 ‘믿음에 이르는 순종’(롬 1:5,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한글 개역)을 말하는데 주 예수께서 뿌리신 피의 효력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순으로 보면 ‘순종’(히 5:9 참조) 이전에 우리를 구별(區別)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그 이전에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중략) 택하사 (중략) 구원을 받게 하신’(살후 2:13) 자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중략)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후 1:2)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8-11)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성령의 현재 사명과 일은 ‘세상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성령의 사명은 다음 세 가지이다.
-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생명 주기
- 성도들을 가르치기
요한복음 16:8-11은 성령의 ‘사명’을 말하지는 않으나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 결과를 설명한다. 이 구절은 죄인들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개인적인 사역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양심을 살피시며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완전히 객관적이고 공적인 결과를 말한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라. 내가 수갑을 찬 채 경찰의 호송을 받는 누군가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어떤 결론을 내리겠는가? 그 사람이 범죄자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가? 우리가 그의 재판 기록을 보았거나 그의 자백을 직접 듣고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수갑을 찬 채 경찰의 호송을 받았다는 사실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사실은 세상의 유죄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마귀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성령께서는 절대로 세상에 계셔서는 안 된다.”라고 한다면 이는 깜짝 놀랄 말이다. 그러나 신중히 생각하고 한 말이다. 세상에 계셔야 할 분은 그리스도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분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그분을 미워하고 쫓아냈다.
이같이 성령이 예수님 대신 세상에 계신다는 사실은 세상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이다. 성령 강림의 정당성은 주 예수의 부활과 승천과 영광을 통해 확보되었다.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판결을 뒤집으며 자기 아들에게 내려진 인간의 신성모독적 판결을 하나님이 뒤집으셨다는 증거이다.
주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이 필요한 자들의 마음에서 하실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만약 이런 것을 말씀하고 계셨다면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들로 자신들의 불의나 의의 결핍을 깨닫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구절은 전혀 이런 의미가 아니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의(義)와 그리스도의 의(義)를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일 때 했던 주장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칭(詐稱)했다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높여 자신의 오른편에 안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 무죄라는 증거이다. 더 나아가 지금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신다는 사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부터 보내셨기 때문이다.(요 16:7 참조)
그리스도를 몰아낸 세상은 불의했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아버지는 의로우셨다.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사실이 이것을 확증한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11)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아주 논리적인 결론이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분을 영접하길 거부했는데 이 부분이 유죄로 드러났다. 세상에 대한 유죄 판결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당한 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최종적으로 세상과 마귀가 기다리는 것은 심판뿐이다.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사실은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히 2:14)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러 세상을 떠나실 때 세상과 세상 임금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처럼 아주 심각한 구절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 14:17) 세상이 성령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성령째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은 유죄 선언이다. 즉 ‘유죄 판결을 내리다’가 훨씬 더 났다.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세 가지 증명이다.
- 세상의 죄 :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길 거부했다.
- 하나님의 의(그리스도의 의까지) : 하나님은 배척당한 예수님을 높여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셨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한다.
- 심판 : 아직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으나 세상 임금 사탄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
따라서 성령께서 세상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거듭 말하면 요한복음 16:8-11은 성령께서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령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성령께서 세상을 향해 수행하실 사명이나 사역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며 성령의 사명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로 한정된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인(印)을 치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차 될 일을 이들에게 보여주신다. 성령의 사역은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을 필연적으로 성취해야 한다.
가정이지만 정중히 말하겠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죄인들을 위해 죽도록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면 인류 중 단 한 사람의 죄인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어느 죄인이든 자기 필요를 깨닫고 구주를 영접할 마음을 가지려면 성령께서 그에게 그의 내면에서 역사하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죽도록) 그리스도를 내주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구원 선포를 위해) 파송하시기만 했다면 – 죄인들이 자기 뜻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거부하도록 완전히 내버려 두신 채 – 모든 죄인이 복음을 거부했을 것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모든 인간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과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면, 죄인의 타고난 적대감을 꺾으려면, 죄인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권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강권하여’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정확히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며 ‘혼인 잔치’의 비유를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16을 보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했다. 이 장면과 마태복음 22:2-10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각각은 동일한 비유의 독립 된 기사며 세세한 부분이 다른 이유는 두 복음서에서 성령의 목적과 계획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시하신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기사는 이에 어울리게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王, king)’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인자(人子, son of man)로 제시하신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기사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2:3절 ‘종들(servants)을 보내어’라하고, 누가복음 14:17은 ‘종(servant)을 보내어’라 한다. 마태복음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종들’이라고 말하나 누가복음 기사는 항상 ‘종’이라고 한다는 데 주목하라. 우리는 성경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을 믿는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는 복수(複數)로 나오는 반면 누가복음에는 단수로 나오는 데는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22장의 ‘종들’은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모든 사람이지만 누가복음 14장의 ‘종’은 성령이다. 왜냐면 성자 하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는 성령이 여호와의 종이셨기 때문이다.(사 42:1) 그러나 마태복음 22장의 ‘종들’은 세 가지 명을 받았다는 데 주목하라.
- 종들은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불러야 한다.(3절)
- 종들은 “청한 사람들에게 (중략)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라고 말해야 한다.(4절)
- 종들은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청해야 한다.(9절)
이 세 가지는 오늘날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누가복음 14장에도 종은 세 가지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는다.
- 그는 “청하였던 자들에게 (중략)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17절)
- 그는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 려와야 한다.(21절)
- 그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와야 한다.(23절)
이 중 마지막 둘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데 주목하라. 누가복음에서 ‘종’ 곧 성령께서 ‘잔치’에 오라고 어떤 사람들을 강권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주권’, ‘성령의 전능하심’, ‘성령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본다.
‘강권하다.’라는 단어는 성령께서 ‘데려오는 자들’이 절대 스스로는 오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게 분명하다. 우리가 앞 단락들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엡 2:3 참조) 따라서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적대감’을 이겨내고 이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들어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나머지 사람들이 바깥에 남은 까닭은 이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뿐더러 성령께서도 이들을 ‘강권하시지’ 않았기 때문인 게 분명하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능력을 행하시며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께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게 분명하다.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방법들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즉 삼위일체의 각 위(位)는 다른 두 위(位)와 일치(一致)와 조화(調和)를 이루며 일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도록 어떤 사람들을 택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죽어주셨고, 성령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살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삼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만 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