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 머리말  

기독교신앙은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보다 더 뚜렷한 차이점을 가진 종교는 없다. 다만 기독교만이 창시자의 무덤이 비었음을 주장한다. 유대교는 오해하여 아브라함을 유대교의 창시자로 주장하지만 아브라함은 약 B.C. 1900년경에 죽었고 또 그의 부활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석가모니에 대한 역사 설명도 부활과 같은 사건을 결코 기술한 적이 없다. 무함마드(Muhammad, 571-632)는 A.D. 532년 6월 메디나에서 61세에 죽었으며 매년 수많은 무슬림(Muslim)들이 그의 무덤을 순례한다.

이 같이 수백만의 유태인, 불교도, 무슬림들은 그들의 창시자가 이 땅의 흙에서 부활한일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고 또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은 기독교 밖에 없으며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그대로 그리스도는 그의 권세로 부활하셨다.

Ⅱ. 역사적 연구의 문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진리를 다룬다. 또 이 진리들의 계시가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나며 그러므로 이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적 연구로 증명될 수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의 교리가 그렇다.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미국의 신학자인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종교의 교리이다. 아무도 인간의 신분으로 스스로를 낮춘 것을 중명할 수 없고 어느 언어로도 그것을 사실로 증거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며 아직도 우리는 죄 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인식의 범주 안에 있는 외적 사건으로 사실이며 역사적 증언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 참으로 이것이 우리 제도의 근본 교리이며 그 위에 모든 다른 교리들이 성립된다.1)

40년 이상 영국 예일대학(Yale University)의 유명한 영문학 교수였던  있던 펠프스(William Lyon Phelps, 1865-1943)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부활이다. 기독교신앙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사복음서 기자들이 역사적인 이 사건을 명백히 보여주며 바울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명이 논술된 어떤 다른 이적보다 더 강하다. 그 이유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만약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복음 증거도 헛되며 우리의 믿음도 헛되기 때문이다.2)

영국의 전 대법원장이었던 다링 경(Charles John Darling, 1st Baron Darling, 1849–1936)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견을 말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교훈하시고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졌는지 또 행하신 기적과 이적들 특히 부활 등의 문제는 어려운 문제지만 진리에 속한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산 진리로써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으며 특히 부활의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여 세상의 지성을 가진 모든 배심원들도 부활이 사실이라고 판결할 수밖에 없다.3)

이 같은 결론은 성경자체가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하나님은 도처에서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을 기뻐j하신다.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딤후 1:16)고 했다.  

또 누가는 말하기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고 했다. 또 다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행 10:39-41)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그가 하신 말씀들을 확증하시기 위해 많은 역사적 증거를 보여주셨다. 마태복음 28:2은 이를 증거하고 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천사들이 거대한 무덤 문을 굴려낸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는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무덤 문을 막았던 돌도 가둘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가시기 위해 돌을 굴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무덤 문을 막은 돌을 굴려 냈는가? 제자들이 무덤에 들어가 수의(壽衣)가 잘 개어져 있는 것을 관찰하게 하고 또 그들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를 확실히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무덤에 왔을 때 천사들이 말하기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고 했다.    38

이 말씀은 나를 아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은 어떤 역사적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고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창조주시지만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악한 불신앙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부인할 수 없는 많은 증거들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는 이 말씀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제자들로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 부활에 대한 모든 의심을 버리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이었다.

또 이것은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특히 도마에게 보여주신 겸손하심을 생각나게 한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는 그의 이적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이며 기독교가 서게도 되고 넘어지게도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제자들로 의심 없이 믿고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유대 지방의 로마 지배인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재임 26-36) 시대에 주님의 부활을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연구과제로 개방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이 사건의 목격자들이 많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교회가 제국에서 자라기 시작하고 주목할 만한 힘을 가지게 되자마자 그 시대의 세속적 문헌에 반영되어져 있다.

Ⅲ. 부활의 중요성

“기독교는 부활과 함께 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고 한 저자가 말하기를 “만일 부활이 있으면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중요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고 부활이 있는 한 모든 것도 있다. 켈서스(Celsus,  2nd century Greek philosopher)이래 수세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주된 공격의 목표가 되어왔다.”4)고 했다. 워필드는 “그리스도 자신은 그의 부활에 대한인간의 믿음을 보려고 그의 모든 주장을 내 걸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요 2:18-22) 예수님은 간단하고도

충분한 증거의 표적을 보여 주셨다.”5)고 말했다.

유명한 학자며 교수였던 월버 엠 스미스(Wilbur M. Smith, 1894-197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획기적인 부활 사건의 역사적 기록을 믿는 이성을 깨뜨리기 위해 어떤 무기도 만들어진 적이 없고 또 누구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아성(牙城)이다. 부활이 주후 일세기를 뒤 엎었고 기독교를 유대교보다 우월하게 만들었고 대서양 세계의 모든 이교도들 보다 우월하게 했다. 부활이 있는 한 주 예수의 복음의 유일무이함과 중요함이 있게 된다.6)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고전 15:17)

또 다른 부분에서 같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시작 된 첫날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합심해서 집중적으로 증거 해 왔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 하나이며 교회의 신념 중 하나이고 신약 성경 어디에나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만약 부활에 관해 증거 한 구절들을 성경에서 다 빼버린다면 남은 부분들은 서로 연결이 잘 안되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7)

로마서 4:23-25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많은 다른 구절들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 사이에 중대한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선민의 죄가 속죄되며 그리스도의 부활도 하나님은 독생자의 사역을 허락하시고 그를 살리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주장과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 사이에는 가장 깊은 관계가 있다. 스페로우 심프슨(W. J. Sparrow Simpson, 1859-1952)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느냐고 질문 받는다면 첫째, 그가 그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요한복음 10:18에서처럼 그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그의 아들도 똑 같이 행하시기 때문에 그가 그의 아버지의 권세로 살아났다고 말하는 많은 구절의 사실이 모순된 것은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공연히 선포하신 것처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선포의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다. 그가 죽음의 권세 하에 계속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그것으로 인해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려 내셨고 공개적으로 “너는 내 아들이고 오늘 나는 그렇게 선포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인정하셨다.8)

또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훈들은 부활교리에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 자신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아들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가 부활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우리의 소망은 헛된 소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 모두가 다 거짓 증인들이 될 것이며 신약성경도 온통 거짓투성이가 되며 큰 권세와 영광중에 그의 왕국을 세우려고 이 지상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만약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죽음의 권세는 그대로 계속 존속하며 또 죄의 결과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의 중요성도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신자들은 아직도 죄 중에 있고 정확히는 예수의 이름을 듣기 전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9)

Ⅳ. 그리스도의 놀라운 주장

인간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이시며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은 복음서에 꼭 있어야 할 사실이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그가 자신의 신성을 주장한다고 믿고 돌을 들어 치려했다. (요 10:30-33)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명했다.(요 14:1)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이 신성함을 주장하셨다.(막 13:31)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써 경배를 받으며(마 14:33, 요 20:28) 하나님과 동일하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2:7, 마 9:5,6)  

요한복음 20:30,31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뛰어난 표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최후 확증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그가 살아나신 이적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자 유대인들은 그에게 대들며 그렇게 행동하는 권위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 그러자 예수님은 그 표적은 자신이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프래드릭 고뎃(Frédéric Louis Godet, 1821-1900)은 말하기를 “이것은 이적이며 그리스도께서 권위와 주장의 증거로서 언급했던 유일한 이적이다.”10)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이적들과 특별히 부활의 이적은 영광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을 보여 주려는데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말이 예수님을 재판하는 동안 주요 쟁점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가 행했던 많은 기적에 대해서는 재판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일에 대해서는 재판을 받았다. 또 이것은 일반적인 재판이 아니었다. 린톤(Irwin H. Linton)은 이 점에 대하며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형사 재판 중 피고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피고인의 신원(身元) 확인이 재판의 논쟁점이 된 것은 이 재판이 유일한 것이었다. 형사상의 죄과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그의 법정에서의 고백은 그가 범죄 했다는 근거가 됐으며 처형당하는 십자가위에 써 붙인 죄 패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이 질문과 연관되어 있었다.11)

예수님을 외에는 어떤 종교 지도자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석가모니, 무하마드, 공자 등 모두가 그런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라고 했고 그 이유 때문에 미움 받았고 재판을 받게 됐다. 그리스도를 거짓 고소하려고 나온 증인들은 소망이 없는 혼란 중에 빠진 자들이었다. 이 재판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존재성 때문에 고소되었다. 마가복음 14:61에 예수님이 처음에 잠잠하고 아무 대답이 없자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대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명백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라고 했고 유대인들은 이 일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가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라고 했다. 맥도월(McDowell)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던 증거로 완전하고도 명백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그의 대답을 이해했어야만 했다. 즉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그의 주장이 완전히 신성모독이든지 혹은 그가 하나님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유대인 재판관들은 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 하실 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라고 하며 그를 희롱했다.12)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은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단순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만약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의 모든 말은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의 모든 말은 거짓말이며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말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주장한 것인데 그런 경우 그는 거짓말쟁이 이며 위선자이고 부도덕한 사람이고 그는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위해 죽은 바보가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말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주장한 경우인데 이런 경우 그는 정신 이상이자이며 자기를 기만한 것이다. 두 가지 중 어떤 경우든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를 선생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지만 그러나 그는 진정 하나님이었다고 루이스(C.S. Lewis, 1898-1963)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주장을 반대한다면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그에게 침을 뱉을 수 있으며 악마라고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그의 발 앞에 끓어 엎드려 그를 주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단순히 인간적인 위대한 선생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는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또 그는 그런 의향도 없었다.13)

결론은 이렇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이런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말한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정말 살아나셨는가? 혹은 잘못된 개념인가? 이 점에 대해 계속해서 부활에 대한 확증을 증거 하고자 한다.

Ⅴ. 부활의 일반적인 증거  

신약은 다음과 같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장사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굉장히 낙담했다. 얼마 후에 그들은 굉장히 의기양양해서 순교의 죽음을 불사하는 헌신적인 생애를 보내는 확신을 보여 주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켰는지 그들이 쓴 여러 글들의 대리인들을 통해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 우리들에게 나타나셨고 우리 모두는 그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나 글을 통해서 그 당시의 세상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음을 알렸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이 그 세대에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 요점이 되는 중요한 점은 부활의 목격자인 그리스도의 사도들 바로 이들의 생존 시에 신약의 모든 책들이 기록됐다는 점이다. 캐반(Ernest F. Kevan, 1903-1965)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행전은 A.D. 63년과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A.D. 70년에 누가가 썼다. 누가는 복음서의 서문에서 이 모든 정보를 목격자들로부터 알아낸 것이라고 했고 또 사도행전을 쓴 방법도 명백히 이렇게 했으리라 본다. 초창기 사도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도 아주 좋은 확증이 있다. 이 서신들은 고차적인 역사적 확증을 이루고 있다.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로마서는 A.D. 55-58년에 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문자적 확증으로 그 사건 후 얼마 되지 않아 기록된 것이다. 그 기간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바울이 이들 서신중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사람들과 있을 때 부활에 대하여 그들에게 벌써 이전에 말했다고 했으므로 부활 후에 15년으로 그 시기를 보아도 된다.14)

문자적 확증이 부활 그 자체와 일치함으로 그 부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부활에 관한 신약의 글과 말을 교회가 받아들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에 많은 생존자들이 있어서 저자가 사기꾼임을 알려 주었을 것이고 또 문서위조를 쉽게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몰랐다고 가정할 수 없다. 암부로스 프레밍(Ambrose Flemi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문학자들의 확증에서 천문학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는  사도들의 이 확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약 30-40년 전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이 신화적이고 거짓된 비정상적인 이야기라면 소중히 여기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30-40년 전의 사건에 관해서 중년을 지난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15)

영국의 유명한 법률가 클럭(Sir Edward Clarke)은 이렇게 말했다.

법률가로서 나는 최초의 부활사건의 확증에 대한 오랜 연구를 했다. 나에게는 그 확증이 확실한 것이며 계속해서 고등법원에서 연구한 결과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추론적 결론은 참 증거에서 나오며 참 증거는 항상 소박하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증거는 이런 유에 속하며 법률가로서 나는 진실한 사람들이 입증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거리낌 없이 성경에 기록 된 대로 부활을 받아들인다.16)

14년 동안 러그비(Rugby)의 유명한 교장이며 법률가였던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 1795-1842)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주님의 생애와 죽음, 부활에 대한 증거는 좋은 증거와 나쁜 증거로 구별하는 일반법칙을 따르면 된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은 모든 재판관이 대부분의 중요한 소인(訴因)을 아주 주의 깊게 결론짓는 것처럼 하나 씩 하나 씩 조사를 한다. 나 자신은 이것을 여러 번 조사했는데 다른 사람을 설복시키려한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다른 시기의 역사를 연구해 오는데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많이 연구하는 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인류역사에 이 보다 더 잘 증명된 사실이 없음을 나는 알게 됐다.17)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법률가 중의 한 사람이며 세 번이나 영국의 대법관을 지낸 유명한 린드허스트 경(Lord Lyndhurst,  1772-1863)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확증이란 무엇인지 아주 잘 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확증은 결코 깨뜨려진 적이 없는 확증이다.”18) 마지막으로 하바드 대학의 그린리프(Simon Greenleaf, 1783–1853) 교수의 강력한 주장이다.

사도들이 선포한 위대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의 소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고 했다. …. 그들(사도들)의 주님은 법정의 판결로 죄인으로서 얼마 전 죽었다. …. 모든 나라의 법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반대했다. 모든 통치자들의 관심과 정열 또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도 그 제자들을 반대했다. 이 세상의 풍조도 그들을 반대했다. 가장 해가 되지 않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의 이 새로운 믿음을 전파하려 했지만 그들은 단지 경멸, 반대, 욕설, 가혹한 박해, 매질, 투옥, 고문 그리고 잔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믿음을 열심히 전파했으며 …. 그럼에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연감은 이 같이 꾸준한 인내로 복음을 전파 사도들의 용기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사도들은 이 믿음의 이유, 위대한 사실의 확증,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려고 모든 가능한 기회를 다 이용했으나 이런 동기는 가장 슬프게도 빈번히 공격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도 않았으며 이 부활에 대해 확실히 모른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19)

부활에 대한 세세한 확증을 및 가지 계속해서 찾아보자.

Ⅴ. 주님 부활하시기 전 상황

1.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많은 과격한 회의론자들은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들 이론에 따르면 예수님은 무덤 속의 찬 공기 때문에 다시 깨어나셨고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믿게 되었고 나가서 그들의 생각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극(喜劇) 같은 주장은 많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막 15:44)을 확실히 증명했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요 19:34)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한다. “정말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면 육체가 약한 처지에 어떻게 무덤을 막은 그 큰 돌을 굴렸겠는가? 또 예수님이 돌을 굴려내고 군병들을 피해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치자 어떻게 부활의 변화된 영광의 몸이라는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는가?” 이런 어거지 주장은 솔직하고 조리 있는 복음서의 설명보다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한다. 미카엘 그린(Edward Michael Bankes Green, 1930- )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피와 물이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이를 직접 본 사람의 증거를 우리는 듣는다.(요 19:34,35) 이 목격자는 명백히 이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창이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세차게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목격자는 흘러나오는 묽은 혈청과 구별하여 반쯤 굳은 검은 피 덩어리가 흘러나온 것을 주목했다. 이것은 대동맥에서 피가 덩어리졌다는 증거이고 죽음에 대한 아주 뚜렷한 의학적 증명이다. 복음서 기자가 병리학자라야 알 수 있는 이 같은 중요한 현상을 몰랐을 터인데 이렇게 쓴 것을 보면 더욱 더 감동적이다.20)

2. 예수님이 장사 된 무덤은 실제(實際)였다.

기록된 사복음서는 무덤에 관해서 어디에 예수님의 시체가 놓였었고 또 그를 어떻게 장사지냈는지 아주 자세하고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동굴처럼 바위를 깎아 만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으로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라고 했다. 또 주님이 십자가상에 못 박히신 장소에서 가까운 동산에 그 무덤이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에서 가깝다는 것은 그 날이 늦었으므로 주님을 급히 장사지내는데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월버 스미스(Wilbur Smith, 1933- )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이 있었던 장소는 지리적으로 명확하고 그 무덤을 소유했던 사람은 1세기 초에 살았으며 무덤은 예루살렘에 가까운 언덕의 바위에 만들어졌고 무덤에 대한 신화적인 요소나 구름에 싸인 것도 아니고 지리적으로 중요함을 가지고 있다. 무덤 앞에 있던 파수꾼들은 올림프스(Olympus) 산에서 온 공상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서 자주 모이는 회합이었다. 아주 여러 번 우리에게 이 사람 즉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살았던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다.21)

3.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장사지냈다.

고대 역사에 나오는 어느 사람의 장례에 대해서보다도 더 자세하게 우리는 예수님의 장례(葬禮)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 바벨론 왕, 이집트의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 로마의 승리자 시이저 등 그 어떤 인물에 대한 장례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 더 명확히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을 어떻게 장사 지냈는지 사복음서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거기 있었던 제자와 마태의 기록, 주님이 부활하신 후 10년 이내에 기록했다고 하는 마가의 기록, 사도 바울의 동행자였고 위대한 역사가였던 누가의 기록, 십자가 곁에 제일 나중까지 남았었고 12제자 중 제일가는 베드로와 함께 부활의 아침 빈 무덤을 보았던 요한의 기록이 다 일치하고 있다.22)

요한복음 19:38-41에서 말하듯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주님의 시체를 아주 급히 서둘러 장사지냈다. 그 시체를 3,4겹의 세마포로 샀고 많은 향유를 붓고 끝에 수를 놓은 수건으로 머리를 들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시체를 무덤에 두었을 때 머리는 입구에서 먼 쪽에 베개로 쓰인 약간 올라간 부분에 뉘었을 것이다.23)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시체를 벗기고 똑바로 누인 후 약 일 피트(30.48cm)의 넓이로 된 세마포로 겨드랑 밑에서 발목까지 단단히 묶었다. 끈적끈적한 고무 같은 향료를 세마포 갈피마다 넣었다. 이 향료는 세마포를 시멘트 같이 붙여서 딱딱한 덮개도 되고 방부제의 역할도 한다.24) 

요한복음이나 어떤 다른 복음서에도 향료가 무덤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다. (중략) 나의 논점(論點)은 향료를 세마포의 갈피마다 넣었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말에 의하면 니고데모가 가져온 많은 향품은 굉장히 많아서 일반적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양은 중요하지 않고 향료가 건조된 것인지 반쯤 건조된 것인지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향료가 말라 있었다면 시체를 똑바로 세우든지 수의를 벗긴다면 향료가 무더기로 바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25)

위에 인용한 글들은 주님의 시체가 장사될 때 어떻게 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또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시체를 싸서 놓은 후 수의를 약간 건드린다면 향료가 무덤바닥에 떨어지게 됐을 것이다. 게다가 시체를 싸 놓은 본래의 형태를 상하지 않고 묶어 놓은 세마포를 예수님이 절대로 빠져 나오실 수는 없다. 예수님의 몸이 세마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4. 무덤 문을 막은 돌은 거대한 돌이었다.

마태복음 27:60에 보면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26)라고 했다. 토번(T. J. Thorburn)은 “이 돌은 사람과 동물을 막으려 사용했다.”고한다. 그는 언급하기를 “이 돌은 아주 커서 그 돌을 옮기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예수님의 무덤 앞에 있던 돌은 도둑을 방지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보통 무덤 문의 돌보다 더 컸을 것이다. 마가복음 16:4은 그 돌이 ‘심히 크더라.’라고 했다. 모리슨(Frank Morison, Albert Henry Ross, 1881-1950)은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자들이 안식일 후 첫날 일찍 무덤으로 갈 때 “어떻게 무덤  문을 막은 그 큰 돌을 굴릴까?”하는 걱정은 그들을 상당히 당황케 했음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여자들 중에서 두 사람은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을 보았고 크고 무거운 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라는 구절을 볼 때 여자들의 마음의 상태를 말해 주며 또 놀라운 방법으로 무덤의 장면에 대한 역사적 성격을 확증해 준다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27)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 성경의 기록은 모순이 없으며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 돌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순전히 인간적인 힘으로 그돌을 밀쳐냈다든지 또 회의주의자의 주장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시체가 로마 파수꾼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훔쳐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5. 로마군의 경비는 최고 수준이었다.

마태복음 27:62-66에서 다음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가 묻힌 무덤을 인봉하고 로마 병정들이 무덤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빌라도에게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부활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시체를 도적질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겠다고 하신 예언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의 악한 행위가 그들의 양심을 괴롭혔고 그래서 더욱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하든지 막을 모든 예방책을 취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로마 사람들인지 또는 성전 경비병들인지 명확하지 않다. 맥도웰(McDowell)은 “마태복음 28:11에는 파수꾼들이 가서 대제사장에게 고했다고 했다. 이를 보아서는 그들이 대제사장에게 속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파수꾼 중 몇이 빌라도에게 고했더라면 경비병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들은 즉시 처형당했을 것이다. 14절은 그들이 로마 군병들이었고 빌라도에게 소속해 있다는 견해를 확실히 해주고 있다.”28)  

이와 관련해서 파수병에 대한 로마군 군율은 엄하기로 유명하다. 커리(Geroge Currie)는 말하기를 “그의 의무를 다 못하는 로마 군인은 사형을 당했다. Polybius Ⅳ37,38에 그 같은 처벌에 대한 공포가 의무를 잘 이행하게 하며 특별히 밤에 파수를 보는 일은 더 하다.”고 했다.29) 커리는 또한 Justinian’s Digest 49:16에서 로마 군병이 사형 당하게 되는 18가지의 죄를 열거했다. 그중 하나가 밤에 파수 보다가 이탈하는 것이라고 했다.30) 커리 교수는 다른 글에서 파수 보는 중 잠자다 들킨 로마 군인은 높은 벼랑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고 했다.31) 

현대 군대의 규율에 비해 로마군의 군율이 엄하고 위반자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음이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로마 군병들은 빈틈이 없었으며 그들의 의무를 방해하는 모든 일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처형 후에 그렇게 많은 걱정을 끼친 범죄자는 없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군대들이 그토록 철저하게 지킨 일은 결코 없었다.”32)

이처럼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하게 됨을 막으려고 모든 예방책이 취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예수님이 죽음의 무덤에서 변화된 몸으로 자신의 권세로 부활하셨을 때 악한 자들이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부활을 막고자 했던 이 모든 예방책은 허사가 되었고 도리어 예수의 부활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확증하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6. 무덤 문은 로마제국의 이름으로 인봉(印封)되었다.

예수님의 시체를 누군가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가장 군율이 엄한 로마 군병들이 최고의 수준으로 무덤 문을 지키고 있었다면 무덤의 돌문에 인봉(印封)을 한 것은 혹시라도 군병들이 뇌물을 받고 시체를 내주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웰든(D. D. Wheldon)은 말하기를 “인봉한 무덤 문은 누구도 열수 없었다. 인봉한 문을 부순다는 것은 인봉을 한 로마 당국에 대한 반역죄가 된다. 파수꾼들을 세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는 것을 막으려 했고 무덤의 돌문을 인봉한 것은 시체를 가져가기위해 돈으로 매수하려는 자들과의 공모를 막기 위해서였다.”33) 로벗슨(A. T. Robert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무덤을 인봉(印封) 한 방법은 아마 밧줄로 돌을 묶어 놓고 다니엘 6:17에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함 이었더라.”라고 한 것처럼 인을 쳤을 것이다. 이 인봉은 로마 제국의 권위와 힘의 상징으로 파수꾼들이 있는 현장에서 행해졌다. 유대인들은 시체가 도적질 당하는 것과 부활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 했으나 술책만 지나치게 부렸지 그들은 결국 무덤이 비었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을 제공하게 됐다.34)

로퍼(Albert Roper)는 이에 부가하여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의 온갖 요구에 빌라도는 묵묵히 따랐다. 그들은 로마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군인들이 지시 하는 대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로마 제국의 인(印)을 치고 또 이것을 파손하는 것은 반역죄가 된다고 하는 의미로 총독의 이름으로 봉인도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대적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낸 후 주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할 때 변명할 수 없도록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예방책은 다 썼다.35)

이 같이 유대인 지도자들 요구대로 총독 빌라도는 부당하게 시체가 도적질 당함을 피하려고 로마 군병들과 로마 제국의 인(印, Seal)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 로마 군병들과 이 제국의 인(印, Seals)이 오히려 역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 부활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마태복음 28:11-14에 보면 의무를 다하지 못한 로마 군병들이 죽임 당할까 두려워 로마 총독에게 가지 않고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 도난설’이 여기서 나오게 되었는데 군병들은 유대인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이 자는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고 소문을 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로마 군병들이 그들의 당국에는 빈 무덤을 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시체 도난 설’을 믿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제자들은 무기도 없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그런 일을 시도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만약 제자들이 그렇게 시도했더라도 비밀리에 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돌의 크기, 로마 군병의 힘, 인봉한 법적 조치 등 이 모두가 제자들의 시도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가능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가 말했던 것처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이다.

7. 제자들은 두려워 다 도망쳐 버렸다. 

마태복음 26:56과 마가복음 11:50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된 후 그를 버리고 다 도망했다.”고 했다. 제자들 중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가장 용감한 베드로까지도 갑자기 겁쟁이가 되어 대제사장 앞뜰에서 한 계집종의 조롱과 모욕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 로퍼는 이러한 제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고 대부분 어부들이며 그들 모두가 도시생활 에 낯설었다. 그들은 같은 고향 나사렛 출신의 젊은 선생을 따랐다. 이 같은 예상 못한 위기가 올 때까지 그들은 기꺼이 그를 따라 어디든 가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악한 자들 손에 붙들리자 그들 모두는 뒤로 물러섰으며 횃불과 무리들의 함성과 군병들의 무기와 그리고 로마군 기병에 위압당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그들만 살겠다고 도망쳤고 누구도 모르는 은신처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장사 후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까지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후 단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만이 헛소리라고 무시했던 그 사실 마리아가 전해준 예수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용기를 내어 무덤으로 달려갔다. 제자들의 이 같은 태도는 두려움과 불신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비겁한 태도였다.36) 

에더쉐임(Edersheim)은 “지금 막 십자가에 달린 주님에 대해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분명히 죽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부터 부활할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죽던 그 순간 니고데모가 가져온 장례용 향료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료 이것들은 몸이 부패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용하는 것인데, 빈 무덤가에서 여자들이 슬퍼했던 일, 사도들의 당황한 태도와 많은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후에 “저회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하신 말씀은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라는 분명한 말씀 등에서 많은 확증을 얻게 된다.37)

이 문제의 결론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 했으리라는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부활신앙의 기쁨을 만들어 낼 능력도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해답은 제자들 밖에 있는 것으로써 실제로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Ⅵ. 주님 부활하신 후의 상황

1. 빈 무덤

제자들을 믿게 한 것은 빈 무덤 그 자체가 아니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거기에 갔던 여자들이 본 천사들 때문도 아니었다.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여인들 또 베드로까지도 이런 일들 때문에 믿게 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제자들을 확실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은 많은 점에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주님께 적의를 품은 이 세상에서 만약 무덤이 비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단 하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 무덤은 부활에 대한 확증 가운데 필수적인 요소로 확고한 바위처럼 솟아있다. (중략) 사도들은 처음부터 적의에 찬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략) 사도들은 주님 무덤이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예수 부활을 전파했다. 그래서 청중 가운데 누구나 원하면 즉시 무덤에 가 볼 수 있었다. 사도들이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선포했는데 만약 그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계속 썩고 있었다면 사도들은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38)

둘째, 예수의 빈 무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이 또한 중요하다.

사복음서는 기독교의 공동체에게 그들이 알고자 하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기록됐는데 이 복음서들 중에서 빈 무덤에 대한 언급을 주목해본 적이 있는가? 사도행전에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대중설교 가운데 주님의 부활에는 큰 강조점을 두었으나 빈 무덤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과연 왜 그랬을까?

나로서는 오직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다. 즉 주님의 빈 무덤에 대해서는 그 당시 그들 중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친구이든 적이든지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논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문제는 “왜 그 무덤이 비어있었으며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하는 것이었다.39)

셋째, 빈 무덤은 단지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것뿐이고 예수님의 무덤은 결코 숭배물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앤더슨이 말하기를 “무덤이 초대교회 때 존경이나 순례의 장소가 됐다는 말이 없는데 이 점이 또한 중요하다.”40)라고 했다. 모리슨은 부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간 사람에 대하여는 초기의 외경이나 선교 서설 또 사도행전 어디에도 그런 흔적이 없다. 작지만 아주 중요한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라. 성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대한 절대적으로 깨뜨릴 수 없는 이 침묵 (중략) 이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41)

2. 예수님의 수의(壽衣)

예수님의 시체를 움직였을 때 무덤 바닥에 향료가 흩어지게 되며 시체에서 수의를 벗기면 수의 본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돌을 굴려 낸 것은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볼 수 있게 하고 특히 잘 정돈된 수의(壽衣)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천사가 말하기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고 했다. 요한복음 20:3-11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갔고 요한은 무덤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그 장면을 잘 보았다. 시체가 없어졌으나 수의는 깨끗한 상태의 본래모습대로 놓여있었다고 했다. 스토트(Stot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도 무덤에 있었다고 가정 해 보자. 우리가 무엇을 보았겠는가? 갑자기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게 된다. 수의는 살짝 밑으로 가라앉아 있고 얼굴과 목을 쌌던 세마포와 수의 사이에 공간이 보였다. 세마포로 쌌으므로 그 모습은 그대로 비밀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 머리가 없었다. 요한이 쓴 본문을 잘 연구해 보면 그가 이런 것들을 보았다고 증거 하고 있다. 그가 보고 믿은 것은 당연하다. 수의를 보았다는 것은 실재를 증명하고 부활의 성격을 지적한다. 인간이 수의를 만지지도 않았고 개지도 않았다. 즉 수의는 나비가나오고 버려진 번데기 같았다.42)

라탐(Latham)은 빈 무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옷은 잘 개어져 있었고 향료는 하나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세마포 역시 시체의 머리를 얹는 베게로 쓰인 약간 높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세마포는 일종의 머리 장식으로 짜진 것인데 따로 떨어져 있었다. 이 장면의 조용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사렛 예수는 변화되어 가버리셨다.” 다만 거기에는 세상에 속한 수의, 향료, 세마포만 남아 있었다.43)

3. 유대인들이 진실을 거짓으로 왜곡

마태복음 28:2-4은 지진이 나는 가운데 천사가 와서 돌을 굴렸다 고 말한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회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그러나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공포에 떤 것은 로마 군병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토번(Thorbur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수를 보았던 병정들은 무서운 난국에 부딪쳤다. 돌이 굴러가 무덤 문이 열리고 인봉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엄격한 로마군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다. 군병들은 자신들이 졸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파수 보는 중에 조는 자는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사형은 항상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유대인 제사장들의 도움을 받는 길 외에 사실 살 길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시체가 없어졌고 또 태만이 인정됨으로 사형 당해야만 했다.(행 12:19)44)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병들은 무덤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전혀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군병들이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시체를 지키지 못한 죄로 사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 군병들이 자신들의 상관보다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을 찾아간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처형당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약속을 받고 로마 군병들은 나가서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기로 합의했다.(마 28:14,15) 아무튼 그들은 빈 무덤을 자연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4. 부활의 목격자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적어도 열 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네 번(바울의 회개 시, 스데반에게, 성전에 있는 바울에게, 맛모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셨다고 말씀한다.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 1931-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부활의 목격자로서 했으며 그들이 말한 사건과 접한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는 동안 선포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A.D. 56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본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고 했고 그들 중에 대부분이 아직 살아있다고 기록했다.(고전 15:6 이하)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을 쉽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단순히 예수의 시체를 조작함으로써 그것을 전파했으리라고는 전혀 믿을 수가 없다.45)

앤더슨도 첨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부활사건을 깨끗이 잊어버리게 하는 간단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조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시도할 수 없었고 실제로 불가능했다. 생각해 보라. 500명이 넘는 부활의 증인이 있다는 것을 또 증인들의 성격이 그러하다. 그 증인들이란 이 세상의 최고의 윤리적 교훈을 준 남녀들이다. 그들의 원수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라고 하는 점을 또 다락방에 있는 실패한 비겁자들의 작은 무리가 아직 핍박이 그치지 않은 그 때에 며칠 사이에 돌변하여 그것을 조작할 극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46)

5. 그리스도의 적들의 침묵

사도행전 2장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담대히 설교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도 유대인 중 아무도 그것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가? 텅 빈 무덤의 증거가 누구든 부활을 부인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직접 볼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예수의 몸이 무덤에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의 메시지에 대한 초기 유대인들의 변증을 복음서에서 추적할 수 있는데 예수의 무덤이 손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의 반대자들이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확증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부활 위에 세워졌으며 만일 누군가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말살됐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 후 일 세기를 통해서 그러한 반증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부활신앙 때문이 협박당하고 매 맞고 징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원수들이 예수의 시체를 조작함으로 그들을 침묵케 하는 것이 더 쉬웠을 텐데 그러나 결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47)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침묵은 사도들이 기록한대로 부활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이다.”48)

Ⅷ. 부활의 다른 명백한 증거들

1. 제자들의 변화된 삶  

존 스토트(John Stott)는 말하기를 “예수의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모든 증거 중에 가장 위대한 증거일 것이다.”49)라고 했다. 그린리프(Greenleaf)는 말하기를 “군대의 전쟁기록 연감에 이와 같은 영웅적인 일관성, 인내, 굽히지 않는 용기의 예는 없다. 그들은 그들 신앙의 근거를 면밀히 검토할 가능한 모든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장하는 위대한 사실과 진리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50) 

리틀(Little)은 말하기를 “사회의 도덕적 변화를 가져온 이 사람들이 완전한 거짓말쟁이들인가? 아니면 속임을 당하고 있는 미치광이들인가? 이 둘 중 어느 것을 믿는 것보다는 부활의 사실을 믿는 것이 더 쉬우며 부활을 부인할 그 가능성은 지지할 증거의 단편도 성경 안에도 밖에도 없다.”51) 앤더슨은 이와 같이 요약한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날 제자들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십자가 지시던 날 그들은 절망이었으나 안식 후 첫날에는 확신과 소망으로 그들 가슴이 타 올랐다. 부활의 메시지가 처음 전달됐을 때 그들은 믿지 않았으며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확신했을 때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짧은 시일이 그 같은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히 주님의 시체를 무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그들의 영혼과 인격을 결코 그렇게 변화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사흘은 전설을 만들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치가 않다. 전설의 발전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로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52)

2. 신약교회

사도행전의 처음 장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히 설교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주된 주제 자체였음을 결론짓게 된다. 사실 부활 사건은 그들의 초기 설교를 가득히 메웠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부할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생기게 된 유일한 설명이 되며 초기 교회의 급성장의 이유가 된다.  

메이요(Henry Dewsbury Alves Majo, 1871-1961)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제자들의 체험이 끝났다면 교회가 생기기는 어렵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메시아 직에 대한 신앙 위에서 세워졌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메시아가 전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에 의해 거절당했으며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았다. 바울이 로마서 1:4에서 말한 대로 그를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게 한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53) 교회사가 라토레트(Kenneth S. Latourette, 1884-1968)는 부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제자들을 절망에서부터 생명을 바쳐 그 운동을 계속하도록 한 것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게다가 그들은 그를 보았고 함께 말했다는 깊은 신앙이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이나 심지어 예수 자체도 영원히 잊어졌을 것이다.54)

3. 주님의 날(主日)

초기 기독교인은 다 유대인이었으며 다 구약성경에 의해 신앙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제7일에 안식일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제7일은 6일간의 창조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같이 주님이 부활하신 첫 날로 예배의 날을 변경한 것은 창조를 기념하는 제7일보다도 더 위대하고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의 본래 예배드리는 날이 토요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를 마치시고 토요일인 제7일에 쉬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룩한 율법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 유대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경건한 일중의 하나는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첫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제7일에서 첫째 날로 안식일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렇게 제7일을 첫째 날로 바꾼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7일인 토요일에서 첫 날인 주일로 예배드리는 날을 변경했다는 것을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56)

4. (聖禮)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 후 얼마동안 계속하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 성례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주님이 친히 성례를 제정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명하셨기 때문에 교회의 탄생과 함께 성례가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다. 성례가 부활하신 주 외에 무엇을 지적하는가? 사도행전 2:46에는 초대교회가 주님의 죽음을 죄에 대한 속죄로써 기쁨으로 기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린은 초대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이 성찬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죽고 떠나간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 그들은 그의 이 죽음을 부활하신 자가 살아 계시다는 자각 속에서 그가 역사의 마지막에 이 땅에 재림할 때까지 기념할 것이다. 그가 참으로 사홀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아니했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에 주의 성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난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56) 

그리스도인의 세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유대교와는 다른 점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계속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세례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주를 믿으며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 세례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울은 사람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다고 설명을 한다.(롬 6:1-6, 골 2:2)57)

결론

우리에게 성경 자체의 말씀보다 더 좋은 결론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14, 15, 20, 25, 26, 58)(*) 글쓴 이 / Dr. Robert S. Rapp(신학박사, 한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대 교장)  

1) B.B. Warfield,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 Historic Fact, evinced by Eye-Witness(Journal of Christian Philosophy, Ⅲ, 1884), P. 305.

2) William Lyon Phelps, Human Nature and the Gospel(cited by Wilbur Smith, A Great Certainty in This Hour of World Crisis, Van Kampen Press, 1951), Pp.131-132.

3) Cited by Michael Green, Man Alive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68), pp. 53,54

4) James Hastings, Dictionary of the Apostolic Church, Vol. n (Edinburgh: T. & T. Clark, 1918), p. 330.

5) B. B. Warfield, Tbe Person and Work of Christ (Nutley,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0), p. 537.

6) Wlbur M. Smith, “Scientists and the Resurrection (Christianity Today, April15, 1957).

7) Wlbur M. Smith, Therefore Staad: Christian Apologetic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s, 1965), p. 369.

8) W. J. Sparrow-Simpson, The Resurrection and Modem Thought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68), P. 287.

9) W. J. Sparrow-Simpson, cited in A Dictionary of Christ and the Gospels, Vol. 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09), p. 514.

10) Frederick Godet, cited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London: The Campbell Morgar Memorial Bible Lectureship. Westminster Chapel, June 14, 1961), P.S.

11) Irwin H. Linton, The Sanhedrin Verdict(New York: Loizeaux Brothers, Bible Truth Depot, 1943), P. 7.

12) Josh McDoweIl, 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 (Arrowhead Springs: Campus Crusade for Christ, 1972), p. 94.

13) C. S. Lewis, Mere Christianity (New York: The Macmillen Company 1952), pp. 40, 41

14) Ernest F. Kevan, cited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London’. The Campbell Morgan Memorial Bible Lectureship, Westminster Chapel, June 14, 1961), P. 4.

15) Ambrose Fleming, cited in Therefore Stand: Christian Apologetics, p. 427.

16) Sir Edward Clarke, cited by John R. W. Stott, Basic Christian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1), P. 47.

17) Thomas Arnold, cited in Therefore Stand: Christian Apologetics, p. 425.

18) Lord Lyndhurst, cited in Therefor Stand: Christian Apologetics, p. 425.

19) Simon Greenleaf,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Examined  by the Rules of Evidence Administered in Courts of Justic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65, reprinted from 1847 edition), PP. 28, 29.

20) Michael Green, Man Alive(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68), P. 33.

21) Wilbur M. Smith, Therefore Stand: Christian Apologetics, p. 386.

22) Ibid., PP. 370-71.                          

23) Henry Latham. The Risen Master (Cambridge: Deighton, Bell, and Co., 1904),p. 36.

24) Merrill C. Tenney, The ReaIity of the Resurrection (Chicago: Moody Press, 1963), P. 117.

25) Latham, op. cit., PP. 36,37.

26) T. J. Thorburn, The Resurrection Narratives and Modem Criticism (London: Kegar Paul. Trench, Truber & Co., Ltd.. 1910), P. 97.

27) Frank Morison, Who Moved the Stone?(London: Faber and Faber, 1967), p. 76.

28) McDowell, op. at., p. 220.

29) Geroge Currie, “The Military Discipline of the Romans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to the Close of the Republic” (Abstract of a Thesis published under the auspices of the Graduate Coundl of Indiana University, 1928), p. 41.

30) Ibid., PP. 49, 50.

31) Ibid,, P. 33.

32) E. Le Camus, The Life of Christ, Vol.Ⅲ (New York: The Cathedral Library Assoc., 1908), P. 396.

33) D. D. Wheldon, Commentary of the gospels Matthew~Mark Vol. 9 (New York: Hunt and Eaton, 1888), P. 343.

34) A. T. Roberts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New York: R.R. Smith, Inc., 1931), p. 239.

35) Albert Roper, Did Jesus Rise from the Dead?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65), p. 24.

36) libd, PP. 34, 35.

37) Alfred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Vol. Ⅱ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 Co., 1958), P. 623.

38) J.N.D. Anderson, Christianity: The Witness of Histor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0), PP. 95, 96.

39) J. N. D. Anderson,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Christianity Today (March 29, 1968), P. 4.

40) Anderson, Christianity: the Witness of History, P. 97.

41) Morison, op. at., P.137.

42) John R.W. Stott, Basic Christian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1), pp. 52,53.

43) Latham, op. cit., P. 11.

44) Thorburn, op. cit., PP. 179-182.

45) John Warwick Montgomery, History and Christian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64), P. 19.

46) Anderson,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pp. 5, 6.

47) W. Pannenberg, cited by J. N. D. Anderson, Christianity of History, P. 56.

48) John Stott, op. cit., P. 51.

49) Greenleaf, op. 58.

50) Greenleaf, op. cit., P. 29.

51) Paul E. Little, Know Why You Believe (Wheaton: Scripture Press Publications, Inc., 1967),  P. 63.

52) Anderson, op. cit., p. 5.V

53) H.D.A. Major, cited by Smith, op. cit., p. 368.

54) Kenneth S. Latourette, cited by Straton in “I Believe: Our Lord’s Resurrection,” Christianity Today (March 31, 1968), P. 3.

55) Green, op. cit., p. 51.

56) Ibid., p. 53.

57) McDowell, op. cit.. P. 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