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14, 끝) 중세시대로의 준비
요약 초대교회사(14, 끝) 중세시대로의 준비

1. 수도원 제도의 발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所有)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寶貨)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72-337)가 313년 ‘밀란의 칙령’(Edict of Milan, 313)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公認)한 후 교회의 영적(靈的)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군림(君臨)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했다. 영적(靈的)인 면이 간과되고 예전적(禮典的)이고 외형적인 면이 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의적(廣義的) 의미에서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해 반동(反動)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신운동(更新運動)이었다.
(1) 최초의 수도사들
초기 수도사(修道士, monk)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애굽 출신의 곱트인 성 안토니(St. Anthony the Great, 251-356)였다. 안토니는 마태복음 19:21을 실천하고 그 후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禁慾主義, Asceticism) 삶을 시작했다. 초기 수도사들은 후기에 볼 수 있는 공동체(共同體) 성격보다는 은자적(隱者的)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수도(修道)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Pachomius monastery)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 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 된 것이다. 이 수도원은 나일강 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St. Pachomius, 292-348)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코미우스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한 것이다. 파코미우스는 중앙 수도원에서 여러 수도원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 공동체는 운영규칙들이 발전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파코미우스 제도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수도원 운동이 2,3세대로 내려가는 동안 금욕주의 생활은 자체 내에 특수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4,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 되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제도 이전에 금욕주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3) 바실과 동방수도원
대(大) 바실(St. Basil the Great or Basil of Caesarea, 333-379)은 고립적인 고행 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 생활을 강력히 주장했다.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反) 문화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실은 지나친 개인적인 경견을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립된 금욕 생활보다는 공동체(共同體)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사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실의 이 같은 수도원 이상(理想)은 그의 가정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 교제를 통하여 성숙하게 되었다. 바실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타부(taboo) 시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에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당대의 이교(異敎) 문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표현상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실의 수도원 성격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공동체와 달라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을 연결하려고 하기는 했으니 그에게도 이원론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실은 육체를 영혼보다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게다다 바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바실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서방 수도원 발흥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 마틴(Martin of Tours, ?-379), 제롬(St, Jerome, 347-420), 그리고 요한 카씨안(John Cassian, 360-435)에 의해서이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방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수도원(Benedictines)과 켈틱수도원(Celtic Christianity)에 와서 더욱 체계화되었다.
서방수도원 운동의 개척자 중에 또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or Jerome, 347-420)이다. 그는 제롬(Jerom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롬 때에 와서 서방의 수도원 제도는 낯선 제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기독교 이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밀란의 엠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더욱 확대시켰고,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수도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고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현했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역시 540년경에 출현한 베네딕트수도원이었다. 또 하나의 수도원은 5세기 말엽에 시작된 켈트의 수도원 운동이었다.
< 요약 >
영적 갱생(更生)의 필요성에 따라 발흥한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음을 보여준다.
수도원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고 교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나 다른 한편 수도원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도 미쳤다.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으며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수도사의 첫째 목적이 그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와 안주(安住)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大別)되었다.
2.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 가운데 최고위이다.”(Pope Leo the Great) 교회의 정통성을 유일하게 이은 교회는 오직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로마 가톨릭교회뿐이라는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그들은 마태복음 16:17-19 말씀을 제시한다.
1.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상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경(信經)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 신앙의 수호자(守護者)라는 자각이 대단하여 주 후 160년경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로마에 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권위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월(優越)하다는 주장은 로마교구 감독 줄리우스(Julius)가 341년 안디옥에서 열린 교회총회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와 마르셀루스(Marcellus of Tangier, ?-298)의 복권(復權)을 추구하는 서신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월성 주장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립된 건 그 후 382년 교황 다마수스(Pope Damasus I, 305-384)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상당히 권위적인 교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2) 세르디카 서방교회
세르디카(Serdica) 회의에서 당시 4개 교구 중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했다. 세르디카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법령들이 니케아회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법령들을 니케아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교황 다마수스 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월권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Aurelius Ambros, ?-397)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암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암브로스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모든 지역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은 교황 레오 1세(Pope Leo I, ?-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였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고 주장하는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또 이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28조항에 ‘새 로마’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 하며 로마 가톨릭교회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라는 것을 명문화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게 권위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Pope Gelasius I, ?-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皇帝)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敎皇, 교회의 황제)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이지만 교회 문제해결의 열쇠는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敎區)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3.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 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이 되기 시작했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Patrick of Ireland, 385-461)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패트릭의 세운 교회의 핵심은 대수도원장들이 권력을 쥔 은둔적 수도원 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지방 왕들과 분봉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해 신변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 자제들이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사진, 패트릭이 30년 동안 복음을 전했던 아일랜드의 선교 유적지, 패트릭은 30년 동안 3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2,0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룸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룸바(Columba fo Irish, 521-597)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룸바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 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룸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Scotsman)들과 픽트인(Picts)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룸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까지 35년 동안 아이오나 섬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콜룸바의 선교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룸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 해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 중재에 나섰다. 이런 요인들에 힘입어 콜룸바와 그의 수도사들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룸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룸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 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 초대교회사 전체 요약 >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
▸ 초대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Challenge and Response)의 구도(構圖) 속에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신앙과 사상의 주제는 그리스도 즉 신학적 의미 로고스(Logos)이다.
▸ 초대교회 기간에 하나님은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신앙의 기초를 마련하게 하셨다.
▸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 등 모든 신앙 전통이 어거스틴에 이르러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하는 절대 희망이었다.
▸ 하나님은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해 오셨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와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신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시며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주권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