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6)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요약 초대교회사(6)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제6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오늘날 우리는 이단(異端)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현재까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계속 번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도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였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는 이단을 ‘표준 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과한 잘못된 신앙’,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은 ‘사탄의 교리’라고 이단을 정의 했다.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이단들이 철학에 의해 고취되고 있다고 봄으로써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시켰다.

이단의 역사는 사도시대부터 시작된다. 2세기 정통신학의 대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 헤게시푸스(Hegesippus, 110-180)에 따르면 당시 유대 백성들 가운데 여러 이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시므온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클레오비우스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도시테우스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마세보테우스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그리고 역시 시므온에서 생겨난 메난드리안파, 바시리디안파, 말시온파, 카로포크라티아파, 발렌티아파, 사투르실리아파가 그것들이다.

이처럼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 신앙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2.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운동이다. 영지주의가 2세기 동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헬라 지식인들의 관심이 점증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 구세주에 관한 문제,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문제 등은 그들이 해명하고자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신약성경에는 영지주의적인 특징을 반영하는 성경 귀절들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2,23)가 바로 그것이다.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켈리(J.N.D. Kelly)가 자신의 ‘초대기독교 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지주의는 유대교와 헬라철학 및 동양철학의 혼합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헬라철학 그리고 동양의 특별히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 주의 사상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나님, 인간, 죄인, 구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의 신념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영지(gnosis; knowledge)인데 이 영지(靈知)는 영계(靈界)로부터 온 계시(啓示)를 의미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口傳, 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또 다른 공통적 특징은 영육(靈肉)의 분리에 근거한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흘렀다. 만일 구원이 물질로 부터의 영혼 해방이라면 윤리적 이상은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上部)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야 texts)은 주후 4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재조명해 준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 행 8:8-24)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이 사마리아 출신이다. 메난더는 자기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4) 영지주의 분파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크게 이집트계, 시리아계, 폰틱계 그리고 유대주의계로 대별할 수 있다.              

  • 이집트계 영지주의

이집트계의 대표적인 사람은 120년에서 130년경에 로마에서 활약 하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유세비우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 가지 상이한 이단 지도자들 즉 안디옥 사람 새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후계자 메산더에게서 나온 머리가 둘이고 혀가 둘인 뱀 같은 세력’이었다. 세투르니누스는 시리아에 그리고 바실리데스는 이집트에 불경한 이단학파를 세웠다.

이집트계에 속하는 영지주의자들로는 바실리데스 외에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같은 영지주의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계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는 135-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 104-165)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티누스는 피우스 황제 시대에 장년기였고 아니세투스(Anicetus)시대까지 살았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인 발렌티누스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 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플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이탈리아와 알렉산드리아와 고을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바실리데스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無)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 시리안계 영지주의

주후 120년경에 활동하던 안디옥 출신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 자들이다.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자유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 폰틱계 영지주의              

대표적인 인물은 말시온이다. 세르돈의 지위를 계승한 폰투스의 말시온이 세르돈의 가르침을 확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까지 행했다.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꾼’(a worker of evils)이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반면에 세상을 만든 하나님 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남긴 말시온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둘째,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이 땅에서 취한 육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시켰다.

  •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 분파는 에비온파(Ebionites)와 키린투스파(Cerinthus)이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 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만 사용했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養子說)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와 신중성 그리고 지혜 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 선상에서 취급했다. 또한 세례 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믿었다.

유대주의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Cerinthus)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케린투스는 좀 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축제와 희생 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유형을 요약한다면 현대 이단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이단들도 역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창출은 기성교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주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리를 발전 개혁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항상 새로운 교리를 고안한다. 이런 교리적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 영지주의 평가 >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는 점이고 이것이 일부 불안정한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강조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특정의 요소를 빌어가지고 이를 자신들의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변형시켰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본질적 차이는 계시관, 신론,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도 부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 영육의 구원인데 반하여 이들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며 구원개념도 영혼의 복귀 또는 영혼의 육체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5)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⓵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Valentinus, 100-160)는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주후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애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애온인 세계-생명(world-life)과 인간-교회(man-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되어 애온들은 총 30이 되었다. 인간-교회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애온은 지혜라는 여자 애온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알기 원했지만 알 길이 없자 그녀의 슬픔은 결국 남자 없이 ‘불확실’을 의미하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고 이 때문에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혜는 더욱 슬퍼했고 애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 줄 것을 청했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애온을 낳았다. 그들의 행위가 플레로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의 애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애온을 낳아(put forth) 예수라 이름 했다.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누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과 헬라의 세계관을 혼합시켰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영지주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 지고(至高)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 세상 창조는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 무(inferior deity) 의 작품이다.
  • 물질계는 악하다.
  •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
  • 단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몇 사람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부활은 없다.

② 말시온주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혼합시킨 종교적 잡록집(Potpourri)인데 반해 말시온주의(Marcionism)는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아울러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했다.

말시온(Marcion of Sinope, 85-160)은 그리스 도시인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Sinope)에서 감족의 아들로 태어나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왔다. 로마에서 그는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말시온도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알려진 분이고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의로운 분이고 후자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말시온은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말시온이 영지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말시온은 다음과 같이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기록된 하나님은 세르돈이 말하는 열등한 하나님(the inferior God)이다. 반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the good unknown father)를 계시하신 분이다. 때문에 말시온은 구약보다 신약을 선호했지만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하나님의 구별이 말시온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자연히 그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구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반면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 말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말시온의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말시온은 육체 부활의 사상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 말시온의 영향

말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영육의 분리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시온 이단을 그의 섭리 역사를 위하여 선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첫째, 정경의 형성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발달이다. 또 말시온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론뿐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창조주-구속 주 하나님’(the Creator-Redeemer God)이시다.

말시온의 영향력은 2세기경 절정에 달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말시온을 영지주의를 공격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천지창조부인,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구분, 가현설적 기독론,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부인, 영혼만의 구원, 물질계와 영계의 구분 등 이원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방에서 말시온의 영향은 그들이 마니교(Manichaeism)와 연계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글이 영지주의를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집단은 그 후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7세기까지 역사 속에 존재했다.

3. 몬타니즘

몬타니즘(Montanism)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점에서 몬타니즘은 말시온과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1) 몬타니즘 배경                  

몬타니즘은 몬타누스(Montanus)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도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2) 몬타누스의 가르침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 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독신(獨身)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다. 또한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세 예언자와 뚜렷하게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감독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공식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몬타니즘의 영향 및 쇠퇴          

영지주의나 말시온주의처럼 몬타니즘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성령께서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또 몬타니즘의 등장으로 교회의 권위의 형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부차적으로는 교회에 평신도운동을 촉진하는 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몬타니즘의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주었다. 몬타니즘의 출현으로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가를 보여준 역사적 건이다.

< 요약과 결론 >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 특히 기독교 교리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회의 이후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 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회의 이후 니케아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과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