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진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공적(公的) 사역을 시작하시며 하신 최초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였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시더라.”(막 1:14,15)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統治)나 주권(主權)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통치가 아니라 아주 독특한 의미의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가까웠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도(意圖)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의식(意識)이 없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결국 거듭 된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나라는 망하고 열국(列國)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실 ‘새 언약’을 그들과 맺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이 ‘새 언약’의 말씀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가 임하여 오기를 기다려 왔다. 그 하나님의 특별하신 통치하심에 대해 오랜 침묵을 깨고 세례 요한은 하나님 편에서 다시 선포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였으니”(마 3:1,2) 이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붙잡혀 투옥되었을 때 예수님은 유대 땅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셔서 다시 같은 선언을 하셨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이 식민통치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성부(聖父)와 구별하시면서도 때때로 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시사(示唆)하시는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언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말을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기존 사고방식(思考方式)과 일치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외적으로 눈에 보이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나이까?”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대답해 주셨다.
물론 주님이 재림(再臨)하시는 종말에는 유대인들의 바라던 것처럼 눈에 보이게 그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이다. 그러나 인자 되신 예수님이 종말의 때에 권능으로 임하시기 전에도 그가 선언하신 대로 그 ‘하나님 나라’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여 온 것이다. 바로 지금 자신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예수님이 계신 그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말씀의 통치라는 방식으로 이미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영적(靈的)으로 소경이었기에 영적으로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물리적(物理的)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들을 귀 있고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회복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선언’을 듣고 받아들였다.
오늘날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예수를 열심히 믿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대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그 어떤 곳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목회자들 뿐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도 이를 확신해야 한다. 이 ‘하나님 나라’는 세상 끝 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극치(極致)에 이를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임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 이미 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물리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극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적이며 현재적인 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가? 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한 종말론적인 공동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개인과 공동체는 항상 전투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전투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땅의 교회가 전투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성도 된 우리의 관계성과 의식과 삶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7:14) 우리의 삶 가운데 의(義)를 지향하고 평강을 지향하는 삶이 나타날 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 된 우리의 역할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해 놓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입장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주께서 받아주시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신과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헌신(獻身)의 삶을 살아야 하는 데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질서는 섬기는 자가 주인이다. 주님은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다.(마 20:28) 인간적으로 보면 손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희락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성도의 삶은 비우는 데 그 기쁨이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성령의 우리 가운데 내주(內住)하여 함께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하나님 나라)을 살다가 우리 주님이 예비 해 놓으신 천국(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정말 ‘하나님 나라’를 믿는 다면 ‘하나님 나라’(천국)가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주님과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거 해야 한다. 내가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고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국에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우리의 육체도 부활하여 영생하는 영원한 빛나는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산다는 소망과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天國)은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주) 이 글은 지난 ‘2014 교리와 부흥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이승구 교수의 강의를 발췌하여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