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28)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2)
제5장 하나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
제5장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주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보존(保存)하신다.
- 하나님은 그것들에 완전한 통치(統治)를 행하신다.
- 이 하나님의 통치(統治)는 자연계의 사건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
-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통치(統治)에 의해 하나님의 확정 된 계획이 실행된다.
-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나타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제5장 제2-7항
(2항) 제일 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만사가 틀림없이 변화가 일어나나 같은 섭리에 의해 하나님은 제2원인의 성질에 따라 만사가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흑은 우연히 되게 정리하신다.
(3항) 하나님은 그의 일반 섭리에 방편을 사용하시나 오히려 그것이 없이 그것을 넘어서 또는 그것에 대항해서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역사하신다.
(4항)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무한히 선하심은 그의 섭리에 잘 나타나 있다. 섭리는 최초의 타락과 천사들 및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에까지 미치니 단순히 허락하심에 그치지 않고 그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큰 지혜와 권능으로 허락의 한계를 정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돈 및 관할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러나 죄악성은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그는 가장 거룩하시며 의로우셔서 죄의 조성 자나 시인자가 아니시며 또 그러실 수도 없으시다.
(5항) 가장 지해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자녀들을 잠시동안 허다한 시험과 그들 자신 마음의 부패에 내버려 두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에 지은 죄를 뉘우쳐 그들을 자징(自懲)하고 흑은 그들의 부패성의 숨은 힘과 그들의 마음들의 기만성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또 저들로 하여금 좀 더 긴밀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장래의 죄를 지을수 있는 모든 기회에 대항하여 또는 여러 가지 공의롭고 거룩한 목적들을 위하여 깨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6항)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대하여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그들의 전에 지은 죄 때문에 눈이 멀고 마음이 강퍅케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해를 밝게 하고 마음에 역사할 은혜를 그들에게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때로는 또한 그들이 이미 가졌던 은사들조차 거두시고 그들의 부패성이 죄의 기회를 만드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을 그들 자신의 정욕과 세상의 시험과 사탄의 능력에 내어주신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들을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을 강퍅케 한다.
(7항)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지만 가장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를 보호하며 만사를 교회에 유익하도록 처리하신다.
(주) 이번 호부터 해설자가 김병훈 교수에서 G.I. Williamson으로 바뀌었습니다.
제5장 2항-7항의 교훈
앞의 1항에 진술된 교리에서 사람들이 끌어낸 그릇 된 추론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울 수 있다.
-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의 완전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 그 주권으로 말미암아 제2 원인들의 활동이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이 ‘법칙들’(원인들)을 자유롭게 파기하신다.
- 하나님은 자신은 아무 죄악도 행하지 않으시면 서도 인간의 타락과 죄들을 허용, 주관, 명하신다.
- 하나님의 주권은 죄에 참여함이 없이(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모두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의 내면적인 활동들에까지 미친다.
신적 주권에 대한 성경의 교리가 가르쳐질 때마다 죄 많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몇 가지 반론들이 고개를 쳐든다. 여기서 그 몇 가지를 열거하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면 나는 내가 행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
이 반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들을 통치하신다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는 우리를 강제로 그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강제로 나의 뜻에 반하여 죄를 범하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나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고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우리 자신의 뜻대로 우리가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시는 대로(기회와 능력의 한계 내에서) 행하는 것을 능히 그분은 허락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하도록 그가 예정하셨던 것을 우리가 틀림없이 행하게 되게끔 조치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요셉과 그의 형제들 간의 관계에 나타나 있는 교훈이다.(창37장-50장)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창 50:20)라고 말했다. 형들은 악을 행했다. 그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행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뜻(작정)을 행했던 것이다.
(2)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면 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결국은 꼭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 반론은 사실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거짓된 것이다. 한편으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가정하에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어떤 개인적인 행위들은 되는 대로 그리고 불확실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아주 이질적이고 모순된 가정하에 있다. 이 같은 반론은 사실상 만일 모든 것들이 신적 작정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면 a,b,c라는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든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d라는 사건에 도달케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d가 사건인 것처럼 a,b,c도 사건들이요 처음 가정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면 각 사건이 계획에 따라서 성취되는 경우에만 그것들이 성취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적 예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위들이 하찮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구원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 모든 아버지가 자기 자식 된 자들은 항상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만일 하나님이 모든 걸 통치하신다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뜻(계획)이었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전에 예정하신 것만을 행하는가?(행 4:28) 성경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적당히 대답하지 않는다. 도리어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성경은 이같이 어두움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못지않게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造成者)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성자이시다.
- 그 가운데 죄가 존재하고 있다.
- 그렇지만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이러한 논리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게 보이는 것은 겉보기로만 그럴 뿐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성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죄의 조성자들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로 구성됨)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으며 그들의 죄를 범할 것을 작정하셨으나 하나님 자신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4)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면 의인들이 죄를 짓는 것과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지혜로 생각하면 택함을 받은 자들이 거듭난 후에는 곧바로 하나님이 의(義)에 있어 완전하게 되게끔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치하시는 것이 가장 좋게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기(遺棄) 된 자들의 경우는 구제 불능의 악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그의 길은 우리의 길과 같지가 않다.”(사 55:8) 그렇다면 성도들이 죄를 범하는 것과 유기된 자들(믿지 않는 자들)이 선(善)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느니라.”(요일 3:9)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또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거나 또는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10) 그렇다면 모순이 있다. 그러나 그 모순은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것이지 성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죄를 고의적으로 그리고 상습적으로 지을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사도 바울은 말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중략)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0-23)
이 말씀은 바울이 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런 의미로 쓰였다면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롬 7:24)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개의 바울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옛사람’과 ‘새 사람’이 있다고 했다. 참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그러나 ‘옛사람’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사람’을 대적하여 맹렬히 돌진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새 사람’은 그 같은 싸움에서 질 수 없다. 그러나 격렬한 싸움이 없이 ‘새 사람’이 승리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이 ‘새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러한 싸움(내적 갈등)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엡 2:20) 이 ‘새로운 피조물’은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약하게 보일지 모르나(히 5:12-14), 그가 참으로 존재하는 한 그는 분명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새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의미로 성경이 이렇게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옛사람’에 속해 있는 힘을 가지고 그가 활동해도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은 본질적으로 온통 죄뿐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때때로 각종 유혹에 잠시 빠지며 우리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대로 행하게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혹에 빠진 우리를 징계하실 때마다 우리의 옛 본성의 잔재들이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때에야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의지하며 구원을 얻으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악한 자들 또는 버림받은 자들이 ‘선한 것’(외형적으로)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들 또한 그들의 옛 본성의 잔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는 그 옛 본성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에게 속해 있던 죄 없는 본성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양심은 최초에 거기에 새겨졌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추억을 아직도 다소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롬 2:14)
그러나 그 사람은 죄 있고 부패하며 타락하여 있다. 양심은 타락한 자아(自我)가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그 둘은 항상 싸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대로 앙심은 양심이 증거 한 것만큼 타락 한 자아를 통제하지를 못한다. 즉 누구도 가책을 받아 깨달은 것만큼 죄를 제거하며 실천에 옮기지를 못한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양심이 유기된 자일지라도 자아를 통제하며 억제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법률, 정부,사회 관습, 칭찬받고 싶은 욕구, 형벌에 대한 두려움 등과 같은 방도(方途)들을 통해 유기된 자가 ‘선한 것’을 행할 수가 있다. 우리는 두 경우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나타낼 수가 있다.
유기된 자의 경우 하나님은 일반은해의 방도들을 통하여 (b)를 억제하고 (a)가 작용하도록 상당한 영향을 주실 수 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의 경우는 특별은혜의 방도들을 통하여 (d)를 증가시키고 (c)를 감소시키게 하실 수 있다. 이 과정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 된다. 하나님은 (b)나 (c)를 결코 육성하지 않으시나 (d)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기 백성이 인식할 수 있도록 특별 은혜를 거두시어 (c)가 다윗의 경우처럼 소름이 끼치게 폭발하게 하실 수도 있다.(*) 글쓴 이 / G.I. 윌리암슨 나용화 옮김 개혁주의신행협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