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함께 묵상하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권 :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 주 하나님의 지식, 제16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떻게 구속주의 역할을 수행하셨는가? 여기에서도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논의 된다. >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1-4항
“우리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되었다.”
제1항 구속 주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 있다. 그것은 원래 정죄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義), 해방(解放), 생명(生命), 구원(救援)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는 베드로의 설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다.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을 그가 받게 된 것은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또는 인간의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 지존자의 명령을 전달한 천사가 하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눅 1:28-33) 그 이유를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마 1:21, 눅 1:31)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점을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속죄주의 직책이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그가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완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견고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일체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버나드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하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이 기름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마른다. 그것은 소금이다. 이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이는 음식은 온통 맛이 없다. 또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講話)는 향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충분하고 확고한 토대를 얻으며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탈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자기 내면에 들어가 자기의 진상(眞相)을 정직하게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적의를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노염을 푸는 방법과 수단을 애써 찾아야 하며 여기는 충분한 배상이 요구된다. 죄인이 죄책에서 사면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그들 위에 머무를 것이니 필요한 것은 평범한 보증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므로 자기의 법을 어기는 자를 반드시 벌하시기 위해 벌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제2항 하나님의 진노
-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잠깐 생각할 일이 있다.
- 즉 우리를 앞질러 먼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이었는가?
- 만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를 이미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특별한 보증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생기므로 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겠다. 보통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이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그의 희생으로 그들의 불의가 속량되기 전에는 그들은 저주 아래 있었다.”(갈 3:10,13)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화해되기 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골 1:21,22)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얼마나 가련한 파멸 상태에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표현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해방의 혜택을 가볍게 여겼을 것이다.
예컨대 누가 다음의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미워하셔서 당신이 당연히 받을 대가로 당신을 버리셨다면 무서운 파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꺼이 또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당신을 은총 가운데 두시고 당신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파멸에서 당신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비의 은택을 얼마만큼은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성경대로 더 정확히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즉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진노를 받을 자,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자, 구원 얻을 희망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자, 사탄의 종이며 죄의 멍에를 멘 포로로 결국 무서운 멸망을 당할 운명이며 이미 멸망 중에 있는 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자.
또 이때 그리스도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모든 죄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벌을 자기가 대신하여 받으셨으며,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 만든 죄악들을 자기의 피로 깨끗이 씻으셨으며, 이 속죄의 대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충분한 배상과 희생을 드리셨으며,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으며, 이 터전 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성립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하나님의 인애가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재난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이 모든 일로 인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겠는가! 6
요컨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이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놀라며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도 생명을 붙잡는 열성이 부족하거나 생명을 받아도 올바로 감사할 줄을 모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제3항 하나님의 사랑
-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는 것보다 앞선다.
이 말은 연약한 우리의 이해력을 고려한 것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절대 공의(公義)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불의를 결코 사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의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다.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성과 그에 따르는 악한 생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들이며, 나면서부터 지옥의 저주를 안고 태어난 자들이다.
그러나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시기 원하여 우리 안에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비록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큰 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는 우리를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값없이 주시는 순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 은총을 베풀려 하신다. 그러나 의와 불의는 영구히 화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인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실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적대관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시며, 우리와 완전히 화해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제시된 속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소멸하신다. 그 결과 이전에는 불결하고 불순하던 우리가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한 자로 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목을 얻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미리 손을 쓰시는 것이다. 참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19) 후에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노염을 받아야 할 불의가 우리 안아 그대로 있어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정죄를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결합하실 때에 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여 완전하고 굳게 결합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호의(好意)를 베푸신다는 확신을 우리가 가지려면 우리의 눈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를 힘입지 않고는 우리의 죄 값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을 면할 길이 없다. 죄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진노도 함께 동반한다.
제4항 속죄 사역
-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전자가 후자를 세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받아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기초를 가진다고 했다.(엡 1:4,5) 이것은 명백하며 성경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포하셨다.(요 3:16)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는 우리가 그의 원수였다고 하는(롬 5:10) 구절도 서로 잘 조화된다. 그러나 나는 고대교회의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어거스틴이 이것에 대해 가르친 말을 인용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변함이 없다. 우리가 성자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독생자와 함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이 되기 전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전에 미워하시던 자들을 이제부터 사랑하시기 시작하도록 만드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와 화해했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는 사도가 증언 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 된 우리를 완전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5-7항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의 결과들
제5항 그리스도의 순종
- 그리스도께서는 일생동안 순종하셨으며 그 순종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호의를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순종의 삶 전체에 의해 우리를 위한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바울의 증언이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롬 5:19)
참으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확대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4,5) 그래서 주님은 세례 받으실 때에도 “내가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하셨다.(마 3:15)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우리의 자유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 순종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마 20:28)이라고 하셨다.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롬 4:25)고 했고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오신 분’이라고 선언했다.(요 1:29)
사도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해자로 세우셨느니라.”(롬 3:24,25)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 화목 되었느니라.”(롬 5:9,10)고 한다. 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했다.
이 같은 말씀의 모든 증언을 열거하려면 한이 없으므로 나는 그 전부를 인용하려 하지 않으며 그 중의 여러 구절을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사도신경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즉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간다. 탄생, 죽음, 부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구원의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보이신 복종의 다른 부분도 제외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자초지종을 전부 포함시켜서 “그는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고 한다. 그리고 참으로 죽음 자체에서도 그가 기꺼이 하신 복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꺼이 바치는 희생이 아니면 의를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는 “자기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5)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요 10:18)고 적절한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런 뜻으로 이사야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사 53:7. 참조 행 8:32)라고 말했다.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도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를 예수께서 스스로 나아가 만나셨다고 하며(요 18:4), 빌라도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순순히 재판을 받으셨다고 했다.(마 27:12,14) 물론 그도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약점들을 맡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에게 대한 복종이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비범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즉 무서운 공포심과 싸우며 저 잔인한 고통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우리를 도우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감정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뜻에 전직으로 자기를 바쳐 복종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희생을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시편에서 인용한 사도의 증언은 적절하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 왔나이다.”(히 10:7,9, 시 40:7,8) 그러나 괴로운 양심들은 오직 죄를 대속하는 제사와 성결에서만 안식을 얻는 것이므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생명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 있다.
빌라도를 통한 정죄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가 하나님의 하늘 심판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우선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정죄 받으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 이 의인(義人)에게 전가(轉嫁) 된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을 인간에게 더구나 악한 자에게 자신이 정죄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총독이라는 칭호를 말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사야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가르친 뜻을 우리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정죄(定罪)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냥 죽으시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한 죽음을 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정죄를 자기에게 옮기는 동시에 우리의 죄책(罪責)을 맡으심으로써 우리를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해방하는 죽음이 되어야 했다.
만일 메시아가 도둑에게 죽거나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죽으셨다면 이런 죽음에는 배상을 치렀다는 증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재판정에서 죄인으로 고발당하시고, 유죄 증거가 제출되고, 재판관의 입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셨기 때문에 이런 증거들에 의해 그가 우리를 대신한 죄인과 악인의 처지에 서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통해서 예언된 두 가지 일에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 두 강도 사이에서 달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복음서 기자가 언급하듯이 “그는 불법 자와 함께 범죄자로 간주되었다.”고 한 예언이 실현된 것을 알 수 있다.(막 15:28. 참조, 사 53:12)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의인이나 무죄한 사람을 대신 하는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죄한데도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한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정죄한 빌라도 바로 그가 그리스도의 무죄를 주장한 것을 볼 때(빌라도는 여러 번 예수의 무죄를 공중 앞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 27:23), 우리는 또 다른 선지자가 그는 도둑질하지 않은 것도 물어 주게 되었다고 한 말(시 69:4)을 기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인과 악인들을 대표하신 것을 보게 되지만 동시에 또한 그는 전혀 죄가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자기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이 명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빌라도 총독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총독의 공적인 선고에 의해 범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재판관 자신이 자기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고 증언함으로 그가 의인임을 선언했다. 이렇게 우리가 받을 받아야 할 죄책(罪責)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轉嫁) 됨으로 그 결과로 우리는 죄가 없는 자로 선언되고 무죄석방(無罪釋放)이 된 것이다.(사 53:12)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로운 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받으셨는데도 그 벌이 지금도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듯이 우리는 평생 떨며 불안해하게 된다.
제6항 ‘십자가에 못 박히사’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 또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율법도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신 21:23)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이렇게 그가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 또한 율법에서 예시된 일이었다. 구약에서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바치는 희생과 속죄의 제물을 ‘아슈모트’라고 했다. 이 말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대신 맡아 지고 가는 속죄 염소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 희생 제물의 원형(原形)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선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시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사 53:10) 곧 죄를 위한 제물로 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제물 위에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던져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이렇게 명백하게 증언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이 전혀 죄가 없으신 데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자신의 순결함을 입혀 주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롬 8:3) 같은 뜻으로 보인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의 제물로 죽게 하신 것은 그의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배상(賠償)하신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한 예언의 말씀이 분명해졌다. 즉 우리의 더러운 불의를 깨끗케 하시려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심으로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모든 불의를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3,14, 참고 신 21:23) 사도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이처럼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인 그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죄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지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여 그 저주의 힘을 완전히 꺾고 부셔버리셨다. 그래서 이것을 믿는 믿음은 그가 받으신 정죄에서 우리는 죄 없다함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치로 가득 찼던 십자가를 돌연 개선장군의 영광처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우리의 죄에 대한 승리를 사도 바울이 선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골 2:14,15)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자기를 드렸기”(히 9:14) 때문이다.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씻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 값에 대한 배상(賠償)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26, 딛 3:5, 계 1:5)
제7항 ‘죽으시고 장사한 지’
그 다음 사도신경에는 ‘죽으시고 장사한 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그리스도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의 구속의 대가를 우리 대신 어떻게 지불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죽음은 우리를 그 멍에 아래 사로잡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위해 자신을 그 죽음의 권세에 내어 주셨다. 사도는 그렇게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즉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는 친히 자원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않도록 하셨으며 혹은 똑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생명에로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와는 다르다. 그가 죽음이 자신을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어쩔 수 없이 그 죽음의 심연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곧 삼켜 버릴 그 죽음을 삼켜버리시기 위함이었다.(참고 벧전 3:22) 그가 친히 죽음에 굴복하신 것은 그 권세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가 무너지는 상태를 기뻐할 때 그 권세를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끝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히 2:14,15)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첫 번째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두 번째 결과는 이것이다. 즉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 그 죽으심이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서 그 기능들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며, 또한 우리 속에 있는 옛사람을 죽여서 그로 하여금 번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것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즉 우리 자신도 그것에 참여하여 그와 함께 죄에 대해 장사 지내게 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롬 6: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를 6: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2:19, 6:14),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라고 했다.
이런 진술들을 통해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모범을 보이라고 권고할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의 죽으심을 쓸모없고 효과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죽으심의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는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이중적인 축복이 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얽매여 있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8-12항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교리에 대한 설명
제8항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음부)으로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옛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들어 있는 이 문구가 한때는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를 요약하여 정리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구를 넣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유용하고도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신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옛 저술가들 중 몇 사람은 이 문구를 생략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구는 얼마 후에 다시 삽입되었고 교회 안에서 즉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점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더욱더 확실한 것은 이문구는 모든 경건한 자들의 공통된 믿음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각기 해석이 다르기는 하지만 교부들 중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이 문구를 생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문구를 누가 언제 삽입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곧 사도신경에는 우리의 믿음의 전체 요약이 모든 세부 사항들에 있어서 충분하면서도 완전히 들어 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나온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문구를 사도신경에 포함시키는 것을 꺼려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곧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일 이 문구가 생략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많은 유익이 상실되고 말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이 조항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고 이전에 그리스도가 장사되신 것에 대해 언급된 것을 반복하고 있으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종종 무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며 나도 이에 근거하여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그 자체로 전혀 어렵지 않은 어떤 일이 명백하고 쉬운 말로 진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좀 더 명백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제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일이겠는가! 두 가지 표현이 동시에 동일한 본문에서 사용될 때에는 언제든지 후자는 전자를 설명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되겠는가?
둘째, 우리 믿음의 주요한 요점들이 가능한 한 짧은 말들로 적절하게 정리되어 있는 이 요약 속에 이런 종류의 쓸모없는 반복이 끼어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쉽사리 내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나는 의심 없이 믿는다.
제9항 그리스도는 지하 세계로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에게로 내려가셔서 구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시며 그들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시편으로부터 잘못된 증거를 인용했다.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시 107:16) 또한 스가랴서에서도 인용했다.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해방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더욱이 스가랴서는 백성들이 당했던 바벨론 포로의 재난을 깊고 메마른 웅덩이에 비교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체 교회의 구원이 낮고 깊은 곳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추측하다가 그곳이 땅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 ‘림보’(limbo)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위대한 저자들이 반복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된 것이라고 진지하게 옹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낱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자의 영혼을 감옥에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실로 유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혼이 무엇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키시려고 그리로 내려가셨다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셨고 그리하여 그들이 단지 소망하면서 맛보았던 은혜가 마침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이런 의미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저가 또한 영으로 망대(흔히 ‘옥’으로 번역됨)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은 우리와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된다고 추측하게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이심지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능력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한편 경건한 영혼들은 간절히 기다렸던 그 강림을 눈앞에서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악한 자들은 그들이 모든 구원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인식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한 자와 경건치 못한 자를 분명히 구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둘을 차별 없이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똑같이 알고 있었음을 가르치려고 한 것뿐이다.
제10항 영적인 고통
-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영적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신경과는 별도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조항에 대해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위로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으로만 죽으셨다면 아무런 효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한 보응을 받으셔야 했고 그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셔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그는 지옥의 세력들과 영원한 죽음의 공포심에 맞서 싸움을 벌이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선지자의 말을 언급한 바 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아버지에게)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사 53:5) 여기에서 선지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내맡기심으로써 행악 자들을 대신하여 보증인과 담보물이 되셔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즉 그는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는’(행 2:24)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악한 자에게 부과하셨던 죽음을 친히 당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장사되신 일 이전에 일어난 일을 장사되신 일 후에 언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 순서가 이런 식으로 뒤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매우 하찮고 어리석은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요점은 곧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바를 진술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받으셨던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해 적절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주어졌지만 그의 영혼이 정죄함을 받고 버림을 당한 인간의 무서운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더 위대하고 더 탁월하게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제11항 이러한 설명을 성경으로 변호함
이런 의미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했다. 베드로는 단지 죽음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죽음의 근거)에서 비롯되는 죽음의 고통에 붙잡혀계셨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나아가셔서 마치 장난을 하는 것처럼 죽임을 당하셨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는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시기는 했지만 죽음을 피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은 그의 무한한 자비를 참으로 증거 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말한 것도 의심할 여지없이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두려워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하심’을 ‘경외하심’으로 번역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그 사실 자체와 어법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했다.
즉 그는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죄인으로서 죽음에 삼키운 바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서 우리의 본성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멀어진다고 느끼며 또한 하나님에게 간구해도 응답이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무서운 무저갱 지옥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멸망을 계획하신 것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버림당하심으로써 깊은 고뇌 가운데서 외치지 않을 수 없으셨음을 알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마 27:4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외침이 그리스도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혀 맞지 않는 개연성이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들은 분명히 그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고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향해 미워하셨다 거나 분노하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의 마음을 평온케 하시는’(참고 마 3:17) 사랑하는 독생자를 향해 화를 내실 수가 있는가? 만일 그리스도자신이 하나님께 참으로 미움을 받으셨다면 어떻게 그의 중재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실 수가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다. 즉 그는 하나님의 엄하신 형벌을 친히 받으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손으로 ‘매 맞고 고통을 당하셨으며’(참고 사 53:50) ‘노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징’을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러리(Hilary)는 이렇게 추론했다. 곧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심으로써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구절들에서 그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견해를 제시했다. 즉 그는 “십자가와 죽으심, 지옥 이것들은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말했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가 이 승리의 열매를 회상하면서 동일한 일 즉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라고 역설했는데 왜 나는 사사로운 개인의 증거를 인용하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본질상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억압하는 두려움을 이기셔야만 했다. 이 일을 하시려면 그는 오직 두려움과 싸우셔야 했다.
그런데 그의 슬픔은 일반적인 슬픔이나 혹은 사소한 원인에 의해 생겨난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이 곧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지옥의 고통과 직접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정복하시고 승리의 개선을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죽음 가운데서도 우리의 왕께서 삼켜 버리신 그러한 일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참고 벧전 3:22)
제12항 오해와 오류에 대항하여 이 교리를 변호함
여기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몇몇 무식한 자들이 무지보다는 악의에 사로잡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끔찍한 모욕을 주고 있다고 외쳐댄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 때문에 두려워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더 극심한 중상의 말을 퍼붓는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믿음과는 정반대되는 절망을 지니고 계신다고 내가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 명백하게 언급한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대해 사악하게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 그는 ‘심령에 민망하셨으며’(요 13:21) 슬픔에 싸이셨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더욱 강하게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셨다.(참고 마 26:37) 그들이 말하듯이 그가 그렇게 두려운 척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해 보려는 비열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올바르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슬픔에 대해 확신 있게 고백해야만 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혼도 함께 형벌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는 단지 육신에 대해서만 구속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싸우셔야만 했다.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지셨던 것은 아무리 찬양해도 모자랄 그의 선하심이 빛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그의 하늘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사도가 우리에게 말했듯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고뇌와 슬픔에 대한 위로가 생기게 된다. 즉 이 중보자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셔서 우리를 비참한 상황에서 더 잘 구원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히 4:15 상반)
그들은 악한 일 그 자체를 그리스도에게 돌린다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그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조화시키는 하나님의 영보다 더 현명한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리스도의 연약성이 왜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되신 것은 폭력이나 불가피성에 의해 억지로 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그의 자비하심에 의해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든 일을 당하셨다 할지라도 그의 권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비방자들은 이 한 가지 요점에 있어서 속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순종의 도를 지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약성은 순수하고 사악함이 전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그 난폭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한계가 없으므로 절제가 없다. 따라서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 표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그릇되게 측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패하지 않으셨으므로 지나칠 것을 억제하시는 절제가 그의 모든 감정들 속에 넘치도록 충만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슬픔, 두려움, 공포심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을 수 있으셨지만(참고 히 2:17) 앞서 말한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셨다.
우리의 대적 자들은 반박을 받게 되자 또 다른 허위 진술로 비약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시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무서워하지는 않으셨으며 그 저주와 진노에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남자답지 못하고 비겁하셨던 것이 그에게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도적들이나 다른 악행 자들은 거만하게도 서둘러 죽음을 재촉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만하게 만용을 부려 죽음을 멸시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충격을 받고 거의 기절한 상태에까지 이르셨다는 것은 과연 어떤 종류의 일관성과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기적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 언급되어 있다. 즉 그의 고통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핏방울이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는 것이다.(눅 22:44)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은밀히 그의 아버지께 괴로움을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다 버리게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들로부터 특별한 위로를 받으셔야만 했다.(눅 22:43) 내가 이미 말했듯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죽음 때문에 핏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워하셨고 천사들이 나타남으로써 기운을 차릴 수 있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나약함이 될 것인가! 과연 그러한가? 믿기 어려운 쓰라린 마음에서 나와 세 번이나 되풀이된 기도 즉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는 기도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죽음보다 더 가혹하고 힘겨운 싸움을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이로 미루어 볼 때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이 궤변 자들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대담하게 지껄이는 것이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는 바로 이것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올바르게 느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과연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는지를 질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이것은 시작이었고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당하셨던 고통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범죄자로 계셨다는 것을 아셨다. 비록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이 육신의 연약함에 자리를 내주고 잠시 숨겨져 있었지만 고통과 두려움의 느낌에서 비롯되는 시련은 믿음과 반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베드로의 설교에 나오는 내용들도 그런 식으로 성취되었다. 즉 “그는 죽음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 말하자면 자신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셨지만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외치셨던 특별한 기도를 통해서 입증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께서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를 그의 하나님으로 부르시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에 의해 자신이 버림받았음을 소리 내어 외치셨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와 소위 단의론자들(單意論者, Monoelites)의 오류를 반박하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영을 있었지만 영혼은 없었으며 따라서 그는 단지 반쪽만 사람이셨다고 주장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의 죄를 속하실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순종하려는 성향이나 의지가 영혼에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셨던 것은 두려움을 물아내고 우리 영혼에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의론 자들에 반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그가 그의 신적 본성에 따라 뜻하셨던 것은 사람으로서 뜻하신 것은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말했던 두려움을 반대되는 감정으로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그대로 지나쳐 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위대한 역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혼란 상황에서도 우리가 자신을 억제하려고 애를 많이 쓸 때에 나타나는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으셨다.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13-16항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늘 보좌에 앉으심
제13항 부활
-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그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 나오고 있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 그리고 장사되심에서는 오직 연약함만이 나타나므로 믿음은 그 충만한 힘에 이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뛰어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이 만족되었고 저주가 옮겨졌으며 형벌이 완전히 갚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벧전 1:3)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은 그 본질을 더욱 잘 표현해 준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것은 마치 다음 말과 같다. 즉 “죄는 그의 죽으심에 의해 제거되었다. 의는 그의 부활에 의해 소생되고 회복되었다.”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에 굴복하셨다면 어떻게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가 그 싸움에서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승리를 얻으실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사이에서 우리의 구원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즉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는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으며 그의 부활을 통해서는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소생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부활 덕택에 그의 죽으심은 그 능력과 효능을 우리 안에서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그때에 마침내 그가 자신의 하늘의 능력을 나타내셨고 이 능력은 그의 신성을 보여 주는 명백한 거울이며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뒷받침 해 주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비슷하게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고후 13:4) 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을 논의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려 하여” 그리고 그 다음에 즉시 덧붙이기를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라고 했다. 베드로의 진술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뒷받침 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특별히 부활자체에서 계시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언급될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는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것을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또한 ‘부활’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제유법(提疇法, 일부로써 전체 혹은 그 반대를 나타내는 표현법, 역주)이 적용된다. 즉 부활이 죽음과 별도로 언급될 때에는 특별히 그의 죽으심과 연관된 것도 포함하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리하여 부활과 생명이 있게 되었다.- 바울은 역설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의 두려움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높이고 난 후에 강조하는 방식으로 덧붙였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더 나아가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데 달려 있다고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그의 부활로부터 그것에 상응하는 유익을 얻는다고 이해해야만 한다.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골 3:3)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야만 한다는 증거를 이끌어 냈다.(골 3:5)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닌 위에 있는 것들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추론했다.(골 3:1,2)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도록 권고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권능에 의해 의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에서 세 번째 유익한 것을 얻게 된다. 즉 그의 부활에 의해 입증된 일종의 보증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12-26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말씀들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죽는 것과 동일한 죽음을 겪으셨으며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취하셨던 것과 동일한 그 육신으로 불멸성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14항 ‘하늘에 오르사’
부활에 이어 승천이 언급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하고 낮은 지상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내던져 버리시고 또다시 그의 영광과 능력을 더욱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참으로 그가 자신의 나라를 시작하신 것은 비로소 그가 하늘로 승천하신 때였다.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10)라고 언급함으로 이를 잘 보여 주었다. 분명히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바울은 놀라운 일치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떠나가셨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임재가 우리에게는 더욱 유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땅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에는 초라한 육신의 집에 거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요 7:37)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언급하고 난 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요 7:39) 때문이라고 했다. 주님도 친히 제자들에게 이것을 증거 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 16:7)
그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떠나가는 것에 대해 제자들을 위로하며 말씀하기를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더 바람직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라 하셨다.(참고 요 14:18,19, 16:14) 그때 그들은 더욱더 확실한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세와 그가 발휘하시는 권능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복되게 살며 행복하게 죽도록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상 우리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발전시키셨고 그의 백성들을 돕고 그의 원수들을 흩어버리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능력을 발휘하시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그의 육적인 임재가 우리 보는 앞에서 사라졌지만(행 1:9) 여전히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순례적의 삶을 사는 동안 그들과 계속적으로 함께 계시며 더 직접적인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자신이 하신 약속 즉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그의 몸이 하늘 위로 들어올려지신 것같이 그의 권능과 힘도 하늘과 땅의 모든 경계를 넘어 확산되고 퍼져 나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말보다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의 말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가셨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게 되어있었다. 그는 순수한 교훈과 믿음의 규범에 따라 육신적으로 임재 하여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승천 후에 그들과 영적으로 함께 계실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은 그것을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말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를 따라 그가 말씀하신바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것이 성취될 것이다. 말씀이 친히 취하셨던 육신을 따라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 따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나무에 달리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세마포에 몸이 감싸져서 무덤에 눕혀지셨다는 사실에 따라 이 말씀 즉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왜 그러한가? 그는 40일 동안 육신적으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으며 그들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보았지만 따라가지 못하는 동안 하늘로 올라가셨기(행 1:3,9) 때문이다.
그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막 16:19) 그렇지만 그는 이 땅에 계신다. 왜냐하면 위엄성의 임재가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참고 히 1:3)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위엄성의 임재에 따라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적인 임재에 대해 그는 올바르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가 육신적으로 임재 해 계셨을 때는 단지 며칠 동안만 그를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15항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다라서 곧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다. 이 비유적인 표현은 왕들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업무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신들의 옆에 앉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오른편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앉히신 것은 그를 높이셔서 그 손을 통해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막 16:19, 히 1:3)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받으셨고 엄숙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통치권을 소유하셨으며 또한 그는 그 통치권을 단번에 소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판 날에 다시 오실 때까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실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도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0,21, 참고 빌 2:9) 또한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 하였으니(고전 15:27)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엡 1:22)라고도 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목적은 하늘과 땅에 있는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의 위엄을 경외함으로 바라보며 그의 손으로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도들이 종종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언급한 것은 곧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결정에 맡겨졌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행 2:30-36, 3:21, 4장, 히 1: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 단지 그의 복된 상태만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외쳤는데(행 7:55) 그것은 별로 중요한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몸의 위치가 아니라 그의 권위의 위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단지 하늘의 심판의 자리에서 주관하신다는 것 이외의 다른 뜻이 아니다
제16항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은 많은 유익들을 얻는다.
첫째,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담으로 말미암아 닫혔던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요 14:3) 그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마치 우리의 이름으로 하시는 것처럼) 하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사도가 말한 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 2:6) 것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소망하는 것만으로 천국을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믿음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아버지 앞에서 항상 우리의 한결같으신 대언 자와 중보자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히 7:25, 9:11,12, 롬 8:34)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의를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죄를 바라보지 않게 하신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목케 하심으로써 그의 중재(仲裁)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참한 죄인들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될 그 보좌를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가득 채우신다.
셋째,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 능력 안에 우리의 힘과 권세, 부귀 그리고 지옥을 대항하는 자랑이 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참고 시 68:18) 또한 그의 원수들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그 자신의 백성을 부요하게 하시고 날마다 영적인 풍성함으로 그들을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앉으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능력을 주입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인 생명으로 소생케 하시며, 그의 성령으로 거룩케 하시고 그의 은혜의 다양한 은사들로 그의 교회를 꾸미시며, 그의 보호하심으로 모든 해로운 것들로부터 교회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며, 그의 손의 능력으로 그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대항하여 날뛰는 원수들을 억제시키시며, 끝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붙잡고 계신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그의 모든 원수를(고전 15:25, 참고 시 110:1,그들은 우리의 원수들이기도하다) 굴복시키시고 그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완성하실 때까지 하신다. 이것이 곧 그의 나라의 참된 상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능력인데 이 능력은 그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셔서 그의 마지막 행동을 완성하실 때까지 그에게 부여될 것이다.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17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하시려 다시 오심
제17항 ‘저리로사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바로 그 능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땅에서는 말하자면 그의 육신의 비천함 아래에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는 임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눈에 보이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행 1:11, 마 24:30) 그리고 그는 그의 나라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성으로 불멸의 광채로 신성의 무한한 능력으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그날에 우리의 구속주로 오시는 그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때에 그는 양과 염소, 택함 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실 것이다.(마 25:31-33) 산자든지 죽은 자든지 간에 그 누구도 그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에서부터 들려올 것이요 그 소리로 말미암아 그날에 살아 있게 될 사람들과 그 이전에 산 자들 가운데서 취해 감을 받은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심판대 앞에 불러 모아질 것이다.(살전 4:16,17)
‘산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우리는 고대 저술가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설명한 의미는 명백하고 분명하므로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기록된 사도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울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마지막 심판 때에 아직 몸이 살아 있는 자들은 자연적인 방식이나 질서대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겪게 될 변화는 그것이 마치 죽음과 같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불려도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다 잠잘 것이 아니요 …. 순식간에 흘연히 다 변화 될”(고전 15:51)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지상의 삶은 순식간에 멸해지고 삼켜 버린바 되며 직접 새로운 생명으로 변형될 것이라는 것이다.(고전 15:52) 이와 같이 육신이 멸해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대 앞으로 호출될 것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로 남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살전 4:16,17)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이 표현은 누가가 언급한 베드로의 설교(행 10:42)와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명한 내용(딤후 4:1)에서 인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강요 제2권 16장 18,19항
사도신경과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한 결론
제18항 심판자는 구속 주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에서 놀라운 위로가 생겨나게 된다. 즉 우리는 이미 우리를 자신과 더불어 심판하는 영예에 동참시키기로 결정하신 분의 손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참고 마 19:28) 그가 심판대에 오르시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통치자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멸하시겠는가? 어떻게 머리 되신 분이 그 자신의 지체들을 흘어 버리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의대변자께서 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을 정죄하실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정죄하려고 나설 자가 없다고 사도가 감히 외치고 있다고(롬 8:33,34) 그렇다면 우리의 대언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친히 맡아 보호해 주려고 받아들이신 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할 것이다. 그 어떤 다른 심판대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해야만 하는 우리 구속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확신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복음을 통해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분은 그때에 심판 가운데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심으로써(요 5:22) 끝까지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인데 이는 그 아들로 하여금 심판에 대해 두려워 혀는 그의 백성들의 양심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짧은 말들로 우리 구속의 주요 요점들을 정리해 주며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유의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일일이 볼 수 있는 일람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고대 저술가들은 그것이 저자가 사도들이라는 데 견해가 일치했는데 그들은 그것이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손에 의해 전달되었거나 훌륭한 신앙으로 수집된 가르침의 요약이며 따라서 그러한 이름을 붙이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어디에서 나왔든지 간에 그것은 교회의 초창기 즉 사도시대에 모든 사도들의 동의에 의해 공적인 고백서로 받아들여졌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도신경’은 어느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쓴 것은 아닌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 어느 시점에서 ‘사도신경’은 모든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분명히 신성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유의해야 할 다음과 같은 유일한 요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 신앙의 전체 역사가 그 안에 간결하고 분명한 순서로 요약되어 있으며 또한 성경의 순수한 증거들로 보증되지 않은 것은 그 안에 하나도 없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저자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혹은 누군가와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일 누군가가 성령의 확실한 진리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동시에 누가그것을 말했고 또 누구의 손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알아야만 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제19항 사도신경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전체 구원과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곳에서 끌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찾는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이 ‘그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전 1:30) 만일 우리가 성령의 다른 어떤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은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있다. 만일 순결이라면 그의 잉태되심에서 찾을 수 있고 만일 온유함이라면 그의 탄생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탄생하심을 통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써(히 2:17) 우리의 고통을 느끼실 수 있게 되셨기 때문이다.(참고 히 5:2) 만일 우리가 구속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의 고난에 있으며, 죄 사함이라면 그의 정죄에서 그리고 저주를 면하는 것이라면 그의 십자가에서(갈 3:13), 만일 배상을 치르는 것이라면 그의 희생제사에서, 정결이라면 그의 피에서, 화해라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에서, 육신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의 무덤에서, 새로운 생명이라면 그의 부활에서, 불멸성이라면 동일한 부활에서, 천국의 기업이라면 그가 하늘에 들어가신 것에서, 보호나 안전이나 모든 축복을 풍성하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그의 나라에서 찾을 수 있으며, 만일 안심하고 심판을 기대한다면 심판하도록 그에게 주어진 권세에서 찾을 수 있다.
요약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마련되어 있으므로 다른 샘에서가 아니라 이 샘에서 마음껏 마시도록 하자. 어떤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 소망 저런 소망으로 옮겨 다니면서 이리저리로 헤매고 있다. 비록 그들이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각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만일 사람들이 단번에 참으로 그의 축복의 풍성함을 깨달아 안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신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글쓴 이 / 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