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6) 중세 암흑기와 교황권의 강화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사후에 제국 프랑크 왕국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약 1000년까지 중세교회는 3세기 동안 퇴보의 길을 걷게 되며 특히 10세기는 소위 ‘암흑의 시기’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경건한 루이(Louis I, 778-840)는 대내적으로 샤를마뉴의 치적을 계승할 만한 능력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아들들의 권력싸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은 드디어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을 체결하여 나라를 분할하였다. 이는 후대에 프랑스와 독일을 갈라놓은 분기점이 되었다고 본다. 설상가상으로 내분의 시기에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제국은 더욱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사라센 족의 침략을 받아 한 때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 노략질 당하는가 하면 또한 바이킹족이 북부지역의 해안을 타고 남하하기도 하였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바이킹족은 835년 아일랜드를 점령하면서 차례로 약탈해 갔다. 845년에는 덴마크 족이 함부르그와 파리를 점령했고 850년에는 침략자들이 르와르 강과 센 강 유역으로 내려왔다. 865년에는 덴마크 족이 영국의 전 국토를 점령했다. 880년에는 색슨족이 덴마크에게 무너져 버렸다.

이러한 위협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카로링거(Carolingian Dynasty)의 제국이 쇠약해지게 되었다. 제국은 더 이상 주민들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했고 주민 스스로 적들과 맞서 싸워야했다. 그래 주민들이 무기를 구입하려 했으나 턱없이 비쌌다. 흉배 갑옷은 황소 6마리나 암소 12 마리를 주어야 살 수 있었고 칼은 암소 7마리를 주어야 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저히 적들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들은 강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들은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이런 정황이 날로 심화되어 종국에는 중세 유럽 사회의 근간을 이룬 봉건제도가 탄생했다. 그러나 영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봉건사회는 봉건 영주들 간에 전쟁 등 전체 사회의 무질서를 조장하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사람들은 국가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교회의 명령을 업신여기며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행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억누르며 세상은 가난한 자에 대한 강포와 교회 재산에 대한 약탈로 가득하였다.
이러한 국가권력의 약화와 봉건영주들의 이권 다툼은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混沌)을 가중시켰고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교황청을 중세 초기 교황 그레고리 1세 때처럼 보편성의 상징이자 질서회복의 세력으로 보았다. 이때 교황권강화의 기선을 잡고 등장한 인물이 바로 교황 니콜라스 1세(Pope Nicholas I, 820-867)였다. 노르만족의 침략을 맞은 프랑크 제국은 루이 2세의 통치하에 심히 약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호기로 삼아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크족의 교회들에게도 세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동방제국의 보호 아래 있던 라베나의 대주교를 소환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거절하자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라테란회의에서 그를 파문시켰다. 루이는 교황의 권한이 높아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의했지만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여전히 프랑크족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절대복종을 강요했다. 교황 니콜라스 1세의 권위는 갈수록 강화됐고 카로링거 왕조의 왕자였던 로타르의 재혼을 허락한 트레베스와 콜른의 주교들을 주교직에서 파문시켰다. 그리고 왕자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포했다.
이에 분개한 루이 1세와 로타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교황 니콜라스의 뜻에 동의하고 말았다.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또 라임스의 학식과 덕망 있는 주교 힝크마르크 대주교와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그는 동방의 포티우스에 대항해 파면됐던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회복시키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스 1세의 재직 시 가장 중대한 사건은 이시도르안(Pseudo-Isidorian Decretals)이라는 허위 칙령이었다.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위조 된 괴문서였다. 이는 이시도르(Isidore)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작성된 역대 교황들의 서신들과 위조 서신들의 묶음이었다. 예를 들면 2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모든 교회들에게 권위를 행사했다는 거짓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교황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인 근거가 없었고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투우르의 교구에 속한 르망에서 847년에서 86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역사적인 상상력과 학식이 풍부한 일련의 성직자들이 모여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의도는 카로링거와 영주들의 통치에 시달리고 있는 주교들의 입장을 개선시키기 위해 캐논(Canon)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성직자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종래의 자신들이 사용하던 법령에 자신들이 창작한 클레멘트로부터 다마수스에 이르는 초대 교황들의 서신을 추가시켰다.
결국 이 문서가 교황의 권위와의 관계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교황이각 지역의 주교들을 관장하도록 권한을 입법화시킴으로 주교들을 지방의 세속 권력자의 지배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교황을 전체 기독교권의 지존의 수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교황이 주권적인 입법자로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주교들의 지방회의의 회집이 불가능 하도록 제정했다. 뿐만이 아니라 교황의 허락 없이는 주교가 면직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교황의 결정사항은 그 자체로서 법률적인 성격이 있음을 제정했다.
이러한 법령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물론 기꺼이 수용했다. 그리고 그는 이 법령을 근거로 “교황이 결정한 사항들은 모든 이들에 의하여 지켜져야만 한다.”고 선포했다. 이 교령 집은 또 교황과 대주교들 사이에 ‘성직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성직자회가 교황의 권위를 높이면서 대주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는 11세기에 실제적으로 추기경단을 잉태시킨 효시가 되었다.
9세기에는 또 다른 위조문서가 나타나 교황권의 확립과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할 뿐 아니라 성(聖)과 속(俗)의 위계질서를 확실히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문서의 이름은 디오니시우스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짜 디오니시우스 문서(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라고 한다. 이 문서에서 천상(天上)의 구조와 지상(地上)의 사회 체제를 위계적(hierarchical)인 구조로 형성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먼저 신적(神的) 영감(靈感)이 천상에서 지상 사회로 내려와서 지상의 성례(聖禮)로 전달되고 또 다시 성례로부터 성직자들에게로 그리고 성직자들에서 평신도에게로 전달된다. 그리고 지상의 세속적인 권한도 같은 도식으로 체계화했다. 즉 천상의 위계가 왕에게 전달되고 다시 농노(農奴)에게로 전달된다. 그리고 교회의 위상을 국가 위에 세우는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결국 이 문서는 로마 교황이 신정정치를 할 수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가짜 문서들의 힘을 입어 강화됐던 교황 니콜라스 1세의 강력한 교황권도 그가 죽은 지 25년이 경과한 후에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위 교황청의 추문이 이탈리아 귀족들의 교황청 지배 야욕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누가 로마의 교황청을 지배하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8세(Papa Giovanni VIII, 제107대 교황, 재위 872-882)의 죽음 이후의 비참한 교황청의 권력싸움은 배후에 조종자였던 귀족들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교황 요한 8세는 그의 재산을 노리는 친척에 의해 독살 당했다. 그가 독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친척들은 그의 머리를 망치로 쳐서 죽여 버렸다.
이후에 소위 암혹기로 불리는 악(惡)과 부정부패의 역사가 그의 1세기 동안 계속된다. 악의 대명사였던 세르기우스 3세(Pope Sergius III, 904-911)부터 요한 12세(Pope John XII, 937?-964)까지의 60년간이 가장 심하다고 하지만 대략 82년에 걸친 무능과 실패의 역사였다. 교황들의 자리는 이를 통솔하던 귀족들의 장난감에 그쳤다.
이 시대가 얼마나 불안했던가는 교황들의 재임기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896년에서 904년까지 10명의 교황들이 교황 직에서 올랐다가 물러났다. 어떤 경우는 4개월 또 다른 경우는 1개월 그리고 20일간의 교황도 있었다. 그리고 904년 세르기우스 3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소위 도색정치(桃色政治, pornocracy)가 시작되었다.
교황청의 악명 높은 두 여인 테오도라(Theodora)와 그녀의 딸 마로지아(Marozia, 890-930)는 그녀들의 미모와 창부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로마 및 서방 교회 전체를 한때 좌우했다. 그들은 치마 바람으로 치욕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이로 인해 교황들은 제대로 수명을 다해 다스릴 수가 없었으며 이 시대의 교황들은 모두가 감옥이나 살인에 의해 단명했다. 이탈리아에서 귀족들의 정치적인 횡포로 인한 교황청의 부패는 곧 독일황제 오토(Otto I, 912-973)의 교황 임명권을 유발시켰다. 즉 한동안 오토 황제가 교황 좌에 오를 인물들을 결정하는 시대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오토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황이 자신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잘 알고 있던 황제는 23살의 조카를 교황 자리에 올려 교황 그레고리 5세(Papa Gregorio V)로 임명하였다. 오토는 그레고리 5세 이후에 교회의 개혁을 내세웠던 유명한 학자 오릴락의 게르베르트(gerbert of aurillac)를 지명했다. 그는 세베스타 2세(Pope Sylvester II, 946-1003)라는 칭호로 교황이 되었으며 그의 개혁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토의 사후에는 이탈리아의 테오필락트 가문의 크레센티우스가 다시 교황청을 장악했다.
그러나 곧 투스클룸(Tusculum) 백작들에게 밀려나고 투스클룸가로 교황청은 넘어갔다. 그들은 베네딕트 8세, 존 19세, 베네딕트 9세 등을 교황으로 세웠으나 이들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045년 베네딕트 9세는 막대한 금액을 받고 교황 직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크레센티우스 가문은 다시 교황청을 장악하게 되어 자신들의 교황을 다시 세우니 그가 교황 실베스터 3세가 되었다. 마침내 이탈리아 귀족들의 권력 싸움에 독일 헨리 3세가 나서서 중재역할을 하게 되었다. 헨리 3세는 종교회의를 소집한 후 양가의 새로운 교황들을 폐위 시키고 클레멘트 2세를 새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아울러 이 회의는 교회 내의 부정부패 문재에 대한 개혁을 다루었으며 성직매매 등을 금지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클레멘트 2세는 헨리를 황제로 임명한 후 곧 사망하였고 헨리 황제는 교회의 개혁을 외치던 토울의 감독 브르노(Bruno)를 교황 직에 임명했으나 브르노는 자신이 로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한 교황 직을 수락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였다. 브르노는 자신과 같은 개혁의 의지를 가진 동료 힐데브란드(Hildebrand)와 훔베르트(Humbert)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이들의 로마에로의 행보는 중세 교회사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 초기의 역사는 교황 그레고리 1세로 시작하여 유럽의 전도를 통한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일단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정치적인 힘을 이용하기도 하였고 교황의 전도전략의 다양성과 효율성도 돋보였다. 그러나 교회는 본질에서 이탈하여 세속화라는 역사적인 과정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사회(Christendom)라는 우산 아래 펼쳐지는 역사는 성(聖)과 속(俗)의 투쟁의 역사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선교의 열기는 중세의 기독교에 활력(活力)을 불어넣었다. 특별히 제도화 된 교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영적인 저수지 역할을 감당한 제도적인 공동체로 수도원(修道院)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바로 이 수도원 운동이 중세의 암흑기에 나타난 교회의 부패를 갱신하기 위해 혁신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표적인 수도원의 이름은 클뤼니 수도원(Abbaye de Cluny, 910 설립)이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