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7) 중세 중기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7)
중세 중기의 역사

Benedict of Nursia(480-543) is honoured by the Catholic Church and the Anglican Church as the patron saint of Europe and students.
Benedict of Nursia(480-543) is honoured by the Catholic Church and the Anglican Church as the patron saint of Europe and students.

1. 로마 가톨릭 수도원의 갱신운동

중세의 중반기는 카롤링 가(家)의 몰락과 더불어 발생했던 부패와 폭력에 대한 혐오와 신(新) 질서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된다. 교황의 권좌를 중심으로 빚어진 정치 싸움과 유혈극의 출현 그리고 성직매매 등 교권의 타락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직자들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도구로 전락하였음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정황을 보면서 분노와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런 와중에 수도원의 삶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교황청의 세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적절한 세력은 수도원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교회의 개혁에 앞서 수도

원 자체의 개혁이 시급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과 정신에 의해 전승된 중세 수도원은 점점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수도원 타락의 주된 원인은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수도원 사유화에서 비롯됐다. 교황청과 감독직들이 귀족과 탐욕에 찬 성직자들에 의해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가 되었듯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사들은 베네딕트의 규율을 지킬 수도 없었으며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자들은 자연히 마음속으로부터 변화의 조짐을 희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1) 베르노의 로마 가톨릭 개혁운동

이런 정황 가운데서 아퀴데인의 공작이었던 월리엄 3세는 작은 수도원 하나를 창설하였다. 이때 월리엄이 초청한 사람은 개혁의 열기로 가득 찼던 베르노(St. Berno of Cluny, 850–927)였다. 베르노의 요청에 의해 월리엄은 자신이 아끼던 사냥터인 클루니(Cluny)를 수도원의 부지로 헌납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원을 당시 부패한 교황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개혁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거룩한 사도들에 속한 재산이라고 명문화하였다.

베르노는 927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훌륭한 수도원장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 클루니 수도원은 위대한 개혁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아 갔다. 클루니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수도원의 방향은 중세 수도원의 원조인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Rule of Saint Benedict, written by Saint Benedict of Nursia 480–547)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수도사들은 점점 개혁의 의지와 이념을 갖게 되었고 베르노의 모범을 지향하면서 수도원의 개혁에 눈을 돌렸다.

이러한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은 점점 널리 확산되어 수백 개의 수도원들이 개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든 시간을 경건운동에 바치면서 원래 베네딕트의 규율에서 중요시 되었던 노동의 본분을 상실할 정도로 기도와 찬양에 몰두하였다. 이 운동의 전성기에는 하루에 138편의 시편이 낭독되기도 하였다.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 전체 수도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진전되자 이번에는 교회의 개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회의 암흑기로 교황들의 부패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이러한 수도원의 개혁정신은 새로운 한줄기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는 교회의 만연된 부패에 비교할 때 수도원 주의적 모범이야말로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로 보였다. 이에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유명인들도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이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교회의 개혁운동은 수도원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상에 부푼 베르노(St. Berno of Cluny, 850–927)는 그의 동료인 힐데브란트(Childebrand)와 훔베르트(Humpert)를 동반하고 로마로 향해갔던 것이다. 베르노는 레오 9세의 이름으로 교황 위에 즉위하였다. 베르노가 교황이 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개혁의 방향과 원칙을 잡게 되었다. 그것은 클루니 수도원이 세속권(世俗權)으로 부터 독립하였기에 위대한 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권을 귀족들이나 국왕들의 권한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속(世俗)과 가장 밀접한 관계인 성직매매((聖職賣買, Simony)야말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세속권(世俗權)에 의한 수도원장 감독의 임명은 그 자체로서는 성직매매가 아닌 수단이었지만 성직매매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사 출신의 개혁가들이 보았던 또 하나의 부패의 고리는 성직자들의 결혼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성직자들의 독신문제는 하나의 규범으로 강요되지는 않았다. 성직자 독신은 단지 권장사항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도원의 개혁에 성공한 수도사들은 성직자들도 수도사들처럼 독신을 지켜야 개혁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주관이 된 11세기 개혁운동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요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또 하나의 개혁의 원칙은 ‘복종(服從)의 원리(原理)’였다. 수도원에서 모든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함으로 개혁이 가능했듯이 교회 아니 전체 기독교권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였다. 이는 수도원장이 전체수도원을 통괄한 것처럼 교황이 기독교권을 통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왕권(王權)도 교황이 관장하는 의미로 확대 해석하여 적용되기도 하였다.

(2) 로마 가톨릭 1차 개혁운동의 실패

The construction the abbey of Cluny II, ca. 955-981
The construction the abbey of Cluny II, ca. 955-981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 중심의 초기 개혁운동은 수도원과 교회 양쪽에서 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의 주된 원인은 부(富) 문제였다. 즉 수도원이나 교회는 둘 다 가난(Poverty) 문제 있어서 실패하였다. 수도원 수도사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동을 받은 부자와 빈민들은 앞 다투어 모두가 많은 금품을 수도원에 헌납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경건한 수도생활을 동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막대한 선물과 유산을 수도원에 바침으로 수도원의 재산은 끊임없이 증대되어갔다. 그러므로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이 요구하는 소박한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들이나 수녀들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 등으로 경건에만 바칠 수가 있게 되었다. 수도원을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할 정도로 재산이 축적되자 수도원은 원래의 정신을 상실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교회대로 수세기를 걸쳐 축적된 토지와 재산이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었다. 이론적으로는 이 모든 재산과 헌금이 고위 성직자나 일반 목회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둘러싸고 교권과 속권과의 투쟁은 성직매매라는 이권 싸움으로 연결되었다.
(3) 클레르보의 버나드의 로마 가톨릭 2차 개혁운동

St. Robert of Molesme
St. Robert of Molesme

이런 문제로 수도원의 개혁 정신이 약해지고 있을 때 이 같은 개혁의지의 약화에 불만을 품은 다른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것은 11세기 말에 시토 수도원(Cîteaux Abbey, a Roman Catholic abbey located in Saint-Nicolas-lès-Cîteaux, south of Dijon, France.)의 등장이었다. 이 수도원 창시자는 모레스메의 로버 트(St. Robert of Molesme, 1209-1111)로 그가 창설한 지명의 이름을 따서 시토 수도원(cîteaux abbey)이라 불렸다. 그리고 이수도원 출신을 시스테시안(Cistercian)이라고 불렀다.

시토 수도원 대표적 지도자는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de Clairvaux)였다. 그는 23세의나이에 친지들과 함께 수도원에 가입했다. 또한 시토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새로운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이는 버나드의 몫이 되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급성장하여 개혁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버나드는 무엇보다도 수도사로서 자신의 신앙을 조명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음식을 장만하던 마르다보다는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를 더욱 선호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고 이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설교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설교로 사람들을 움직여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케 할 정도였다.

자신의 명성에 높아짐에 따라 정치, 종교 문제에도 개입하여 중재의 역할을 하는 등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 교황의 영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명상에 전념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일체의 신학적인 변화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보수주의자였으며 교회 개혁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버나드의 영향력 때문에 시토 수도원 운동이 사람들의 각광을 받으면서 1세기를 넘기기 전에 클루니가 담당했던 교회 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