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46) 근대 세계교회사

1. 17, 18세기의 세계교회(4)
(4) 경건주의 운동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발달된 교리논쟁은 개신교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한 중간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발달은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의 합리적인 사고논리와 병행하여 신앙을 신학화 하고 논리화하는 정통주의(Qrthoddx)를 잉태시켰다. 이는 중세의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적인 냄새를 갖고 있었다.
이때의 신앙은 순수한 교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설교를 규칙적으로 청종하며 성례의식을 엄격하게 시행해야 참된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앙형태는 매너리즘(mannerism, 타성)을 야기 시켰고 종교생활의 형식화를 초래하여 죽은 정통에 얽매이는 모순(矛盾)을 가져왔다. 이런 신앙의 모습에 만족치 못한 사람들이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교리적인 고백보다는 경험(經驗)과 감정(感情)의 중요성을 고조하는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을 따랐다.
이 같은 경건주의의 시작은 필립 스페너(Philip Jakob Spener, 1635-1705)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너는 독일 북부 알사스 지방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성경 석의학(釋義學)을 연구했다. 그는 또 바젤과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루터와 장로교신앙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정신적 도움을 준 사람은 신비주의 경향이 짙었던 아른트(Johann Arnt, 1555-1621)였고 게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와 네덜란드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도 영향을 받다. 그리고 영국 청교도였던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에게서도 물론 감화를 받았다.
스페너는 1666년 프랑크푸르트교회 목회에서 교인들의 영적 고갈 상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처음에 몇몇 사람들과 함께 소그룹으로 자기 집에 모여 성경연구와 기도 등 신령한 신앙생활을 시도했고 이를 그는 경건모임(collegia pirtas)이라고 했다.
스페너는 당시의 신앙의 부패 현상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는데 그것은 1)정부의 교회간섭, 2)성직자들의 삶의 부패, 3)이론적이며 신학적인 논쟁, 4)평신도들의 무절제한 생활 등이라고 하였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 그는 교회 내의 소그룹을 만들어 성경과 기도로 서로의 삶을 챙기고 서로의 신앙을 시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의미했다. 특히 스페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신학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모습의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그로 하여금 극단적인 영국의 청교도신앙 사상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극장, 춤, 카드놀이 등 음식과 의복에 이르기까지 금욕(禁慾)의 삶을 주장했다. 그는 교회를 신조(信條) 중심에서 성경연구 중심의 교회 경건생활 위주의 교회로 바꾸려고 했다. 이런 시도에 대해 기존 교회에서는 이단적인 시각으로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후에 베를린 궁정의 목사로 청빙을 받아 그곳에서 성공적인 경건주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스페너가 베를린에서 경건주의 신앙활동을 하고 있을 때 할레대학(Martin Luther University of Halle-Wittenberg)을 중심으로 경건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에게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라는 재주와 지성이 겸비된 인물이 할레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할레대학은 곧 경건운동의 중심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특별히 할레대학의 유명한 점은 선교의 열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가 선교의 눈을 뜨기 전에 프랑케와 그의 동료들은 선교에 대한 사명감에 불타 대학에서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들이 18세기 근대선교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들이 파송한 선교사는 멀리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또 경건주의의 영향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지에도 확산되었고 대중들의 신앙생활에 파고들어 청순한 국민정신의 함양에 기여하였다.
그 후 프랑케와 스페너의 뒤를 이어 경건주의의 활동을 계승할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불러일으킨 괄목할 만한 결과 중의 하나는 진젠돌프 백작(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의 지도하에 있었던 모라비안 형제단(Moravian Brethren)의 형성이었다.
진젠돌프 백작은 스페너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작센 선제후 궁전의 고위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건한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고 어린 때에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파에다고기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자신의 영토인 베르텔스토르프에 30년 전쟁 이후 신앙 때문에 계속 피난생활로 전전 긍긍하던 얀 후스(Jan Hus, 1369-1415)의 후예들인 모라비아의 피난민들을 위한 촌락을 만들어 이들을 안주하게 도와주었다. 이 촌락이 바로 유명한 헤른후트(Herrnhut)다. 진젠돌프는 그의 이상에 따라 이들의 신앙훈련을 강하게 시켰다. 바로 이런 운동을 통해 1722년 모라비안 교회(Moravian Church)가 탄생한 것이다.
모라비안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선교의 열정이었다. 진젠돌프 자신이 선교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는 1738년 서인도 섬에 선교여행을 갔으며, 1741년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모라비안 교회 확장을 시도했다. 그리고 뉴욕에 건너가서 펜실베니아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미국 내 모라비안 본거지를 삼도록 했다. 진젠돌프를 중심으로 모라비안들은 인디언 선교를 추진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선교활동을 적극 추진했다. 이처럼 진젠돌프의 헤른후르트는 세계선교의 근거지가 되어 수리남, 기아나, 이집트,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러나 종국의 모라비안들은 진젠돌프와 분리 독립교회를 형성하여 오늘날의 중국 모라비안 교회를 낳게 되었다. 이 운동이 광범위하게 독일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생동하는 신앙을 불러 일으켰고 목사들의 영적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설교의 질적인 향상과 청년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훈련의 실천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평신도의 교회생활의 확장을 가져왔다. 또한 성경에 대해 친숙하게 만들었고 신앙생활의 구체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운동이 끼친 부정적인 요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공로 사상에 치우쳤고, 세상에 대한 지나친 금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경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신앙적인 차별과 그리고 신앙의 지적 요소를 경멸하는 것 등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행하고자 하는 성경 본래의 의미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시 되었다.
(5)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과 영국교회의 부흥
독일에서 정통주의(正統主義)와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영국에서도 스페너의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교회의 영적 고갈을 해결하기 위한 복음주의(福音主義)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의 근저에는 일찍이 성경읽기와 기도운동 그리고 수시로 성찬 거행 등을 통해 경건생활을 모색했던 모임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고 런던에만 이런 그룹이 백여 개나 됐다,
이런 가운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미 어스킨(John Erskine of Dun, 1509–1591)과 에벤에젤(Ebenezer Erskine, 1680-1754) 등을 통해 복음주의 운동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을 하나로 규합하여 영국교회 부흥을 유발시킨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1707-1788),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였다.
-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그들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성경공부와 규칙적인 신앙생활의 모 임을 갖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기 상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일정한 시간에 감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등 그들만의 규칙적인 생활 방식(method)에 따라 신앙생활 했다. 이들 모임을 신성한 모임(Holy Club) 이라 하였고 후에 이들을 가리켜 John Wesley(1703-1791) 규칙적인 생활방식의 사람들이라는 의미 즉 감리교의 ‘Methodist’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시작한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요한 웨슬레가 주도하는 감리교, 윗필드가 주도하는 칼빈주의적 감리교, 전통적인 앵글리칸교회 계통의 복음주의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요한 웨슬리는 그의 동생 찰스 웨슬레와 함께 1735년 미국의 조지아 주의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받아 파송되었다.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가다 큰 풍랑을 만났고 이때 자신들은 폭풍우 속에서 공포에 질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같은 배 안의 모라비안(Moravian)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요한 웨슬리는 미국의 사바나에 도착하여 모라비안 선교사인 슈팡겐베르그를 만나 다시 감화를 받았다. 웨슬리는 모라비안들과의 접촉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점검과 반성의 기회를 가졌다. 1738년 그가 영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완전한 회심의 기회를 모라비안 뵐러(Peter Böhler, 1712-1775)에게서 받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 의하면 요한 웨슬리는 알더스게이트에 있는 모라비안의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뵐러의 로마서 강해를 듣는 중에 변화를 체험한 것이다.
“그런데 8시 45분 쯤 되었을 때 나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그 한 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내 죄 아니 나 자신까지도 다 제거해 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하여 주셨다는 그런 확신이 가득함을 느꼈다.”
이 같이 모라비안을 통해 참된 신앙을 깨달은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집단 거주지인 헤른후트(Herrnhut)에 가서 진젠도르프를 만나 2주 동안 머무는 등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이들의 지나친 신비주의와 주관성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더 행동적이고 덜 신비적인 폭넓은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 요한 웨슬리는 기회를 찾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에서 일하고 있는 휫필드의 초청을 받아 광부들에게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날 동안 야외 집회를 열고 거기서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 중에 사람들은 신체적인 광란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외치고 어떤 이는 땅에 거꾸러지거나 몸을 뒤틀었다. 이 일들로 인해 요한 웨슬리는 성직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의 세력은 확장되어 갔고 종래에는 1739년에 감리교 신앙공동체(Society)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웨슬리 추종자들은 모라비안 피터 뵐러가 설립한 페터 레인 신앙공동체(Fetter Lane Society)라는 모라비안 교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과의 갈등이 빚어져 결국은 감리교 교인들은 이곳에서 분리되어 나와 1740년 연합 신앙공동체(United Society)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독립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감리회(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으로 정식 설립된 것은 1779년이었고 웨일즈 감리교회가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54
요한 웨슬리는 1791년 런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공적은 영국의 상하류의 종교적 조건을 혁신한데 있으며 미국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는 교회의 분립을 반대하였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잦은 성공회와의 마찰로 인해 오늘날의 감리교회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요한 웨슬리와 함께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했던 칼빈주의 감리교파 조지 휫필드 역시 요한 웨슬리에 못지않게 영향을 미쳤다. 요한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휫필드도 초기 회심의 체험을 했다. 그는 요한 웨슬리의 체험보다 사실 3년이나 앞서 신앙체험을 했다. 휫필드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을 믿음으로 의지할 수 있게 하시고 양자(養子)의 영을 허락하심으로 영원한 구원의 날까지 나를 인치시며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나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 다시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그 장소를 잊지 않고 있다. 미신적인 행동일지 모르지만 옥스퍼드에 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던 장소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휫필드의 체험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휫필드는 1736년 글로스터의 주교에 의해 사역자로 임명되자 영국의 각 섬의 구석구석을 돌며 설교를 했다. 그리고 미국의 13개 주의 영국 식민지를 다니며 순회사역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옥스포드에서 요한 웨슬리 형제와 신성 그룹(Holy Club)에 합류하여 그들과 동역했으나 나중에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알미니안(Arminian)의 입장을 취했고 휫필드는 그와는 반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다는 칼빈주의(Calvinism)의 입장을 따랐기 때문이다.
휫필드는 주로 야외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요한 웨슬리와 같은 방법이었다. 휫필드는 운반하기 쉬한 강단을 가지고 다니며 설교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복음의 전파에 도움을 주었다. 그의 주 사역지는 브리스틀과 런던이었다. 브리스틀의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시에 나는 서둘러서 킹스우드로 갔다. 나의 설교를 들으려고 일천 명 정도의 청중이 운집해 있었다. 나무들과 산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찼다. 내가 설교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태양은 밝게 빛났으며 하나님은 힘을 주사 큰 능력으로 한 시간 동안 설교할 수 있게 하셨다. 나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이 지역에 복음의 불길은 타올랐으며 지옥의 모든 악마들도 그것을 끌 수 없을 것이다.”
휫펼드의 설교는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스코틀랜드인들은 휫필드의 칼빈주의적인 복음설교를 환영했다. 휫필드는 35년간을 사역하면서 영국 식민지 미국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다. 그는 조지아 주에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이를 위한 모금운동 차 전도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나 중부권의 식민지들을 자주 방문했다. 중부지역의 농부들은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연장을 농장에 버려둔 채 달려가곤 할 정도였다.
휫필드는 전통교리와 복음주의적인 열심과 전도가 서로 상충하지 않는 진리를 보여주었다. 휫필드의 장점은 교파를 초월하여 성령을 통하여 회심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영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파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770년 55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뉴잉글랜드의 뉴베리포드에 묻혔다. 그는 천식으로 인해 자기의 생명이 다한 것을 알고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주 예수여! 저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의 갈 길을 아직 끝마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밖에 나가 주님을 위해 외치게 하소서. 그리고 진리를 외치고 집에 돌아와 숨지게 하소서.”(*)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