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52) 근대 세계교회사

19세기의 세계교회
(3) 19세기 유럽 대륙의 교회
18세기의 유럽대륙은 17세기의 30년 전쟁의 결과로 회복한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가 개신교 교회에 축복의 시대를 약속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프랑스, 스위스, 독일, 화란 등과 같은 나라는 그들의 신조를 만들어 개혁신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은 지속되었지만 성경적인 신앙의 회복은 이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적대 요소들이 나타났다. 개신교도들에게는 로마 가톨릭교회보다 어떤 면에서 더 무서운 질병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바로 계시종교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을 준 계몽주의 운동이었다.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와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de Voltaire, 1694-1778) 같은 지성인들은 기독교를 공공연하게 조소(嘲笑)하면서 공박했다. 볼테르는 기독교를 향해 ‘수치스런 것들을 때려 부숴라!’라는 슬로건(Slogan)을 내걸었다.
이 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理性)의 횡포와 더불어 18세기 말 교회와 신앙에 절대적 적대감과 상처를 준 사건은 1789년 프랑스 혁명(Révolution française, 1789.7.14.-1794.7.27)이었다. 혁명군에 의해 장악된 프랑스 정부와 의회는 군주를 몰아내고 왕과 황후를 죽인 후 교회 폐지령을 내렸다. 그 대신 이성(理性) 숭배를 강요했다. 노틀담사원( Notre-Dame Cathedral)과 지방의 교회당에 이성의 상을 세우고 경배 하였다.
기독교의 교회력이 폐지되었고 주 7일을 10일로 수정했다. 그리고 교회당의 종을 다 떼어다가 녹여 대포와 동전을 만들었다. 교회의 예배는 금지되었고 대신에 열흘마다 한 번씩 정치연설을 했다. 그리고 교회당에서 흥겨운 잔치와 무도회가 번갈아 열렸다. 그 후 비록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권력을 잡고 로마 가톨릭과 화해하여 교회의 예전을 회복시켰으나 불란서혁명으로 인해 교회가 입은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비록 프랑스혁명의 공격대상은 로마 가톨릭교회였지만 개신교도들의 미약한 상태도 마찬가지로 침체의 분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프랑스의 교회에 대한 박해의 영향이 19세기로 이어져오는 동안 스페인과 이탈리아와 같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지배국가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개신교 교회가 큰 타격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의 성서공희 사업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했다. 1816년 교황 피우스 7세(Pope Pius VII, 1742-1823)는 개신교를 전염병으로 규정하였고, 교황 레오 12세(Pope Leo XII, 1769-1829)는 “개신교가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마귀의 말이다.”라고 공박했다. 이런 박해는 이 시기 동안 지속되어 어떤 교황은 개신교의 성경을 ‘무서운 전염병의 근원지’라고 했다. 그래서 교황들은 눈에 띠는 모든 성경을 찢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스위스 각 광역구(Cantons of Switzerland)의 경우도 정통 기독교가 버림을 받고 프랑스의 이성주의자(理性主義者, rationalist)들의 사조(思潮)가 밀려들고 있었다. 자연종교(自然宗敎, Natural religion)가 범람하여 성경의 진리를 대신하였고 칼빈의 신학은 퇴조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이상한 현상이지만 16세기 말엽에 일어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604)의 주장을 받아들인 소시니안주(Socinianism)의 혹은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와 같은 이단의 성행으로 19세기 초 스위스의 대부분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포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1815년 4년간의 제네바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부스트라는 학생이 회심한 후 고백하기를 신학교의 교수들은 강의시간에 신약이나 구약성경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는 바로 이성론자(理性論者, rationalist)들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보여준다.
19세기 독일 개신교의 모습도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었다. 독일은 19세기 초반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시대라고 불렸다. 괴테는 당시 독일어권에서 지대(至大)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개혁 이래 무섭고 악마적인 요소가 예술 작품에 스며 들었다.”고 할 정도로 반(反) 개신교적 이었다. 그는 반면에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다. 그것은 그가 로마 가톨릭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고전적인 예술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19세기 중반에는 독일에 불신앙(不信仰)의 사조(思潮)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신학은 고등비판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성경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불신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등을 실제의 일로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실제 죽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아사(餓死) 상태에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는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을 출판하여 복음서의 대부분의 내용이 단순한 신화(神話)에 불과하다고 역설(力說)했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또 성경의 영감, 통일성, 성경 기자들에 대한 정통적인 가르침의 반대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유럽과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 신학의 자유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려는 일련의 운동이 일어났다.
베를린신학교 교수 헹스텐베르크(Ernst Wilhelm Hengstenberg, 1802-1869)는 성경의 무오(無誤)을 주장하며 치명적인 자유주의의 악영향에서 벗어났다. 종교는 삶의 내면과 경건(敬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헹스텐베르크의 영향을 받아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뛰어난 주석가였던 카일(Johann Friedrich Karl Keil or Carl Friedrich Keil, 1807-1888)이었다.
참된 경건주의를 주장했던 옹켄(Johann Gerhard Oncken, 1800-1884)은 형식적인 루터교회의 차가운 신앙을 실감하고 함부르그(Hamburg)에서 개신교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여러 경건주의 책을 읽었고 런던에서 로마서 8:1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독일 함부르그에 돌아와 많은 복음주의 일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대표가 되었고 함부르그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19세기 독일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바로 이 같은 옹켄의 영향이 컸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가 당시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더불어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옹켄과 그의 동료들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영혼 구원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진력을 다했던 것이다.
한편 보수적인 신앙고백의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프레드릭 월리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1840)에 의해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강요된 연합교회(Prussian Union of Churches)가 이루어지자 루터교 정통 보수주의자들은 칼빈주의와의 통합을 반대하고 나셨다. 1840년에 와서 루터교의 보수연대 세력은 외국 이주의 자유를 맞이하여 장기간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버팔로와 미조리에 정착하고 루터 보수주의 교회를 세웠다.
19세기의 독일신학의 변화 속에서도 국내 선교의 열심을 내는 이도 있었다. 1833년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81)은 불행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하여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 수백 개에 달하는 이 같은 어린이 숙소가 생겼다. 그는 이와 함께 도시전도와 문서전도 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그의 복음에 대한 열심을 곧 스칸디나비아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Denmark)에서는 철학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에 의해 당시의 형식주의에 빠져 힘없는 덴마크교회가 역설적인 신앙과 실존적인 입장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19세기의 유럽교회는 태풍과 같은 악재들이 밀려왔지만 부흥의 기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음주의자들의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기존 교회의 심각한 반대는 여전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성교회는 이미 합리주의의 늪에 빠져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목사인 콕(Hendrik de Cock, 1802-1841)은 합리주의자들의 지배하에 있는 기존 교회에 반발하여 개혁교회를 창설해 분리하는 운동을 벌였고 스위스의 비넷(Alexandre Vinet, 1797-1847)이 복음주의자들을 이끌자 합리주의 교회의 반대에 부딪쳐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보드자유교회(Free Church Vuad)를 설립하기도 했다. 19세기의 교회 분열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분명한 명분이 있는 진리를 위한 분열이었다.
19세기 유럽 기독교의 또 다른 변화는 기독교의 사회적 해석이 진지하게 진행 된 것이다. 슈퇴거는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노동법과 사회보장 등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기독교가 너무 세속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복음의 확대 해석을 통해 얼마든지 사회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사상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큰 성과는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근대 기독교의 새로운 방향을 열게 하였다. 사회적 기독교운동은 역시 개혁교회에서 더욱 풍부한 토양을 일구어 내었다. 평화주의자 라가츠와 미국 영국에서 사회적 기독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바로 개혁교회 출신들이었다. 비록 사회적 기독교 출발이 바라는 만큼 완성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기독교가 개인구원의 길로만 생각했던 벽을 극복하고 사회문제에 도전하는 의미심장한 변혁의 문을 두드렸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