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가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여기서 교훈(敎訓)은 교리(敎理, doctrine)를 뜻한다.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령과 구원과 은혜와 영광에 관한 진리를 배운다. 또 우리는 교리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양육을 받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간다.

그러므로 교리를 소홀히 여기면 은혜 안에서 자라며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증거 하는 역사가 필연적으로 중단된다. 사실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의 기초이다. 그런데도 교리를 그리스도의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무시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 이 말씀은 “무지, 편견, 오류, 악의 세력으로부터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를 모르면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의 순서에 주목하라. 모든 성경은 먼저 ‘교훈(교리)’에 유익하다. 이와 동일한 순서가 서신서 전체에 나타나며 특히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적 서신들에서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로마서를 읽어보면 1장부터 5장까지는 훈계가 단 하나도 없다. 에베소서에서도 1장부터 3장까지는 권면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서신서들의  순서를 보면 먼저 교리의 가르침이 나오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훈계나 권면이 나온다.

그럼에도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실천적 가르침이 교리 해설을 대신해 버렸으며 이것이 지금 신비로운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많은 악한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에 대한 깊이와 이해와 깨달음이 너무나 부족한 까닭은 가르침을 듣고 은혜의 교리(교훈)들을 혼자 연구하여 믿음에 굳게 선 신자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이들의 영혼이 성경과 관련해 신적영감(神的靈感, divine inspiration) 교리와 완전(完全) 축자영감(逐字靈感, full and verbal inspiration) 교리에 견고히 서 있지 않으면 확고한 믿음의 기초란 있을 수 없다.

칭의(稱義) 교리를 모르면 자신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화(聖化)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잘 모르면 완전이나 거룩에 관한 저속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쉽다. 중생(重生) 교리를 모르면 그리스도인의 두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평안과 기쁨을 잃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의 목록은 아주 길다. 이 시대의 교회가 불신앙의 거센 물결에 대처할 힘을 잃은 것은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이 이 시대의 무수한 거짓가르침에 속아 넘어가는 주된 이유도 그 근본은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교회가 거짓 교리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딤후 4:3 KJV직역,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한글개역개정)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교리도 순전히 냉정하고 지적인 시각에서 연구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교리 교육과 교리 연구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며 당연히 메마르고 무익하게 된다.

그러나 교리를 바르게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해 연구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실천적 가치가 없는 한낱 신비한 교리(mystical dogma)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일상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도록 계획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며 성경의 신적 영감 다음으로 중요하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기독교 진리 체계의 무게 중심이다. 행성들의 중심을 이루는 태양과 같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황금 이정표다. 모든 지식의 대로가 여기서 끝나는 동시에 여기서 시작된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하나의 끈이다. 나머지 모든 교리가 진주알처럼 이 끈에 꿰어져 제자리를 잡고 통일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모든 신앙고백을 재는 다림줄이며 모든 인간적인 가르침을 측정하는 저울이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의 영혼이 인생의 폭풍 속에서 의지할 닻이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청량제이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마음의 감정을 사로잡아 올바른 행동으로 이끈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번영 중에 감사를 역경 중에 인내를 낳는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현재에 대해 위로를 주며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 안정감을 준다.
  •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며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며 훨씬 더 많은 것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을 그에게 합당한 자리인 티끌 가운데 둔다.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좀 더 깊이 생각 해 보자.    

1.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깊이 존숭(尊崇)하게 한다.

성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는 숭고(崇古)한 시각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하나님의 권리는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그릇을 자신이 원하는 용도로 사용될 그릇을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의 권리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이렇게 증언한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비난할 권리가 없으며 인간이 그분 앞에서 취해야하는 적절한 태도는 공손한 복종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을 이해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높은 주권을 올바로 존중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 속에서 절대로 높임을 받지 못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도 합당한 자리에 계시지 못하신다.

2.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측량 못할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다음 몇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더없이 거룩하시지만 악이 자신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적어도 6,000년 동안 마귀가 자신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의 완전한 체현(體現)이지만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지만 수많은 인간이 불 못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다. 이것들은 고도의 신비다. 성경은 이러한 신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인정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3.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하나님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세상의 시작부터 그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 알려졌느니라.”(행 15:18, 한글 킹제임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히”(엡 3:21)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처음부터 목적하셨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완전한 계획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좌절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13:8, KJV직U)이란 말에서 보듯이 인간의 타락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타락 이후 인간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지도 못했다. 시편 기자의 말이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분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 전에 시작되었고 변하지 않고 영원까지 계속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모든 일에 미치며 모든 사건을 주관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행하신다.”(Dr. Rice) 하나님을 거스리는 인간과 마귀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록되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시  99:1)

4.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한다.

은혜(恩惠)란 공로 없이 받는 과분한 호의(好意)다. 은혜는 자격 없고 지옥행이 마땅한 자들에게 또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은혜는 값없이(free) 주어지는 것이며 죄인 중 괴수(魁首)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은혜는 전적으로 주권적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사람들은 불 못에 던져지도록 예정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은혜가 그물처럼 들어와 잃은바 된 인류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끌어내어 헤아리지 못할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영원한 기념비로 삼는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분에 대한 반대를 꺾고, 육신의 생각에서 일어나는 그분에 대한 적대감을 가라앉히며,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로 그분을 사랑하게 만든다.

5.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유일한 참 종교인 기독교의 견고한 기초이다.

이것은 첫 번째 항목에서 다뤘던 내용에 나온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만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자리를 그분에게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주권 교리만이 실천적 종교의 견고한 기초일 수 있다. 하나님은 지존하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敬畏) 해야 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가 주(主)로 인정하고 섬겨야 할 분이라는 것을 인격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조금도 진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며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야 그것은 헛수고다. 하나님 뜻을 알고자 하는 것 외에 성경을 읽는 다른 동기는 모두 이기적이며 부적절하며 무가치하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육신의 무례한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지 않는 기도는 모두 우리의 정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섬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행실에 불과하다. 체험의 종교는 주로 하나님의 뜻을 지각하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실행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는데(롬 8:29 참조) 그 아들의 양식(糧食)은 언제나 자신을 보낸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성도가 자신의 삶에서 그 아들을 실제로 얼마나 본받았는지는 무엇보다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6.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죽은 행실에 의한 구원이라는 이단사설을 거부한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보기에 바르나’ ‘사망’ 이것은 곧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구원이다. 행위에 의한 구원에 대한 믿음은 인간 본성의 공통된 것이다. 이 잘못 된 믿음이 늘 기독교의 몇몇 분야에서 발견되는 큰 형태의 오류만 띠는 것은 아니다. 회개의 개념 즉 ‘죄 때문에 슬퍼하기’라는 개념마저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올바른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동일한 악한 논리의 변종일 뿐이다.  

많은 설교자가 말하듯이 “여러분이 자기 몫을 하면 하나님도그분의 몫을 하실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가증스럽게 변명의 여지없이 부정하는 행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귀한 진리 가운데 하나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이는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힘이 없는 자들을 도우시며 시도하고 또 시도해도 실패만 거듭하는 자들을 도우신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죄인의 구원이 자기 의지(意志)의 행위(行爲)에 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곧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의 또 다른 형태의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인간 의지(意志)의 모든 움직임은 행위이다. 그것은 내게서 나온 그 무엇이며 내가 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악의 뿌리에 도끼를 놓는다. 이 하나님의 주건 교리가 죄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렇게 될 지어다!” 필자는 이런 절망이 널리 퍼지는 것을 보고 싶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에도 절망할 때까지 죄인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성령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 속에 자신의 구원을 도울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하시면 그는 자신이 잃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외치게 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외침을 들으신다. 거듭 말하건대 자신의 전적인 무능(無能)을 깨닫는 것이 확실한 회심(悔心)의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것을 자신 밖에 있는 그 어떤 분을 바라보기 전에는 그 어느 영혼에게도 구원은 없다.  

7.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으로 깊이 겸손하게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는 인간의 교만을 부수는 거대한 파성퇴(破城退, battering ram)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리는 민간의 교훈들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우리 시대의 영(靈)은 본질적으로 육체를 자랑하고 육체를 영광스럽게 하는 영(靈)이다. 인간의 성취, 인간의 발전과 진보, 인간의 위대함과 자기 충족은 오늘날 세상이 예배하는 신전(神殿)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교리와 이 진리가 수반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자기 자랑을 위한 토대를 모두 허물고 그 대신 겸손의 영(靈)을 불어 넣는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에게서 실행되며 하나님에게서 완성된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하나님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적용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이 우리 영혼 속에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완성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끝까지 지키고 인도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해 받으며 우리의 모든 행위(회심 이전의 행위)와 악한 행위뿐 아니라 선한 행위도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 1:13)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자신의 속전(贖錢, 구원을 위한 값)을 조금이라고 내고 싶어 하며 자랑과 자기만족의 근거를 조금이라도 마련하고 싶어 하는 자들의 마음을 더없이 겸손하게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 찬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의 빛 가운데서 자신의 무가치와 무능력을 보았다면 진심으로 시편 기자처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당신께 있습니다.)”(시 87:7)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며 율법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같은 진노에서 구해주실 의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은혜와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녹지 않으며 이것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감사하지 않으며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소리 높여 놀라운 찬양을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가엾은 선택을 하며

잔치에 오지 않고 굶고 있을 때

왜 내게 그분의 음성 들려주시고

아직 자리가 있을 때 들어가게 하시는가?

찬치를 배설한 바로 그 사랑이

우리를 부드럽게 강권하여 들어가게 하시니

그 사랑 아니었다면 여전히 맛보지 못하고

우리는 다 우리의 죄 가운데 죽었으리라.

8.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안전감을 준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하나님의 작정을 능가하여 성취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말이 죄인의 마음에는 두려움으로 채우지만 성도의 마음에는 찬양으로 채운다. 한마디 덧붙여 이 말이 어떤 차이를 낳는지 보자. 나의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히 13:6) 나의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 하리이다.”(시 56:3) 나의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것은 성도들이 갖는 확신의 근원이었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고별 연설을 할 때 느꼈던 확신이 아니었는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여수룬(이스라엘)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6,27) 이것이 시편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다음과 같은 강력한 글을 쓰게 한 안전감이 아니겠는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애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 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시 91:1-7,9,10)

죽음과 재앙이 나를 에워싸나

그분이 명하실 때까지 나 죽지 않겠네

화살 하나도 나를 맞추지 못 하리

사랑의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참으로 귀한 진리이다. 나는 약하고 힘이 없고 어리석은 한 마리 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왜 내가 거기서 안전한가? 나를 붙잡은 손이 하나님의 아들의 손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빼앗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 자신은 힘이 없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연합하여 나를 넘어뜨리려 대적한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보살핌과 지켜주심에 내 자신을 맡기고 사도 바울처럼 말한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내 확신의 기초는 무엇인가? 내가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이 지켜주실 수 있음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이것을 아는 까닭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계 17:14) 때문이다.

9.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가 슬플 때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위로가 넘치고 그리스도인에게 큰 평안을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하는 기초이며 하늘과 땅보다 견고하다.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 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낯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7-12)

하나님의 강한 손이 모든 사람 모든 만물 위에 있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우리가 또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우리의 환난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마귀에게서 오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정하시고 명하신 것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 3:3)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능력만 무한하신 게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와 선하심도 무한하시다. 이 진리의 고귀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선한 것만 뜻하시고 그분의 뜻은 돌이킬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더없이 지혜로우셔서 오류를 범하지 않으시며 더없이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자녀가 헛된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선이시라면 만물이 그분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분의 손에서 그분의 뜻대로 빚어진다는 확신이야말로 얼마나 큰 복인가!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을 빼앗는 자가 마귀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닌가! 우리의 날 수가 그분에게 달렸고(욥 7:1, 14:5 참조), 질병과 죽음이 그분의 사자들이요 언제나 그분의 명령을 받으며 우리에게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우리에게서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다.(욥 1:21 참조) 이런 말을 들을 때 불쌍하고 연약한 우리의 마음이 큰 평안을 얻는다.  

10.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를 하나님께 즐겁게 맡기려는 마음을 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앞에 엎드리는 자세야 말로 평안과 행복을 얻는 큰 비결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심령이 상할 때까지 주님이 우리를 자신의 방식대로 대하시는 것을 우리가 원하고 기대할 때까지는 만족이 동반되는 진정한 복종은 불가능하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권고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룬 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때 우리는 최고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외에 엘리와 욥의 예도 인용했다. 이제 여기에 몇 가지 예를 더 보충하겠다.

레위기 10:3에 ‘아론이 잠잠하니’라는 이상한 말이 나온다. 레위기 10:1-3에 기록된 상황을 보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중략)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을 것이다. 더욱이 아론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두 아들을 잃는 이런 일을 당했다. 그러나 아론은 잠잠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귀한 예이다.

이제 다윗의 입에서 나온 말을 생각해 보자.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 15:25,26)   

여기서 다윗도 인간의 마음에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만났다. 다윗의 마음은 슬픔에 짓눌렸다. 다윗의 아들이 그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그의 생명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예루살렘과 성막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때에 하나님께 완전히 엎드렸으며 자신이 왕좌를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좋으며 그것이 그러하다고 완전히 확신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하시는 데 만족했다.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예를 더 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희미한 구약시대에도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자신에게 그렇게 행하시는 데 만족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으니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훨씬 더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주저 없이 찬양해야 하리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선하지만

그분이 주신 게 아니라면 좋은 것도 악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뿐 뜻이라면

가장 그릇되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옳다.

11.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본질상 무관심하고 경건치 못한 무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 내가 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고 이제 그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는가? 나는 이전에 외인이요 거역하는 자였다. 그런 내가 왜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을 자로 선택되었는가? 아! 나로서는 헤아리지 못할 일이다. 그 놀라운 은혜와 그 놀라운 사랑은 이해를 초월한다. 그러나 내 머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내 마음은 찬양과 경배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또 하나님이 과거 내게 베푸신 은혜만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분이 지금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도 내 마음을 감사로 채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는 사도 바울의 말이 무슨 뜻인가 주목하라.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서 모든 상황의 주인으로서 기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 펀지를 쓸 때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의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는 수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었다. 땅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주림과 목마름, 채찍질과 돌팔매질을 모두 겪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다. 그를 지켜주어야 할 자들이 그를 핍박하고  버렸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편지했다. 그의 평안과 행복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아! 바로 이 사도가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바울은 어떻게 알았으며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 대답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지존하신 주권자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이며 그분은 자기 백성을 향해 오직 사랑만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렇게 정하셨기에 모든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엡 5:20) 그렇다. 누군가 “우리의 실망은 그분의 약속이다.”라고 잘 말했듯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자들이여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염려의 구름이 희망의 천조(天兆) 일뿐 아니라 언제나 희망이며 어둠은 도리어 빛을 더 밝게 할뿐이다.

두려워 떠는 성도들아!

새 용기를 얻어라.

너희가 너무나 무서워하나

저 구름이 자비로 가득하니 깨어져

너희에게 축복으로 쏟아지리라.

12.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악에 대한 선의 최후 승리를 보장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땅에서 선(善)과 악(惡)의 싸움은 성도들에게 늘 고통스러운 문제이다. 시대마다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께 도전했는데도 그런 악인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대다수가 가난했다. 반면에 악인들은 세상에서 푸른 월계수처럼 부유하고 번성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신자들이 억압을 받고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보인다. 신자는 아주 적지만 불신자는 아주 많다. 옳은 자들은 패배하고 불의한 자들은 강하고 승리한다. 전쟁의 함성과 부상자들의 비명과 유족들의 통곡이 들린다.  

하늘 아래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혼란과 무질서와 파괴로 가득하다.

마치 사탄이 전투에서 이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위를 보는 대신 위를 보면 땅의 폭풍에 영항을 받지 않는 보좌 즉 고정되고 안정되며 안전한 보좌가 믿음의 눈에 분명하게 보인다. 그 보좌 위에 그 이름이 전능자이신 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엡  1:11)그분이 앉아 계신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배의 키(helm)가 그분의 손에 있다. 그분은 전능하시기에 그분의 목적은 절대 좌절되지 않는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사나니”(욥 23:13)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의 손은 그분의 말씀을 확실히 신뢰하며 따라서 그분은 실패하실 수 없다고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너무나 생생하다. 다음은 우리 형제 개벨린(A.C. Gaebelein)이 쓴 글이다.

하나님에게는 실패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 곧 와서 그들을 이곳에서 영광으로 옮기시리라는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은 틀림없이 오셔서 이들을 자신에게로 모으실 것이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세상 열방에게 주신 엄숙한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 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 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 지어다!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 당하게 하셨은즉”(사 34:1.2)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사 2:11) 그날도 반드시 올 것이다. 그분이 나타나시며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그분의 발이 다시 이 땅을 밟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분의 나라가 반드시 임할 것이며 종말과 완성의 때와 관련해 약속된 모든 사건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어둡고 견디기 어려운 시대에는 그분이 흔들리지 않는 보좌에 계시며 스스로 말씀하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사 34:16) 복된 기대감을 갖고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이 성취되며 평강의 왕이 오심으로써(사 9:6 참조) 의(義)와 평강이 마침내 도래하는 영광의 순간을 볼 수 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는 최고의 복된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분은 신뢰하며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이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성실히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날마다 발견한다.

13.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우리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준다.

여기서 해야 할 말 가운데 많은 부분을 앞의 항목들을 다룬데서 이미 다 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며 열방의 통치자요 모든 사건을 작정하셨고 지금 주관하시는 분은 능력이 무한할 뿐 아니라 지혜와 선하심도 무한하다. 모든 피조물의 주(主)이신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 난 바 된’(딤전 3:16) 바로 그분이다. 아! 여기 그 어떤 인간의 글로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주제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그분이 지극히 높으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그분이 지극히 겸손한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죄악 된 피조물의 짐을 대신 지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다.(행 20:28) 왕이신 그분의 은혜로운 자기 비하(卑下)를 위에 그분의 나라가 세워진다. 오! 놀라운 십자가여,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분이 우리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공포에 젖어 최고의 주권자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23)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하나님에 대한 잔혹한 허설(虛說)이며 따라서 그분의 백성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는 악한 비난을 잠재운다. 하나님에게 그분의 참된 자리를 드리며, 그분의 권리를 유지하며, 그분의 은혜를 높이며,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며, 피조물이 자랑할 모든 근거를 제거하는 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잔혹하고 위험할 수 있는가? 위험에 처한 성도들에게 안전감을 주며, 슬픔을 당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며, 역경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 인내를 낳으며, 성도들로 늘 찬양하게 하는 이 교리가 잔혹하고 위험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선이 반드시 악을 이긴다는 확신을 주며, 우리의 마음에 확실한 안식처를 주며, 주권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는 교리가 잔혹하고 위험할 수 있는가? 천 번을 물어도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잔혹하고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광스럽고 교훈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모세처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여! 신(神)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 글쓴 이 / 아더 월킹톤 핑크(Arthur Walkington Pink, 1886-1952)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요단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