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47) 제3계명 예배의 핵심

제 36 주일Ⅱ(문 99,100)
요절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23,24)
문 99 :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저주나 위증이나 필요 없는 맹세를 함으로 하나님 이름을 더럽게 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침묵 혹은 묵인 하에 그러한 무서운 죄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종국에 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 분에게 올바르게 고백하며 경배하여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문 100 :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는 그런 저주와 맹세를 막거나 금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진노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죄입니까?
답 :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는 사형으로 처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해설
지난 번 공부에서 제3계명은 ‘예배의 태도’에 관한 명령임을 알았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에서 ‘망령되이’란 말의 의미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여호와의 이름을 우상 섬기듯 ‘헛되게’ 부른다는 뜻이며, 둘째, ‘거짓되게’부른다는 것이며, 셋째, ‘가볍게’ 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바로 우상 숭배를 할 때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우상 숭배하듯 부르는 자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행위들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일까?
1. ‘영과 진리’에 대한 이해
수많은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에 임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는 성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예배장소에 대해 묻는 수가 성 여인에게 예수님은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태도에 대해 잘 가르쳐 주셨다. 요한복음 4:23,24이 그것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예배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서 ‘영과 진리로’란 무슨 의미일까? 과연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 대부분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는 사회자는 이 구절을 읽고 예배를 시작한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사람의 영혼과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하는구나!”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 볼 때 문맥은 그런 인간의 마음과 정성을 요구하는 구절이 아니다.
수가 성 여인이 예수께 한 질문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가?”라는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1,22)고 말씀하셨다.
즉 사마리아 인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있고 유대인들은 알고 예배를 드린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바로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근본임을 주장하시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1) 진리(眞理, truth)
그러므로 이 같은 예수님 말씀에 근거 해 볼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알고 드리는가 모르고 드리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문제이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신실한 마음과 정성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즉 하나님은 영이심을 알고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어떻게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준으로 진리를 삼을 수 있겠는가! 예배의 근본은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누군지를 바르게 알고 드리는 예배이다. 우상숭배자들 역시 진정성을 가지고 진지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다. 문제는 그 예배의 대상을 그들은 모르고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자는 진리 즉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
(2) 영(靈, Pneuma, spirit)
‘영’(靈, spirit)이란 헬라어로 ‘Pneuma’란 단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바람’(wind), ‘혼’(魂, spirit)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때 이 영은 사람의 영혼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하지만 요한복음 3장과 4장의 문맥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고 여겨진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요 3:5)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4장에서 수가 성 여인에게 구원의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영’(靈)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에 대해 가르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신 다른 말로 하면 살아계신 신(神, God)이신 하나님이신 것임을 인식하고 예배에 임하는 것이 예배의 핵심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즉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신신(神, God)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피조물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표현이다. 그 어떤 것으로 만든 우상과 전혀 차원이 다른 위치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란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질 것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라고 가르쳤다. 이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있었던 애급에서 의지했던 그 어떤 신상(神像)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로서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애급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3)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영이신 하나님’이란 표현이 ‘영혼을 가진 사람’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 즉 ‘빛이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屬性, nature)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그 어떤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면 ‘영이신 하나님’이란 말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피조물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신(神)이시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2. 영과 진리로 예배드림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1) 예배드림의 의미 81
예배란 ‘절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듯이 성도가 예배드리는 행위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절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도가 예배드릴 때 어떻게 절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영혼이 절한다.”고 할 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진정성으로 가지고 영혼을 드리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일까?
모든 종교적 행위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주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이러한 세속 종교에서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구별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주님의 이 교훈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은 영이심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단순히 성수주일 하는 데 강조를 둔다든지 그저 예배를 드렸다는 율법적 의식 가운데 예배드림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예배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 예배 자들을 위한 공연(performance)이 되고 콘서트(concert) 장으로 변모한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소위 열린 예배(open worship)라 부르는 이러한 류(類)의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공연장에서 자신의 기분이 좋아진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이 예배 참석의 목적인 듯하다. 과연 이러한 예배나 집회를 주님이 가르치신 바른 예배라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목사들의 잘못 된 설교와 가르침으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에 참석하여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여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곧 예배인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주께서 가르치신 예배의 핵심은 영이신 하나님께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를 통하여 얻은 참된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중심이시고 예배의 대상이신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성도가 인식해야할 가장 중요한 예배의 핵심인 것이다.
(2) ‘곧 이때라.’
올바른 예배 장소에 대해 묻는 수가 성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곧 이 때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제물을 준비하여야 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게 가시적인 제물을 준비하고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즉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성령의 도우시는 대로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한편 이는 이 수가 성의 여인뿐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배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시 종교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혁명적이고 놀라운 예배에 대한 가르침인가!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림의 핵심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럼에도 일부 교회에서는 아직도 교회당(敎會堂)을 성전(聖殿)이라 하고 강단(講壇)을 제단(祭壇)이라고 강조하며 반드시 그 성전에 와서 그 제단에 예물을 드려야만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호도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 되셔서(요 2:21) 이루신 구속의 진리를 알고 믿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찾고 계신다.
3. 바른 예배의 예들
예배에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말씀으로 구성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 바르게 드린 예배의 예들을 성경에서 찾아 보려한다.
(1) 기도와 감사
시편 기자들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확신하고 그 분을 부르며 나아가 절했다. 시편 4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면 반드시 그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그 분께 나가 부르짖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중략)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1,3b)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인식한 성도는 하나님을 찾고(기도) 그 분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이것이 바른 예배인 것이다. 시편 7편의 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17:7)라고 감사하며 찬양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인식하고(진리를 알고) 감사하며 그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생각 속에서 진심으로 구원을 경험한 성도가 드리는 기도와 감사 그리고 찬양이 바로 참된 예배인 것이다. 진정 성도의 예배는 이렇게 구원의 경험한 자 만이 드릴 수 있는 살아있는 예배이다. 이를 경험한 시편 116편의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리고 우리 주님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지고 기도하면 불가능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2) 경배(敬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이 완성된 그 나라에서 천사들과 먼저 구원받은 장로들 그리고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어린양 예수께 1)찬송과 2)경배(敬拜)와 3)영광을 돌리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중략)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2,13 참고 계 4:8,11, 5:9,10, 7:12)
이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을 받을 당시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께 드리는 경배요 예배인 것이다. 이 모두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 드리는 찬양이며 경배요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바른 예배 속에는 바로 1)이러한 구속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2)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께서 이루신 고마운 구원을 성령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찬양하고 3)경배하는 것이 바른 예배인 것이다.
4.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예배
(1) 성령 임재의 예배
오늘날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예배를 강조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 흔히 생각하는 성령집회를 의미하는 것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이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히 2:11,12)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렇게 된 그 배경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즉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고 그 구속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믿게 하시는 역사를 하셨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이 진리를 선포하고 이 놀라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시겠다는 것이다. 바로 바른 예배는 이러한 구원의 진리 과정으로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때 드려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성도의 영적 예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사도 바울이 제시 하는 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른 예배는 영적예배이며 이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마음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여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인간 중심, 감정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예배’로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기도와 감사 그리고 찬양으로 나아가 드리는 예배를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게 된다.
결론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 계명을 어떻게 하면 범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드릴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무조건 아무에게나 명하신 것이 아니라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시내산 밑에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주신 특별한 명령이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법인 것이다. 86
‘여호와’란 이름은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기억하여 찬양하고 그의 이름 앞에 경배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구원자 하나님의 이름을 구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요 바른 도리며 자세인 것이다.
세상에서 신성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읊조리며 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극히 불경스러운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하여 신성한 이름을 상스럽게 사용하는 것인가? 이뿐 아니라 적지 않은 교인들이 기도하면서 마치 노래의 후렴을 하듯이 말이 막히면 하나님 아버지는 반복적으로 의미 없이 부르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그저 기도를 길게 한다. 이것도 별로 바람직 하지 못하다 하겠다.성도는 마땅히 존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예배라는 미명하에 예배를 인간 중심으로 드려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주님께 진리와 영으로 항상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소원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