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62) 용서받은 자의 사죄 간구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2-35)
제51주일(문 126)
요절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문 126 : 다섯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항상 괴롭히는 악을 제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해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구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했으니까 주님도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점에서 126문은 참으로 뛰어난 해설을 담고 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용서 행위를 공로(功勞)로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기초로 한 용서를 구하는 깊은 기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를 드림으로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은혜로운 증거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부패함을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가르침을 주께서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이라고 해서 자기가 용서한 행위를 ‘근거’에 의한 사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께로 부터 받은 ‘은혜의 증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 거듭난 성도라고 하더라도 그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로 인하여 의롭다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法庭的)인 선언(宣言)으로서의 칭의일 뿐임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가운데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항상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사죄(赦罪)를 구하는 것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요리문답 126번의 이러한 가르침은 어떤 영적 교훈을 생각하게 하는가?
1. 부채를 갚지 못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기도하라.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죄 지은 자’라는 표현에서 여기서 말하는 죄(罪)란 부채(負債, debt)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빚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고 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이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이 구절에서 ‘죄 지은 자’(debtor)란 ‘빚을 지다’(to owe, to owe a debt)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죄란 빚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죄와 빚의 차이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행위를 죄라고 한다면, 빚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드리지 못한 상태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빚)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경우가 죄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시간, 재능, 성품,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드리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마 25:14-30)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과 생활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하는 것들, 능력은 있는 데 연마하지 못하여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 세월을 허송하여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빚진 것이며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죄다.
이런 교훈은 주께서 주신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虛浪放蕩)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 15:11,12)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했다. 이 말은 흥청망청 썼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지만 사실은 낭비하는 행위를 뜻한다. 마땅히 사용할 곳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하는 행위가 허랑방탕이다. 바로 이것이 죄다. 허랑방탕 하는 즉 낭비하는(waste) 행위가 죄인 것이다. 그래서 탕자는 다음과 같이 결심하고 결행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빚)를 얻었사오니”(눅 15:17,18) 이 탕자와 같이 우리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며 죄를 지은 것이다.
아담 이후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빚진 상태의 죄책(罪責)이 전가(轉嫁)되었다. 이런 인간의 죄책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어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따라서 죄를 짓는다. 역사는 나치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그럴듯한 이론으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이에 빠진 자들 모두가 비참한 삶을 살게 되고 또한 끔찍한 죄를 짓기도 한다. 부모의 결핍함은 자녀에게 전달되고 자녀의 결핍은 부모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런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통해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래서 이 은혜를 받아 대속의 복음을 믿은 자로서 성도는 마땅히 형제를 용서해야 하고 또한 여전히 죄 가운데 영향을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겸손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죄요, 하나님께 빚진 존재임을 확인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기 마련이다. 또 그들은 이 사실을 깊이 고백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이런 죄 된 자로서의 깊은 인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죄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하고 하나님께 공동체의 죄까지도 연대하여 책임을 갖고 회개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선지자 다니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민족의 죄로 인하여 겪고 있는 비참함을 절감하며 하나님 앞에 긍휼하심과 자비를 간절히 구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義)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다니엘은 자신의 비참함, 가족의 비참함,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과 인류의 죄로 인하여 야기되는 비참함을 인식하고, 이는 하나님께 진 죄의 빚으로 인하여 결과 된 비참함이기에 그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우리도 이 민족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죄를 구해야 할 것이다.
2. 행위의 조건이 아닌 은혜의 증거로 기도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형제를 용서한 그것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같이’라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임금에게 탕감(蕩減) 받은 종’의 경우이다.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탕감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소액(少額)을 빚진 형제를 탕감해 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탕감 받은 것 ‘같이’ 형제를 탕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진노의 심판을 받았다.
한편, 주께서 가르치신 이 사죄를 구하는 기도는 믿는 성도를 향해 가르친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모든 성도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완성하신 대속의 진리를 믿은 자이기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나의 용서행위를 근거로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먼저 예수의 보혈로 용서받은 그 은혜를 근거로 남을 용서해 주고 또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주께로 부터 받은 은혜의 증거를 근거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해야 한다.
사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용서해 줄 수가 없다. 또 용서받는 사람도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앙금이 남게 마련이다. 용서를 베풀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우리라고 하는 인간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고 또 그 은혜의 증거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거짓되고 위선적인 존재라 하겠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있는 성도는 당연히 그 은혜의 증거를 통하여 용서하고 용서받는 삶을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매일매일 반복되고 일상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너무 심각하거나 너무 안일하게 대해서는 안 되겠다. 예를 들어 너무 죄에 깊이 빠져 있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한 수단으로 어떤 극한의 고행을 감행한다면 그는 극복은커녕 오히려 죄에 속박된 상태로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죄를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방종(放縱)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 눌려 살아도 안 되지만 죄를 무시(無視)하고 살아서도 안 된다. 그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사죄해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얻게 된 사죄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며,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은 죄 많은 여인을 사해주신 후 나눈 교제의 장에서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많이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세상 사람들과도 더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3. 공동체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에서 ‘개인’ 혹은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즉 복수를 위한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며 이는 공동체의 기도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우리’란 신자를 의미한다.
그러면 어째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적 차원에서 기도할 것을 교훈하셨을까? 대체적으로 성도가 이 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중 잣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성도가 교회 안에서 죄를 취급하는 방식과 세상의 죄에 대하여 접근하는 좀 방식이 다르다 것을 반영한 것이다. 즉 세상 죄에 대하여서는 세상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방관적 자세를 취하는 반면에 교회 내에서의 죄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신랄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때 대체적으로 교인들은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죄는 성경적인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단호하게 상대를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 가운데는 자신은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려있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죄인 것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6:12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친 반면 마태복음 7장에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함과 함께 자기 교만의 죄까지 저지를 수 있기에 주께서는 ‘우리의 죄‘ 즉 공동체적인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하도록 가르치셨다. 만약 성도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상대를 정죄하는 데 더욱 힘쓴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부채 즉 죄만 더 쌓아가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믿음 공동체 안의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고, 그를 받아 드리고 또 진심으로 품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신다.
4. 일용할 양식을 구함같이 사죄를 구하라.
한편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에 대한 간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배울 것이 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매일 구하는 것처럼 죄의 용서도 매일 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에는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껴 상대를 정죄하기에 바쁘지만 스스로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의 근원적인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즉 주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의 부족과 잘못과 결핍과 죄 그리고 그 구체적인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날마다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날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항상 주께 사죄의 은혜를 구하면서 나아갈 때 우리는 주님과 거룩한 언약의 교제로 들어가고, 타인의 죄를 용서하면서 그들과도 더 긴밀한 사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사죄함을 받고 천국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죄 사함을 ‘천당 가는 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죄 받음을 ‘천당 가는 표’처럼 생각하면 구원 얻은 자로서의 ‘구별된 거룩한 생활’은 있을 수 없다. 기차역에서 목적지로 가는 표를 산 다음에 사람들은 시간이 남으면 영화를 보거나 시장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허비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첫 번째 사죄를 허락하여 ‘천당 가는 표’를 주시고 그 다음에는 너희들끼리 그냥 살다가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또 한 번 회개를 크게 한 후에 천국에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방관적인 자세로 형편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죄가 아니다. 성도의 삶은 죄를 용서를 받은 자로서의 삶으로 그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사죄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죄함을 받은 성도의 모습일 것이다
또 주께서는 교회를 점이나 흠이 없는 정결한 신부로 단장하도록 해 주신다. 주께서는 우리를 매일 매일 정결케 씻겨 주시기 원하신다. (엡 5:25) 주께서는 매일 매일 주께 나아오면 계속하여 더 깨끗하게 씻어 주신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구속의 진리를 믿게 해 주신 주께서는 그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하나님께 육신이 먹고 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매일 죄 사함을 구하면서 주께 나아오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역시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하늘의 천사들도 그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듯이 그 거룩한 엄위 앞에 사람은 도무지 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깨닫게 마련임을 보여준 말씀(사 6:1-7)에서 확인된다. 이는 고백 공동체인 교회가 공동으로 매번 모일 때 마다 사죄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교훈한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주님과 거룩한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도록 하시려고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악인들은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기를 힘쓰며, 작게 보이는 죄에 대해서도 진실하게 고하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경건한 삶의 비결인 것이다.
5.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
그런데 오늘날 이런 ‘주님의 기도’의 교훈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사이비 집단이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소위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은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았기에 다시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여러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지만 네 가지를 들어 반박할 수 있다.
첫째, 주께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둘째,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와 대화 하시면서(요 13:4-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시며 목욕하여 깨끗해진 사람도 밖에 다니며 더러워진 발은 씻어야 한다고 지적 회개의 필요성을 암시하셨다는 점이다,
셋째, 비록 거듭난 성도라고 하더라도 죄의 세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9-25에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절규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이 비록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삶 속에서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넷째, 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이다.
칭의는 우리의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의 대속의 피로 덮어서 없는 것으로 여겨주시겠다는 법정적(法廷的) 선언(宣言)이다.
결론
‘용서’(容恕)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은 누구나 절감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빚을 만들기도 하고 또한 빚을 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용서를 주고받는 삶의 상황들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의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 주시며 해결해 주신 사실을 믿어서 하나님께 빚진 자가 되었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이나 빚을 진 자들에게 용서와 탕감을 베푸는 아량과 마음 씀씀이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써야겠다.
이제 다시 한 번 더 우리 주께서 이 교훈하셨음을 상기하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참된 용서와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용서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