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한국교회선교의 과거를 돌아본다

PART Ⅰ

한국교회의 선교역사  

시작하는 말  

성경 해석이나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세속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선교’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할 때 무엇보다 선교의 두 가지 측면 즉 피선교국으로서의 한국교회와 선교국으로서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역사 속에서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급성장과 부흥의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 역사를 일정한 사관(史觀)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개괄하면서 정리한 첫 번째 학자는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사이다. 그를 중심 한 인물들은 주로 초기 ‘선교사’ 중심의 교회사를 서술했고 또 민경배 교수 등은 민족주의적 입장의 교회사, 오윤태, 김광수, 송길섭 교수 등은 민중사관에 의한 교회사 등의 분야들이 연구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근자에 이르면서 보다 통전적(通典的)이며 포괄적 의미의 교회사 서술이 시도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사의 제3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사 연구회’는 한국기독교의 어제와 오늘은 어느 한쪽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면 참 면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사관을 설정하기보다는 우선 기독교사의 사실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과 정리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는 부류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이만열 교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적이고 총괄적인 시각을 감안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 그리고 복음 선포를 위해서 수고한 여러 사역자들의 대가를 지불한 헌신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한국교회 선교의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Ⅰ. 한국개신교 초기 선교역(1626-1884)

백낙준 박사는 197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선교사관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사(基督敎史)는 그 본질에서 선교역사(宣敎歷史)이다. 또한 기독교사는 반드시 선교역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 사상의 한 중간적인 존재이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종(自初至終) 선교사(宣敎史)로 일관되어 왔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개신교사도 선교사(宣敎史)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宣敎史)를 외인 선교사(宣敎史)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2천년사의 교회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교회의 전도활동에 있었고 전도활동은 신도들의 신앙허실에 좌우되어 왔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이다.”(한국개신교사 p,ⅴ-ⅵ)

이상의 언급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선교사(宣敎史)의 과정에서 보는 한국의 선교사(宣敎史)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계속되어 온 세계의 선교사(宣敎史)의 맥락 속에서 한국 기독교사를 헤아릴 수 있다는 지적과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단순히 선교사(宣敎史)를 외인 선교사(宣敎史)에 의한 피(被) 선교과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모순 된 듯도 하지만 초기의 기독교사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이 된다.  

즉 한국개신교의 초기역사는 무엇보다도 순교를 각오한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한 보냄을 받은 선교사(宣敎師)들의 헌신적 복음 선포의 열심에 크게 빚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개신교회의 시작은 이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으로 돌아서는 면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복음과 한국과의 최초의 접촉(1626)

한국과 복음과의 최초 접촉은 1626년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Jan Janse de Weltevree, 1595–?, 한국명 박연)를 통해서였다. 그는 일본으로 항해 도중 표류하여 경주에 상륙했다가 붙잡혀 조선 수군(水軍)의 고급 장교가 되었다. 그의 개신교 신앙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최초로 한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그 뒤 26년 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을 통해서 복음이 한국에 전해 졌다.

1816년 영국 군함 알세스토(Alceste)호의 함장 맥스웰(Murray Maxwell, 1775-1831)과 리라(Lyra)호의 함장 버질 홀(Basil Hall, 1788– 1844)과의 접촉에서 조대복(趙大福)에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경이 주어졌다. 그 후 독일 선교사 칼 구츠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목사가 1832년에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 해 한국에까지 와서 항해도 장연 지역에서 통상을 요구하고 또 충청도 홍주만의 원산도에 정박하여 지방관을 통해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떻든 한국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 날이 오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1865년 9월에 영국 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런던선교회)는 월리암슨(Alexander Willamson)의 주선으로 1차로 항해도 장연 소래마을에 도착한 그는 서울까지 가려 했으나 도중 폭우로 인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66년 다시 무장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에 승선하여 대동강을 거쳐 평양까지 와서 안타깝게도 그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1867년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후원자인 월리암슨 등에 의하여 한국과 선교적인 접촉이 시도되었다.

한국 최초의 외국 선교사로 순교한 토마스 목사(26세)

  민영익과의 대화에 감명을 받은 가우처 목사는 곧 감리교 본부와 일본 주재 선교사 맥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에게 한국답사를 부탁하고 기쁨으로 한국답사를  3개월간 가진 맥레이는 선교본부에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선교사역 착수를 희망하는 의견서를 제출한다.

이런 노력이 주효하여 1884년 9월 22일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최초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교단 선교사로 파송 받은 선교사는 장로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였다. 이 두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함께 인천항에 상륙함으로 한국선교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었다.

(2) 한국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의 접촉

  • 만주지역에서의 접촉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목사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1836–1905) 목사는 중국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다. 당시의 조선국이 쇄국정치를 하던 대원군 시대이기에 한국선교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전에 조선인들을 통해 성경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 들어오는 동지사(冬至使)들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어 그들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데, 1874년 당시 한약장사로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거친 바람에 배가 파선되어 살길이 막막한 의주출신의 이응찬(李應贊)을 로스 선교사의 조수인 중국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사지(死地)에서 이응찬을 살려 그를 한국인 최초의 신자로 만드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한국선교의 밑거름을 삼으셨다. 이것은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 지 8년 만에 의주(義州) 땅에서 복음의 꽃이 피게 된 것이다. 의주로 돌아온 이응찬의 전도로 백홍준(白鴻俊)이 예수를 믿어 순교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기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 되었고 만주를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서상륜(徐相崙, 1849-1925), 서경조(徐景祚, 1852- 1938) 형제는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로스 목사의 간호로 낫게 되고 그 이듬해인 1879년에 세례를 받고 백홍준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에 참여하게 된다.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3년에 ‘사도행전’이 나왔다. 그리고 신약 전부가 간행된 것은 4년 뒤인 1887년이다. 이것을 흔히 로스 역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서상륜 번역 성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일본에서의 접촉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준비하고 계셨음을 볼 수 있다. 만주에서 성경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한국선교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1881년 고종의 명을 받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안종수(安宗洙, 1859-1896)는 일본 농학계의 유명한 쯔다센(律田仙)으로부터 농학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복음을 접하는데 특히 쯔다센의 서재에 걸린 족자의 산상수훈은 마음에 와 닿는 그 무엇을 느꼈다.  

귀국 후 그는 친구인 이수정(李樹廷, 1842-1886)에게 쯔다센을 꼭 만나라고 한다. 이수정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때 고종의 왕비 민 씨를 구해준 공으로 1882년 40세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일행으로 유학겸 수행원으로 가게 된다. 도착 즉시 안종수가 소개해준 쯔다센을 만나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물로 받은 한문성경에 크게 감동을 받고 성경공부와 함께 신앙고백을 하고 미국인 선교사 녹스(G.W. Knox)에게 1883년 4월 세례를 받았다. 수세 후 그는 전공인 농학보다 성경공부에 열중했으며 그를 만난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는 그의 높은 학문을 통해 한국어 성경번역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다.

복음을 접하고 확신 있는 믿음으로 준비된 이수정은 성경이 철도, 전기, 기선보다 조선에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성경 번역이 이후 한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에게 준비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번역에 임하는데 그로부터 1년 뒤인 1883년에 토를 단 한문성경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출간 된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일본을 거쳐 우리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데 몇 달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웠고 언더우드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9

  • 한미(韓美) 조약 체결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년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이다. 결국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에서 수호조약을 맺게 되고 쇄국정책을 종식된다. 일본과의 조약으로 국가들 간의 조약이 뒤따르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조약을 맺게 된 것은 미국이다. 1880년 4월에 한국 대표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미국의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1-1895)간에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이 체결된다.

1883년에 이 조약에 따른 비준서가 교환되었는데 이때 미국의 비준서를 가지고 온 특사가 푸트(Lucius Harwood Foote, 1826- 1913)였다. 미국은 초대공사를 파견하고 공사관을 설치하였는데 우리는 경험과 국력의 미약으로 잘 대처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푸트의 권유로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특명전권공사로 하고 대리공사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을 파견하였는데 1883년 9월에 미국대통령을 접견 하고 기차 편으로 대륙을 횡단했는데 그 때 기차 안에서 한국선교에 빼놓을 수 없는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목사를 만난다.

Ⅱ. 초기 조선 선교사들의 선교활동(1885-1906)

한국 교회사와 세계 선교사에 있어 가장 감동적인 사실의 하나는 한국은 분명 순교자들의 선교지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한국으로 파송된다는 것은 순교를 위한 파송과 같았다. 구한말(舊韓末)의 불안한 정치상황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차례 천주교에 대한 사화(史禍)들을 경험했고 개신교 선교사로 런던 회중교회 토마스 목사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 강변에서 1866년 8월 31일 제너럴셔먼호의 좌초와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했던 미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 감리회의 아펜젤러 선교사는 이러한 순교의 위협을 부활의 승리로 이겨내기를 비는 소감을 피력한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조선에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이들은 그들보다 조금 전후로 한국에 들어온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스크랜톤(Mary F. Scranton, 1832-1909), 헤론(John W. Heron, 1856-1890) 등과 한국 개신교사에 최초의 선교사들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 후 계속해서 영국성공회(1887), 오스트리아장로교회(1891), 캐나다장로교회(1898) 등의 여러 교파들의 선교활동이 시작된다.

동시에 한국 개신교사의 특징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서구의 구도자들에 의해 복음이 수용되어 이미 상당수의 수세(受洗) 자들과 기독교 구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로 시작되었다. 이런 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백은 솔직한 것이다.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1) 초기의 선교활동

  • 의료와 교육선교

 의료선교 :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주된 사역은 직접 전도나 설교(preaching) 등에 의한 복음전파 방식과 함께 의료선교와 교육사업 등이었다. 1884년 7월의 고종의 선교 윤허(允許)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만 국한시켰다. 적극적인 선교활동은 조선정부의 태도와 사회 전반의 보수적 분위기로 어려웠으며 그래서 초기선교는 직접 선교보다는 학교와 병원 사역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의료선교는 이런 정황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다. 1883년 미국 공사관 설치와 함께 1884년에 미국 공사관이 중심으로 서양인 의사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상해에 있던 알렌이 친구의 권유로 지원하게 되었다. 알렌은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22일에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알렌 자신은 미국 공사관 의사의 자격이지만 미국의 북장로교 입장에서는 조선에 파송한 선교사 자격이었다.

알렌이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이 일어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크게 부상을 입는데 서울 장안의 유명한 한의 14명이 흐르는 피도 멈추지 못했는데 죽게 된 민영익을 알렌이 정성 다해 치료한 결과 3개월 만에 완쾌된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고 정변 때 죽은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하게 했다. 이 병원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다. 후에 고종은 이 병원을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제중원이 개원되면서 1885년 의료선교사로 입국한 미 감리교의 스크랜톤과 장로교의 헤론이 외래환자를 진료하였다. 1887년 개조해서 쓰던 홍영식의 집을 미 북장로교에서 구리개로 옮겨 진료를 하였으며 그 후 1894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의 실업가인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1838-1913)가 거금을 희사함으로 남대문 밖 지금의 서울역 앞에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세브란스병원의 전신(前身)이다.

그러나 초기 의료선교는 어려움이 많았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치료소는 환자들로 가득했으며 알렌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와서 약국 일을 도와주고 헤론과 스크랜톤이 가담을 했으나 모자라는 약품과 의료재료들은 어쩔 수 없었다. 1885년 제중원에서 진료하던 스크랜톤이 9월에 나가서 정동에서 민간인 진료소를 개원하고 이 병원의 간판을 ‘시병원(施病院, 1887년 4월)’이라고 했다. 이 병원을 통하여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1886년 미 북장로교의 여자 의사인 엘라즈(A. Ellers)가 입국하여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녀자들을 돌보고 치료하였다. 그 뒤 여자들만의 병원도 생겨나게 되는데 1887년 10월에 하워드(Howard)가 내한하여 시병원에서 일하다가 1888년 정동에 여자들만을 위한 병원을 세워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 칭하고 여성들의 치료에 전념하게 된다. 이 같은 치료소가 서울에 여러 곳 개설되고 지방에도 병원이 늘어나는데 이 병원들이 조선선교 전진기지로서 역할이 막중했다.  

 교육선교 : 학교를 통한 교육(敎育) 선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알렌이 공적 신분이 의사(醫師)였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사(敎師)였다. 선교에 있어서 의료와 교육은 전초작업의 두 축이나 다름이 없다. 의료가 질병에 걸린 사람을 상대한다면 교육은 배우지 못한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포괄하는 큰 밭이기도 하다.

1885년 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에서 진료하며 2,3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모두가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었다. 어떻든 맨 먼저 학교의 형태로 교육을 시작한 것은 언더우드였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들을 모아 수용함으로서 자연히 고아원이 되었다.

1886년 2월 정부의 허가를 얻어 조그마한 집에서 고아원을 시작 했고 언더우드는 이 고아원이 장차 대학과 신학교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그의 친구 헐버트에게 술회한 적이 있다. 발전하면서 ‘언더우드 학당’, ‘예수교 학당’, ‘민노아 학당’ 등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마지막에는 오늘의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 경신학교(1905)로 바뀌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네비우스 정책을 채택하면서 일단 문을 닫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일하는 실업학교로 변하게 된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1886년 6월 8일 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로 시작한다. 이것이 근대 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이 학교가 문을 열자 불과 5개월 만에 32명의 학생들이 몰려 들어왔고 이들의 관심은 종교보다는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현실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여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같은 무렵 여학교도 시작되었다. 1886년 5월 31일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이화학당(梨花學堂)과 1887년 6월 엘리즈에 의해 시작된 정동여학당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도 선교부와 지역교인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늘어났다. 대표적 지방의 기독교 학교는 다음과 같다. 평양에 숭실학교(1894, 북장), 숭의여학교(1903, 북장), 광성학교(1894, 미감), 정의여학교(1899, 미감), 대구에 계성학교(1906, 북장), 신명여학교(1903, 북장), 광주에 숭일학교(1907, 남장), 수피아여학교(1908,남장) 등이다.

이런 의료와 교육 선교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사라졌지만 간혹 선교 방법에 있어 선교사들 간에 의견차이가 있었다. 알렌은 이런 정황에서 바로 전도행위를 한다는 것은 경거망동한 몰지각한 행동으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언더우드 등은 입국 즉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직접 지방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준비와 이들의 노력으로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 한국의 개신교 성도는 10만 명이 넘었다.

  •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한국선교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 발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국내로 유입이 되어 읽혀졌으며 그 결과 상당수의 구도자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 사업과 함께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은 성경번역이었다. 이 일은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던 어학선생이나 조사들과 공동 작업이 이루어 졌다.

우선은 일본이나 만주에서 이미 번역된 성경들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번역상의 오류와 평안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개정작업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 성경번역을 제일 먼저 실행에 옮긴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중국어 단어들로 가득 차 있고 (중략) 형편없는 철자와 형편없는 인쇄 때문에 처음부터 번역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887년 1차로 ‘마가복음’ 번역이 끝나고 곧 출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마가복음’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에 체제하고 있을 때 주일(駐日) 미국성서공회 총무 헵번(J.C. Hepburn, 1815-1911)의 충고로 1887년 조선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는데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이 선임되었다. 성경번역은 철저한 심의 과정을 거쳤다.

첫째, 선교사들과 조사(助事)들이 먼저 번역하고,

둘째,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여 그들의 견해를 듣고 수정하고,

셋째, 다시 다른 번역자들이 읽고 의견을 개진한 다음,

넷째, 위원회에서 한 절씩 읽어 가면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있을 때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짓는다.

이 같은 세심한 과정을 거치게 하는 원칙을 정하고(1890) 번역에 임했다. 번역위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892년 ‘마태복음전’이 나왔고 1900년 신약성경 전부가 번역되어 시험역본이 출판되었다. 시험역본을 거쳐 1904년 1차 개정본이 나오고 1906년에 비로소 오늘과 같은 공인역본 ‘신약전서’가 나왔다. 계속되는 번역으로 1910년에 구약번역이 완료되었고 이 신구약 성경을 흔히 ‘구역(舊譯)성서’라 부르는데 이는 1937년에 나온 ‘개역(改譯)성서’에 견주어 붙인 칭호다.

기독교의 경전(經典)은 성경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배나 기타 개인의 신앙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찬송가(讚頌歌)다. 따라서 성경이 출판되면서 찬송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고 이 일을 제일 먼저 착안해 한글 찬송가를 편찬한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와 로드와일러(L.C. Rothweiler)이다. 이들은 1892년에 ‘찬미가’(讚美歌)로 편집 출판했다. 후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공동으로 쓸 찬송가를 존스와 언더우드에게 맡겨 편집토록 결정하였는데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후 존스가 안식년으로 귀국하면서 언더우드가 혼자서 맡아 어려운 중에도 전념하면서 1893년 ‘찬양가’(讚揚歌)가 출판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4성부의 악보가 포함되었다. 찬송가와 함께 기타 교리문서와 기독교 간행물도 나왔다.

(2) 선교정책

  • 연합 선교활동

한국에 전파 된 기독교가 선교사에 따라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인 배경을 가진 교회였으므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연합함으로 공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선교사 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이었다. 이 일은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1889년 미 북장로교와 호주 빅토리아선교회 간에 ‘장로교 선교연합공의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1년 후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실상 해체되고 미국 남장로교의 도착으로 1893년 재조직이 되어 ‘장로회교의회’라 하였다.  

후에 호주 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가입을 하는데 이 조직의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장로교회의 정치형태를 갖는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처음의 기구는 협의체에 불과하다가 1901년 한국의 대표들이 참여하면서 1907년 노회조직 전까지 실질적인 장로교 치리회로 유일한 기구였다. 이 공의회가 한 일 중 중요한 것은 조선 선교지역 분할이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주축으로 한국에 맞는 선교세칙을 만든 일이었다.

  • 선교지역 분할

한 나라에 여러 교파의 선교부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미리 막기 위해 각 교파 선교회간에 지역분할이 추진되었다. 이 협정의 근본 목적은 선교사역의 중첩을 피하고 돈, 시간,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선교지 분할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서 처음으로 이루어 졌다.

1893년 공의회에서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남장로회는 한반도의 서남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게 되고, 1898년에는 북장로회와 캐나다장로회간의 협정이 이루어져 북장로회로부터 함남의 원산지역을 양도받았다. 캐나다장로회는 이곳을 기점으로 함경도지역을 담당하고, 1909년에는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그때까지 부산에서 활약하던 북장로회가 호주장로회에게 양도하고 떠났다. 이로써 호주장로회가 부산을 근거로 하여 경안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삼게 된다.

서울과 평양과 원산이 세 도시는 두 개 이상의 선교회가 공동으로 점유하여 선교한 곳이며 다른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여 분할하였다. 지방별로 대분하면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의 중부지역은 남,북감리회와 남,북장로회가 중복을 피하여 분할 담당하였고 평안도, 항해도 지역은 북장로회와 미감리회가, 함경도는 캐나다장로회가, 경북지역은 북장로회가, 경남지역은 호주장로회가 호남지방은 남장로회가 각각 맡았다.

분할하여 선교 지를 담당함으로 마찰과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지만 교파적 교회로 정착된 한국 교회가 다시 교회 안에서 선교부의 배경에 따라 세분이 되는 분파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노골화된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또 지역분할이 장,감리회의 6개 선교회 주동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교파와 선교회들이 참여하지 못해 선교지 모색에서 구세군, 성공회, 성결교회 등이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
John Livingston Nevius(1829-1893)

한국의 초기 개신교 선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선교정책을 이루고 있었던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내용은 네비우스 자신이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정리한 선교지에서의 선교 착수, 새신자관리, 신앙공동체 관리, 교인 훈련과 교육, 사경회, 신조와 교리, 교회규칙, 교회조직, 타교파와의 관계, 학교와 의료사업, 타종교와의 관계, 교인들의 경제생활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선교학적인 정리가 주요 내용이었다. 이들 중 주로 한국에서 절실히 필요한 4가지 정도의 선교방법을 받아 들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자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형편에 거하게’하며 각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되어 이웃들 속에 살면서 스스로 생업을 꾸려 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친다.

둘째, 교회 운영방법이나 조직을 토착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 스스로가 가능한 한 인력과 재정을 충당하게 하여 이웃 속에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되 좀 더 나은 자질이 발견된 사람은 별도로 둔다.

넷째, 본토인들로 자기네 교회당 건물을 마련하게 하되 그 건물은 토착적인 것이어야 하고 지역교회를 능히 꾸밀 수 있는 그런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이 같은 네비우스선교 기본정책은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 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 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의 3대 명제로 정리된다.

해외선교에 가장 중요한 궁극적 목표는 원주민에 의한 원주민 교회 설립이다. 지금 일부 한국교회는 선교지에 무조건 돈만 보내면 선교가 된 줄로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는 서구 교회로부터 ‘원주민에 의한, 원주민 교회’라는 자립선교를 배웠고 실천해 왔다. 이 자립선교원리는 19세기에 발달하여 영국의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미국의 루프스 엔더슨(Rufus Anderson, 1796-1880)에 의해 주창되고 이 원리를 한국에 도입한 사람은 네비우스이 선교사이다.

Ⅲ.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1907-1918)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과 성장은 기본적으로 위에 언급한 선교정책과 부흥 결과 생겨난 전도의 열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네비우스 정책 결과 한국교회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자치(自治, self-governing), 자전(自傳, self-propagating)의 삼자원칙(三自原則, the three-selfs principle)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이런 원칙에서 자란 새로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선교의 열정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신자들의 전도열은 한국교회와 같이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고도화되어 있었다.”고 백낙준 박사는 회고한다. “북 구주 각국의 기독교화는 4세기를 요했다. 그리고 (중략) 그 다음이 약 400년을 지나는 동안에도 외지에 전도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고 서구의 교회에 대해 모레(E.C. Moore)는 지적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전수(傳受, 전해 받음)와 전수(傳授, 전해 줌)가 병행되었다는 것이다.

또 게일 선교사는 “말로 알리고 마음으로 전하여 복음이 북으로는 멀리 만주와 두만강 유역까지 남으로는 해변 도서를 건너 다도해 벽촌에까지 전국 동서각지에 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초기 한국교회를 회상했다.(J.S. Gale, Korea in Transition, p.191) 이런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역에 있어 가장 큰 민족의 과제는 당시 일제(日帝)의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민족 독립운동의 목표를 지니고 입교했으며 실제로 초기 한국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産室)이 되기도 했다.

(1) 1907년 대부흥운동

사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진원지 장대현교회, 지금은 옛 교회 자리에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

1907년 1월에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큰 획을 그은 운동이었는데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 기간 중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03년 시작된 선교사 기도회가 출발이었다. 선교사 기도회를 중국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화이트 여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가졌으며 이 모임은 곧 장로교와 함께 연합기도회로 발전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은 강원도 일대에서 의료사역을 하던 하디(R.A. Hardie, 1865-1949) 선교사의 통회자복이었다. 그는 기도회 중 3년간 아무런 결실이 없는 자신의 무능을 솔직히 고백하며 한국인들 앞에 가졌던 자신의 백인으로서의 우월감과 자만감에 찼던 권위주의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런 하디 선교사의 회개는 기도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큰 감화를 주었으며 하디 선교사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이 한 선교사의 회개의 기도가 발단이 되어 평양일대와 전국 각지로 회개운동과 함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원산에서 시작된 선교사 중심 기도회의 성령의 역사는 1905년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을 했고 이 부흥의 열기는 전라도 목포까지 전해져 다투어 통회하고 자복하는 소리와 부흥은 계속되었다. 1,500여 명이 모인 첫날모임에 참석한 정익로 장로의 술회는 다음과 같다. “그 날 밤 길선주 목사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중략)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2) 백만 명 구령운동(救靈運動)

이 운동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쇠잔해 지는 것을 되살려 보려는 운동으로 출발한다. ‘백만 인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 아래 시도된 전도운동이었다. 백만 인 구령운동에서 특이할만한 것은 독특한 전도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른바 ‘날 연보’(日 捐補, Day-offering)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날 연보’란 전도를 위해 물질보다는 자신의 시간을  연보(捐補)한다는 것이다. 즉 일주일 가운데 하루나 이틀을 전도운동에 참여하게 하자 많은 교인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양에서 1천명의 신자가 연 2만 2천 일(日)을 ‘날 연보’하였으며 이렇게 전도운동 기간에 전국적으로 바쳐진 ‘총 연보일’(總捐補日)이 무려 10만 일(日)이 넘었다.

(3) 디아스포라 선교

한국인들이 바다 건너 외국으로 집단 이민(移民)을 한 첫 번째 예는 1902년의 하와이 이민이다. 이 농업이민은 미국인 데슐러(David W. Desher)의 동서개발공사와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주한 미국공사관, 존스가 담임했던 인천내리교회 등이 주도로 이루어 졌다. 인천 내리교회 교인 50명을 포함한 1차 이민단 121명이 하와이로 떠났는데 인솔 책임자 장경화, 통역 안정수는 물론이고 이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당시 신학생인 홍승하 전도사가 함께 떠났다. 홍승하 전도사는 전도와 목회를 위해 해외에 파송된 첫 목회자가 된 셈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분산되었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이민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1905년이 되기 전 호놀룰루, 에봐, 와일루크, 힐로, 구후쿠, 리후에 코할라, 목골리아 등지에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한인교회를 지도한 목회자로는 안정수, 홍승하를 비롯해 우병길, 현순, 홍치범, 민찬호, 이경직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은 순탄하지 않았다. 농장주인은 한국 이민자들을 노예처럼 다루었고 기후와 풍토병으로 사람들은 죽었다. 이런  실상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1905년 하와이 이민은 중단이 되었고 이민자들이 이민을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미국 본토로 가서 다른 기회를 찾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 중심의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미국 본토의 한인교회로는 로벗슨교회(1904년 설립), 샌프란시스코 연합교회(1906년), 업랜드 한인선교회(1907년) 등이 초창기의 교회이고 이들 교회를 창설하거나 지도한 목회자들은 문경호, 민창호, 윤병구를 비롯한 유학 목적으로 한국에서 직접 온 양주삼, 방화중, 신흥우, 황사용, 임종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멕시코와 쿠바에도 한국인 이민이 이루어 졌고 거기도 한인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4) 교회의 조직과 최초의 선교사 파송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이 무렵 장로교신학교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경사를 맞는다. 이 장로교신학교는 1901년 마펫(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선교사가 자기 집 사랑방에서 김종섭, 방기창 두 청년을 데리고 신학공부를 시작한데서 효시가 된다. 첫 졸업생으로는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이었다. 그리고 한인 목회자 중심의 교회와 교회조직을 바탕으로 다시금 교회부흥운동이 추진되었으며 한국교회의 조직과 정비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독노회 조직과 첫 선교사 파송

1907년에 한국교회 최초의 노회가 조직이 되었는데 노회가 하난 뿐이기에 ‘독노회’(獨老會)라 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독노회 조직과 함께 “선교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말에 따라 새로 설립된 노회에 전도부를 두어 전도에 박차를 가하기로 하고 그 첫 사업으로 평양신학교 첫 졸업 7인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李基豊, 1868-1942)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다.    

노회가 2년 후에 최관흘(崔寬屹, 1877-?)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한석진(韓錫晋, 1868-1939) 목사를 일본에 성교사로 파송하고 평양 여전도회에서는 이관선을 제주도에 5년간 파송 전도케 했다. 이어서 1909년에 시작한 100만 명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김영제(金永濟) 목사를 북간도에 김진근 목사를 서간도에 파송했고 구미지역 즉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사는 동포를 위해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였다.

  • 총회조직과 해외선교사 파송

1907년 독노회가 창립된 이래로 교회는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갔다. 1911년에 전국에 7개 노회가 조직되고 총회 창립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912년 9월 1일 오전 9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대로는 외국목사 44명, 조선목사 52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였고 회장으로는 언더우드, 부회장에는 대 부흥운동의 기수인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때 열린 총회에서 공자의 고향인 중국의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그 중요한 출발은 큰 고역을 겪었다. 3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들은 중국교회와 먼저 현지에 와서 사역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먼 오지로 보내져 사병순 선교사는 병사했고, 김영훈 선교사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박태로 선교사는 귀국을 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방효원 목사를 주축으로 한 조사단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이 조사단 보고서에는 그들 사역을 평가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한국선교사들이 중국교회와 현지에서 사역하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사전 협의가 없이 파송되었고,    

둘째,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이 사역지에 대한 사전 훈련이 없이 파송되었고,

셋째, 선교지 선정에 대한 사전 조사가 없었으므로 그 선정에 실수하였다고 싣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조사단 대표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방효원 목사는 스스로 1917년 다른 몇 명의 사역자들과 함께 전임 선교사들이 실패했던 산동지역으로 다시 갔고, 20년 후에는 그 아들도 오게 하였으니 이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남아 1957년 8월까지 사역한 방지일 목사(方之日, 1911-2014, 전 서울 영등포교회 원로목사)이다. 이들은 1942년까지 35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1,71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2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빛나는 선교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5) 기독교 민족운동

일제(日帝)가 한국에 편 종교정책 특히 기독교정책은 줄기차게 탄압과 박멸로서 일관되었다. 세계사적인 배경 하에서 보면 아시아지역에 전파된 기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본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의해,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국에 의해,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민지의 과정은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비(非) 기독교 국가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의 경우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될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의 사회적인 기능은 초기에 정치 외적인 사회와 문화적인 방면의 변혁(變革)의 주체로서 봉건성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항일(抗日)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한 시기는 1905년 을사 5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강탈당하던 제1시기, 사실상의 주권상실을 의미하는 정미 7조약이 체결되던 1907년까지의 제2시기, 1910년에 일제에 강토가 합병되던 제3시기 등 3단계로 추진이 되었다.  

(6) 105인 사건

1911년 일제(日帝)가 왜 ‘105인 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음모를 꾸미게 되었는지 그 배경은 기독교가 일제의 한국식민지 통치에 가장 장애가 되는 집단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 세력이 가장 큰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교계 지도자들을 초전에 억압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일제는 ‘합법성’(合法性)을 가장하기 위한 기독교인 탄압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造作)한 것이다.

이 105인 사건의 공식명칭은 ‘데라우찌 총독 모살 미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105인 사건’이라 함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 끝에 1심에서 유죄선교를 받은 사람이 105인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로를 통해 일제는 비밀결사(祕密決死)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결성한 신민회(新民會)의 실체를 파악했다. 그리고 일제(日帝)가 만든 각본에 따라 조작된 것이기에 증거가 없었으며 고문에 못이긴 사람들이 허위자백을 해야만 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무려 72종에 달한다. 당시 학생으로 고문을 직접 당했던 선우훈은 ‘민족의 고난’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두 손가락 사이에 쇳대를 끼우고 손끝을 단단히 달아맨 후 위에 높이 달아매고 줄을 잡아 당겼다. 온 몸이 저리고 쏘고 (중략)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는 불길이 확확 올라왔다. 독사 같은 형리들이 줄을 잡아당기니 손과 팔이 다 떨어지는 것 같고 쇳대에 잘린 손가락은 뼈가 드러났고 피는 온 몸을 적셨다. (중략) 혹한 삭풍에 몸은 얼기 시작했고 (중략) 부젓갈을 달궈 내 다리를 지졌다. (중략) 담배 불로 얼굴을 지졌다. (중략) 머리털을 잡아 이리저리 질질 끌고…”

Ⅳ. 근세 한국교회 수난기와 선교역사(1919-1944)

1919년 3.1운동(또는 만세운동)을 시점으로 하여 한국교회의 양상은 초기의 국면을 벗어나면서 일제(日帝) 통치하의 수난시대(受難時代)를 맞는다. 3.1운동은 일제(日帝)의 주권침탈(主權侵奪)과 무력강점(武力强占)으로 인해 형성된 민족적인 수난을 벗어나기 위해 전 민족이 독립적 역량을 발휘해 일으킨 항일(抗日) 독립투쟁(獨立鬪爭)이었다.  

한국기독교는 복음 초기부터 일제(日帝)의 침략에 대한 저항세력(抵抗勢力)으로 위상을 구축했다. 그로 인한 교회가 피해도 막심했으나 기독교는 3.1운동의 참여로 ‘민족의 종교’로 자리를 매길 수 있었다. 3.1운동을 통해 장로교가 입은 피해만도 다음과 같다. 체포된 자 3,804명, 체포된 목사, 장로 134명, 기타 기독교 지도자로 체포된 자 202명, 감금된 남자 신자 2,125명, 감금된 여자 신자 531명, 매 맞고 방면된 자 2,162명, 사살된 자 41명, 매 맞고 죽은 자 6명, 파괴된 교회 6교회 등이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거나 백안시하던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선봉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한 핍박과 희생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오히려 존경을 표하게 된다. 이는 3.1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3.1운동 직후 그리고 심하게 타격을 입은 교회가 신속히 교세를 만회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3.1운동 이후의 교회의 성격

3.1운동 이후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앙 양태를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운동이다. 이들은 신앙의 내면화에 치우치는 타계주의 신비주의의 경향을 갖게 되는데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주로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다. 둘째는 사회구원 차원에서 제반문제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현실적인 계몽주의 신앙운동이다. 이들은 3.1운동에서 보여 진 민족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물산장려 운동과 형평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0-30년대 기독교에서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절제운동, 야학운동, 문서운동, 여성 계몽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배경을 가지게 된다. 이런 방법의 사회운동은 일제(日帝) 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일련의 맥락을 이루고 있는 바 대한독립 애국단(1919,5)과 대한민국 청년애국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2) 한국교회의 치욕 일본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의 야욕은 중국과 몽고 등지에 대한 대륙의 팽창으로 끝나지 않고 태평양 지대를 향해 1930년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 때 일본의 태도에 반감과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으며 이런 때 등장한 문제가 일본 ‘신사참배’였다. 일본은 한국교회를 완전 붕괴시키기로 작정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 첫 번째 충돌은 1935년 열린 평양지역의 교장회의에서였다. 기독교 학교인 숭의여고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총무인 폴턴목사는 “신사란 신격화된 신(神)을 믿는 것으로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 아니라 우상숭배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내세웠고, 1937년에 이른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폴턴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결국 장로교가 세운 평양신학교는 폐교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도 강경 입장으로 선회했다.

1938년 미나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일제(日帝) 탄압은 더욱 가중되었고 총독부의 공작으로 노회별로 하나씩 굴복을 하고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 통과하게 된다.

 (3) 해외선교와 해외 한인교회의 발전

 일제(日帝)의 탄압을 피해 생겨난 해외 한인사회와 한인교회는 구한말부터 민족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3.1운동의 모의, 전개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한 면에서 1919년 이후 추진된 기독교 해외선교 및 한인교회가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사 파송은 미주지역을 포함한 폭넓게 퍼져있는 해외 교포들을 위한 1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그 뒤에 해외에 한인들을 위한 선교와 함께 장로교의 중국 산둥성 선교 등은 현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였다는 의미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상기의 방효원 목사 외에 홍승한, 김병규 등을 파송했고 의사 김윤식이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해외선교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한국교회의 힘으로 마련되었다는 점과 또 이 같은 선교가 본격적인 복음전도가 이루어진 지 30년이 채 안된 초기에 이루어졌다는 점 등은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될 수 있다. 피선교지인 조선교회가  25년 만에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20세기 피선교국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4) 한국교회의 분열과 신학의 갈등

해방 이전까지의 한국교회는 1930년대 들어서 교단분열의 양상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먼저 장로교 내에서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또 각 교파 간에서 특히 장로교와 감리교의 갈등이 표출되고 선교사 배척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선교사 배척 운동은 3.1운동 직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는 일본의 통치전략에 일부 가담하여 교회의 비(非) 정치화를 강조한 선교사들에 대해 강하게 표출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선교들 사간의 긴장감이 조성이 되었던 1927년에 장로교 선교사 로즈는 ‘풀어야 할 선교과제들’이란 글을 쓰면서 한국교회와 선교사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선교사들이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윗사람들이 원하거나 아니면 때때로 비난하는 바에 따라서만 결정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곳에 와 있다.”(한국기독교의 역사, 상게서, 1773) 

이 같은 언급에서 보듯이 소위 ‘한국교회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서서히 선교사들이 배척받고 있던 사실이 노출이 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특이한 것은 교단의 분열과 신학의 갈등이 일어나자 한국교회가 초기에 보여 주었던 해외 선교를 포함한 선교운동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Ⅴ. 해방 한국교(1945년-현재)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생활했던 70년의 절반인 35년 만에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자발적인 교회 정화운동과  회개운동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정화운동은 교회의 일각에서 일어나다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정화운동의 실패로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는 분열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 같은 분열은 한국교회가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였다.  

(1) 신학적인 대립과 교회 분열

해방 후 신학적인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장로교였다. 한국에서 장로교 신학교는 하나뿐이었다. 즉 평양신학교가 보수신학을 전하여 오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신학교가 문을 닫고 난 후에 한국신학(조선신학교, 현 한신),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현 장신)가 차례로 생겼다.

(2) 한국교회 선교의 새로운 출발

독립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제(日帝) 말기의 탄압으로 위축되었던 면모를 떨쳐 버리고 1955년부터 선교사 파송을 재개하는 형태로 그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김성권 선교사(1955), 최찬영 목사와 김순일 목사(1956)가 태국에 파송 받게 됨으로써 동남아시아를 향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선교의장이 열리게 되었다. 계화삼 선교사(1957), 김영진 선교사(1958)가 대만으로 각각 파송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화여대에서는 전재옥 선교사를 1961년 파키스탄에, 1967년에 예장(합동) 선교부에서는 채은수 목사를 대만에 파송했다. 그 이후 1971년에 국제선교협력기구(KIM)에서 임홍빈 선교사를 부루나이로, 신흥식 선교사가 태국으로, 예장(합동)이 1971년 서만수 선교사를 인도네시아로, 1976년 정성균 선교사를 방글라데시로 각각 파송했다.

그러나 이런 선교의 열기는 장로교의 분열로 주춤하다가 다시 1970년대 후반기부터 선교사 수가 증가되었고 선교지에서 10년 이상 된 선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고 본격적인 해외선교는 대개 80년대에 나간 선교사들이다. 나일선 교수가 편집한 1982년도 한국선교사 주소록에는 47선교부가 323명의 선교사를 37개국에 파송한 것으로 나타났고, 4년 후인 1986년에는 한국선교사 주소록에 89개 선교부가 511명의 선교사를 47개국에 파송했다. 최근(1996.6)의 한국해외선교부 출판부(GMF Press)의 한국선교핸드북에는 113개 선교부가 4,404명을 138개국에 파송 선교사 파송 세계 5위권 선교국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해외전문선교기관들과 연합하여 사역이 시작된다.

맺는 말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에 있어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성공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80년대 들어서 한국교회의 성장세가 둔화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꾸준한 증가세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 선교의 미래 전망은 주님의 지상(至上) 명령인 선교에 충실성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역사 가운데서도 세계 제1의 장로교회와 세계 제1의 감리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 27개가 한국에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앞날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한국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현재 한국교회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성장의 둔화에서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하는 염려와 걱정들이 있다.

그러나 위기 속에 기회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제야말로 정말 불신자들을 향해 성숙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체계적 신학정립과 교단의 갈등 등의 산재한 문제 속에 대화와 화해를 통해 하나 된 교회로 국내 및 국외의 선교의 정보 및 교육훈련 등의 강화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오늘 하나님의 절실한 명령 앞에 순종함으로 계속적인 각성과 부흥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선교에 힘쓰는 교회로 자신을 정립할 때 그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시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글쓴 이 / 윤순덕 목사(선교대구 대표, 선교대구는 지역교회의 선교동원과 잠재된 선교자원 발굴 및 훈련, 협력 파송, 선교정보 제공을 통해 지역교회의 선교 극대화 목적으로 1993년 설립된 초교파적 선교협의체),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39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