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현대신학 이해하기 자유주의 신학

–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다른 표현인가 다른 종교인가? –

“Liberalism is a different religion from Christianity.” – Gresham Machen

시작하는 말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사제(司祭) 존 쉘비 스퐁(Bishop John Shelby Spong, b.1931)은 다원주의(多元主義) 시대를 맞아 급속하게 변모하는 21세기의 기독교를 ‘새로운 기독교’(A New Christianity)라 부른다. 신약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 1942-2015)는 이를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A Newly Emerging Christianity)라고 일컫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세계 기독교’(A New World Christianity)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 교계는 이 ‘새로운 기독교’를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theology) 이라고 일컬어 왔다.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여러 신학 유형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한국 교계의 이런 인식은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기독교(Historic Christianity)와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자유주의 신학)는 하나님, 성자, 성령, 십자가, 부활, 교회, 구원, 종말 등 신학의 상징들(theological symbols)과 용어들을 공유(共有)하나 실제는 전혀 다른 개념과 패러다임의 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기독교’(A New Christianity)라는 표현이 이 ‘자유주의 기독교’(Liberal Christianity)의 개념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기독교’는 통일된 규칙이나 정연한 신념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신학 흐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마다 이론이 다르고 정통신학과의 거리도 일정하지 않다. 온화한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과격한 자유주의가 있다.

또 극단의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성경의 신적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 사역, 육체 부활,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 능력과 같은 기독교의 근본 도리를 신봉하지 않는 자유주의도 있다. 성경을 신화, 영웅담, 전설 집으로 여기는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도 있다.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도 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미 여러 세대 전에 이 ‘새로운 기독교’의 정체를 규명한 바 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전혀 다른 뿌리에서 생겨난 별개의 ‘타(他) 종교’라고 단정한다.

그는 ‘자유주의’(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별종 종교(a different religion from Christianity)이며 역사적 기독교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아우를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메이첸은 그의 책에서 이 사실을 교리관, 신론, 인론, 성경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봉사론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를 규명한다.

과연 메이첸의 주장처럼 ‘자유주의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가 아닌 ‘별종 종교’인가? 메이첸의 판단이 옳다면 그러한 신학을 지향하거나 그와 비슷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진리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메이첸의 판단이 틀렸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유서 깊은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하나로 묶거나 아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Christianity)은 무엇인가? ‘역사적 기독교’와 ‘근본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필자는 본 글에서 메이첸의 주장대로 우리가 왜 ‘자유주의 신학’을 절대로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1. 새로운 기독교 – 자유주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일제(日帝)의 한국 지배가 본격화될 때부터 한국장로교회가 전수(傳受)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줄기차게 공격해 왔다. 장로교회와 정통신앙을 이탈시키고 한국교회를 ‘자유주의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여러 가지 지략을 짜내고 독설을 내뱉었다.

예컨대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옛 건물(정통신학)을 파괴해야 새 건물(자유주의 신학, 신신학)을 건축할 수 있다.”라고 역설(力說)하고 심지어 그는 “정통신학은 (중략)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라고 한국 정통 장로교회(현 고신, 합동, 통합)를 힐난(詰難)했다. 이 같은 ‘자유주의 기독교’의 속성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기독교와 반대된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에 뿌리를 박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超自然的) 기초를 부정(否定)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현실 세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는 세상의 합리성(合理性)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마저 넘어서는 영속성(永續性)을 가진 진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자유주의는 계시(啓示) 의존 신앙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종교적 경험’과 ‘이성적 이해’ 즉 깨달음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또 인간의 이성(理性)에 바탕을 둔 ‘인간 진리’와 신의 계시(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 진리’ 사이에 단절(斷折)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만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계시가 기독교에만 유일(唯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성경과 교리를 무시한다.

자유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경험(經驗)을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또 성경의 언어는 인식(認識) 언어가 아니라 고백(告白) 언어라고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사실에 대한 경험(經驗)과 그 경험에서 얻은 의미(意味)를 고백(告白)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들이 말하는 ‘고백 언어’란 실재 사실과 거리가 먼 신화(神話), 꾸며낸 영웅담(英雄譚), 선의(善意)의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유주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초월성(超越性)을 부인하기 위해 역설적(逆說的)으로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도성인신(道成人身), 동정녀(童貞女) 탄생, 대속(代贖)의 죽음, 육체 부활, 기적 수행능력 등을 부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교리(敎理, doctrina)와 신조(信條, Credo)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절대화(絶對化)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교리(敎理, doctrina)를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적 기독교를 배타적(排他的) 집단으로 단정한다. 죄 사함이나 영혼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 따위보다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과 사회정의(社會正義)와 사회 윤리실천(倫理實踐)에 역점을 둔다. 그리고 복음(福音)보다는 문화(文化)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신자화(信者化), 복음(福音化)가 아니라 인간화(人間化), 사회화(社會化)에 열성을 보인다.

(3) 기독교를 도덕과 윤리의 실천 종교로 이해한다.

사회 정의실현(正義實現), 사회악 타파(打破), 사회 구조악 철폐(撤廢), 인권투쟁, 성차별 철폐, 핵무기 제거, 환경보존, 창조세계 통합, 가난, 전쟁, 인종차별, 평화, 사회악 개선 등 그들은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전 우주를 통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도 세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 사상은 교회 기능을 부정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를 천명한다. 그들은 악의 원인을 무지(無知)로 보며 인간의 원죄(原罪)나 타락(墮落)한 본성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뿌리

이 같은 ‘자유주의 기독교’의 뿌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고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그리스도로부터 밀교(密敎)를 받았다고 주장한 당대의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또 자연신학(自然神學, Natural Theology)이라고도 일컬어지는 17-18세기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Deism)도 일종의 ‘자유주의 기독교’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섭리(攝理)와 통치(統治)를 부정했다. 그들은 기독교가 일반 종교 가운데 발견되는 것들을 공유(共有)하고 있는 것들만이 기독교의 참된 것이라고 보았다.

(1) 고전적 ‘자유주의 기독교’

고전적인 ‘자유주의 기독교’는 인간 이성(理性)의 제한성, 상대주의, 주관주의를 몰고 온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인식론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독일의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온상에서 자랐다.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와 릿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이 대변하는 ‘구 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기독교의 핵심이 인간의 경험(經驗)과 윤리(倫理)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직관(直觀)으로 신(神)을 파악할 수 있으며, 종교의 본질이 신적(神的) 실재에 대한 깨달음(radical sort of awareness of divine reality)과 인간의 감정(感情, 느낌)에 있다고 보았다. 릿츨은 기독교의 본질이 교리(敎理)나 진리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실천’과 우주적인 ‘사랑 공동체 구성’에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잠재 가능성과 도덕 실천을 통한 지상낙원(地上樂園)을 추구했다.

이같이 성경, 계시,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태도는 성경 비평(批評)을 고무시켰다. 그래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고,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며, 창세기를 단일 저자의 기록이 아니라 다민족(多民族)의 여러 전승(傳承)을 편집한 것으로 보는 경향을 낳았다.

(2) 현대 ‘자유주의 기독교’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 시기인 1920-1930년대에 나타난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 무오성, 그리스도 동 동정녀 탄생, 속죄 사역, 육체 부활, 기적 수행능력 등을 단지 ‘이론’(理論, theories)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또 성경을 단지 역사 사료(史料) 편찬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批評) 접근을 지지했다. 또 복음의 메시지에 추가된 문화적(文化的), 신화적(神話的) 요소를 배제한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바울의 기독교’와 ‘예수의 기독교’로 구분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뒤에 다양한 형태의 현대주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의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비 신화화 신학’(Demythologization Theology),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정하는 ‘고등비평학’(高等批評學, Higher Criticism), 구약성경을 신화집(神話集), 전승집(傳承集)으로 보는 ‘성경신학’, 성경적 신론(神論)을 신화(神話)로 여기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와 존 로빈슨(John Robinson, 1919-1983)의 신학,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신학’(過程神學, Process theology),알타이저(Thomas Jonathan Jackson Altizer, 1927-2018)의 ‘사신신학’(死神神學, Death of God theology),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 신학, 하나님 없는 기독교를 주창(主唱)하는 ‘신(新) 자유주의’(Neo-Liberalism) 등으로 나타났다.

(3) 박형룡의 ‘자유주의 기독교’ 정의(定義)

역사적 기독교의 한국 정통신학자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는 ‘자유주의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했다.  

  • 성경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經驗)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경 권위보다는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신 교훈에만 권위를 둔다. 과학, 역사, 도덕에 관한 성경 본문에는 오류(誤謬)가 있다고 본다.
  • 반(反) 교리적이다. 성경에 바탕을 둔 교리, 신조를 배척한다. 기독교는  생활(生活)이지 교리(敎理)가 아니라고 한다. 기독교 신조(信條)는 사상의 자유를 앗아간다고 본다. 교리나 신조는 각 종파 사람들의 심리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 하나님 임재(臨在, presence)를 느끼는 것(感)이 중요하며 신관(神觀)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수 있는 방법은 교리가 아니라 예수라고 한다.
  • 그리스도의 동정녀(童貞女) 탄생(誕生)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復活)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 그리스도를 신앙 모범(模範)의 독특한 인물로 추대하는 반면 그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과 구속적인 기능을 가진 그의 인격을 부정한다.
  • 인간의 원죄(原罪)를 부정한다.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을 수용하고 그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 타락(墮落)의 교리를 부인한다. 죄의 심각성과 흉악한 독성(毒性)을 희박하게 여긴다.
  • 성경이 제시하는 것과 상관없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구원을 부정한다.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부정한다. 죄인이 성령으로 중생(重生)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 천국(天國)과 영생(永生)의 소망을 포기한다.
  •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실 세계를 선행(善行)으로 극복하겠다고 한다. 타계적, 초자연적 능력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격변시키려 하지 않는다.
  • 영벌(永罰)과 지옥, 형벌, 심판도 없고, 백색 보좌도 없고, 심판주도 없다고 한다.
  • ‘내재하는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일을 자신들의 비범(非凡)한 업적으로 여긴다. 그 내재성(內在性)은 전통적인 성경적 유신론(有神論)의 내재성이 아니라 과학에 맞추기 위해 초월성을 제외한 내재성이다.

(4) 한국교회와 ‘자유주의 기독교’

용어(用語)의 개념은 그것이 사용되는 컨텍스트(context)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의 보수계 교회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체계화한 신(新) 신학 즉 바르트주의(Barthism, Neo-orthodoxy)를 ‘자유주의 기독교’에 포함시킨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했으며 ‘변증법적 신학’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박형룡은 ‘구(舊) 자유주의’와 ‘바르트주의’를 모두 ‘자유주의 신학’으로 분류한다. 박형룡은 ‘바르트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연루(連累)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 세 가지를 지적했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해서 ‘바르트주의’는 성경적 기독교에서 떠났다고 한다.

  • 바르트는 성경에 오류(誤謬)가 있다고 본다.
  • 바르트는 파괴적인 성경 비평학(批評學)을 허용한다.
  • 바르트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기초한 신학을 재구성한다.

‘바르트주의’도 전통적 신학 술어(術語)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통신학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바르트주의’는 동일한 술어에 새로운 개념을 부가(附加)해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기독교와 다르다. 옛 신학 술어들을 그대로 쓰면서 그 속뜻을 다르게 풀이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새 사상(思想)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바르트 신학’도 옛 신학 술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해석에서 는 성경적 전통의 본의(本意)를 떠남으로써 기독교를 재해석한다. 일종의 새로운 신학 체계이다. 이런 이유로 한편에서는 그의 보수적 경향에 주목하여 ‘신 정통’이라고 부르지만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이 신학에 담긴 자유주의 내용을 보아 ‘신현대주의’라 일컫는다.

한국교회가 ‘바르트주의’를 ‘자유주의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관례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괴적 성경관과 성경 비평학을 수용하는 현대주의자들, 아빙돈주석(Abingdon Bible commentary) 사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바르트주의 성경관 논쟁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박형룡은 1930년대 중반에 장로회신학교(평양)에서 ‘기독교신학 난제’를 가르치면서 기독교계에 급속하게 확산이 되고 있는 새로운 신학 사조(思潮)들을 비판했다. 그 무렵 김재준(金在俊, 1901-1987), 송창근(宋昌根, 1898-1951?), 채필근(蔡弼近, 1885-1973), 김영주(金英珠, 1899-1950), 김춘배(金春培), 김관식(金觀植, 1887-1948), 조희염(曹喜炎, 1885-1950) 목사 등은 자유주의 신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또 한국교회 사가(史家)들은 ‘바르트주의’를 ‘자유주의 기독교’ 범주에 포함시켜왔다. 김양선(金良善. 1907-1970)은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1956년)에서 광복 후의 한국교회 분열을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과 보수주의(保守主義) 신학의 대결로 파악했다.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프린스톤신학교의 존 매카이(John A. Mackay, 1889-1983)와 에밀 부룬너(Emil Brunner, 1889-1966)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단정한다.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친 바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간하배(Harvie M. Conn, 1933-1999) 교수는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 연장 선상에서 김재준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규정한다.

총신대학 박용규 교수는 ‘한국장로교사상사’(1992년)에서 간하배의 논지를 확대 서술하면서 김재준과 송창근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분류한다.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학에 대해 총회에 제출한 진정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소개했다.

장로교 남부총회(1946년)가 조선신학교를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공식 인준할 무렵 그 학교 안에는 교회에서 정통신학을 배우고 자란 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다가 충격을 받고 ‘진정서’(1947년)를 총회에 제출했다.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성경관, 교리, 신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 진정서는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교수의 신학을 다루지만 주로 김재준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김재준은 구약성경을 유대교의 성경이라고 하며 문서설(文書說, document hypothesis)을 주장하여 모세 6경설, 제2이사야서설을 가르쳤다. 그리고 김재준은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성경은 주변국의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 성경에는 오류가 많다. 노아홍수, 바벨탑 기사, 인류의 기원 등은 모두 허구이다. 여리고 성의 함락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승리였다.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이며 정통적 이단이다. 성경은 교리의 교과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칼빈의 예정론은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 유일신 엘로힘은 셈족의 신이다.”      

김재준은 자신의 성경관이 이단 시비에 휩싸이자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자신의 것으로 천명했다. 그는 성경에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救贖)의 이치가 있다는 점에서 성경은 무오(無誤, infallible, not inerrant)하다고 설명했다. 즉 성경 역사와 과학 관련 본문에는 오류가 있으나 구원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점에서는 성경은 무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도 철저한 ‘바르트주의자’도 아니었다. 정통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포괄성과 수용성의 면모가 엿보이기는 하나 그의 신학은 모두를 부정하는 ‘부정신학’(Nein-Theologie), 모두를 수용하는 ‘포괄신학’(Umgreifen Theologie), 마치 이것인 듯하기도 하고 저것인 듯하기도 한(Als-Ob) 신학이다. 어느 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높고 먼 공중을 떠도는 신학 – 장공신학(長空神學, 장공은 김재준의 호)이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근년에 이르러 ‘종교 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Religious pluralism) 형태로 나타났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윤성범(尹聖範, 1916-1980), 변선환(邊鮮煥, 1927-1995), 홍정수, 한신대학교(기독교장로회)의 김경재 교수 등이 이러한 물결을 주도해 왔다. 한국의 보수계 교회들은 김재준을 동력(動力)으로 출범한 기독교장로회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중심 한 대한기독교감리회를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라고 생각한다.(*) 글쓴 이 / 최덕성 박사(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 현 브니엘신학교의 총장,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 온라인 신학 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 운영자 

(출처) http://reformanda.co.kr/xe/index.php?document_srl=101528&mid=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