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종말과 세상 종말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개인종말과 요한계시록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중심으로 ‘개인종말’과 ‘세상종말’이 있다. 개인종말은 육체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있을 육체의 부활, 그 이후 최후 심판이 있다. ‘세상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 및 역사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개인종말’과 ‘세상종말’에 따라 잘못된 종말론을 다루면서 개혁주의의 종말론의 입장을 변론하고자 한다. 특히 종말론 중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견해는 신학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의 차이를 비교 비판하고자 한다.
제1부 개인 종말론
1. 죽음의 의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플라톤(B.C. 4C)의 이원론적 사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은 실제 인간의 자아로서 우등하며 승화된 것이요 영원하며 신성한 본체인 반면에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서 열등하고 없어져야 할 일시적이고 더러운 죄의 본체로 본다. 따라서 죽음을 성스러운 영혼이 더러운 죄 덩어리의 육체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았다.
또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죽음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본다. 이런 주장은 주후 5세기경 수도사였던 영국의 펠라기우스(Pelagius)의 제자 셀레스티우스(Celestius)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아담은 유한한 존재로서 죄와는 상관없이 죽음을 맛보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1)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Socinians)들도 이와 꼭 같은 주장을 했다.
현대에 들어와 칼 바르트(Karl Barth)가 같은 주장을 했다.1-1) 그는 죽음이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인간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이와 비슷한 주장으로 인간의 죽음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일부분으로 주장했다.2) 이처럼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들은 성경과 정면충돌한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한다.(창 2:7, 3:19, 롬 5:12,17, 6:23, 고전 15:21, 약 1:15) 창세기 2:16,17을 보면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다. 곧 인간의 죽음이 자연적 운명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래 창조에 의도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이며(시 90:7,11), 심판이며(롬1:32), 정죄요(롬5:16), 저주(갈3:13)임을 발견하게 된다.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람으로 완전한 단계에 이를 수 있었으나 죄를 지음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범죄 하였을 때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는 것과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창 3:19)이었다. 창세기 2:7과 3:19을 보면 아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이며 그 죽음은 아담의 육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육체의 죽음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비추어볼 때 창세기 2:17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그의 존재에 있어 육체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도 갖고 있는 전인으로서(약 2:26) 창세기 2:17의 인간의 죽음은 영적 죽음인 하나님과의 분리를 포함한다. 에베소서 2:1,2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의 ‘죽었던’은 분명 육체적 죽음이 아니다. 이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는 죽음인데 그 죽음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분리요 또 다른 하나는 육체의 죽음이다. 곧 죽음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과 육이 서로 분리되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영혼은 죽음의 영역인 음부로 들어가는 것이다.(민 16:30, 신 32:22, 시 86:13, 88:6) 따라서 죽음은 분명히 인간에게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2. 성도의 죽음 이후
복음은 바로 인류에게 죄의 두 가지 결과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 우리 예수님에게 십자가 상에서 저주로 임하였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영생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딤후 1:10, 롬 6:9)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가 되어 영적인 죽음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자들마다 영생을 얻고 그 영생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체를 입음으로 절정을 이루며 이때 우리의 육체의 죽음은 완전히 극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활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완전히 해결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의 원래 목적이 완성되는 순간이 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3,54)
따라서 개인구원 또는 영생이란 두 가지 면을 포함한다. 하나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주님 오실 때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서 죽음이 모든 인류에게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요 오직 그 해결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사역을 믿음으로 받으며 예수와 연합될 때만 즉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 그 죽음의 심판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영생의 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문은 오직 유일한 문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롬 5:17, 8:1,2, 고전 15:22,55-57)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 옆의 강도에게 하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말씀은 그 강도의 죽음은 낙원으로 인도되어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신자의 죽음이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음의 영역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마 16:18) 오히려 이제 죽음은 성도가 죄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성화의 마지막 과정이다.3)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죽음 이후에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새로운 부활체를 입을 때까지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죽은 영혼은 하나님 보좌 앞에 있게 된다.(계 6:9-11) 어린양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땅에 누워있지만4) 그 영혼은 예수 앞에 있어 하늘의 영광을 누린다. 그들은 부활체를 입을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고대하면서 하늘의 복락(福樂)을 누린다.
이 같이 성도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현관이기 때문에 심지어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다. 이는 세상이 지긋지긋해서 도피처로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빨리 함께 있고 싶기에 죽음을 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심정을 가지며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이 구절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요 오히려 주와 함께 더욱 가까이 거할 수 있는 길이 된다.(고후 5:8, 고후 1:1-3) 즉 성도의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영역으로 이전(移轉)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왕하 22:20, 수 23:14) 그 다른 영역이란 바로 천국으로 그곳에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죽음 이후의 상태란 예수님과의 공중 혼인 예식을 앞두고(마 25:10) 대기실에서 기쁨으로 기다리는 신부(新婦)와 같다.
3. 불신자의 죽음 이후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의 세계와의 영원한 분리(分離)로 곧 음부(陰府)로 떨어지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시 9:7, 눅 16:23, 벧후 2:9, 계 14:11, 마 13:41,42) 음부는 죽음의 영역으로서 불신자들이 고통 중에 있는 장소이다. 이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잘 설명되고 있다. 부자는 죽은 후 하데스(Hades) 곧 음부로 내려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쳐다보니’라고 했다. 이를 베드로후서 2:9과 함께 보면 불신자들은 심판 날까지 계속되는 형벌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히브리어로 스올(Sheol),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 음부의 영역은 죽은 자의 영역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5)
그러므로 음부(陰府)는 곧 지옥이다. 그러나 지옥은 몸과 영혼이 함께 들어가는 물리적인 장소인 반면 음부는 영혼만 거하는 어떤 장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옥이든 음부든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서 완전하게 차단(遮斷)되었기 때문에 그 형벌의 고통은 같은 종류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음부에서 몸이 없는 상태로 계속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들도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처럼 부활체를 입게 되는데 그 부활은 수욕과 심판의 부활로(요 5:29, 행 24:15) 나아와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 이에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셨다.
여호와의증인이나 안식교도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14의 ‘예수 안에서 자는 자’ 또는 고린도전서 15:20의 ‘잠자는 자들’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의 죽음이란 영혼이 잠을 자는 무의식(無意識) 상태라고 주장한다. 죽은 자들은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부활 후에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바울의 경우를 볼 때 맞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된 후 즉각 그리스도 앞으로 가며 주 앞에서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후 5:8, 빌 1:23, 고후 12:1-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13)라고 한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신자의 죽음 후의 상태를 볼 수 있고 고린도후서 5:8의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14:13에서 신자들이 ‘쉬리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영혼의 수면(睡眠)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고통이 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상태를 뜻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에서도 죽음 이후의 영혼들에게 의식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눅 16:19-31)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지만 믿지 않던 부자는 죽음 이후에 큰 고통을 당한다. 즉 죽음 이후에는 무의식의 영혼 수면 상태가 아니라 음부의 처절한 고통을 경험함을 증거 한다. 따라서 불신자의 죽음의 상태에 관하여 베드로후서의 내용과(벧후 2:9) 예수님의 ‘나사로와 부자 비유’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은 도한 자명(自明)하게 죽음 이후에 구원을 위한 다른 기회가 없음을 강조한다. 죽음 이후는 천국 아니면 지옥일 뿐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도 우리의 살아 있을 동안의 삶에 대한 심판이지 죽음 이후의 어떤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삶에 대해 심판하시고 그 결과로는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에게는 영벌(永罰)로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에게는 영생(永生)으로 갚으시는 것이다.(마 25:26)
로마 가톨릭의 연옥(煉獄, Purgatory) 교리는 성경에 위배된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일반인이 죽으면 예외 적인 극소수의 거룩한 성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중간 장소인 이 연옥에 간다. 그곳은 천국도 아니요 지옥도 아니다. 오히려 그 곳은 신자들이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까지 자신들의 죄 값을 일시적으로 겪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오래 머물고 어떤 사람은 잠깐 머문다. 한편 이 땅의 사람들의 기도나 공로 미사의 제물들로 그들의 고통 기간이 짧아질 수 있다.
이 같은 로마 가톨릭의 중간 장소(연옥) 교리는 성경과 완전히 상반(相反)된다.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있을 수가 없고 또 산자가 죽은 자의 영역에 어떠한 영향력을 구사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신 26:14, 레 19:28) 심지어 돈이나 제물로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음은 자명한 진리이다.(눅 12:16-21) 특히 더 큰 문제는 연옥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연옥교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홀로 담당하셨음을(히 9:14,15) 부인하는 교리로서 인간이 선행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칠 뿐이다.(롬 1:16,17)
제2부 세상 종말론
1. 천년왕국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um)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천년왕국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경을 보는 관점과 성경해석의 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천년왕국의 견해는 성경 전반에 대한 해석과 깊게 연결된다. 특히 구약의 선지서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성경전반을 보는 조직신학의 구조와 깊게 밀착되어 있다.
천년왕국 이란 말은 요한계시록 20:1-6에 나오는 말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용(사단)을 잡아 무저갱(無底坑, abyss)에 던져 잠그고 천년동안 인봉하는 사건과 연결된다. 그 기간 동안에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게 되며 왕 노릇을 한다. 이처럼 성경을 보는 견해에 따라 이 말씀을 이사야 11:6-9과 연관해 이 기간을 지구상의 최고의 번영과 축복의 시기로 보기도 한다. 그 기간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문화의 최고봉을 이루고 죄악이 극소인 상태에서 평안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소망을 잃고 살던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천년왕국이 일종의 강한 희망을 주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지 아니면 이후에 재림하실 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의견일치가 되지 않았다.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이라면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며, 재림 이전이라면 현재 교회 역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현재 교회에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실제적인 문자 그대로의 천년동안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인지 도 다시 거기서 의견이 나뉜다. 일반적으로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는 대체로 천년을 실제적 기간으로 보지만 재림 이전의 천년왕국 견해는 성경의 천년을 실제적인 천년으로 보는 견해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뉘게 된다.
이 같이 예수님의 재림 시기와 천년이라는 기간의 해석에 따라 천년의 통치 곧 천년 왕국은 네 가지의 견해로 나뉜다.6) 이 네 가지 견해들은 각각 후천년설(Post-millennial Progress),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or Classical Pre-millenialism),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2. 후(後) 천년설
후천년설(Post-millennial Progress)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지지를 받았던 견해이다. 따라서 후천년설은 19세기에 미국과 영국을 주도하던 복음주의적 입장이었다.7) 후천년설은 청교도신학의 유산 및 기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장래에 대한 낙관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8)

후천년설의 자세한 내용은 아마 미국 내에서 표준이 되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남긴 위대한 프린스턴 신학자 찰스 핫지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20세기 교회에서 볼 때는 후천년설은 어거스틴과 칼빈 이후의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된 견해로 여겨져 왔었다.9) 내부적으로는 진보 및 보수의 의견으로 나뉘는데 진보의 경우는 예수님의 가시적 재림을 믿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논문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보수의 의견으로서 후천년설에 해당하는 학자들은 P. Fairbairn, Hodge, W. G. Shedd, B. B. Warfield, L. Boettner 및 H. Strong이 있다.10)
특히 L. Boettner는 현대에 잘 알려져 있는 후천년론자로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복음의 전파와 각 개인들의 심령들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구속적 사역을 통해 이 세상에 확장되고 있으며 이 세상은 점차적으로 기독교화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 복음화의 확장으로 유대인들의 대거 개종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지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져 죄가 최저의 상태로 감소할 것이며 사회, 경제, 정치, 문화도 크게 개선되어 천년동안 풍요를 누릴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부요를 함께 나누게 되고 사막에서 꽃이 피는 시절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전에는 서로 적대적이던 나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이러한 번영의 황금시대가 문자적으로 천년 기간 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천년기의 마지막 때에 잠시 사탄이 놓임을 받아 ‘제한적으로 악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는 세상의 교회에 대한 공격을 하지만 교회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11) 그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되는데 결국은 ‘천년기’라고 불리는 의와 평화의 긴 시대의 끝에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곧 대부활과 대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으로 인도되어 인류의 역사는 끝이 난다고 본다.12)
후천년설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무천년설의 주장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이미 이 땅에 영적으로 실제 한다고 믿으며 이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교회에서 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탄은 결박을 당하였고 성도들이 이미 영적으로 주님과 통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13) 이들은 무천년설자들과 아울러 천년왕국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후천년설이 무천년설과 다른 차이점은 교회시대 중간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사탄이 천년동안(초림과 재림사이) 결박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후천년설은 교회시대에 아직 사탄이 활동하고 있으나 이 세상의 역사 중 어느 시기에 이르면 실제적인 천년 동안 사탄이 결박을 당하여 그 때에 이 지구상에 거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복음으로 돌아오며 유대인들이 대거 개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후천년설에는 성경적으로 모순이 되고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다. 후크마는 그의 책 ‘The Bible and the Future’에서 후천년설의 4가지 문제를 제시한다.14)
첫째, 후천년설자들의 구약의 해석인데 곧 이사야 2장, 11장, 65장 및 다니엘 2:44의 내용을 천년 왕국에 연결시키는 점이다. 이는 무천년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세 가지 설에 똑같이 해당하는 내용이다. 후크마는 주장하길 이 구약의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이지 천년왕국의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둘째, 후천년설자들의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란과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의 배도사건을 과거의 일들로 처리하는 것에 대하여 틀리다고 본다. 후크마는 분명히 세상 끝이 가까워지면서 이 세상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환란과 배도(背道)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살후 2:3)
셋째, 후크마는 지적하기를 계시록 20장 자체 내에서는 사실 미래적 천년기 황금시대를 기대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증거를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영혼들’을 이 땅에 살고 있는 실제 사람들로 볼 때 이미 4절과 5절에서의 ‘목 베임을 받은 자’와 ‘죽은 자들’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수명이 70여년인데 조건도 바뀌지 않은 이 땅에서 일천년을 산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본다.
넷째, 후크마는 이 땅 인류의 역사의 앞날이 점점 선하여진다는 그들의 의견에 반박을 한다. 사실 마태복음 24장과 디모데 후서 3장을 보면 후크마의 의견처럼 세상은 오히려 더 악하여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의 비유는 끝 날까지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후천년설이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단서가 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3.역사적 전천년설
초대교회 이레니우스는 이미 오늘날의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or Classical Premillenialism)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이 견해가 인기를 얻었는데 이는 Bengel, Godet, Van Oosterzee, Moorehead 같은 학자들이 역자적 전천년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G.E. Ladd, Millard Erickson등이 이 견해를 지지했다.15)

역사적 전천년설에 의하면 베드로후서 3:8의 말씀 곧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에 근거하여 세상역사를 6,000년으로 보고 각 천년마다 창조의 하루에 해당한다고 본다. 따라서 6,000년의 역사가 끝난 후 주님이 다시 재림할 것이며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성도들의 고난과 학대가 점점 더 증가하여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극치를 이른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가장 강할 때 그리스도가 하늘의 영광중에 나타나 성도들을 부활시키고 그때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 받아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 두 그룹의 성도들은 하늘에 들어 올려 주님을 공중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 후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이 땅에 내려와 일천년 동안 지속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곧 적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적그리스도의 강포한 통치가 끝장난다.
바로 이 시기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믿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 이 후에 바로 하나님의 7일 창조의 안식일에 해당하는 천년왕국이 7000년째에 천년동안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천년 기간 중에 예루살렘이 다시 재건되고 세상은 번영하며 세계적인 평화가 넘친다. 예수님은 전 세계를 가현적(假現的)으로 통치하시며 구속 받은 백성들도16)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
이러한 역사적 전천년설에 있어서 천년왕국의 상태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최종상태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 동안에는 계속해서 죄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신 악은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되어 의로움과 평화가 온 땅에 가득할 것이다. 이때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맞이한다. 특히 모든 자연 만물마저도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상태가 되어 사막에서도 장미가 피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천년기가 끝날 무렵에 사탄이 나타나지만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된다. 사탄은 잠깐 풀림을 받아 열방들을 다시 한 번 더 미혹한다. 사탄은 곡과 마곡의 전쟁을 치루기 위해 반역하는 나라들을 모아들여 이들을 이끌고 ‘성도들의 진’을 향해 공격한다. 그러나 사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에 의해 소멸되어 다시 불 못 속으로 던져진다. 이후 죽었던 불신자들의 부활이 있고 백보좌 앞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이때 모든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된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는 영원한 불 못으로 가고 그 책에 이름이 있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행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 그 직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 모든 악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17)
역사적 전천년설의 문제와 약점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후의 세상을 다스리심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 서신은 최종 상태에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사망의 세력을 이기는 부활로서 모든 원수를 발아래 끓게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설 자들은 부활 이후에도 죄의 세력과 사망의 세력이 남아 있다고 하니 부활의 참된 의미에 어긋나며18) 천년 왕국 끝에 마지막 원수 사탄이 또 전쟁을 한다고 하니 이는 바울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발견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성경이 뒷받침 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
후크마는 역사적 전천년설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완전히 원수를 재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에 심한 반기를 든다. 영광중에 임한 재림의 예수가 천년이 지난 후에 또 철장 권세로 원수를 쳐 부셔야 하는 것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19) 사실 위의 고린도전서 15:24-26을 자세히 살펴보면 후크마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위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현재의 통치는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쉬지 않고 진행되며 모든 원수가 멸하게 될 때 특히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이기는 성도들의 부활과 함께 역사의 끝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예수님 사이의 중간에 어떤 천년 왕국과 같은 휴전이 있을 수 없다. 곧 인류의 끝이 올 때까지는 예수님의 왕국에는 천년 왕국과 같은 쉼이 없는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의 지상적 천년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맞지 않는다. Vos는 그의 책 ‘The Pauline Eschatology’에서 주장하길 종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주님의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의 강림은 종말적인 영원한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침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이 말은 오직 두개의 나라 곧 아담으로 시작된 나라와 예수로 시작된 나라가 있는 것이지 제 삼의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오는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지 천년 왕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1)
예를 들어 마태복음 25:31을 보면 예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 여기서 말하는 보좌는 지상적 천년왕국의 보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46절에서 보면 악인은 영원한 심판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심판하는 심판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주님의 재림은 마지막 심판과 바로 연결되고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의 설교 중에도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예수를 하늘에 받아 두시는 동안이라 하시며 바로 예수가 재림하는 순간이 만유의 회복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천년왕국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13에서는 이 내용을 더욱 확실히 한다. 곧 예수의 재림 후에 옛 땅이 녹아지고 새 땅이 창조될 것을 말함으로 역사적 전천년설자들이 말하는 천년왕국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후크마는 비판하기를 역사적 전천년설 자들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현세대와도 같지 않고 장차 올 세대와도 같지 않은 모호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22) 사실 이런 천년왕국은 계시록 20장에 ‘해석’에 의한 것이지 성경 전반에 걸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 그 어떤 곳에서도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또한 결과적으로 볼 때도 악인이 예수의 재림 이후에도 더욱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믿는 이에게는 예수 재림 이후에도 전쟁을 해야 한다는 불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성경이 의도하는 바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중략)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4.세대주의 전천년설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의 배경인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는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된 신학체계로 교회와 이스라엘을 두개의 별도 개체로 보고 하나님은 이들에 대한 각각의 계획이 있다고 주장한다.23) 특히 다비의 종말론 신학체계는 스코필드(Cyrys I. Scofield, 1843-1921)에 의해 체계화 되면서 세대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 세대주의는 L.S. Shafer, J. Walvoord, Herman Hoyt, H. Ironside, Charles Ryrie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의 의견이 다른 종말론과 특이하게 다른 것은 신약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고 믿는데 있다. 곧 신약교회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게는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이한 주장은 하나님은 인류를 다스리시는 데 있어 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여 7가지의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각 세대를 다루셨다고 보는 것이다.24)
이런 세대주의 자들의 성경해석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하나는 모든 예언을 문자적(文字的)으로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區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대주의에 의하면 성경의 예언에는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 있고 신약교회를 위한 예언이 따로따로 있다. 또는 예언을 해설함에 있어 일차적인 뜻은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영적인 뜻으로는 교회에 적용을 한다.25) 예를 들어 예레미야 31:31-34을 해석할 때도 영적으로는 교회를 위해 성취된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는 아직도 미래의 천년왕국을 위해 남아있는 언약이라고 한다.
천년왕국은 세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재림 후에 있을 문자적인 천년 기간의 천년왕국이다. 이 천년왕국은 특히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다 완성되는 지상적 왕국으로 본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 등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미래의 어느 때에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에 모여들면서 이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번영과 축복의 세대가 찾아오며 이 지구상에서 다른 민족들 위에 특별한 위치를 갖게 된다고 한다.
세대주의자들은 말하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교회시대는 없고 곧 바로 구약 예언들이 성취되는 천년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왕국을 거절함으로 인하여 예수는 ‘신비로운’ 왕국 곧 교회를 도입하게 되셨으며 그 신비한 교회에 관한 비유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라고 한다.26) 이는 교회에 대한 비밀은 구약에서는 전혀 내다보지 않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괄호’와 같다고 한다.
세대주의자의 주장 중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첫째 재림은 휴거를 위한 것인데 이 첫째 재림은 대환란 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첫째 재림은 아무 때나 가능하며 항상 임박하다고 믿는다. 첫째 재림 때에는 주님이 휴거를 위해 이 땅에 완전히 내려오시지 않고 공중에 오셔서 7년 동안 머무신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제외된 신약의 교회시대 신자들의 부활이 있고 이 땅에 살아있는 신자들(이방인과 유대인 신자 전부)은 홀연히 변화하여 하늘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 주님의 첫째 재림에 참여하여 휴거할 수 있는 조건은 항상 깨어 주를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활하거나 휴거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7년 동안 공중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 7년은 이 땅에 있어서는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 중 마지막 이레(7일)가 성취되는 기간이다.(단 9:24-27) 다른 69이레와 이 마지막 이레 사이에 오랜 기간이 있는 이유는 교회시대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교회가 하늘에 7년간 머무르는 동안 이 땅에는 수많은 사건이 발생한다. 특히 7년 중 후반 3년 반은 대환란기이다. 이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 땅에서 잔인한 통치를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경배할 것을 주장한다. 무서운 학대가 땅의 거민들에게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다윗 왕국의 약속을 포함한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 민족 중에 144,000이 주님을 믿고 인(印)을 받는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144,000을 통해 많은 이방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수없이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려지며 결국 땅의 왕들이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코자 전쟁을 준비한다. 이 때쯤이면 7년 기간이 끝나게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첫째 재림에 참여하였던 교회와 동행하여 영광중에 지상(地上)으로 둘째 재림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을 치루시고 모든 원수를 멸하시며 그 후 대다수의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모여 그리스도께 돌아옴으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 이제 마귀는 결박되어 문자적으로 일천년 동안 무저갱 속으로 던져지고 방금 7년 환란기 동안에 순교한 성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얻게 된다.(계 20:1-4)
또한 구약 성도들도 이때에 부활을 하게 된다. 부활한 이 사람들은 첫째 재림 때 부활한 자들과 먼저 합류하고 합류된 모든 부활한 자들이 마태복음 25:31-46처럼 살아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한다. 이 심판은 7년 환란 동안에 이들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심판이다. 이 시험에 통과한 양들은 땅에 남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나 이 시험에 떨어진 염소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 후 천년 왕국이 시작된다.
천년왕국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천년왕국 기간에는 부활한 자들(열방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음)과 이들의 심판을 통과하여 살아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부활한 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은 하지 않았어도 중생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부활한 성도들은 새로운 하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살고 땅에서는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이 살게 된다.
하늘의 도성에 사는 부활한 자들은 천년 왕국 기간 중에 가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하는 사건에 동참한다.(마 19:28, 고전 6:2, 계20:6) 천년 왕국을 이 땅에 왕국으로 보는 리리(Charles C. Ryrie)는 주장하기를 그러므로 부활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천년 왕국 예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천년왕국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약속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천년왕국 기간 중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즉 결혼도 하고 자녀를 낳으며 죽음도 계속 존재한다. 그럼에도 천년왕국은 번영과 축복과 평화와 풍성함의 세대이다. 온 땅은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고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재건되어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릴 것이다.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가 이 성전에서 다시 있을 것인데 이 제사는 대속적인 제사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하는 기념제사가 될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오직 중생한 사람들로 천년왕국은 시작되지만 점차 태어난 자녀들 중에는 입술로만 주를 고백하고 마음으로는 주를 대적하는 자가 생기게 된다. 이들이 바로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사탄의 편에 서서 성도의 진영을 공격하는 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후의 반란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사탄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천년 왕국 중에 죽은 모든 신자들은 다시 부활을 하게 된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믿지 않고 죽었던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 백보좌 심판 이후 이제 최종상태에 이른다. 죽음과 고통이 전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 최종 상태 곧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은 영원한 교제를 누린다. 단지 이 최종 상태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적 특수함으로 인하여 이방인들과 구별된다.
지금까지 세대주의의 종말론을 간략히 요약했다. 세대주의를 분석하는데 있어 많은 방법이 있겠으나 사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성경해석의 원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곧 상징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묵시 문학적 내용도 무조건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해 소설 같은 조잡하고 난해한 이론이 나온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사도 요한이 상징적으로 묘사한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마치 공상 소설을 연상케 하는 엉뚱한 성경해석을 발생 시켰다.27)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비(Darby)로부터 시작된 세대주의의 기본 믿음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따로 분리시켜 다루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에베소서 2:11-18은 세대주의의 기본 바탕을 충분히 반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에베소서 2:16이나 2:18의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 및 성령의 역사는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이 귀한 결과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됨을 세대주의 종말론의 견해처럼 나누어서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1-18)
또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말하길 참 이스라엘이란 구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체를 따라 난 민족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약부터도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 난 자녀들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한다.(갈 4:29-31) 다른 말로 하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 것이다.(롬 2:28,29)
후크마는 갈라디아서 6:15,16을 해석하면서 주장하길 바울은 ‘이스라엘’이란 용어를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한 믿는 자녀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못을 박고 있다.28) 특히 후크마는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약에 나타난 천년왕국에 관한 대부분의 약속들은 이미 다 신약 교회에서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킨다.(행 13:32-39)29)
사실 베드로의 주장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족속이냐 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느냐 없느냐로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벧전 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29)
세대주의는 천년왕국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재건되어 짐승을 잡아드리는 제사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대속의 제사가 아니더라도 만일 천년왕국에서 동물 제사를 또 드리게 되면 이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신 사역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면이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는 제사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 구약의 동물 제사 제도에 대하여 언급하길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속죄제와 전제 등의 제사를 도무지 원치 아니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히 10:8) 도리어 동물제사를 영원히 없이하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항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중략)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0-18)라고 하셨다. 따라서 세대주의의 주장은 성경에서 동물 제사에 관한 의견과 전혀 상반되는 입장을 갖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첫째 재림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올 가능성을 열어두는데 이 또한 성경의 주장과 전혀 맞지 않는다. 성경은 ‘오늘’이라 하는 이 세대 외에 또 다른 구원의 세대를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히 3:13) 따라서 세대주의의 주장처럼 7년 대환란이나 천년왕국 끝에 많은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베드로후서 3:4의 내용에서도 주님께서 재림을 연장하시는 것은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을 때 이 땅에서 일단 구원의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을 것을 확실히 전제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천국 비유가 보여주는 것도 구원의 기회가 지나가면 문이 닫힘으로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마 25:1-13,14-30, 31-46)
마지막으로 교회는 괄호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과 따라서 교회시대로 인하여 천년왕국이 연기되었다고 보는 세대주의의 주장에 많은 문제가 있다. 이는 먼저 세대주의자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그들로 교회시대를 괄호로 보게 한다. 세대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을 인류의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꿈꾸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 성경의 왕국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가장 중요하다.(왕상 8:14-21, 삼하 7:1-16)
또한 세대주의자들이 천년왕국이라고 믿는 다니엘의 왕국 개념도 실제는 ‘인자’의 영원한 다스림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앞서서는 안 된다. (단 7:13,14) 다시 말해 성경에서는 주님과 관련된 왕국의 개념이란 주님의 다스림의 실체이지 그 다스림의 결과로 오는 부수적 축복을 왕국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개념을 가지시고 본인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자신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하였다고 선포하신 것이다.(마 4:17, 5:3, 16;19, 막 9:1) 예를 들면 마태복음 12:28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30)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왕국은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들을 물리쳐 나가는 영적인 나라이다. 이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주님의 왕국에 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중략)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구절을 통해 이 땅에서의 주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된다.(눅 17:20, 요 3:3f, 살전 2:12, 골 1:13) 그러나 이 영적인 나라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땅 끝까지 확장되고[8](마 24:14, 눅 24:47)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되는 영원한 주님의 통치로 연결된다.31)
이는 복음의 역사가 멈춰지는 그때에 주님이 다시 오시고 이 세상의 역사가 끝이 남으로 신자들은 부활체를 얻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다.(고전 15:50) 이 연결성은 바로 왕국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중략)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고 이는 그분의 ‘통치’가 하나님의 최종 왕국에서도 핵심이 됨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스림과 통치의 개념에서는 분명히 천년왕국의 ‘왕국’은 이미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왕국의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통치로 보아야 한다. 이는 천년을 기간으로 보기보다 영원한 기간 즉 부활 승천으로 시작되는 영원한 주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5. 무천년설

무천년설(A-millennialism) 자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특히 20세기 초기 및 중반기를 통하여 Vos및 Ridderbos의 영향은 무천년설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 이후로 Louis Berkfor, W. Hendrikson, L. Morris, Oswald Allis, 그리고 A. Hoekema등의 신학자들이 무천년설을 지지하였다.
무천년설 자들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러한 유의 유토피아와 같은 천년왕국은 이 땅에 관한 한 예수 재림 전이나 예수 재림 후에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대신 무천년 자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의 성령의 역사기간을 천년왕국으로 보거나 아니면 하늘의 보좌의 하늘의 상태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것이다.
제이 아담스(Jay E. Adams)는 그의 책 ‘The Time is at Hand’에서 천년왕국을 복음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무천년이란 용어는 ‘실현된 천년기’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32) 사실 이 분의 의견은 무천년설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무천년주의 자들은 요한 계시록 20장의 천년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천년기가 주님의 승천과 함께 실현되어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년 기간 동안에는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으며 현재의 교회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왕국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무천년주의 자들은 사탄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全) 기간으로서 성령의 복음의 역사와 연결되며 따라서 천년의 기간은 실제적인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믿는다. 곧 천년의 기간은 교회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따라서 무천년주의 자들은 천년 왕국 이후 또는 천년왕국과 함께 (하늘의 나라일 경우)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본다. 예수님 재림 이후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온다. 그 사이에 소위 전(前) 천년이나 후(後) 천년이 말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천년왕국은 없는 것이다. 대신 무천년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의 실체로 보면서 동시에 그 나라는 영적으로 현 세상에 와있음을 강조한다.
그 나라는 성령을 통해 성도들 마음에 이미 와있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신다. 곧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고 장래에 또한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시대에 종말론적인 축복을 영적으로 이미 향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축복의 완성이 미래에 약속되었다고 본다.(*) 글쓴 이 / 스데반 황 목사(연세대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미국 비블리컬 신학대학원 신학 석사, PCA(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에서 목사 안수, 미국교회 목회 7년, 현재 인천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담임, 성경훈련연구원 원장) 저서 / 사랑의 15가지 속성, 역서 / 주님은 나의 최고봉, 약속과 구원, 성도의 영원한 안식, 거룩한 전쟁 등 40여권 출처 http://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Hapv/133
< 미주 >
1)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New York: Harper and Row, 1959), 361.
1-1) Karl Barth, Church Dogmatics (Edinburg: T. and T. Clark, 1960), III/2, 632.
2)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Scribner, 1941), I, 175-177.
3) 소요리 문답 37문
4) 영혼의 수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무덤에서 활동하지 않음을 뜻한다.
5) Heokema 1979, 184.
6) 사실은 과거주의(Preterism) 종말론이 최근에 많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주의 종말론은 완전 과거주의와 부분 과거주의로 나뉜다. 완전 과거주의는 계시록 전체가 과거 사건이라고 보는 반면, 부분 과거주의는 계시록 대부분이 이미 성취되었고 오직 주의 재림만이 미래에 남아있다고 본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사건에 대해 어떤 징조나 현상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또는 시간적으로 미래의 사건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7) Kenneth A. Kantzer. Our Future Hope: Eschatology and the Role of the Church. Christian Today 31:2 (February 1987), 5. An interview article with Gleason Archer, Jack Davis, Anthony Hoekema, Alan Johnson, and John Walvoord.
8) Iain H. Murray. The Puritan Hope: Revival and the Interpretation of Prophecy. Carlisle, Pennsylvania: Banner of Truth Trust, 1971. 이 책에서 머레이는 청교도 특히 영국 청교도을 중심으로 하던 후천년설의 역사를 탁월하게 다루고 있다.
9) Williamson 1964, 263.
10) Millennium,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1) Boettner 1958, 67-70.
12) Boettner 1958, 14.
13) Warfield 1929, 648-650.
14) Hoekema 1979, 177-180.
15) House 1992, 133.
16) 개종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아무 구분이 없다.
17) Williamson 1964, 260.
18)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죄의 세력으로 인하여 온 죽음을 이기는 것이므로 이는 더 이상 죽음이 있을 수 없음을 이미 가정하는 것이다. 부활 후에 또 사망의 세력이 있다면 이는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19) Hoekema 1979, 184.
20) Vos 1979, 160.
21) Vos 1979, 258.
22) Hoekema 1979, 186.
23) Poythress 1987, 14-15.
24) Poythress 1987, 21. 세대주의는 역사를 순결, 양심, 인간 정부, 언약, 율법, 교회, 왕국 시대로 나눈다.
25) Poythress 1979, 28.
26) A Companion to 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97.
27) 많은 종말론에 관한 공상소설들이 세대주의의 해석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Dyer C.H.의 사담 후세인을 주인공으로 한 The Rise of Babylon (Wheaton: Tyndale, 1991)등의 책이나 석유파동을 중심으로 한 종말론 Walwoord, J. F의 Armageddon, Oil and the Middle East Crisis (Grand Rapids: Zondervan, 1990)등이 있다.
28) Hoekema 1979, 197.
29) Ibid.
30) 이미 주께서는 부활 승천을 통하여 만유의 주가 되셨으므로 그의 통치는 시작된 것이다.
31)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무천년설을 다룰 때 있다.
32) Adams 197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