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핵심적 요약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1. 개혁주의의 기원, 용어의 문제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란 말은 역사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와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한 마디로 집약된다. 여기에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의미가 모두 내포된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그것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머문다. 칼빈은 ‘성경의 신학자’였으며 ‘성경적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感動, inspiration)으로 된 것으로 믿는다.(딤후 3:16)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딤후 3:14)이 성경의 진리이며 성경적 진리라는 것을 고백한다.

이러한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복음’만을 ‘성경적 복음’으로 보았다. 이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 열린 입장을  취하여 ‘성경적 복음’을 ‘성경의 복음’에 국한하지 않는 ‘포괄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와는 분명히 대조된다. 복음에 대해 이런 포괄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복음주의’라고 자처할지라도 그들이 말하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성경적 복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참 신학과 참 경건을 엄밀하게 추구한다. 그래서 고유한 기원과 근원 곧 성경에 충실히 붙들려 있으며 또한 성경의 근본적 가르침인 교리를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서 견지(堅持)해 왔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보수적, 근본적 성향은 단지 성향에 그치지 않고 신학적 정밀함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예를 16세기 말 이후부터 칼빈의 후예들 즉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서 발견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신학자’라고 불릴만한 칼빈의 후예들인 바빙크(Herman Bavinck), 카이퍼(Abraham Kuyper), 핫지(C. Hodge), 워필드(B.B. Warfield) 등은 개혁주의를 충실히 계승, 심화, 발전시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부요(富饒)하게 만들었다. 개혁주의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회고하면서 더욱 굳게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전망하면서 앞으로 내딛는 자리이기도 하다.

2. 개혁주의와 칼빈주의

개혁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定義)는 다양하다. 가장 넓게 이해하는 입장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와 정통신학 그리고 삶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개혁주의를 넓게 이해하는 경우 이는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과 동일시된다. 이 경우 ‘종교개혁’ 안에 개혁주의를 포함 시키기도 하고 역(逆)으로 ‘개혁주의’ 안에 종교개혁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여기에는 루터교(Lutheran)도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좁은 의미로 이해된다. 이 경우 개혁주의는 루터교와 구별되며 칼빈과 그를 잇는 후예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를 지칭(指稱)한다. ‘칼빈주의’로서 개혁주의는 어떻게 정의(定義)될 수 있는가? 저명한 칼빈신학자 펄만(Paul T. Fuhrmann)은 이렇게 말했다. “칼빈의 진정한 유산은 실로 구조가 아니라 방법 즉 사람, 그리스도, 믿음, 세계, 성경, 종교, 삶 등 모든 것들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애쓰는 방법에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또한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칼빈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창조, 계시, 구원의 전 영역을 엄밀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생명관(生命觀) 혹은 생활관(生活觀)이자 세상관(世上觀)을 지칭한다. 칼빈주의에 관한 고전적 명저를 남긴 미터(H. Henry Meet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언급했다. “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상이다.”(The central thought of Calvinism, therefore, the great thought of God.)

칼빈주의자들(Calvinists, Calvinians)은 칼빈에 의해 조명(照明)된 ‘하나님의 사상’을 계승하여 체계적으로 심화시킴으로 역사상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를 수립했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일체성’(一體性, unity)과 연속성(連續性, continuity)은 그들이 공유(共有)한 ‘하나님 사상’ 그 자체에 객관적으로 놓여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대상(對象)에 있어 뿐만이 아니라 그 방법(方法)까지도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을 본질로 삼고 인간의 주관은 철저히 배제하는 칼빈주의의 객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3. 개혁주의의 근본원리

 개혁주의의 근본원리는 곧 성경이다.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을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과 동일시할 때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를 되새기는 것과 다름없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하듯이 개혁주의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삶 중심’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모든 요소(要素)가 어우러진 것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며, 교리이며, 신학이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다. 즉 성령의 역사로만 수납(受納)된다.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성령의 조명(照明)으로 떨어지고(受) 그 감화로 들어온다.(納) 세상 지식은 이성(理性)으로 추론(追論)하나 성경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 수납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확(正確) 무오(無誤)하다. 성경의 권위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그 규범(規範)에 있어 뿐만 아니라 그 역사에 있어서도 무오하며, 사상과 문자(文字)에 있어도 무오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 저자들은 이차적(二次的)이다.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말씀과 기록이 모두 정확 무오하다.

이런 성경관에 기초하여 개혁주의 원리로 수립된 대표적인 것은 도르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0)에서 작성된 칼빈주의 ‘5대교리’(TULIP)이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회(PCUSA)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기 전인 1910년에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으로 선포한 개혁주의 교리들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奇蹟)들 등이다.  

 4. 개혁주의 언약신학

개혁주의는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 율법폐기론(律法廢棄論, Antinomianism) 둘 다 거부한다. 개혁주의는 신약시대가 율법의 끝이 아니라 완성(完成)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마 5:17, 롬 10:4)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이루시고(성취) 다 이루신 자신의 그 의(義)를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전가(轉嫁)해 주심으로 성도가 은혜 가운데 율법을 행하며 살도록 하신다. 칼빈은 이를 율법의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작정을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시고 그 의(義)를 성도의 의로 삼아주시는 경륜 곧 질서를 뜻한다. 이는 구속의 성취와 구원의 적용을 포함한다. 구속의 성취는 주님께서 단번에 모든 의를 다 이루셨음을 뜻하며(요 19:30), 구원의 적용은 그가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다 이루신 의를 성도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의의 전가(轉嫁)를 뜻한다.(행 2:33)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렇듯 구속사적 –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

타락(墮落)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망의 형벌을 받고 전적으로 무능(無能)하고 전적으로 부패(腐敗)한 상태로 태어나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영생(永生)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율법을 모두 순종하여 우리를 위한 의(義)를 다 이루셨다. 그 의가 우리의 영생의 값이 되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언약의 백성이 살아가는 길로 하나님이 주셨다. 율법은 본질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14) 다만 죄로 말미암아 율법이 저주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언약의 법은 율법(תּוֹרָה, Torah)으로 명령(命令)과 함께 약속(約束)이 있다. 그리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 율법의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죄(罪) 사함과 의(義)의 전가의 은혜를 선포한다.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에게 도망치게 하는 용법과 거듭난 사람이 그 가르침을 좇아 살아가는 규범이 되는 용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체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뜻을 다하여 율법에 계시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신학적인 기능을 감당한다.

이렇듯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을 계승, 심화시킨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있다는 합리주의(合理主義)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공로주의(功勞主義)도 거부한다. 또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운명론(運命論)도 거부한다.

칼빈에 따르면 개혁주의는 “우리는 알되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한 안다.” 또 “우리는 할 수 있되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한에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언약신학의 지평(地平)이 열린다. 그 지평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불변하고 충족한 진리로 삼는 참 신앙과 자기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큰 담대함을 얻는 참 행실을 아우른다.

한국 장로교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를 서구의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신학에 대한 식견이 깊었으며 신앙과 삶 또한 그에 걸맞게 경건했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역사적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작용함을 굳게 믿는다.(*) 글쓴 이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 조직신학 ) 출처 /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