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설교학 강의(1)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라

시작하는 말
기독교회 설교는 교회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하나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가르쳐질 때 교회는 부흥과 갱신을 가져온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의한 신앙과 삶의 개혁’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과 삶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성경 중심’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 신자들의 믿음과 행동의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고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이자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기독교회 존립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설교 없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 신자들의 삶도 역시 올바르게 설 수 없다.
더 나아가 이미 오래전에 개혁교회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취리히의 개혁자 불링거(H. Bullinger, 1504-1575)가 작성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53년)는 설교가 지닌 고상하고도 거룩한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다.”(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여기서 ‘est’(…이다)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와 하나님 말씀을 동등하게 만드는 엄청난 고백이자 선언이다. 이런 고백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공유했던 보편적 사상이었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가 ‘성령은 설교 된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의 원리로 굴절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설교의 핵심을 엿볼 수 있다.
1. 개혁주의 설교의 정의
설교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성경 말씀을 강해(講解)하고 오늘날의 회중(會衆)에게 적용함으로써 구원의 유익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먼저 기억하자. 설교 사역은 인간 목회자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교 사역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를 건설해 가시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설교 사역에는 언제나 두 사역자(two agents)가 개입되어 있다. 인간 설교자는 언어와 행위라는 의사소통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청중들의 육신의 귀에 전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청중들의 영혼의 귀에 복음을 선포하신다. 따라서 설교란 두 개의 다른 차원이 한 곳에서 만나는 역동적 사건이요 신비적 조우이다. 즉 인간 설교자의 수평적 차원의 의사소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수직적 차원의 구원 사역이 만나는 곳이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 역시 자신의 신명기 설교 76번째 설교에서 설교에서의 두 사역자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칼빈 연구의 전문가인 스토페르(R. Stauffer)는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란 ‘진실로 신적 행위’이며,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 다른 게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했다.
설교가 갖는 그 고상한 위치와 역할은 교회 역사를 통해 반복 강조되었다. 16세기 영국 청교도주의의 아버지이자 또한 청교도 설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퍼킨스(W. Perkins, 1558-1602)는 설교의 역동성과 신비적 사건을 예정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지적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 시간을 초월한 영원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들을 오늘 복음이 선포되는 이 순간 시간 세계 속에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불러 모으시고 교회로 회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신다. 따라서 설교는 단순히 오늘 우리 신자들만의 모임이 아니다. 설교란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 실현되고 구체화 되는 현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구원의 목적을 설교라는 수단과 방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 설교자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영원히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금 가슴 절절히 감격하며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2.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라.
–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하라! –
기독교회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은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생을 얻는다. 61
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베푸신 은혜의 길이요 구원의 방편(方便)이다.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장대에 매어 들어 올린 놋 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치유(治癒)되고 구원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마다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요 3:14,15)
비록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며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실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이다.(고전 1:18-25 참조)
고린도전서 2:1-5은 이방인의 스승이자 사도인 바울의 설교관(說敎觀)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이 다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고백 속에서 사도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세속(世俗) 학문이나 하나님의 율법에 부족하거나 뒤처져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바리새인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율법의 교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행 22:3) 율법의 의에 대하여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또한 배설물로 여겼던 까닭은 바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다.(빌 3:8)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십자가의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 메시지는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성 령(聖靈)의 손에 붙잡혀 전달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방법은 설득력 있는 사람의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통해 증거 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그림,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으로 양들을 지키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성령론적 관점에서의 설교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렉 하이슬러(Greg Heisler)의 ‘성령이 이끄는 설교’(Spirit-led Preaching)는 설교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중시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설교 사역을 주장한다. 성령께서 영감(靈感)하여 기록하신 성경 말씀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照明) 없이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철저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그러므로 기도의 땀이 흐르지 않는 설교는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상 설교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함은 사도행전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다름 아닌 사도들로 온 세상 만민(萬民)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신 것을 볼 수 있다. 즉 아시아에서의 전도의 문을 막고 유럽으로의 전도의 문을 여시고 인도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중략)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幻像)을 본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건너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유럽의 첫 번째 교회가 설립되었다.
또 두아디라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에 그녀의 마음을 여신분은 바로 주님이셨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행 16:14)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한 까닭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설교는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3.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설교학자 훅스트라(T. Hoekstra, 1880-1936)는 사도행전 6:4에 근거해 설교란 ‘하나님 말씀 봉사’(διακονία του λογου)라고 정의한다. 즉 설교자(說敎者)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나고 증거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는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과 섞지 않고 순전하게 섬기고 봉사한다는 의미다.
설교자는 자신의 의도대로 하나님 말씀을 조작(造作, manipulation)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복음임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주(主)가 되도록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이 설교를 지배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복종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훅스트라는 이러한 말씀의 봉사가 성경 본문 ‘해석’(解釋, hermeneutics)과 ‘적용’(適用, application)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먼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령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주해’(註解, Exegesis)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말씀에 결코 자신의 의도(意圖)를 주입(注入)하거나 강제적으로 대입(代入, Eisegesis)하여 성경 본문의 뜻을 왜곡(歪曲)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해석이 잘못되면 그에 따른 적용은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말씀의 봉사’로서의 설교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Soli deo gloria) 돌아가는 것이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께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참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살전 1:9,10) 복음 설교를 통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름을 받았고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엡 2:20-22)
더 나아가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의 유익을 위해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복음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 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중략)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중략)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24,31,33)
칼빈의 영적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개혁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설교 가운데 가장 먼저 출판된 것은 다름 아닌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지에 관하여’(1523년)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설교는 언제나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설교학자 해던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2017)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고 회중(會衆)에게 적용하는 ‘강해설교’(講解說敎, Expository preaching)야말로 ‘신적 권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형태’라고 확신했다. 로빈슨은 강해설교란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되는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고 그다음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로빈슨이 비록 개혁주의 설교학자는 아니나 개혁주의 설교학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즉 설교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주목한 점이다. 우리는 이미 앞서 설교 사역에서의 두 사역자를 언급했고 인간 설교자가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복음을 청중들의 육신의 귀에 전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 복음을 청중들의 영혼의 귀에 들려주신다고 확인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를 작성하는 순간부터 설교를 전달하고 또한 설교를 마친 뒤에 전달된 설교가 열매를 맺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설교란 단순히 예배 시간에 회중(會衆)에게 전달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란 회중들이 자신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배 시간에 들었던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글쓴 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