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설교학 강의(2) 설교와 설교자의 권위

1. 설교의 권위
– 설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설교는 죄인을 구원하는 권세를 갖는다.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설교는 권세 있는 설교다.
설교의 권위와 권세는 다름 아닌 천국을 여닫는 권세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난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렇다면 이러한 설교의 권위와 권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설교의 권위는 세 가지 사실에 기초한다.
(1)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았다는 데 기초한다.
설교 권위는 그리스도의 보냄 받았다는 데 기초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공적인 선포를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10)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이러한 사도들의 파송에 앞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사도들이 보냄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과 땅의 통치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만민에게 증거 하기 위해 권세를 받았다. 따라서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그리스도의 권세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섬김을 통해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신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사도들의 사역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그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권세와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도들의 파송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파송하신 것과 연관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cf. 요17:18)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파송 받은 사도들에게 주님의 권세가 주어졌음을 잘 알 수 있다.(마 10:1, cf. 막 6:7, 눅 9:1)
(2) 사람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다.
설교 권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다. 설교가 권세를 갖는 까닭은 설교자 개인 혹은 그 자신의 이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의 인간적 재능에 기초하지 않는다. 설교의 권위는 오로지 설교자가 전달하고 증거 하는 말씀에 연관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반복하여 증거 한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을 통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후 5:20)
칼빈은 이 사실을 ‘기독교 강요’(IV,8.2)에서 선명하게 묘사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이 모든 권위와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이나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주실 때 사실상 인간 자신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임명되는 직분에 주셨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야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봉사하도록 위탁받은 그 말씀에 주신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그들이 직분으로 부름을 받을 때 동시에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전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권위는 사실상 설교자의 봉사를 받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다. 이 사실은 성경의 몇 구절만 인용해도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 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구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3)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설교의 권위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설교 사역에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대사명을 주실 때 주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은 인간적 노력과 수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권능으로 사도들에게 임하시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역하게 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삶과 더 나아가 복음 증거의 사역이 영적 전쟁임을 명확하게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도록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기를 권했다.(엡 6:17-19)
오늘도 혈육을 가진 연약한 설교자가 천국 열쇠의 권세를 가지고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까닭은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았으며, 하나님 말씀이 지닌 고유한 구원의 능력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설교 사역에 함께 역사하심에 그 뿌리를 둔다. 그러므로 설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섬기는 봉사요, 바로 그때 설교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바로 그때 설교는 천국 문을 열고 천국 문을 닫는 권세를 갖는다!
2. 영광스러운 설교사역
– 하나님은 왜 연약한 인간을 영광스러운 설교 사역자로 부르셨을까? –
천국 문을 열고 천국 문을 닫는 열쇠 권은 설교자의 하나님 말씀의 봉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설교 사역은 사람이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설교 사역을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사람의 손에 맡기셨을까? 왜 더욱 고상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의 손에 위탁하지 않으셨을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중적 지혜가 깊이 배어 있다.
(1) 인간의 복음 설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질그릇 같은 인간 설교자를 통한 복음 설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만일 거룩하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생에게 말씀하신다면 흙으로 빚어진 불완전한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생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고 마침내 하나님 위엄과 권능 앞에 죽고 말 것이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도록 모세에게 간청하였다. 이는 자신들이 죽임을 면하기 위함이었다.(출 20:18,19, 신 5:22-27, 히 12:18-21) 그러므로 인간 설교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 선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택하신 방편이요,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적응(accommodation)하신 결과다.
(2) 인간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설교에는 전달자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상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를 사용하시기보다는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질그릇 같은 인생을 즐겨 사용하신다. 왜냐면 영적 피조물인 천사는 인생 삶의 걱정과 고달픔을 모를 뿐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천사는 죄를 지은 인간의 비참함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육신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과 비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죄 가운데 빠졌으며 죄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광대한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인간뿐이다.
따라서 동료 인간이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은 더욱 감명을 받고 복음을 쉽게 수용한다. 동시에 연약한 인생만이 죄의 비참과 구원의 기쁨을 체험적으로 알기에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적합한 존재다.(행 14:8-18) 이런 인생을 설교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다!
더 나아가 천사가 아닌 연약한 설교자의 입을 통한 복음 선포에는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만일 천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 한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천사의 능력과 영광스러움 때문에 그 전하는 메시지를 쉽게 수용하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동일한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을 통해 선포되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우리의 믿음이 선포하는 자에게 의존되는지 아니면 메시지 자체에 두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그리스도의 복음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다.(고후 4: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천사의 탁월함이나 인간의 지혜 위에 세워지기보다는 자신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설교자 자신과 설교를 듣는 회중은 설교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설교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로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의 대사’로 여겨야 한다.(고후 5:18-20) 설교자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자를 단순히 ‘이야기꾼’으로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하나님 구원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방편인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롬 1:16, 10:13-17) 또한 우리는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처럼 우상시해서도 안 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을 보자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숭배하려는 잘못을 범하였다.(행 14:8-18)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를 이야기꾼으로 무시하거나 신(神)으로 우상시해서도 안 된다.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오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여! 하나님께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설교 사역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위탁하셨도다!(*) 글쓴 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