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성경’과 ‘인간의 마음’
– ‘영혼의 의사’가 알아야 할 두 개의 책 –
설교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동적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란 설교자가 하나님의 회중이 모인 장소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풀어 해설하고 오늘의 청중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에는 설교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제외하고 수평적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세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다.
‣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 메시지인 하나님의 말씀
‣ 그 말씀을 듣는 청중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자를 중심으로 설교자의 소명과 권위, 설교자의 자격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야 하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언제나 배우기를 힘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관심을 기울여보자.
기본적으로 설교자가 청중을 알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에게 보다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바르게 지도하기 위해서는 학생 이해와 그 학생의 능력 평가가 기본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설교 사역을 위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와 평가(assessment)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회중에 대한 이해나 분석 없이 함부로 달려드는 설교자의 일방적 소통은 무모하기 짝이 없고 또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면 잘못된 회중 이해와 평가는 잘못된 목표를 지향하는 설교를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중평가는 설교자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며 직무라고 언급한 로이드 존스는 지적은 올바른 것이다.
미국의 강해설교 학자인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2017) 역시 “강해설교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메시지만큼이나 그 메시지를 듣는 자신의 청중들을 알아야 하고 그런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과 회중 모두를 주해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회중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에게 올바르고 적실한 적용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 ‘영혼의 의사’(physicians of souls)라고 불렸던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들은 목회자가 반드시 연구하고 알아야 할 두 개의 책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시이자 말씀인 ‘성경책’과 ‘인간의 마음’이라는 책이다. 필자의 청교도 설교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말한 이 두 책의 전문가요 대가였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경의 전체 주제만 아니라 성경의 구석구석까지 훤히 아는 소위 ‘걸어 다니는 성경’(Walking Bible)이었다. 그들이 설교 중에 인용하는 성경 본문과 단어들이 과연 성경에 나와 있는지 확인하느라 필자는 셀 수도 없이 성경을 들춰보았다. 이렇게 확인하면서 필자는 그들에 비해 성경을 몰라도 너무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Bible Works를 비롯한 뛰어난 성경 프로그램을 가진 설교자들은 언제든지 찾고 싶은 성경 단어를 검색하기만 하면 단번에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리는 환경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전원이 나간 상태에서 컴퓨터나 Bible Works는 한순간에 허망하게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 육신의 마음 판에 새기고 묵상함이 더욱 필요하리라! 전기가 나간 캄캄한 밤에 그리고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을 간직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이처럼 성경을 밝히 아는 청교도 설교자들은 또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영혼의 의사’였다. 그들은 사람이 다양한 처지에서 가질 수 있는 온갖 마음의 경향들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아는 심리학자였다. 그들은 인간 모두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 질병과 고통 속에서 일어나는 각기 다른 욕망을 낱낱이 아는 신학자요 목회자요 상담자였다.
그들은 ‘영혼의 거울’(어거스틴) 혹은 ‘영혼의 해부도’(칼빈)라고 불린 구약성경 시편의 대가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단하며 마음의 훈련에 힘쓴 성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 속에 나오는 간절한 호소와 간청은 청중들의 폐부를 뚫고 들어가 은밀한 거짓과 탐욕의 암 덩어리를 말씀의 메스로 예리하게 도려낼 수 있었다.
청교도 후예인 19세기 영국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이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성경만 아니라 세상 속의 청중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성경과 신문’(The Bible and the Newspaper, 1878)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책의 서문을 시작한다.
“내가 신문을 읽는 것은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스펄전은 이것이 ‘진실로 매우 탁월한 이유’(a very excellent reason indeed)라고 지적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젊은 신학자들에게 “성경과 신문, 둘 다 읽으시오. 하지만 여러분의 성경으로 신문을 해석하시오.”라고 조언하였다. 과연 하늘의 진리를 오늘의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설교자는 이 땅의 신문을 읽어야 하리라. 성경의 관점으로!
8.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
– 설교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 –
기독교의 설교란 넓은 의미에서 폭넓게 그리고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땅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늘 위로부터 값없이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설교란 하늘로부터 주어진 구원의 복음을 지상의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하늘의 은혜를 땅의 사람들에게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십자가 복음의 설교로 잇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설교는 하늘과 땅을 수직적으로 이어주는 다리(bridge)라고 말할 수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영국 복음주의 신학자요 목회자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 목사는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preaching as bridge-building)를 제안한다. 성경의 옛 세계와 오늘날 현대 세계 사이의 간격을 복음의 설교로 잇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설교란 과거 세계와 현대 세계를 수평적으로 잇는 다리이다. 왜냐면 설교자의 일이란 ‘하나님의 계시 된 진리가 성경으로부터 흘러나와 오늘날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토트 목사가 이러한 수평적 차원의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를 제안한 배경 속에는 단순히 과거 성경의 세계와 현대 우리 세계 사이의 역사적 간격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는 신학적 이유도 들어 있었다. 즉 스토트 목사는 기독교회 속에 오랫동안 팽팽하게 대치해 온 두 진영의 신학적 경향이 지닌 약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적이나 현대적이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현대적이나 성경적이지 못하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같이 고지식한 태도로 양극화되어야만 하는가? 양편 모두 그 나름의 정당한 관심사를 갖고 있다. 한쪽 편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고, 다른 한쪽 편은 하나님의 계시를 현실 세계에 사는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관련시키는데 관심 갖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의 원칙들을 보존할 필요성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한가? 또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그 원칙들을 현실 세계에 철저하고도 적절하게 관련시켜야 할 중요성을 배워 깨달을 수는 없는가? 그동안 이 두 그룹은 깊은 문화적인 단절 속에서 각각 자기 쪽에만 머무른 채 어느 쪽도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스토트 목사가 제안한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는 이중적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한 것이다. 한편으론 과거 성경의 세계와 현재 우리의 세계라는 역사적 간격을 잇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신학적 견해가 지닌 약점을 극복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간격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기엔 단순히 시간이라는 역사적 간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과 한국 땅이라는 지리적 차이도 있다. 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삶의 가치와 관습을 담은 세계관은 현대 한국 사람들이 갖는 세계관과 커다란 격차를 갖는다.
영국 지하철역에서 자주 듣는 방송 중 하나는 ’Mind the gap!‘(간격 주의하세요!)라는 경고의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우리는 언제나 성경의 세계와 현재 우리가 사는 현대 사이에 쉽게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현대인들에게 성경을 설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강해 설교를 주장하는 데니스 레인(Denis J. Lane. 1929-2017) 목사는 우리가 현대인들에게 성경을 설교할 수 있는 근거로서 두 가지 고리를 지적한다.
하나의 고리는 시대와 역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친히 다스리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다른 고리는 비록 환경은 급속히 변화할지라도 인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다시 말하면 불변하신 하나님과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요 성경의 세계와 현대 세계를 잇는 고리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이 두 고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그 첫 페이지를 시작한다.
9. ‘성경 본문’과 ‘환경’
– 본문(text)이 환경(context)을 주도해야 한다. –
설교자가 청중을 고려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청중은 설교자에 의해 전달되는 복음의 수신자요 복음이 지향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들어야 할 청중이 없다면 복음은 무의미한 것이요, 결국 복음을 전달하는 설교자도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따라서 청중은 복음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이 청중에게 올바르게 전달되도록 반드시 청중을 고려해야만 한다.
탁월한 교사는 세 가지 면에서 평범한 교사와 구별된다. 첫째, 탁월한 교사는 교사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우둔하다고 탓하지 않는다. 둘째, 탁월한 교사는 학생들의 형편을 이해하여 그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친다. 셋째, 탁월한 교사는 학생들이 잘 깨닫도록 가르치는 교수법까지 연구한다.
미국 텍사스주에 소재한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는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세계적으로 뛰어난 명성을 지니고 있다. 이 학교의 기본적인 교육철학은 “비록 훌륭한 교수가 귀중한 진리를 가르쳤다 할지라도 학생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코 가르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바로 학생의 입장과 학생의 관점에서 교육을 이해한 것이다.
학교란 무엇보다도 학생의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므로 학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학생으로 깨닫고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수들은 먼저 학생들의 형편과 능력을 고려하여 눈높이 교육을 한다. 눈높이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는 수준 낮은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치되 그들의 수준을 교수들이 기대하고 목표로 하는 정상궤도에 끌어 올리는 것이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학습 무능력 혹은 학습 부진을 탓하기보다 학생들의 지적 향상을 위해 교수법 계발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달라스신학교는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며 이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수들은 그 가르치는 교수법까지 연구하고 있다.
교수법에 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교수법을 소유하셨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비유’의 말씀을 통해 가르치셨다. ‘비유’란 지상의 것을 가지고 천상의 것을 가르치는 화법이다. 잘 알려진 지상의 이야기를 통해 하늘의 진리를 예증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말하면 비유(parable)란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로 ‘곁, 옆’이라는 ‘파라’(παρα)와 ‘두다, 놓다’라는 ‘볼레’(βολη)가 합쳐진 합성어다. 따라서 비유란 천상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상의 것을 곁에 두는 것이다. 즉 곁에 놓인 지상의 것을 보고 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란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속에 하늘의 진리를 담아 비추어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의 평범한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의 세계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색깔의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빛의 세계를 보여주듯이, 이 비유에 나타난 지상의 이야기들을 통해 하늘나라와 영생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길 즐겨 하셨다. 주님께서 이처럼 비유를 즐겨 사용하신 까닭은 청중들의 형편과 능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현대 설교학에서 청중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새롭게 부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설교학자 존 맥클루어(John S. McClure, 1952- )가 주장하는 소위 ‘원탁의 설교’(the Roundtable Pulpit)는 설교자와 평신도 사이의 협력을 강조한다. 그는 협력적 설교야말로 청중을 감동시키며 인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 ‘협력적 설교’란 설교자가 평신도들과 더불어 원탁에 둘러앉아 교회 공동체의 관심사를 논의하고 그 논의된 내용을 주일 설교에 반영하는 것이다.
맥클루어는 평신도들의 지혜와 경험을 설교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의 평신도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정당한 근거요 마땅히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현대 청중들의 필요와 요청이 강단을 지배하거나 조종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설교자가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여 청중의 상태와 위치를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특별히 현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은 탈권위 시대를 살아가기에 정당한 권위마저 부정하고 거부하는 시대적 조류 속에 빠져 있다. 이런 때에 설교자는 시대적 유행이 아닌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독특한 권위에 근거하여 청중을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text)과 청중의 환경(context)을 모두 고려해야 하되, 항상 본문(text)이 환경(context)에 대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다.
이러한 청중 분석과 평가는 언제나 참되고 정확해야 한다. 잘못된 회중에 대한 평가는 잘못된 평가 아래서 설교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적하는 20세기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교회 회원으로서 교회 출석과 정규적인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일이다. 왜냐면 그런 가정하에서 모든 예배의 설교는 기성 신자에게 적합한 교훈적 설교로 일관하여, 불신자에게 향하는 복음 전도적 요소와 요점은 무시되고 결국 복음전도는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이러한 지적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목회 사역 중 가장 흔한 체험은 젊은 대학생들이 주일 저녁 전도설교를 듣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짓된 가정하에’ 살아왔던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고 고백한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규적인 예배 참석자들이 누구나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설교자의 ‘완벽하고도 위험한 실책’이다.(*)
글쓴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