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설교학 강의(6) 회중의 설교 듣기

   설교자의 올바른 설교와 함께 설교를 듣는 청중인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또한 숙고(熟考)할 필요가 있다.

10. 설교자의 청중 이해

– 청중 분석의 근거와 다양한 청중들 –

설교자가 청중의 상황과 형편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까닭은 하늘의 음성을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설교자의 필수적 직무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는 청중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이미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들을 통해서 살펴보자. 먼저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8-23)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청중들의 네 가지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이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영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관점에서도 청중을 구분하신다.

두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대답은 하고도 가지 않은 아들이 있는가 하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에 “싫소이다.”라고 했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한 아들이 있다.(마 21:28-31) 

성경에서 청중의 모습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심판의 관점에서 더욱 더 뚜렷하게 구별된다. 마지막 종말에 있을 심판은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극적으로 묘사된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처럼 청중들의 영적 형편을 고려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들’을 언급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 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사역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그들의 다양한 형편을 고려하여 사역하였다고 고백한다. 즉 바울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되었고,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으며 약한 자들을 얻고자 약한 자처럼 되었던 것이다.(고전 9:19-22)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도 역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 즉 젖을 먹는 영적 유아의 성도와 단단한 음식을 능히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성도로 구분한다.(히 5:11-14) 

이러한 청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교회사의 지도자들을 통해 더욱 다양하게 묘사되고 증거된다. 로마 감독이었던 대(大)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는 회중 가운데 존재하는 지적, 사회적, 경제적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해 처음으로 말한 목회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목회지침’(Pastoral Rule, 591)에서 ‘하나의 교훈, 다양한 권면’이라는 제목 아래 36쌍의 서로 상반(相反)이 된 특징을 가진 회중 목록을 열거한 후에 각각의 쌍에 적합한 짧은 설교문을 제시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지혜 자와 우둔한 자, 뻔뻔한 사람과 유약한 사람, 순진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게으른 사람과 성급한 사람,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과 평화를 만드는 사람 등으로 구분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스트라쓰부르의 개혁자인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개혁주의 목회학 교과서인 자신의 ‘참된 목회학’(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1538)에서 에스겔 34:16을 근거로 청중을 다섯 가지 종류의 양으로 구분한다.

잃어버린 양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되 아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길 잃은 양

가끔 육신 적이고 세상 적인 문제들 속에 연루되어 있고, 가끔 거짓 교리와 거짓 예배에 빠지기도 하고, 잠시 그리스도의 회중에서 벗어나 소외되어 완전히 길을 잃었을지라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상처 입고 깨어진 양

그리스도와 교제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내적 존재 속에서 상처 입고, 찢긴 사람들, 그 실례로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상호 간 폭행과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와 분열과 파당,

병든 양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신앙과 사랑과 기독교적 삶의 모든 강력함 속에서 약함을 보이는 사람들,

살찌고 강한 양

잘 성장하고, 기독교적 삶 속에서 안정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다.

16세기 청교도주의 아버지인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역시 자신의 설교학 교과서인 ‘설교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 1607)에서 적용을 위한 범주로서 청중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즉 퍼킨스는 청중들을 영적 상태에 따라 7가지로 분류한다.

‣ 불신자들과 무지하고 다가서기 어려운 자들,      

‣ 가르칠 만한 자들이지만 무지한 자들,

‣ 지식은 있으나 결코 겸손을 모르는 자들,

‣ 이미 겸손해진 자들,

‣ 이미 믿고 있는 자들,

‣ 진리를 떠나 타락한 자들,

‣ 신자와 불신자와 함께 있는 공동체이다.

필자가 수학했던 네덜란드 아펠도른 신학대학교(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의 펠레마(W. H. Velema, 1929- ) 교수는 설교자가 설교를 작성할 때 유념해야 할 청중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 노인(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 중년의 과부 혹은 홀아비,

‣ 자녀를 둔 젊은 가정,

‣ 중고등학생들이다.

펠레마 교수는 특히 설교 초보자라면 반드시 이 네 가지 부류를 메모하여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설교문 작성 시에 항상 참고할 걸 조언을 한다.

11. 청중의 설교학 

– 청중 입장에서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

우리는 앞에서 설교자의 설교 사역을 위한 관점에서 청중 분석의 필요성과 그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제 관점을 바꾸어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 즉 원리적 이유와 실천적 이유가 있다.

첫째,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 청취가 필요한 원리적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특정 개인(설교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사실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설교를 위한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영적 자산이다. 왜냐면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세상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선포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마 28:19,20, 막 16:15) 그러므로 설교 청중인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만 할지 숙고(熟考)할 필요가 있다.

둘째,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 청취를 논의해야 할 실천적 이유로서 현대교회는 아무도 거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바로 청중들의 건강한 설교 청취 훈련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설교자들을 위한 설교의 기술 또는 설교학 책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나 설교를 듣는 청중의 올바른 설교 청취를 위한 책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하는 설교학’이 아닌 청중의 입장에서 바라본 ‘듣는 설교학’이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를 바르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설교의 효과가 증대되고 설교자는 더욱 좋은 설교를 위한 도전과 격려를 받기 때문이다.

설교 청취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다.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는 설교 청취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요소이다. 만일 우리가 설교자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 또는 좋지 못한 감정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과 귀는 선입견에 의해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해 이미 닫히고 만다. 이것은 연약하고 부패한 성정을 지닌 우리 모두의 현주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일차적 전제 조건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설교자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와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설교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의 대사’로 여겨야 한다.(고후 5:18-20) 

성경은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 청취에 대해 즉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반복적으로 교훈한다.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주의하라.”(눅 8:18) “귀 있는 자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3장) 

바이올린 연주자는 연주하기 전에 반드시 네 개의 줄(G, D, A, E)을 정확한 음에 조율(調律, tuning)하여 맞춘다. 이는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필수적이다. 아무리 탁월한 연주자라 할지라도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 아름다운 곡을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바르게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사현(四絃)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맞추어 조율해야 한다. 그것은 경외함으로 듣기, 기도함으로 듣기, 사모함으로 듣기 그리고 분별함으로 듣기이다.

(1) 경외함으로 설교 듣기 

성경에 그 선명한 실례(實例)가 나타나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의 설교 된 말씀을 ‘사람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살전 2:13) 즉 경외함과 겸손함 그리고 믿음으로 들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 존전(Coram Deo)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설교의 청취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잊고 만다. 현대교회가 직면한 커다란 위기 가운데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부족이다.

많은 사람이 설교를 성경에 대한 설교자의 견해나 해석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예배 시간에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이 서로 속닥거리며 잡담하는 것을 쉽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설교 시간은 우리 영혼의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이 가름 되는 엄숙한 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말씀을 사소한 인간의 이야기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롯의 사위들은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소돔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었다.(창 19:14)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히 11:6, 참조 막11:22, 행 16:31)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서 믿지 않는 건 아무런 유익이 없다.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여 은혜를 풍성히 누리자.

(2) 기도함으로 설교 듣기

또 설교를 듣는 일은 단순히 귀를 통해 수동적으로 듣는 것 이상의 일이다. 진실로 설교 청취란 영혼의 귀를 열고 마음으로 듣는 일이다. 왜냐면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적인 일들을 밝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함으로 설교를 듣는 일 역시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 없이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0-14) 여기서 다윗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의 모범이 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따라서 설교 청취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신의 영적 유익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도의 의무를 지닌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그리고 쉽게 설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뿐더러 본인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설교 청취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는 필수적이다. 왜냐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요 16:13)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바울은 ‘성령’과 ‘설교’(예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사도행전 16장에는 주목할 만한 언급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어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설교의 방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설교 청취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임의적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필수사항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이 변하여 부드러운 심성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단 마음으로 듣게 된다.  

우리가 설교를 바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게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도 기도는 필수적이다.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채 설교를 듣게 되면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설교 가운데 죄악 된 행위가 경책(警責)을 받게 될 때 어떤 이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행위를 책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설교자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로 잘 준비된 성도는 같은 경책의 말씀을 들을 때에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살펴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 설교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설교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이미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할 때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림을 받아 사도들에게 구원의 길을 요청하였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그와 반대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의인 예수를 잡아 살인한 자는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라고 고발할 때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분개하였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갖는 특성으로서 복음을 듣는 청중을 둘로 구별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듣는 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설교 청취는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의 삶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적 유익을 위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각자의 근심과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존전(尊前)에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말씀을 사용하시어 그 기쁘신 뜻대로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적절하게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설교의 신비요 비밀이며 기적이다. 다만 우리에게 속한 의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도록 기도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을 뿐이다.

(3) 사모함으로 설교 듣기

세 번째로 올바른 설교 청취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듣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자신의 사모함이 얼마나 큰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더 나아가 그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라고 했다.

마음이 상한다는 것과 헐떡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훌륭하게 묘사해 준다. 우리도 시인처럼 그러한가?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이 땅의 물질적인 것들을 남몰래 사모하며, 혹여라도 그것을 소유하지 못해서 못내 아쉬워하며 마음이 상하는가? 다른 시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하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함을 표현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1-3) 

베드로 역시 구약의 선지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상고했다고 기록했다.(벧전 1:9-11) 심지어 천사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는 이처럼 주의 깊게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취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 예수로부터 칭찬을 들은 것은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말씀을 기뻐하여 들었기 때문이다(눅 10:42) 

따라서 설교를 들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설교 청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지식의 축적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친히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설교란 최우선으로 마음에 연관된 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 전 한 중국 선교사가 찍은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예배의 한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교회당은 거의 황무하고 눈에 띄는 장식도 없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의자조차 없었다. 약 30여 명의 남녀 교인들이 오래되고 누추한 옷을 입고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드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그들이 어떻게 설교를 듣는가를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청중들이 모두 한결같이 설교단을 향해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구부린 채 열중하여 듣는 모습이었다. 필자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그렇게 듣기를 기도해 마지않는다.

(4) 분별함으로 설교 듣기

마지막으로 올바른 설교 청취는 분별력(分別力)을 갖고 듣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모함으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사고작용을 제한하는 맹목적인 청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설교 청취란 긍정적 의미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듣기 행위는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거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청취를 통해 설교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증거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베뢰아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바울의 설교)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맹목적 순종은 진리의 주님께서 결코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양들이 지닌 특성은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른다.(요10:4) 성도가 참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별을 위해 우리는 성경을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더불어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미경을 가지고 읽듯이 성경을 찬찬히 세밀하게 읽는 동시에 망원경을 가지고 읽듯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읽기에 있어서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성경 읽기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매일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주일 설교에 최대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만,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기가 쉽지 않다.

분별력 있는 설교 청취를 위해 설교를 들을 때에 요점 적기를 추천할 만하다. 16, 17세기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청교도들은 설교 시간에 ‘설교요점 적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정예배’를 돕는 데 매우 유용하였다. 청교도들은 주의 날에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가장(家長)이 가족들과 하인들에게 다시금 전달하고 설명하였다. 예배 시간에 기록한 설교요점은 다시금 설교를 회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습이라도 지혜롭게 시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설교요점 적기 위해 설교자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정보는 얻을 수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요점을 적은 내용은 반드시 개인적 묵상과 소모임의 교제와 나눔을 위해 활용되어야 그 유익을 경험한다.(*) 

글쓴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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