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론

개혁주의 성경관

신학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개혁주의 성경관

시작하는 말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관(聖經觀)을 논할 때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성경의 정경성(正經性), 성경의 영감성(靈感性), 성경의 필요성(必要性),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성경의 권위(權威), 성경의 명료성(明瞭性), 성경의 완전성(完全性) 등이다.

개혁주의는 무엇보다도 신구약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認定)하고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規範)이 됨을 믿는다. 성경은 또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인간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없이는 하나님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과거에 무슨 일을 하셨으며 현재 무슨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스미스(Morton Smith, 1915-1991)는 “성경은 신학적 자료들을 조직적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시(啓示)의 기록이다. 달리 표현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역사(救贖歷史)의 기록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의 구속 행위들의 역사적 기록이며 또한 그가 말씀하신 것의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행위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행위들을 해석하신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성경의 개념을 정리했다. 성경은 특별한 책이요. 그래서 특별하게 접근해야 한다.        

1. 성경의 정경성(正經性)

신학(神學) 작업과 신앙생활의 기준(基準)을 어떻게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신학 작업과 신앙생활을 위한 규범(規範)은 성경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신구약 성경 66권만이 교회의 정경(正經, canon, κανων)인 것을 믿는다.

구약은 BC 1450경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BC 430년경에 기록된 말라기까지 39권이며, 신약은 AD 5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AD 90년대까지 기록된 27권으로 신구약 합쳐 66권이다. 구약은 말라기 이후도 유대인의 문헌들이 계속 기록되었지만(Maccabees서 등) 이들 기록은 구약의 기록과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는 “아닥사스다 I세(통치기간 BC 465-424)의 때로부터 자신의 때까지 기록된 유대인들의 문헌이 구약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위대한 역사가인 요세푸스까지도 이렇게 요세푸스 당시의 구약 39권의 권위를 인정한 셈이다.

이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신약성경 27권이 어떻게 정경으로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해 보자. 우리는 “왜 신약 27권만이 정경이고 다른 책은 정경이 될 수 없는가?” “현지 존재하지 않는 자료가 발견되어 정경으로 합류될 수는 없는가?” “현 정경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될 책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등의 질문을 해야 한다.

(1) 정경 결정 기준

이상의 질문들에 대한 바른 답을 구하기 위해 학자들은 정경(正經) 결정을 위한 기준을 가정(假定)해서 정경문제를 접근했다. 어떤 기준(基準)을 정해서 그 기준에 따라 어느 책이 정경에 속할 수 있다고 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경 설정문제에 관한 지난 역사를 연구해 보면 가장 자주 언급되는 몇 가지의 기준이 등장한다.          

첫째, 사도성(師徒性, apostolicity)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물론 정경의 기준을 생각할 때 사도성을 배제(排除)하거나 정경과 사도성과 밀접(密接)한 관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사도들은 주님과 신약성경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경성과 사도성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크게 잘못이 없다. 사실상 정경은 사도성의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성을 정경의 기준으로 삼을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히브리서, 마가복음, 유다서, 누가복음, 사도행전,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책들이다. 왜냐하면 이 책들의 저자들은 사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성이 정경 결정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완전한 기준은 되지 못한다.

둘째, 먼저 기록되었다는 고전성(古典性, antiquity)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여기서 고전성은 실제로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된 바울의 서신이 고린도전서 보다 더 먼저 기록되었으나 정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셋째, 보편적 수납(受納, universal acceptance)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교회 공적(公的) 예배에서 보편적으로 읽혀진 것들을 정경으로 받으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열 두 사도의 교훈’(Didache)과 ‘목양자’(The Shepherd)는 초대교회에서 자주 읽혀졌다. 반대로 베드로후서, 요한삼서. 유다서는 초대교회에서 읽혀졌거나 설교되었다는 근거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두 사도의 교훈’과 ‘목양자’는 정경에서 빠졌고 베드로후서, 요한삼서. 유다서는 정경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에 읽혀진 것을 정경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넷째, 성경의 영감(靈感)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정경을 생각할 때 영감은 절대적(絶對的)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처럼 영감 되지 않은 문서가 정경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이 영감이 정경 결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영감은 기록될 당시에 되었고 정경 결정은 이후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 졌다. 영감과 정경 결정이 동시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5:9과 골로새서 4:16에 언급된 편지를 생각할 때 비록 그 편지들이 바울 사도가 영감 된 상태에서 기록했었지만 그것들이 정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정경성과 영감을 일치하는 개념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감 된 기록인 데도 정경에서 빠진 경우도 있다. 이는 영감을 정경 결정 기준으로 삼는 것은 완벽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도성. 고전성, 보편적 수납, 영감성은 모두 정경 결정에 있어 중요한 것이요 전경에 포함할 책을 선정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어떤 기준을 정해 그 기준을 통과하면 교회의 정경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기준들이 다 중요하기는 지만 신약 27권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정경 결정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면 현재 신약 27권의 정경인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는가?

(2) 정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선물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이성(理性)과 지혜를 초월(超越)하는 일을 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빼 놓으면 기독교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 사건도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100%인간이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합쳐진 200%의 존재가아니라 역시 100%의 한 인격의 존재이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이처럼 정경(正經)의 경우도 하나님의 지혜의 조화(調和)를 보여준다. 인간의 결정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 같지만 사실상 정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다. 우리는 정경이 순전히 우연한 요소에 의해 생성된 ‘우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듀 토잇(Du Toit)은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로 정경이 형성되고 편찬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정경을 연구할 때 정경 형성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웨스트코트(Brooke Foss Westcott, 1825-1901)는 정경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당시 교회 회의가 정경에 대해 의논할 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비중을 둔 요소는 그 당시 교회들의 ‘자연적인 표현’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 당시 교회들의 ‘자연적인 표현’을 통한 그의 섭리로 역사를 주관하셔서 현재의 27권 정경이 성립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블랙만(Edwin Cyril Blackman)은 신약 정경 결정 당시 “교회의 직감(直感)은 이미 새로운 문서들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었으며 말시온(Marcion)으로부터의 자극이나 압력이 필요 없었다. 건전한 가정은 말시온이 두 부분(복음과 사도)으로 나누어져 있는 정경 개념을 창시(創始)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미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따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다른 역사적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처럼 ‘역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결단(決斷)을 내려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에 따라 ‘그의 결정된 뜻’이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스톤한우스(Ned Bernard Stonehouse, 1902-1962)는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의 개념 속에는 자존하시며 자족하신 창조주요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정경의 형성 과정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요 역사를 주관하셔서 정경(正經)이 정경(正經)되게 하심으로 정경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는 정경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그대로 받는 것이다.

사실상 66권의 정확무오하고 상호(相互) 일치하는 책들이 수세기에 걸쳐 여러 저자들에 의해 성경 내용의 통일성(統一性)과 일관성(一貫性)이 유지되어 저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랄만한 이적(異蹟)인 것이다. 저자들이 서로 의논하고 기록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기록 과정을 주도(主導)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66권의 성경이 하나의 책으로 모아진 과정도 어떤 외적인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요 순리적인 진전에 의해 모아진 것이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게도 하셨지만 66권을 정경으로 모아 주셨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경의 기원(紀元)이나 존재는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認定)하는 행위와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이 저자이신 점은 하나님의 정경 구성의 근원적(根源的) 행위이지만(consitutive) 교회의 행위는 반사적 행위(reflexive)인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창시자(創始者)가 아니요 진리를 지지(支持)하고 나타내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체적(本體的, ontic)인 것과 지적(知的, noetic)인 것의 구분이다. 혹은 ‘사실 그 자체’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의 구분인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을 확증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의 행위는 정경 구성(構成)의 행위가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회의의 행위도 정경 구성의 행위가 될 수 없다.

신약정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어진 그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主管)하시며 하나님이 성령의 특별한 인도(引導)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는 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구약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것처럼(롬 3:2) 신약의 교회도 주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3) 신약정경 결정의 종결

역사적으로 볼 떼 정경 결정 과정에서 교회의 회의가 어느 정도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신약 정경 27권을 교회가 결정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라틴교회는 A.D. 382년에 로마에서 모인 회의에서 신약 27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것들만이 신약 정경이라고 결정했다. A.D. 393년 히포(Hippo)의 회의와 A.D. 397년 칼타고(Carthage)회의에서도 A.D. 382년 로마회의의 결정을 인준(認准)했다. 4세기말에 이르러 같은 결정이 계속 증가되었다. 이때로부터 신약 27권이 교회의 정경으로 고정(固定) 되어졌고 공식적으로 인정함을 받게 되었다.

   ⓵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신약정경 결정의 종결

교회 회의와 인간이 정경 결정에 일정의 역할(役割)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정경을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부인(否認)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영감 된 자료들을 역사적 과정에 펼쳐 놓으신 다음 통일된 정경으로 모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쓰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자료들을 주신 목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태도이다. 그런 개념은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著者)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개별의 책의 저자이시기는 하지만 유오(有誤) 한 교회가 수집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약은 신적(神的) 저작권을 가진 인간의 명문선집(名文選集)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실 때도 인간 저자들을 영감 시켜 잘못이 없도록 기록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된 성경들이 정경으로 확정하는 과정에도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신 것이다.

   ⓶ 예수의 구속사역의 단회성과 신약정경의 종결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역사(救贖歷史)의 시작(始作)과 진행(進行)과 종말(終末)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소유한 정경(正經)인 특별계시(성경)는 역사적 과정으로 발생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그 종점(終點)에 도달한 것이다. 신약의 모든 계시는 역사상에 존재했던 예수님과 연관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속사역(救贖事役)은 한번으로 족하다.(히 9:26)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특별계시를 역사적 과정으로서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사역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별계시를 말씀과 사건의 관계 및 세기적 특성 그리고 계시의 언약적  특성을 함께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Exaltation)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이래 계시가 멈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때로부터 특히 그리스도의 승귀로 부터 그가 다시 재림할 때까지(고전 1:17) 계시의 역사를 종결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 교회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 점진적(漸進的)으로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이를 가리켜 ‘특별계시의 성취와 적용’이라고 표현한다. 요점은 그리스도의 단회적(單回的)인 사역의 특성과 특별계시의 종료(終了)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단회적인 특성을 포기하면 특별계시의 종료를 주장하는 입장에 문제가 생기며, 특별계시의 종료(終了)를 양보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단회적인 특성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계시를 마지막으로 이제는 더 이상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28권 째의 성경이 기록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2. 성경의 영감성(靈感性))

개혁주의는 성경의 영감(靈感)을 말할 때 단순히 사상(思想)만 영감 되었다는 사상영감(思想靈感, dynamic inspiration) 이론을 배격하고 언어로 기록된 성경 모든 내용이 영감 되었음을 말하는 축자영감(逐字靈感, verbal inspiration)을 믿으며, 성경 66권의 일부만 영감 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영감(部分靈感, partial inspiration) 이론을 배격하고 성경 66권 전체가 영감 되었다고 가르치는 만전(완전)영감(萬全靈感, plenary inspiration)을 믿는다.

또 인간 저자들은 마치 타자기(typewriter)처럼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단지 받아쓰는 역할만 했다고 주장하는 기계적영감(機械的靈感, mechanical inspiration)이론을 배격(排擊)하고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성경의 저자들을 사용하시되 그들의 성격(性格)과 지식(知識)과 경험(經驗) 등 인간 저자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시면서도 잘못이 없게 기록하게 하셨다고 가르치는 유기적영감(有機的靈感, organic inspiration)을 받아들인다. 축자영감과 만전영감은 유기적 영감을 바로 터득하면 자연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유기적 영감만을 다루기로 한다.

 (1) 성경의 유기적 영감

개혁주의는 구약성경 39권과 더불어 신약성경 27권 역시 성령의 감동(感動)으로 기록된 정확(正確)하고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리고 개혁주의는 성령이 인간 저자를 영감 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유기적(有機的)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믿는다. 여기서 핸드릭슨(William Hendriksen, 1900–1982)의 말을 빌려 유기적 영감을 설명해 보자.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有機的)이지 기계적(機械的)이 아니다. 이 말은 영감을 생각할 때 성경의 저자를 한 역사적인 장면에 도달하도록 돕는 많은 행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含蓄)하고 있다. 성경의 저지를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특별한 성품을 소유하게 하시고, 특별한 교육을 받게 하시고, 특정한 경험을 하게하시고, 어떤 사건을 접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데 성령이 그 인간의 의식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가 글을 쓰도록 감동시키시는 일을 하시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전에 경험한 모든 행위와 철저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 저자의 마음에 그의 위치의 고하와 연령의 다소와 종족의 구별 없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데 가장 적절한 도구인 언어와 문체(현 성경)를 제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진정으로 인간 저자의 말임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런 유기적 영감의 성격과 성경 저자들의 교육 및 성품 그리고 경험 등을 정경 기록과 연관시켜 고찰할 때 마태에게 마태복음을 쓰게 하시고 누가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게 하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해석을 강조하는 바울 서신들을 마태나 마가나 누가에게 쓰게 하시지 않고 바울로 하여금 쓰게 하신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이 신약 정경에 포함된 27권의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 저자들을 유기적으로 영감 시키시어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신(新) 정통주의 성경 영감론

여기서 신(新) 정통주의의 성경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경 영감론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될 줄 안다. 신(新) 정통주의는 성경관에 있어 자유주의(自由主義)와 정통주의(正統主義)의 중간쯤 되는 입장을 취한다. 신정통주의가 성경이 인간의 종교적 의식(意識)의 산물(産物)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견해를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주의의 견해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新) 정통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거(證據)’라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발생하여 우리에게 성경본문으로 전수(傳受)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적 반응을 수반(隨伴)해야만 하는 현재의 경험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신(新) 정통주의는 성경의 무오(無誤)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약간의 잘못이 있어도 신(新) 정통주의 입장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新) 정통주의는 인간 실존에 는 깊은 관심을 가지나 객관적 계시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신(新) 정통주의는 이 같이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 계시의 객관성(客觀性)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K. Barth, 1886-1968)에 대한 신(新) 정통주의자 리드(J.K.S. Reid)의 평가가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성경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권위 자체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들을 때 우리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 서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소유한 것에 있지 않으며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주신 선물도 아니다. 성경이 권위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취하셔서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新) 정통주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바르트(K. Barth)와 미국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 목사로 ‘이터니티’(Eternity)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 1985-1960)와의 면담 내용을 통해  바르트의 성경관과 계시관을 알아보도록 하자.

반하우 : 당신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습니까?

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십니다.

반하우 : 그리나 지상에 계셨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

바르트 : 나는 그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살아 계십니다.

반하우 : 그러면 당신은 우리 주님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되 단순히 영적으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살아나신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바르트 : 나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반하우 : 당신은 인간이 오직 중생의 초자연적인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음의 응답으로 새 생명을 소유하여 구원 얻음을 믿습니까?

바르트 : 그렇고말고요. 나는 내 신학이 바울 특히 로마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이 새 생명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인격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삼위일체           의 신성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반하우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신학적 입장이 많은 비평을 받아 왔는데 그 문제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성경 밖에서 말씀하셨다고 믿습니까?

바르트 : 아니요, 성경을 떠나서는 계시가 없습니다.

반하우 : 그러면 당신은 세익스피어(Shakespeare)가 영감된 것처럼 성경의 저자들이 영감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의견이 아니시군요.

바르트 : 노!(No), 노!(No), 노!(No) 성경이 신적 계시의 유일한 자료입니다.

반하우 : 바르트 박사님! 이제 우리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박사님은 성경이 계시의 유일한 자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박사님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하나님의 계시           라고 믿습니까?

바르트 : (바르트 박사는 성경을 손에 들고 성경의 한 페이지를 편 다음) 만약 성경의 한 부분이 내게 말씀하면 그것은 내게 하나님의 말씀(God’s Word)  입니다. (그 후 다른 페이지를 가리키면서) 그러나 만약 성경의 이 부분이 내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면 그것은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이 말이 결정적인 중요한 말이다. 결국 이 말은 내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이 내게 감동을 줄 때만 성경이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말이다.)

반하우 : 그러면 박사님! 박사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던 그 부분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바르트 : 그렇고말고요! 그 경우 그것은 당신에게 하나님 말씀입니다.

반하우 : 박사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그 부분이 어느 날 박사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믿으십니까?

바르트 : 물론이지요. 성경 안에 있는 어느 것이든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교회의 책이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반하우 : 성경 밖의 어느 것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는  없을까요?

바르트 : 아니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자료입니다.

바르트는 폐쇄된 우주관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의 대화는 그가 성경의 축자영감이나 유기적 영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게 증거 한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자료라고 말하므로 성경을 중요하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성경의 내용이 자기에게 말할 때(경험되어질 때) 그 때에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단언(端言)하므로 성경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못한 것이다.

(3) 성경영감에 대한 성경의 자증(自證)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⓵ 디모데후서 3:16

먼저 디모데후서 3:16에 나타난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성경의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를 디모데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거짓 교사들보다 얼마나 더 유익한 위치에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고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딤후 3:13-15) 그래서 바울은 성경의 본질을 설명한 내용을 소개함으로 성경이 최고의 가치를 소유하교 있다고 말한다.(딤후 3:16)

여기서 정경 영감에 관한 본문의 문장 구성에 관해 잠시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등으로 된 것으로”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본은 이 표현이 세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이 본문에서 ‘성경’(graphe, grafhv)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어떤 책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했는가?

신약에 사용된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가리킨다. ‘그라페’(Γραφή)라는 용어는 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전문적인 의미로 신약에서 차용된다.(마 21:42, 22:29, 눅 4:21, 24:27,32,45, 요 2:22, 10:35 등) 그런데 바울은 본 구절에서 ‘그라페’를 관사 없이 사용했다. ‘그라페’가 바울 서신에서 관사 없이 사용된 예는 그렇게 흔한 예가 아니다.

바울 서신에서 ‘그라페’가 정관사 없이 사용된 경우 로마서 1:2, 16:26 디모데후서 3:16 중 로마서 1:2과 16:26은 정관사는 없지만 문맥에 비추어볼 때 ‘그라페’가 구약을 한정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디모데후서 3:16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디모데후서가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 서신이요 이 구절이 성경 영감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바울이 본 구절에서 정관사 없이 ‘그라페’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라페’가 관사 없이 사용되면 ‘그라페’에 질적(質的)인 의미가 부여된다. 즉 ‘그라페’의 질(質)을 소유한 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16에서 정관사 없이 ‘그라페’를 사용한 것은 일차적으로 구약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미 기록된 신약이나 기록의 과정에 있는 문서들도 ‘그라페’에 속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본문에 나타난 ‘모든 성경’이라고 할 때 ‘모든’(Pasa. pa‘sa)의 뜻이 무엇인가?

‘파사’(πᾶσα)를 집합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전체’(全體, all)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해석과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전 모든 것’(every)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해석이다. 집합적(集合的) 개념의 전체나 개별적(個別的) 개념의 전체가 결과적으로는 같은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모든’을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성경의 어느 부분은 영감 되고 어느 부분은 영감 되지 않았다는 사상을 인출해 내기 때문에 본문의 경우 ‘모든’을 집합적 개념의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성경의 어떤 저자도 성경으로 분류된 어떤 책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본문은 성경의 모든 부분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기에 유익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본문의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theopneustos: qeovpneusto)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가 문장 구성상 서술적(敍述的) 위치에 있는지 혹은 한정적(限定的) 위치에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서술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을 한정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으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한정적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성경을 직접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해야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을 한정적으로보다는 서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먼저 ‘데오프뉴스토스’ (theopneustos)가 뒤에 따라 나오는 ‘읍헤리모스’(ophelimos: wjfevlimo)와 ‘그리고’(kai: kaiV)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오프뉴스토스’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읍헤리모스’도 한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읍헤리모스’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본문의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다음은 ‘데오프뉴스토스’를 한정적으로 생각하여 본문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속에 성경의 어떤 구절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상을 함축하게 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경 66권 중 어느 부분만 따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한정시키고 있는 부분만 ‘모든 성경’속에 내포되고 그 부분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뜻이다. 이 처럼 문장 구조로 보나 그 의미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나 본문의 ‘데오프뉴스토스’는 서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옳다.

그러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은 무슨 뜻인가?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 한번 등장하는 단어 ‘hapax logomenon’이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것은 데 ‘오프뉴스토스’가 능동적으로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느냐이다. 이 용법을 성경의 영감과 연결시키면 능동적인 해석은 “성경이 영감 시키고 있느냐?”(Scripture is inspiring.)가 되며, 수통적인 해석은 “성경이 영감 되었느냐?”(Scripture is God-breathed.)로 된다.

이 문제는 얼핏 보기에 큰 문제가 없는 듯싶다. 하지만 ‘데오프뉴스토스’를 능동적으로 취하느냐, 수통으로 취하느냐에 따라 성경 영감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 게 된다. 만약 ‘데오프뉴스토스’를 능동으로 취하면 성경은 단지 영감의 도구나 수단의 역할을 할 정도에 머물러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럴 경우 성경의 기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성경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행위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데오프뉴스토스’를 수동으로 취하면 성경은 궁극적인 의의(意義)를 소유하게 되며 성경의 신적(神的) 기원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성경본문을 ‘하나님이 숨을 내뿜으신 행위’의 산물(産物)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의 내뿜는 호흡’과 ‘그라페’와의 본질적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이 같은 신비로운 특성 때문에 성경은 다른 모든 인간의 기록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呼吸)에 의해 생성(生成)된 산물이다. 하나님의 이런 행위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기원(起源)과 그 내용이 ‘하나님의 내뿜는 호흡’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 기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본문의 저자이신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란 의미를 요약하면 현재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신구약 66권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의 활동으로 나타난 산물로서 하나님이 기록하시기를 원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⓶ 베드로후서 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이는 디모데후서 3:16과 함께 성경영감을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절이다. 본문은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성경영감에 관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베드로가 ‘성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말했을 때 성경의 범위가 어느 정도 되는가?

‘성경의 모든 예언’(Pasa propheteia grapheslpa’sa profhteiva grafh)이 단지 성경 내에 있는 예언만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가? 물론 베드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가치가 아니요 성경의 신뢰성(信賴性)과 확실성(確實性)이다.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19에서 ‘우레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한 사실은 본문을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본분이 성경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베드로가 본문에서 예언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성경의 다른 부분과 구별하여 예언의 가치를 더 강조하여 말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같은 해석은 문맥에 나타난 의미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경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경의 모든 예언’은 구약의 예언 부분만을 가리키지 않고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본문에서 성경이 될 수 없는 것과 성경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한글 개역개정 성경의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에 대해 두 가지의 견해로 집약된다.          

그 하나의 해석은 한글 개역개정과 같이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번역은 성경 독자(讀者)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의 의미는 거짓 선생들이 전통적인 무리들이 인정한 해석을 따르지 않고 사사(私事)로이 임의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잘못을 공격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할 때는 사사로이 해석할 것이 아니요 성령에 의해 인도된 정통교회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푼 것이 아니니’라는 의미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번역은 성경 저자(著者)를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의 ‘에피류세오스’(epiluseos: ejpiluvsew”)의 용법은 성경의 신적 기원을 지지한다. 아퀼라(Aquila)의 역본에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할 때 ‘에피류시스’(ejpiv1usi”/ejpi1uefn)를 사용한다.(창 40:8) 그런데 문맥에서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실을 명백히 한다.

허마스(Hermas)도 ‘에피류시스’를 ‘하나님이 주신 해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경우 선지자들은 먼저 이상(암 7:1, 렘 1:11,13)이나 꿈(슥 1:8, 단 7:2)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그 후에 해석까지도 받은 것이다. 에스겔 37:1-10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에 대한 이상을 주시고 에스겔 37:11-14은 하나님께서 그 이상에 대한 해석을 직접 해 주신다. 다니엘 8:1-14까지에 나타난 다니엘이 올래 강변에서 받은 이상을 하나님이 직접 해석해 주신다.(단 8:15-27) 

그러므로 참다운 예언은 그 해석이 선지자 자신의 해석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해석이어야 한다. 여러 학자들이 ‘에피류시스’를 번역할 때 ‘해석’ 이외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스펜스(R.M. Spence)는 ‘에피류시스’를 ‘계시’ ‘나타냄’(revealment)으로 번역했으며 안드리(E.R. Andry)는 ‘충동’(prompting)으로 번역했고 스피타(F. Spitta)는 ‘분해’(dissolution)로 해석했고  루오(J. Louw)는 ‘영감’(inspiration)과 ‘황홀경’ (ecstasy)으로 번역했다. 만약 ‘에피류세오스’가 ‘영감’의 뜻이 있다면 본문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운 영감(황홀경)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로 문맥의 앞뒤가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디아스 에피류세오스’를 ‘선지자 자신의 영감’으로 번역하면 본문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영감으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요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가 되어 성경의 신적 기원을 명백히 하며 문맥의 앞뒤 역시 잘 일치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경이 영적인 전문가들의 권면이나 통찰력이나 조언에지나지 않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 없이 해석한 내용이 있다면 그것도 성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문은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을 언급한 후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 이라고 성경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러나 본문은 ‘사람들이 (중략)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 것’이 성경이라고 말함으로써 성경기록에 있어 사람들의 역할을 배제(排除)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성경이 다른 책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본문에서 성경은 ‘인간 저자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해석을 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과 ‘기록한 것’이 동일함을 볼 수 있다. 즉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 자체인 것이다.(엡 3:3,4) 본문은 성경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한다. 베드로는 사람이 성경의 기원이 아님을 밝히고 곧이어 하나님이 성경의 기원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계시해 주셨는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라고 할 때의 ‘받은’이 그 방법을 제시해준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받은’(페로메노이)을 특별하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단어를 여기에 의도적으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본문에서 사용된 ‘페로메노이’(pheromenoi: ferovmenoi)가 성령의  사역과 관계되어 사용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용례(用例)를 통해 추정하는 것이 유익하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묘사했다.(행 2:1-4) 여기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할 때의 ‘급하고’(pheromenes)는 베드로가 사용했던 ‘받은’과 같은 말이다. 이는 제자들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해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종(操縱)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의 완전히 조종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정상적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1:21에서 언급된 성령의 사역은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인도하는 사역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의 ‘받은’(페로메노이)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운반자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령이 제1차 저자요 인간 제자들이 제2차적인 저자임을 분명히 한다. 키스터마커는 “성령은 성경을 만들기 위해 도구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인간들을 사용하셨다. 성령은 인간들을 사용하시되 그들의 죄와 잘못에서부터 보호하시면서 그들의 재능, 통찰력, 습관, 특성과 함께 사용하셨다. 성령이 사람을 조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 점에 있어 명확하다. 즉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성령은 능동적이었다.”라고 바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에 관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영감에 관한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을 종합해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철저하게 100% 활용하시면서도 그들이 기록한 내용이 하나님이 기록하기를 원하는 내응으로 나타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은 100% 신적(神的)이면서 또한  100% 인적(人的)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편집자의 첨가) 이 같이 성경만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證據) 할 수 있으며 오직 성경만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證明)할 수 있다.(벧후 1:20,21, 요일 5:9, 살전 2:13) 그러므로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의 인정(認定)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스스로의 증거(證據)에 의해 독자적 신임성(信任性)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고 하였다.                        

3. 성경의 완전성(完全性)

종교개혁이 있기 전(前) ‘성경의 완전성’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사도적인 전승(傳承)들로부터 심각한 위협(威脅)을 받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주장하기를 교회는 성경이 있기 전(前)부터 존재하였고 스스로 즉 그리스도나 내주(內住)하시는 하나님의 영(聖靈)을 통해 존재하는 무오(無誤) 한 단체이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준(認准)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이므로 교회는 성경이 없이도 존재(存在)할 수 있으나 성경은 교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이 불완전(不完全)하므로 ‘기록된 말씀’(성경)에 대한 보충(補充)으로 사도들의 구전(口傳)과 교회의 전승(傳承)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66권의 정경(正經)에 가경(伽經) 7권을 더 첨부하여 모두 73귄을 정경으로 인정 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이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적극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신적권위(神的權威)와 유일성(唯一性)과 완전성(完全性)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 성경의 신적권위(神的權威)

   ⓵ 구약의 권위(權威)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39권의 구약이 권위 있는 구약 정경(正經)으로 오래전부터 받아드려져 왔다. 외경(經)의 경우를 제의하고는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받는데 심각한 논란이 제기되지 않았다. 여기서 구약 39권의 권위에 대해 신구약 성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 구약의 증거                

구약은 모세가 하나님의 대변자(代辯者)임을 분명히 한다. 모세오경 여러 곳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출 25:1, 30:11,17,22, 31:1, 32:9, 레 1:1, 4:1, 민 1:1, 2:1, 3:44)  또 모세가 율법 책을 기록했다는 증거도 구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출 24:4,  34:27,28, 민 33:2, 신 31:22,24)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후 모세가 기록한 모든 율법 책을 백성들에게 낭독해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수 8:31-35) 

또 모세오경으로 알려진 모세의 율법 책이 유다의 왕들을 통해 계속 전수되었다. 다윗은 구약 열왕기상 2:3을 통해 솔로몬에게 모세의 율법을 전수하면서 그 율법을 지킬 것을 부탁했다. 히스기야 왕은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고(왕하 18:6) 므낫세 왕은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으며(왕하 21:8-12), 요시야 왕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왕하 23:25)하였고, 여호야다는 여호와의 전(殿)의 직원을 세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도록 했다.(대하 23:18)

이렇게 구약 여러 곳에 언급 된 모세의 율법은 다 모세오경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켰다.(겔 7:26, 단 9:11.13) 시편에서도 율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시편 119편은 율법이 자주 언급되기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대선지서와 소선지서 모두 율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내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말 4:4)고 이스라엘 백성을 권면했다. 이처럼 구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율법으로 받아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또 모세오경뿐만이 아니라 선지서의 경우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정받았다. 선지자들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며 다른 선지자들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함으로 선지서들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하고 있다.(렘 28:8, 겔 38:17, 단 9:2, 슥 1:4-6)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자신들이 예언하는 말씀은 자신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임을 분명히 했다.(민 16:28, 24:13, 왕상 12:33, 시 41:6,7)

  • 신약의 증거                    

신약성경에 구약의 권위(權威)를 인정하는 표현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시고 ‘모세와 선지자’ 혹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눅 24:44 참조)이라는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가리키셨다. 예수님이 산상보훈 말씀 중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을 때 듣는 자들은 ‘율법’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구약 39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들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사용된 성경(그라페)란 용어는 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전문적 의미를 갖고 있다.(마 21:42, 22:29, 눅 4:21, 24:27.32,45, 요 2:22, 10:35 등) 특히 성경영감을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인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의 경우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 전체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구약의 증거와 신약의 증거는 구약성경 39권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위해 규범이 되며 권위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⓶ 신약의 권위(權威)

구약성경 39권은 예수님 오시기 오래 전에 정경(正經)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하게 굳히고 있었다. 예수님도 우리가 소유한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셨고 제자들도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신약의 권위도 사실상 구약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부적절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복종과 헌신도 문제가 된다.

스토트(John Stott)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복종은 예수님의 주님 되심에 대한 우리의 복종의 결과이다.”라고 바로 정리했다. 우리가 신약의 권위를 생각할 때 비(非) 역사적 관점에서나 초(超) 역사적 관점에서 권위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신약본문이 역사적(歷史的)인 책이면서도 우리를 위해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삶을 위한 권위는 신약성경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본문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기록된 과거의 문서 자체에만 권위가 내재(內在) 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본문과 저자이신 하나님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권위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암스트릉(Armstrong)은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탁월(卓越)함이나 증거(證據)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는 모세, 바울. 베드로 안에서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의 권위는 주권적인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그의 인간 저자들을 통해 말씀을 뿜어내신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진술, 모든 교리, 모든 약속 그리고 모든 명령을 지지하신다.”고 말했다.            

또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카이퍼(Abraham Kuyper)는 하나님의 법령들은 편재(遍在)하시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뜻이며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우리들의 삶의 과정을 결정하시고 신적인 권위로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성경본문과 성경의 저자를 분리(分離)시킬 수 없는 점이 성경과 다른 일반 역사적인 문서와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연구할 때 보수주의자들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는 보수 성향의 성도들이 성경을 생각할 때 보통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의 신탁(神託)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성경에 가장 높은 영광을 돌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말의 표현일 뿐 성경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신학적인 전제에 의해서 또 이론적인 배경의 결과로 나타난 것인데 결국 성경을 비(非) 역사적인 안내서로 전락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성경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역사적 인 발전 과정을 통해 나타난 역사적인 문서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문서가 하나님을 저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우리는 인간의 이성(理性), 판단(判斷) 흑은 추측(推測) 보다도 더 높은 곳 즉 성령의 비밀한 증거 안에서 우리들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의 계시적(啓示的) 성격은 역사적(歷史的) 성격을 초월하거나 떠나서 고려(考慮) 될 수 없고, 역사적 성격은 계시적 성격을 도외시(度外視) 하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적인 모든 특성을 사용하셔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생각할 때 역사적인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무리에게 전해주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구속사(救贖史) 행위(역사)가 없이는 계시가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구속의 행위가 없는 계시는 허공(虛空)에 달려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보스(G. Vos)는 “계시는 구속과 서로 연계(聯繫)되어 있기 때문에 구속을 생각지 않으면 계시는 허공에 달리게 된다.”고 구속 행위와 말씀계시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말씀계시는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특히 그리스도의 강림(降臨) 십자가 수난(受難)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復活)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책이다.  

(2) 성경의 필요성(必要性)

성경의 중요성(重要性)과 필요성(必要性)은 성도들과 목사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설명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 여러 가지 분야의 신학을 배우는데 특히 조직신학 분야를 배울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과목이 조직신학 서론이 성경론이다. 그 이유는 모든 신학 작업이 성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타락으로 인한 우리의 우둔(愚鈍)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혼란된 지식만 가중되고 참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된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또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또 성경이 없으면 창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 왔는지 하나님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정리될 것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 그가 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복음의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영적인 삶을 유지할 수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기억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될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선장 없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과 같고 조종사 없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같게 된다. 캄캄한 밤에 방향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과 같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비참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바른 인생의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특별계시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 주신다. 이를 자연계시(自然啓示) 혹은 일반계시(一般啓示)라고 한다. 시편 기자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장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라고 한 내용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롬 1:20)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啓示)해 주셨지만 죄(罪)로 타락(墮落)한 인간이 자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통해 겨우 하나님의 존재(存在)와 그 능력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이다. 그것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왜곡(歪曲)된 상태로 희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救贖)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신천신지에 대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또  하나님께서 구약의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또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그리고 신약의 하나님 백성인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지를 자연계시 만으로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계시(特別啓示)를 통해 자신과 자신이 하시는 일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심을 통해서(창 15:17, 출 3:2, 19:9, 시 18:10-16) 그의 사상과 뜻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하심으로(창 3:8-19, 신 13:1-6, 욜 2:28) 그리고 이적을 통해서(출 10:2, 요 2:11)나타내신다. 이런 특별 계시들은 신구약성경 66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이라고 한다.          

이 같은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은 다른 계시보다 더 우월(優越)한 위치에 있다. 그 이유는 성경 계시가 구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시 형태 자체가 문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죄(罪)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이 어떻게 성취되었으며 또 우리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시고 죄 문제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인간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주셨다.

성경은 구속(救贖)에 관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는 믿음에 이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 성경은 죄인(罪人)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과 사역을 오고 오는 세대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엡 3:3,4)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경전(經典)들과 그 성격이 다르다. 성경은 단순히 도덕률을 제시하는 그런 책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부터 신천신지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진행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으며 또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러나 성경의 필요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벌코프(Louis Berkhof)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 생각은 교회가 성경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몬타누스파(Montanists)와 재세례파(Anabaptist) 그리고 제네바의 방임파(放任波, Libertiness )와 같은 신비적 종파의 사람들도 역시 성경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신자의 마음속에서 직접 말하는 성령의 말씀인 ‘내적 광명’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루이스 뻘콥, ‘기독교신학개론’ 서울: 은성문화사, 1976, pp. 46-47.)      

(3)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우리가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논할 때 인간이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성경이 말해준다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다. 성경이 우리가 알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알려 준다면 우리는 즉시 모든 과학연구나 다른 분야의 연구를 멈춰야할 것이다. 성경만 보면 다 아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각하는 마음과 머리를 주셔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함으로 인류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게 하셨다.        

성경은 인간의 연구심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연구의 결과로 얻은 놀랄만한 성취에 대해 언급하지만(욥 28장 참조) 우주여행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나 심장이식 수술에 관한 기술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오늘날 엄청나게 빨리 발전하고 있는 전자분야에 대해 성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현대인의 삶에 관한 여러 분야에 대해 침묵한다. 또한 어떤 청년이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고민해도 이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성경에 없다. 우리가 반드시 어느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것들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성경의 충족성이 손상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이 충족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먼저 생각할 것은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의 기록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의 주요목적을 성취하는데 충족하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그루뎀(Wayne A. Grudem, 1948-  )이 정리한 성경의 충족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충족성은 하나님이 구속 역사의 각 단계마다 그의 백성이 소유하도록 의도하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기위해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기 위해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기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알 필요가 있는 것들에 대해 모든 것을 대답해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런 것들에 있어 성경은 충분하고 넉넉하다. 그러고 성경은 사람과 구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인간이 어디에서 잘못되었으며 왜 잘못되었는지를 말하고 그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를 제시해준다.”        

맥아더(John MacArthur)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대한 종교개혁의 원리는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는 뜻으로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은 단순히 말해서 우리들의 구원과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성경 안에 확실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암묵적(暗黙的)으로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의 길과 함께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도 가르쳐준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성경은 우리의 노력이나 짐작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남겨놓지 않고 명백하고 충분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맥아더는 “확실한 것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금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말할 때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것과 사람의 영적상태 그리고 구원에 관한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분명하고 충분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분명하계 설명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관해 우리들이 어떻게 믿어야 하며 타락한 사람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의 충족성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과 관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의 삶을 위한 원리(原理)를 제공하고 있다.

또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일반적 원리들을 빠짐없이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특별한 형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지만 그 특정한 형편을 위한 일반적인 원리는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일반적 원리는 다른 많은 경우에도 적절하게 적용시킬 순 있는 원리이다. 세상 기준들과 원리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나 성경에서 찾은 일반적 원리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일반적 원리들이 성도들의 삶에 충족할 뿐 아니라 완전히 의존할 수 있는 원리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 위해 충족한 것이다.      

또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의 최종성(最終性)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성경이 최종적이라는 말은 현재의 성경에 어떤 새로운 계시가 첨가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일 현재의 성경에 새로운 계시가 계속 첨가될 수 있다면 현재의 성경은 최종성을 상실하며 충족성 또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도 새로운 계시가 성경에 계속 첨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성경 자체에 어떤 것을 빼거나 어떤 것을 더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계시록에만 해당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구절이 계시록에만 해당하느냐 성경 전체에 해당하느냐에 대해서는 결정적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시록 22장의 내용은 예수님 재림 때에 도래할 신천신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성경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빼는 일을 금한 이 구절이 바로 신천신지를 묘사한 직후에 나타나며, 현재의 66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요한계시록 22:18,19 내용을 전체 성경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이하는 루이스 뻘콥, ‘기독교신학개론’ 서울: 은성문화사, 1976, pp. 48.에서 편집자 인용)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경의 필요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해 벌코프(Louis Berkhof)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재세례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재세례파는 저급한 성경관을 갖고 성경보다도 성령의 내적 광명의 절대 필요성과 또는 각종 신비적인 특별계시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전(口傳)을 기록 된 말씀인 성경의 보조물(補助物)로 생각했다. 즉 성경은 구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들 주장에 의하면 구전은 사도들이 전한 진리를 구체화 한 것이지만 성경처럼 기록하도록 주님께로부터 위탁 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기록된 말씀인 성경보다도 사도들이 전한 진리의 구전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구전이 없이도 성경만으로 완전하며 충족하다고 주장했다.”           

(4) 성경의 명료성(明瞭性)

성경에는 삼위일체 교리나 성육신(成肉身) 교리 같은 신비로운 구절도 있고 대단히 애매하고 난해(難解)한 구절도 있고 전문적인 성경해석이 필요한 구절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주므로 진지하게 구원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성령의 인도 아래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구원에 필요한 도리(道理)를 교회나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명료하게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 주기 때문이다.(사 34:16, 시 19:7, 눅 24:25-27,31, 히 11:) 또 성경 원저자이신 성령님이 성경을 읽는 성도의 마음을 조명(照明)하셔서 성경이 깨달아지게 하시어 구원의 지식을 명료하게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시 119:105)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시 19:7)라고 하였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하였다.

(5) 성경의 유일성(唯一性)

우리는 성경은 신앙(信仰)과 행위(行爲)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요 구원 사역에 있어 완전하고 충족(充足)하다고 믿는다.(딤후3:15-17, 시 19:7-10) 그러므로 기록 된 말씀(성경)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고전 4:6, 계 22:18-19) 우리는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구약 성경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지혜를 주며 우리의 신앙에 있어 최종적인 판결자(判決者)임을 믿는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고 하였고,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고 하였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 개혁주의 성경관이라는 주제 하에 일반적으로 논할 수 있는 성경의 1)정경성(正經性) 2)영감성(靈感性) 3)절대 필요성(必要性) 4)충족성(充足性), 5)권위(權威) 등 기초적인 부분을 다루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주신 특별 계시요 정확하고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規範)이며 표준(標準)이며 범사에 최종 판결(判決)이다. 그리고 타락으로 인해 그 영혼이 눈먼 소경과 같은 인간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구원의 길이 있으며 최초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글쓴 이 / 박형용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서경대 영문과(B.A.), 총신대학신대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Emory University(S.T.D.), 저서 / ‘약정경론’ ‘성경해석의 원리’ 외 다수)  출처 / 갱신과 부흥(Reform & Revival) 16호 2015. (주) 본지의 편집형식에 맞추어 편의상 원문을 재편집하였고 각주는 생략함, 편집자

< 개혁주의와 로마가톨릭의 성경관 비교 >

성경특성개혁주의로마가톨릭
완전성완전함불완전함(구전과 가경 필요)
권위성성경 스스로 증거(신적권위)교회가 인정(교회가 성경보다 우위)
필요성성경이 구원에 절대 필요함성경이 구원에 절대 필요한 것이 아님
명료성구원 필요지식 명료함구원에 필요한 지식 애매함
충족성구원계시로서 충족함부족함(구전과 가경 필요)
유일성신앙과 행위의 유일의 법칙성경 외 다른 구원의 방편 있음(유전과 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