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론

개혁주의 성경 영감론

개혁주의 성경관의 토대(土臺) 개혁주의 성경 영감론

   시작하는 말

성경관(聖經觀)은 신학을 결정짓는다. 성경에 대한 관점(觀點)은 사상과 믿음과 삶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신비주의(神秘主義)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주관주의(主觀主義)에 치우쳐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항하여 올바른 성경관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칼빈주의 성경관을 연구하고 적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장로교 신앙고백서와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논의를 통해 칼빈주의 성경관을 밝히고자 한다.

      1. 성경의 계시(啓示)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하나님 지식의 전달 수단인 ‘계시’(啓示, revelation)는 어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어 보이고 또한 나타내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것이었으나 당분간 잊어버린 어떤 지식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탐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지식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객관적으로 인간 자신 밖으로부터,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지식의 전달을 말한다.      

(1) 계시의 주체(主體)

그러므로 계시의 주체(主體)는 하나님이시고 그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주권적(主權的)으로 자유롭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현시(自己顯示, self-manifestation)이다. 이 계시는 보는 자가 보고 싶을 때에 스스로 열어보거나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는 자가 열어 보여줄 때 보여주는 만큼 보는 자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결코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한 구원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맺을 길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전 2:10, 욥 11:7)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

(2)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이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는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지만(요 20:31)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은 하나님의 자기 현시(顯示)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와 권능 그리고 지혜를 나타내시므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롬 11:36)

(3)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총화(總和)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이루어졌다.(시 19:1, 97:6, 롬 1:20) 그리고 그 모든 계시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통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 중심과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같은 영광을 가지셨던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신 분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요(요 1:14),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요,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2,3) 이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이처럼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이요 총화(總和)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아들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셨고(골 1:16), 또한 그 아들 안에서 자신의 계시를 완성하셨다.(골 2:9, 히 1:1,2)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므로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고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구원의 계시를 완성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로고스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지식은 모두 인간이 구성한 허구(虛構)요 자기 투사(透寫)일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 로고스(그리스도)의 개입 없이는 신(神) 지식이 불가능하며 성립될 수도 없다.(마 11:27)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는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스스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연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학자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계시(성경)에만 근거하여 신(神)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로서의 계시는 그 양식과 내용에 기초하여 일반계시(一般啓示, general revelation)와 특별계시(特別啓示, special revelation)로 구분한다.

(4) 일반계시(一般啓示)

일반계시(一般啓示)는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를 두고 모든 사람에게 자연세계와 인류역사 그리고 인간의 이성(理性)과 양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일반계시 자체(自體)는 오늘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명료하게 주어지고 있지만 인간은 타락 이후 죄로 인한 영적 맹목(盲目) 때문에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읽을 수 없게 되었다.(롬 1:18-25)

(5) 특별계시(特別啓示)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에 근거하여 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오늘날은 성경을 통해 일반계시의 내용을 포함해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거룩과 의(義) 그리고 긍휼과 은혜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구원에 대한 특별계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에 다 기록되게 하심으로 구원의 계시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셨다.            

이처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섬기기 위하여 모두 필요한 것으로 신적 권위가 있으며 명백하고 완전하다. 그리고 두 계시는 서로를 떠나 존재하지도 또한 서로를 떠나 작용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두 계시의 관계는 상호 유기적(有機的)이며 보완적(補完的) 인 형식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타락 전에도 후에도 일반계시에 비하여 특별계시가 항상 우선성(優先性, priority)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항상 특별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세계에 대한 자기 해석의 출발점과 표준으로 삼아야만 했었다. 그리고 타락 이후에는 인간의 창조세계에 대한 정상적인 해석이 죄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毁損)되었기 때문에 특별계시가 구체화된 성경이 사실상 하나님의 진리의 유일한 표준과 원천으로서 그 궁극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 일반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하고 중요한 예증들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항상 성경의 특별계시가 자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교정하고 결정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오직 성경만이 모든 신학의 ‘유일한 원천’(源泉)이다.

2. 자유주의와 개혁주의 계시관(啓示觀)

(1)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계시관  

현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과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근본적 태도에 공통점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는 성경의 무오(無誤)를 부인(否認)하는 것과 계시의 주관성(主觀性)만 강조하는 것이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완성되어 이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특별계시(성경)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소원된 응답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바르트와 브루너는 “계시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지속적(持續的) 혹은 아마도 더욱 낫게는 반복적(反復的)이라고 불려 질수 있다. 계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결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객체(客體)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가 객관적(客觀的)임을 부인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시 자체(성경)와 계시의 증거(성령의 조명)를 구분 짓는다.          

(2) 개혁주의 계시관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에서 영구적인 형태로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칼빈주의 교회는 성경의 객관성(客觀性)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적(主觀的) 요소를 동시에 둘 다 강조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의 제1절은 성경의 ‘기록 됨’을 통해 성경의 객관성을 고백하고 있다.

“…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 후에는 진리를 더욱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가 더욱 공고히 서고 더욱 더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것들을 온전하게 기록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기록을 가장 필요하게 만들었으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1장 제5절에는 성경의 권위(權威)와 신적(神的) 온전함에 대한 수납(受納)과 확신의 주관적인 면을 고백하고 있다. “… 성경의 무오(無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그 말씀으로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성경의 객관성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성을 동시에 주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성경의 객관성은 오늘날 더욱 강조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구약 성경 외에 새로운 신적(神的)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유주의적 주관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탈(脫) 성경적 행태(行態) 내지는 외부적 형태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객관성의 강조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방패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⓵  칼빈의 계시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광란(狂亂)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최근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 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인지 나는 묻고 싶다.”라고 칼빈은 반문하며 성경의 객관적 계시를 떠나 주관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자들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100년 역사를 넘어 부흥 2세기를 지향하는 오늘날에 있어 이 같은 신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창조 이전 상태처럼 깊은 혼돈(混沌)을 경험하고 있다. 말씀을 외면하고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경향과 그와는 정 반대로 배타적인 강조점을 두면서 성령의 역사를 간과하는 지성(知性) 정통주의적인 합리주의 경향을 목도하면서 올바른 방향설정에 대한 상황적 요청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⓶  종결 된 특별계시

하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는 본질상 말씀계시이다. 그 말씀을 이루시는 행동 역시 계시에 속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에는 ‘말씀계시’  뿐 아니라 ‘사건계시’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나 특별계시는  양자(兩者)가 다 객관적 계시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일반계시와 달리 특별계시에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선지자적 영감과 사도적인 영감이 포함된다는 사실에서 상이(相異) 점이 발견된다. 또 다른 상이점은 말씀으로 주어지는 특별계시는 종결(終結)되었고 그 후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곧  객관적인 특별 계시요 성경 외에 더 이상 다른 특별 계시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⓷  바빙크의 계시관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계시에 대해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수납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객관적 계시로서는 충분치 않다. 거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동반(同伴) 해야만 한다.”고 하여 객관적 계시 외에 성령의 조명 또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주관적 계시’(主觀的 啓示)라 칭했으나 그가 말한 의도는 객관적 특별계시의 내용의 불충족성(不充足性)을 말함이 아니다. 바빙크는 그의 책 ‘신학의 방법과 원리’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 지어 천국을 땅 위에 세우며 세상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하고 이 모든 것 가운데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더욱이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객관적인 특별계시가 주어져도 타락한 인간이 이러한 계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로써 아들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 있어야만 한다. 학문을 연구할 객관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종교에 주관적 종교가 서로 응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객관적인 계시는 그것을 받는 주체 안에 ‘내면적 계시’를 요청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내면적 계시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바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것이 객관적 계시(성경)와 연관을 가질 때에만 바로 정립된다. 이로부터 벗어나가든지 혹은 그것 위로 넘어서서 스스로 높은 체 하게 되면 주관적인 계시는 그 표준을 상실하게 되고 이로써 각양의 미혹(迷惑)과 미신(迷信)에 이르는 문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주관적 계시에 관한 해석은 오직 성경에 의한 객관적인 계시에 의하여 바로 잡아져야 한다.          

객관적 계시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계시되었으므로 어떠한 부분만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만약 객관적 계시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의식(意識)을 밝히고 이것을 강화하는데 그친다든지 혹은 다만 경건한 감정을 되살아나게 한다든가 혹은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높여 천국건설에 함께 참여케 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성령을 통한 내면적 조명의  필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특별히 구별된 성령의 사역 즉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주관적인 성령의 사역을 넓은 의미에서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미 주어진 객관적 계시에 첨부한다는 의미에서 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이 주관적 계시는 다만 신자로 하여금 객관적 계시인 성경을 알게 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도록 한다.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대하여 인간은 성령의 주관적 계시의 역사에 의해 종교적인 응답을 하며 하나님을 섬긴다.”

이 같은 바빙크의 견해는 비록 그의 용어가 혼란을 일으킬 요소도 없지 않으나 개혁파 전통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 하든 ‘주관적 계시’라 부르든 성령의 이 주관적 사역은 객관적 계시인 성경말씀과 항상 동반(同伴) 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개관적 계시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다는 의미의 ‘계시’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계시를 방편(方便)으로 죄인들을 그들의 존재(실유)와 의식(意識)에서 계속적으로 갱신(更新)시키신다. 객관적 계시인 성경은 교회의 확장과 지도 그리고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일을 위한 성령의 중요한 도구이다. 이렇게 칼빈주의 성경관은 객관적 계시로서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 성경과 성령의 영감

무디(Dwight Lyman Moody, 1839-1899)는 “내가 성경이 영감(靈感, inspired)으로 기록된 것을 확실히 믿는 이유는 성경이 나를 영감 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유일하고 참된 계시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를 말씀과 창세기 2:7에 기록된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성경의 저자들의 마음에 역사하셨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고 기록하는데 전혀 오류가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靈感)에 대한 확신은 무디의 말과 같이 성경의 진실성(眞實性), 진리성(眞理性), 무오(無誤) 그리고 신적권위(神的權威)와 상관되어 있다. 이 같이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칼빈주의 교회의 전통은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신앙고백의 처음엔 항상 ‘성경’ 즉 ‘계시’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영감과 그에 따른 권위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칼빈주의 성경관에서 핵심(核心)이라 할 수 있는 영감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유기적(有機的) 영감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은 성경이 유기적 영감 방식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유기적(有機的)이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기계적(機械的) 방식으로 사용하시지 않았으며 또 기록하려는 단어들을 그들의 귀에 불어넣지 않으셨고 저자들의 내면적 실유(實有)의 법칙과 조화(調和)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유기적 영감은 무생물을 사용한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의 독특한 성격, 재능, 교육, 경험, 용어 그리고 문체들을 사용하는 유기적 방식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무오하게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시면서도 성경 저자들이 지닌 각자 자신의 특색을 표현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역사를 쓰게 하셨고 어떤 이는 시편을 쓰게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장래 일에 대해서 쓰게 하셨으며 어떤 사람은 교리가 중심이 되는 책을 쓰게 하셨다. 또한 성령은 저자들의 저술 활동에서 죄의 영향을 제어(制御) 하시며 그들의 단어 선택과 그들의 표현에 지도해 나가신 것이다.

   ⓵ 유기적 영감에 대한 벌콥의 견해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1873–1957)은 “유기적(有機的)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들은 마치 기자가 펜을 사용하는 것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셨거나 그가 그들에게 쓰기를 원하신 말씀들을  그들의 귀에 속삭이지 않으셨으며 다만 그들 자신의 내면적 존재(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작용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쓰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또한 그들이 단어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사상들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지도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견해에 대해 평하기를 “이 견해는 분명히 성경의 표현과 잘 조화가 된다. 그것은 성경의 기자들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미리 그들이 기록한 일들을 조사하였다.(눅 1:1-4)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의 저자들은 반복하여 그들의 근거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환경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의 서신들도 우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경험들과 죄와 용서에 대해(시 32:, 51:), 둘러싸인 위험들과 은혜로운 구원(시 48:, 116: )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인들과 선지자들의 숭고한 시와 시적인 언어와 병행하여 우리는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산문을 그리고 이사야의 순수한 히브리어와 병행하여 다니엘의 아람어적인 색채를 가진 히브리어를 그리고 바울의 통용적(방언적)인 체제와 병행하여 요한의 단순한 언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이 성경 그 자체는 그것이 기계적으로 영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성령은 기자들을 그들의 인격(人格, personality)을 억압당함이 없이 그 자신이 그들을 각기 임무를 위해 조성하신대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셨고 지도하셨으며 그리하여 성경책들을 유기적으로 영감하셨다.”라고 하였다.

   ⓶ 성경의 영감에 대한 칼빈의 견해

성경의 영감(靈感, inspiration)에 대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말하기를 “‘영감을 주다’ 혹은 ‘영감’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표현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신적기원신(神的起源)을 나타내 주는 다른 표현 양식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입’ ‘성령의 학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표현 양식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이 처럼  칼빈은 인간 성경 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압도 당해 그들은 성령의 확실하고 성실한 서기(書記)로서 봉사하여 ‘성령께서 감화하시는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칼빈은 디모데후서 3:16에 대해 주석하기를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한 원리로써 받아들여야만 한다. 곧 율법과 예언서들은 인간의 쾌락을 위하여 전수된 것도 아니며 그 근원이 인간의 정신에서 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하여 구술(口述)되어진 것이다.”

칼빈은 ‘구술(口述)’이란 용어를 그의 주석 전반에 걸쳐 특히 예레미야와 바룩에 대한 토론에서 사용한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구술에 대해 언급할 때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주시는 교리나 가르침이란 배경 하에서 이 ‘구술’이란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이 ‘구술’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칼빈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단어와 사고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독특한 상황 안에서 신(神)의 가르침 혹은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였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했다.          

이 같이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계시(啓示)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성경 기록자들은 그들 독자의 능력과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전할 낱말을 선택하고 그들 자신의  생각을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었다. 이렇게 신(神)의 메시지(message)는 인간의 언어(言語)와 사고(思考)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칼빈이 영감을 ‘구술(口述)’로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⓷ 성경의 영감에 대한 워필드의 견해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의 성경론 해설은 유명하다. 그는 한 평생 성경의 완전(完全) 영감과 성경의 무오(無誤)를 변증했으며 당대에서 가장 잘 변호할 수 있었던 변증가였다. 그는 디모데후서 3:15,16을 해석하면서 15절에 ‘성경’이란 말이 한번 나오지만 이는 성경의 신적기원을 가진 것이라 강조했다. 또 16절의 ‘하나님의 감동’을 풀이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의미하며 ‘모든 성경’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 했다.  

또 베드로후서 1:19-21 말씀 역시 성경의 신적권위를 가리킨다고 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란 본래 ‘운반’이라는 의미의 뜻인데 이는 마치 물건이 운반자로 말미암아 운반되어 목적지로 옮겨지듯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전혀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機械的) 영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은 철두철미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책으로 인식되는데 매 곳에서 하나님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고 사람이라는 그들의 본성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을 통해 주어진 매 곳에서 인간 저자의 시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런 책으로 인식되었다.  

인간 저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성경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임무를 하나님께로 부터 부여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위해 필요한 한도까지 계시하셨다. 그 결과로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정확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⓸ 헤르만 바빙크의 유기적 영감의 증거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유기적 영감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성령이 선지자와 사도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사로잡고 인도하사 그들 자신이 생각하며 말하며 또한 기록케 하신다.

성령의 역사로 감동되었으나 말하는 이는 그들 자신이다.(벧후 1:20)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 성경의 제1저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많지만(눅 1:70, 행 1:16 등) 제2저자인 인간의 이름 예컨대 모세, 다윗, 이사야의 이름으로 인용된 곳도 적지 않다.(마 13:14, 22:43, 요 1:23,46, 5:46, 12:38 등)

둘째, 성령에 의한 ‘기록에의 충동’(衝動)이 유기적 영감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직무가 반드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글을 썼다는 자체가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감동하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셋째,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기록의 단계로 넘어갈 때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을 보며 계시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여유가 있었다.            

시편에는 경건한 찬송이 담겨졌지만 탄식과 기쁨과 간구와 감사가 섞여 있다. 저자들의 인간적인 소망, 두려움, 믿음, 신뢰, 비참, 탄식 등이 그려져 있다.

넷째,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다 각각 특색이 있고 서로 다르다는 점이 유기적 영감을 지지한다.

요컨대 성경 기자들의 교양과 지식과 정서와 경험 등 그들의 인격  전체가 유기적으로 사용되면서도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제1저자가 되시어 그들을 감동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되었다.

(2) 완전축자(完全逐子) 영감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은 성경과 관련해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 축자(逐字) : 글자 하나하나를 따름

첫째, 성경 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감화(感化) 정도는 성경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문자(文字)에도 미쳤으며 그 결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기로 의도하신 모든 뜻들이 오류(誤謬) 없이 정확(正確)히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적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기관(機關)들이었다. 이리하여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무오를 완벽하게 확인해주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영감은 완전축자영감(完全逐字靈感)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은 성경의 무오(無誤)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유기적 영감은 축자영감을 배제(排除)하지 않는 다는 말로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할 때의 성령의 사역은 미리 양육한 성경 저자들의 의식 속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게 좋은 방법으로 알려지도록 저자들의 사상(思想)과 문체(文體)와 단어(單語) 선택까지 주관하셨다. 사상 속에 문장이, 문장 속에 단어가, 단어 속에 자음과 모음이 서로 얽혔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중 어느 하나에 고집하여 서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경의 각 단어(單語)나 일점일획(一點一劃)이 개별적으로 무한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한 문장 속의 적당한 위치에서 그 깊은 의미를 발휘한다. 성경을 원자적(原字的 또는 文字的)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체와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잊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유대 서기관들처럼 우매한 성경해석을 낳기 쉽고 성경을 존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게 욕을 돌린다.

요컨대 성경은 유기적(有機的)으로 영감(靈感)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축자영감을 배제하지 않는다. 축자(逐字)를 고집하는 나머지 그 문장 전체나 사상을 무시하거나 반대로 사상을 고집하는 나머지 문자나 단어를 무시함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단어나 사상뿐만이 아니라 저자의 경험(經驗), 재능(才能), 인격(人格) 전체를 성령이 주관하사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표현되도록 감동하셨다.”

또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영감 된 인간 저자들의 개성(個性)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의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관계를 성당의 색유리 창을 통과하는 빛의 비유로 설명함으로써 인간 저자들의 오류가 불가피하게 성경에 있다는 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성당 창문의 색유리를 통과하는 빛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유리의 색조에 물들여지는 것처럼 인간의 심혼(心魂)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그것이 주어지는 통로인 인간의 개성에 채색되어 나오는 것이 분명하며 바로 그 정도만큼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건축가에 의해 색유리창의 색깔이 성당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빛에 본래의 색조(色調)와 색질(色質)을 정확하게 주기 위한 분명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면 어쩌겠는가?”  

워필드는 이렇게 색유리 비유를 통한 성경 유오(有誤) 주장을 배격(排擊)한 후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동류적’(同類的, concursive, confluent) 작용이  오류를 절대 불용(不容)하며 오히려 “그 작품에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신적(神的) 성질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러한 성령에 의한 성경의 영감이 성경 전체와 단어 선택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無誤)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동류적(同類的) 작용을 통한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 할 때 워필드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원본(原本)을 두고 말한 것이다. 워필드는 정확과 무오성은 성경이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 원본(原本)의 정확(正確) 무오성(無誤性)은 또한 성령의 내증(內證)에 의해 신자의 마음속에 확인된다. 워필드는 성령의 내증이 없이는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의 가슴과 머리에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그것이 성령의 조명(照明)이 있으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지식의 활력 있는 출처가 된다.”

4. 최종 권위로서의 성경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에 대한 고백은 당연히 그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고백으로 인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8절-10절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의 영감성에 두어 고백하고 있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의 자국어였던)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신약이 기록될 때에 많은 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직접 받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살피심과 섭리에 의해서 만대에 순수성이 보존되어질 권위가 있으므로 교회는 모든 논쟁에서 궁극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를 해야 된다. (중략) 정확무오한 성경의 법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중략) 신앙에 관한 모든 분쟁들은 최고의 심판자에 의해 결정이 되어야 하고 제반 회의의 모든 신조와 고대 신학자들의 의견들과 사람들의 학설과 개인의 영혼들도 그 심판자에 의해서 주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판결에는 전적으로 복종을 해야 되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어느 누구도 최고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 같은 신구약 성경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경의 유일 최종의 권위를 고백이다. 따라서 성경의 영감은 성경 권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⓵ 성경의 권위에 대한 머레이의 견해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진술들은 분명히 신구약 성경보다도 전통(傳統)과 교회의 의견(意見)을 근거로 삼는 로마 가톨릭교화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적(神秘的)인 내적조명(內的照明)을 통한 특별계시에 대한 광신적(狂信的)인 주장을 겨냥한 것이다. (중략) 이 표현에서 한 구절이 종종 오해되고 잘못 적용되고 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우리 마음속에서 말씀에 의해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살아 있고 영속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개혁자들은 살아 있는 음성이 교회의 신앙과 지도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상쇄(相殺)하기 위해 또한 신자의 내부에서의 성령의 음성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동일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이러한 성령의 특질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0절에서는 상호 연관된 특질인 성경의 궁극성이 고찰되고 있는데 교회의 성직자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신조화(信條化) 되어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더 나아가 “오늘날 수많은 신학적 저작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하는 저작들을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 저작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자체로 설명해 나가려 한다든가 성경 자체로 자신의 사고를 규제하려고 한다든가하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특히 대표적 개혁자들의 규제 원리가 포기되었으며 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성경의 궁극성도 포기되었기 때문이다”고 현대의 탈(脫) 성경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존 머레이는 계속하여 ‘성경의 유일무이성’(唯一無二性)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모든 교리,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는 구속의 모든 빛, 시간과 영원의 문제들에 대한 소망의 모든 빛에 있어서 성경의 메시지에 의존한다. 성경 없는 현재의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며 성경에 하나님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기독교이고 주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를 갖는 것은 길 잃은 자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한 유일무이성(維一 無二性)은 손상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성경이 하나님의 지위 그리스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성경의 관계 때문에 성경은 유일무이하다. 성경은 우리가 은혜의 구속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구속 주로서의 유일 무이성을 갖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식, 믿음, 체험, 소망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성경은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구원하고 구속하는 은혜에 관한 한 성경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의지의 유일한 계시다. 이것이 성경의 유일무이성((唯一無二性)이다.”

   ⓶ 성경의 권위에 대한 바빙크의 견해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도 성경의 권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권위는 모든 다른 권위를 훨씬 초월하여 하늘 같이 높기 때문에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해야 한다. 성경이 권위는 절대적(絶對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근거가 신적(神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나, 세상 정권이나, 총칼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신적 방법 곧 성령의 역사로써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다.”

   ⓷ 성경의 권위에 대한 칼빈의 견해

그런데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식과 확신은 오직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실 때뿐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도날드 맥킴(Donald K. McKim, 1950- )은 그의 논문 ‘칼빈의  성경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판단이나 추측  이상의 것 즉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 의해 이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성경에 대한 존경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또 칼빈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이 말할 때 인간적인 수단들을 결코 의존하여 증거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성령의 증거가 모든 이성보다 우월하며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써 증명되기 전에는 그 말씀은 인간의 마음에 결코 수용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영(靈)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함을 칼빈은 믿었다.(기독교강요 제1권 제7장 4항) 성경의 자기 확증적인 권위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강조는 성경의 권위를 증거나 논리에다 굴복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칼빈으로 하여금 생각나게 했다. 칼빈은 기록하기를 “성경 안에서 유일하고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 각자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기독교강요 제1권 제7장 5항)

따라서 칼빈이 가장 강하게 강조한 바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는 성령의 사역에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증거 하여 주는 인간적 증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이 독특한 장엄성, 강한 인상, 최고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기독교강요 제1권 제8장 1-4항, 기억들과 예언 : 5-10항, 단순성, 천상적 성격 그리고 신약의 권위 : 11항, 교회의 우주적 일치성, 순교자들의  믿음 : 12,13항)

그러나 칼빈에게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헛된)한 것이었다. 이런 ‘외적인 주장’들이나 ‘인간의 증거’들은 적합하지 않다고 칼빈은 말했다. 단지 이런 것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간접적인 도움으로써 유용하다.(기독교강요 제1권 제8장 13항)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이미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이러한 증거들은 유용하다.    

외적인 증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확실해지고 성령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도록 한 후에야 비로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끔 더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로써는 결코 믿음을 세울 수 없다. 칼빈이  말했듯이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설득 위에 기초할 때에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충분히 보여줄 것이다.”(기독교강요 제1권 제8장 13항)

따라서 칼빈주의 성경관은 성령의 사역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최종적이며 유일한 권위는 성경의 영감과 그것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칼빈주의 성경관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 자체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결론

칼빈주의 / 개혁주의 성경관은 성경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수집물’(蒐集物)이나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기록물’(記錄物)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고등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된 ‘객관적 계시’로서 스스로의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개관적 계시인 성경이 개인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靈)의 조명(照明)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성경관은 성경에 대한 확신과 이해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감동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자연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에 대한 파괴적 비평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확신케 하시는 초자연적 경험을 갖지 못한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관은 신학과 설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극히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관의 정립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비평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의 발현으로 성경에 대한 개념이 저급(低級)한 단계로 내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칼빈주의 / 개혁주의 성경관의 확립과 교육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말씀의 권위 아래 교회의 일과 우리 모두의 삶을 순복해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기석호 목사 Th.D.,(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충성교회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