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0)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0)

< 1부 > 개혁신앙의 원리들
1.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2. 하나님 중심의 원리
3.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
4. 신자의 삶 강조의 원리
< 2부 > 개혁신앙의 핵심교리들
A. 성경론(계시론)
B. 신론(神論)
C. 인간론(人間論)
C. 인간론(人間論) (2)
(3) 죄의 전가교리(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 사이의 관계)
– 죄의 전가교리(원죄)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그의 후손들인 나머지 인류와 독특한 관계 속에서 살았다.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류의 혈통적 조상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행위 언약의 대표였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설정하셨던 행위 언약에 있어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세움을 입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언약적 대표의 위치 때문에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롬 5:12-21 고전 15:21,22)
원죄(原罪)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 아이가 죄인일 수 있는가? 성경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에서 부터 그 원인을 찾아낸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벌은 그가 저지른 범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결과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범죄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온 결과 외에도 그것과 함께 모든 인류의 인생 속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다.
오늘 모든 인류는 자신이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이미 아담 안에서 원죄(原罪)를 이어받아 부패한 성품으로 태어난 죄인인 것이다.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행정원리가 바로 언약의 대표자인 아담의 존재의 성격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으므로 그 대표의 범죄는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로마서 5:12 이하의 내용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행정 원리를 행위언약의 관점으로 설명해 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15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18절)
–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그러나 아담의 죄 때문에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날마다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 앞에서 죄악 된 마음과 행동들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죄인인 것이다. 즉 원죄(Original sin) 뿐만 아니라, 자범죄(Actual sin)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원죄는 모든 자범죄의 내적 원천이 된다. /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매가 맺히듯이 원죄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죄악 된 생각과 행동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원죄는 하나이지만 / 자범죄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로마서 5:18에 보면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라고 말해준다. 아담이 선악과의 범죄로 타락한 후에도 여러 가지 죄를 지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처음에 타락케 한 그 한 범죄의 행동에서 인류의 원죄의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 원죄의 영향 아래서 인류가 저지르는 자범죄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 모든 사람은 죄인
끝으로 원죄는 일반 사람들 혹은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반대를 받기도 하지만 자범죄는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자신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죄란 수천 년 혹은 수억 년 전에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만나서 얘기해본 적도 없는 한 아저씨(아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기에게 그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수용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들은 우리가 다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될 때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조,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부활, 재림 등 그 어떠한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들도 그러한 믿음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신적(神的) 권위를 수용하는 신앙인에게는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나의 이성적 판단 보다 더 정확한 진리적 가르침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리 힘든 문제는 아닌 것이다.
(4) 자유의지론
행위 언약의 행정 안에서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인류의 타락의 교리를 생각할 때 그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들 중의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이다. 개혁신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인간의 타락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를 말하게 된다.
과연 인간의 타락이 어느 정도까지인가? 전적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면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면 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성경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최초의 신학적 논쟁의 대표적인 사례는 4,5세기경에 전개되었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인류에게 퍼져있는 죄의 우주성은 인정하면서도 죄의 문제에서 인간의 책임을 정당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들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중립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결과도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그 영향이 미쳐졌고, 그의 후손들까지 죄인으로 만드는 원죄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아담의 후손들도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기 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그러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거룩한 삶을 살고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궁극적인 결정은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는 인간의 개인적인 의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가르침을 확립한 신학자였다. 물론 어거스틴도 그의 생애 초기에는 펠라기우스와 비슷한 관점을 지녔었다. 구원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어거스틴은 타락 이후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심판의 결과로 전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따라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고 인간의 의지도 죄의 노예상태에 놓이게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즉 인간이 가지게 되는 믿음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엡 2:8), 인간 편에서 우리가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어거스틴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는 인격체임을 지적했다. 즉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결국 죄를 짓지만 억지로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적인 결정 속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 에드워즈의 관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이 종교개혁시대에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대체적으로 루터는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노예 의지론’을 주장했고 에라스무스는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과 루터 혹은 칼빈으로이어지는 정통신학은 ‘노예 의지론’을 성경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였지만 복음전도와 부흥운동의 상황 속에서 ‘노예 의지론’은 그렇게 환영받는 교리가 되지 못했다.
복음전도의 상황에서는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믿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교리는 불필요한 말로 간주되기 쉽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시기에 이러한 교리는 환영받지 못했었고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정통 신학자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과제로 여겨졌었다. 그러한 고민을 했던 인물 중에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 수 있다.
에드워즈는 타락 이후 인간 상태를 ‘자연적 능력’(natural ability)과 ‘영적, 도덕적 무능력’(spiritual, moral inability)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려 했다. 인간의 의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의지는 중립적이지만 그 의지를 사용하는 인간의 주체로서 마음(heart)이 부패되어 있으므로 결국 범죄에 이르게 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한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책임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는 부패한 마음의 영향 아래에서 의지를 죄의 방향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서 복음을 거부하고 죄의 길로 가게 된다고 본 것이다.
– 찰스 피니의 부흥 방법론
위에서 살펴본 에드워즈의 구분법이 후대의 ‘신 학파’(new school)에 의해서 확대 해석됨으로서 자연적 능력은 점차 더 확대되고 영적 무능력의 영역은 더욱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칼빈주의 신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말했던 ‘자연적인 능력’과 ‘영적 무능력’의 구분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결국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부패와 무능력을 말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이후 신 학파에서의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런 신학적 성향은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신학자였던 찰스 피니에게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교리를 강조하는 구 학파의 칼빈주의를 꺼려했던 피니는 특히 대부흥운동이 전개되던 19세기 미국 상황 속에서 ‘부흥 방법’의 개발을 강조했다. ‘참회자 지정석’과 같은 방법을 개발하여 집회 시간에 그 자리로 나오는 행위들을 통해서 회심을 유도하는 실용주의적 기법들을 사용했다. 인간의 방법들을 하나님의 영적 부흥과 동일시하는 ‘부흥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자연적 능력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적 인본주의가 강조되고 하나님의 주권적 부흥역사를 인간의 기술로 유도해내는 부흥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안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는 부흥이 아닌 정해진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면 발생되는 인본주의적인 부흥을 말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의존해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의 결과로서 이해되는 부흥으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다.
– 개혁신학의 입장(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전적 부패와 무능력 교리의 중요성)
신자의 구원과 복음전도의 주제 속에서 전적부패와 무능력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의지는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스스로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서 영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신의 상태가 완전히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 대상자들 중에 “나중에 믿겠다.”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나중에 언제든지 자신이 의지적으로 결정하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적 세계를 볼 수도 없고 찾으려 할 마음도 생길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들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만이 인간은 눈을 뜰 수 있고 어두움을 깨치고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시대의 진정한 부흥이란 인간의 계획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들을 진행해야할 것이나 중생과 구원과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물론 인간의 방법들을 사용하시는 가운데) 이뤄질 것이기 때문 이다.(*) 글쓴 이 /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