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3)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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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개혁신앙의 원리들
1.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2. 하나님 중심의 원리
3.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
4. 신자의 삶 강조의 원리
< 2부 > 개혁신앙의 핵심교리들
A. 성경론(계시론)
B. 신론(神論)
C. 인간론(人間論)
D. 기독론(基督論)
D. 구원론(救援論) – 1

기독론이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이라면 구원론은 주님이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로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다양한 축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전통적으로 구원의 서정(序程, order of salvation, 구원의 순서)이라는 주제 아래 그 다양한 축복들을 1) 소명 2)중생 3)회심(믿음과 회개) 5)칭의 6) 양자 7) 성화 8) 성도의 견인 9)영화의 순으로 말한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런데 이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비로써 다른 모든 영적 축복들의 요소들이 따르며 서로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연합의 개념을 뒷받침해주는 가르침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요 15:1-11)과 바울의 가르침들 속에서 풍부하게 제시된다.(엡 1:3; 롬 6:4-8; 엡 2:6; 골 3:1-4)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말해주며, 그들의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님과 연합함으로 신자는 주님의 죽음, 부활, 승천 등의 사건들이 자신들의 삶에 실존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도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며, 주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2. 소명, 중생, 회심(믿음과 회개)

(1) 소명(召命, 부르심, calling)

성경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보편적(普遍的) 소명과 유효적(有效的) 소명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반드시 구원의 상태로 인도되는 부름을 의미하고 전자의 소명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효적(有效的) 소명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능력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무조건적인 은혜(恩惠) 가운데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은 반드시 능력으로 그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지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2) 중생(重生, 거듭남, born again)

1) 중생에 대한 개혁 신학의 이해

개혁 신학은 중생을 교회 예식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전주의적 관점과도 다르고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고 보는 알미니안의 관점과도 다르게 이해한다.

개혁 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서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으로 본다. 중생에 대해 성경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이미지들은 모두 중생의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말하고 있는 바 피조대상이 먼저 창조사역의 동인이 되거나 출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부활의 이미지가 제시되는데 죽은 자가 먼저 부활의 시작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부활하게 하는 분으로부터 그 사건이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중생과 회심과의 관계

중생과 회심(回心, 회개와 믿음, conversion)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 두 가지 개념들은 바르게 서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 중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중생은 인간이 먼저 노력하거나 준비한다고 주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도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성령님의 비밀한 초자연적 사역이다.(요 3:8)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한 사건으로 인간 의지나 참여와 상관없이 성령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주어지는 역사다.

– 그러나 회심은 중생의 역사의 결과로서 발생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중생에서 인간이 수동적으로 남게 되는 방식과는 달리 회심에서는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두 가지 사건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구별하기는 하지만 그 두 사건은 분리된 사건은 아니다. 중생이라는 한 뿌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두 가지의 열매인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강조하면서 그 두 사건 사 이에 시간적 격차를 두게 되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시도들도 무 의미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까지는 인간은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비밀한 역사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주어질지는 모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들을 준비하고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중생의 역사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적은 헌신을 통해서도 그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허락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 결론적으로 중생과 회심은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다.

즉 중생과 회심은 두 개의 분리 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중생 사건이다. 그런데 또한 인간 쪽에서 보면 중생의 역사로 영혼 깊숙이에서 발생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하는 인간의 경험이 포함된 회심의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가 주어지는 근원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지만 그 사건 속에서 항상 수동적으로만 남아있지 않고 믿음과 회개 등의 반응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건인 것이다.

(3) 회심(回心, 회개와 믿음, conversion)

회심의 사건 안에는 믿음과 회개가 있다. 중생의 역사로 새 생명이 주어진 새로운 피조물은 주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며 동시에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1) 믿음(信仰, faith)

– 믿음의 성격
믿음의 근원은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는 나의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해 구속사역을 감당하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신자의 믿음이란 단지 도구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님의 의(義)만이 공로(功勞)적 원인(原因)이고 신자의 믿음은 그것을 연결해주는 통로(通路) 역할을 할 뿐이다.

더 나아가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가 처음 가지게 된 믿음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다. 전적으로 무능력한 죄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의 삶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믿음의 3요소

성경적으로 온전한 믿음은 3가지 요소를 지닌다.

첫째, 지적(知的) 요소다. 성경적 믿음이란 그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한다. 그냥 막연한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믿음이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둘째, 감정(感情) 요소다. 마음으로 동의하는 차원이 있다. 믿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해한 믿음의 내용을 마음 으로 동의하고 확신해야 참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확 신은 성령님의 역사로 주어진다.

셋째, 의지(意志) 요소다. 믿음은 신뢰하고 맡기며 헌신하는 삶이 동반 되어 야 온전한 믿음이 된다. 야고보서에서 강조되는 바와 같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복 음의 내용을 이해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 확신한 바대로 살아가는 삶이 동반될 때 참 믿음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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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개(悔改, repentance)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2가지의 표현 방식이 사용된다. 하나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애통하는 감정이나 후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자의 경우는 누가복음 18:23에서 언급된 ‘부자 관원’이 예수님의 도전적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간’경우이다. 그는 후회하거나 애통한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다.

회개는 물론 감정적으로 후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참 회개란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반역을 인정하고 그 언약의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신뢰하며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즉 참 회개는 지성, 의지, 감정이 포함된 전인적인 돌이킴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은 진정한 회개는 ‘총체적 회개’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총체적 회개란 복음의 총체성을 이해하고 전인격적 변화를 통해 모든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영역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향해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는 이원론적 신앙으로 이해되는 회개가 되기 쉽다. 즉 그들이 회개는 했다고 하지만 입술만의 회개, 영적 영역에서만의 회개, 교회 안에서 만의 회개로 머물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아직도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는 신앙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 즉 총체적 회개를 촉구한다. 누가복음 3:7이하에 외쳤던 ‘나눔과 정직한 생활’에 관한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그것을 말해주고, 누가복음 19:1 이하에서 말해주는 삭개오의 회심 사건이 또한 총체적 회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정신’으로 돌이켰는데 그 돌이킴을 소위 ‘영적’영역에서 만의 돌이킴을 넘어 경제적 영역(물질관)에서의 돌이킴까지 나아갔다. 주님을 만난 후에 삭개오는 ‘나눔과 정직한 직장생활’로의 변화를 결심하였고 주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인해 주셨다.(눅 19:8,9)

3. 칭의(稱義, 의롭다함, justification)

(1) 칭의 교리의 중요성

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 중 하나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기본적인 성격들 중의 하나는 다른 종교들은 자력 종교의 성격을 지녔으나 오직 기독교만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는 점이다. 특히 개혁 신학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음을 고려해볼 때 성경의 교리들 중에서 칭의 교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원리를 강력하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稱義)란 인간의 내적 도덕적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주관적 변화에 관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법정(法廷)적 선언을 가리킨다.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선언 받는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성경의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고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변화 및 성화되는 문제는 그 칭의의 결과로서 이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란 인간의 어떤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2) 칭의에 대한 오해들

기독교 역사상에 나타난 칭의에 대한 오해들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펠라기우스적인 오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은 인간이 예수님의 생애를 모방하는 삶을 근거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력 구원론적인 성격을 띄우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자의 칭의는 인간의 어떤 도덕적 성취나 모범적인 삶과는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다.

– 신인(神人) 협력주의적(synergistic) 관점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선한 행위가 함께 이뤄져야 칭의가 주어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관점을 잃어버리고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도움이 된다는 차원으로 전락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차원이 타협되고 마는 것이다. 이를 반(半) 펠라기우스라고 한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극단적 강조

위의 두 관점들과는 반대 방향에서의 오해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되 하나님의 공의나 거룩의 속성들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나 심판의 근거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서만 찾는 관점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정죄나 심판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마찬가지로 칭의 받는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근거한 행동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없는 하나님의 주권성으로만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객관적 근거를 지닌 행동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3) 칭의의 근거

신자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근거는 예수님의 대리적(대표적) 위치와 그러한 위치에서 성취하신 순종의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은혜 언약의 대표로서 온전한 인성을 취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가 되시어 그들의 칭의를 획득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언약의 대표로서 예수님은 일생을 통한 순종의 생애를 감당하셨으므로 그분의 공로가 언약의 회원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로 전가(轉嫁)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성도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의 사역과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능동적 순종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의 칭의를 포함한 구원의 근거를 확보하셨던 것이다.

요약하면 신자들은 대표적 위치에서 그들을 위해 감당하신 예수님의 수동적, 능동적 사역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루신 의의 성취를 신자들의 의(義)로 전가(轉嫁) 해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4) 칭의(稱義)와 선행(善行)과의 관계

성경 속에서 우리는 칭의와 관련하여 ‘믿음’에 대한 지배적인 강조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는 대개 하나님의 은혜성이나 믿음의 원리와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나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삶에 빠뜨릴 수 없는 요소로 가르친다.

그것은 칭의란 텅빈 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므로 칭의 받은 자는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관계 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그의 삶 속에서 주인 되신 이의 뜻을 기쁨으로 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과의 생명적 연합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신자라면, 그는 자신이 받은 칭의의 축복 안에서만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善行)의 삶과 성화(聖化)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행을 자신의 칭의의 근거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이다. 칭의의 근거는 언약적 대표이신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순종의 삶을 통한 구속사역 뿐이며 그분의 공로를 받게 되는 수단은 오직 그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간과하고 율법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입장도 거부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성을 강조하면서 선행과 성화의 삶을 간과하는 반(反) 율법주의적(antinomeanistic) 접근도 거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웨슬리안의 접근과 같이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또한 율법의 행위를 율법주의적 차원에서 또 다시 요구하는 신(新) 율법주의(neonomeanism)의 오류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제1부의 마지막 항목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개혁 신학도 웨슬리와 함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이나 선행과 성화를 간과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의 신자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율법을 순종하는 삶에 대한 강조는 복음의 정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차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순종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은 이미 완성 된 것이며 주님께서는 신자의 구속을 위해서 신자가 추가해야 할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신자들의 삶 속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삶과 선행과 성화의 삶을 위한 노력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누리는 삶이지, 무거운 짐으로 감당해야 하는 율법주의적 의무는 아닌 것이다.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f Paul)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도 웨슬리적인 신(新) 율법주의와 같은 방향의 오류에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의 공동체에 들어온 자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일반적인 율법주의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믿음으로 시작한 신자의 삶 속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삶으로 완성을 이루어야 최종적인 구원이 확보된다는 신(新) 율법주의적인 관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新) 율법주의는 신자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이기보다는 여전히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신자가 확보해야하는 구원의 근거로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 이 /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