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7)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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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개혁신앙의 원리들
1.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2. 하나님 중심의 원리
3.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
4. 신자의 삶 강조의 원리
< 2부 > 개혁신앙의 핵심교리들 21)
A. 성경론(계시론)
B. 신론(神論) < 계속 >

B. 신론(神論) (2)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격들(26호)

2. 하나님의 고유적(절대적) 속성들

하나님의 고유적 속성에 속한 속성들을 또한 절대적 속성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는 발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적 속성들도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피조물들 속에서 그 속성들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완전하나마 인간에게서 어느 정도는 그러한 속성들을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되는 고유적(절대적) 속성들이란 조금이라도 피조물들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고유적 속성(절대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범주 안에는 1)자존성, 2)단순성, 3)불변성, 4)무한성의 속성들이 포함된다.

(1) 하나님의 자존성

이 속성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 이외의 것들을 의존하여 존재한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의 생명을 자신 스스로 유지하며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자존성을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의 소명 과정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만날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에게 너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 하리까?”라는 질문을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호렙 산에 있는 떨기나무 불꽃의 모습에서 벌써 모세에게 그의 자존성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계셨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떨기나무 불꽃은 불이 계속 붙어있었지만 그 나무는 타들어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불붙은 나무의 불꽃은 그 불꽃이 계속되기 위해서 나무가 연소될 때 나오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떨기나무 불꽃의 생명은 나무가 연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즉 불꽃의 생명이 나무에 의존하지 않았고, 불꽃 자체로부터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함 없이 존재하시는 자존 자(自存者)이신 것이다.

(2) 하나님의 단순성
하나님의 이 속성은 하나님이 복합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이는 자존성과도 연관되어 이해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만일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존재이라면 하나님은 그러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분들에 의존하여 존재하시게 된 것이라고 말하게 되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못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단순성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존재는 그 본질에 어떤 속성들이 첨가됨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해준다. 만일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영원한 원리(속성)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속성들이 혼합되어서 구성된 존재라고 간주하게 되어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다른 속성들에 종속케 되는 존재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의 속성은 세 가지 영역들 속에서 제시될 수 있다.

1) 완전성

먼저 하나님의 존재의 질적인 면에서 무한하심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할 수 있다. 그 분은 그의 지식이나 거룩, 사랑, 능력 등에 있어서 어떠한 부족함이나 제한도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2) 영원성

또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시간의 영역 속에서 적용시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이르 된다. 그런데 그 분의 영원하심이나 무한하심 등의 개념들은 우리 인간들의 사고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유한한 인간으로서 초월자의 무한성이나 영원성을 바르게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이러하다는 식의 적극적인 서술보다는 그 영원하심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지적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 분의 영원성의 의미들을 접근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단순히 ‘끝없이 연장된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다. 현재의 피조계의 시간을 단순히 양쪽 방향으로 끝없이 연장시킨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과 피조계의 시간의 차이는 단순히 양적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피조계의 어떠한 존재를 확대시킨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성질의 영원성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도 사실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존재 차원에 속한 시간과 창조주의 존재차원에 속한 영원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원성은 피조물들의 영생하는 것과도 구별 된다. 사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영생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택자들이 영생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분의 고유한 속성이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의 존재에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택자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시작이 있는 영생이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생은 근원적인 것이며 원래적인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원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분은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시간들을 그의 충만으로 채우시는 분이시라는 점도 균형 있게 이해해야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그가 시간적인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영원하심은 또한 시간의 영역과 무관하신 분이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 속의 모든 시간들은 그 분의 손길에 의해서만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종속 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은 피조물 중 하나로서 그 분의 통치 아래 놓여있는 하나님의 통치대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3) 편재성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공간의 영역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우주 공간으로도 다 포용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과 공간 위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왕상 8:27; 행 7:24) 여기에서도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분이 우주공간 안에 무한대로 퍼져있는 존재인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가 유한한 피조물의 공간적인 제약을 초월하고 계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 속성은 하나님께서 피조 계를 지배하고 있는 공간의 법칙을 초월해 계심을 말해준다. 공간의 법칙이란 하나님께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설명할 때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광대하심 혹은 무소부재하심은 어떤 피조 된 공간이 확대되어서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피조 된 공간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광대하심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대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후자는 창조자의 원래적인 속성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셋째,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공간적 초월성만 강조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가 우주만물에 충만히 내재하심만을 강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와 같이 하나님을 역사의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우주만물과 동일시함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간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적으로 말해준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하신 신이시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 그의 백성들과 성전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시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은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다 포용할 수 없는 광대하신 신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넷째, 끝으로 편재교리의 실제적인 유익들을 생각해보려 한다. 편재하신 하나님은 시편 139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 끝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로 내려가 있을지라도 거기 계시고, 새벽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에도 계신 분이심을 말해준다.(8,9절) 우주 안에서 그의 시야를 벗어나 숨을 곳은 한 군데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시편기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절) 즉 하나님의 편재성을 참으로 알게 되면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게 되며, 진실한 회개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게 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교리는 우리를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된 삶을 뒷받침해준다. 시편 23:4 말씀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거기에서도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교리는 복음전도자들로 하여금 주의 함께하심의 확신 속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 자들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마 28:19,20)

(4) 하나님의 불변성

하나님의 속성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 분의 자존성이나 무한성과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다.

1) 무한성과의 관계

하나님의 무한성이란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나 편재성을 가리키는데, 그러한 속성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시간이나 공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이심을 말해준다. 시간이나 공간의 변화가 하나님의 존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함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즉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지배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원리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해 놓으신 원리들이며, 오늘도 그 분에 의해서 통치 받고 있는 피조 세계일뿐이다.

2) 자존성과의 관계
하나님의 자존성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이외의 것들에 의해서 존재하지도, 영향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그의 존재, 속성, 지식, 사역 등에 있어서 어떠한 외부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이뤄 가실 수 있는 스스로 충족하신(self-sufficient) 분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3) 하나님의 인격과의 관계

끝으로 하나님의 불변성의 의미는 단순히 ‘비인격적인 부동 체’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설명 된다.(말 3:6; 시 102:25-27; 히 1:11,12; 약 1:17)

그런데 야고보서의 구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은 마치 하나님께서 생명력도 없는 어떤 석고상과 같은 비인격적인 부동 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실성, 특히 언약적 신실성의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분의 선하심을 신실하게 보여주시며, 반대로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로 반응하시는데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경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나 ‘진노를 변경하심’과 같은 구절들은(창 6:6; 삼상 15:11; 출 32:10-14; 요 3:10)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그러한 표현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기록된 것으로 봐야한다. 성경은 인간을 대상으로 주어진 계시이므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간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4:11이나 여호수아 4:24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손’은 실제로 하나님에게 사람의 손과 같은 부분이 있다는 말(신인동형동성론: Anthropomorphism)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이해의 차원으로 표현된 말(Anthropic expression)이라고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신약에서 “성령을 근심케 한다.”와 같은 표현도 실제로 성령님이 근심 가운데 빠져든다는 말이 아니고 단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봐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6

둘째, 하나님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본문들은 그 변화의 내용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에서의 변화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이나 속성들, 지식, 작정, 혹은 언약적 신실성에 있어서 변하시는 분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언약은 언제나 신실하게 서있으므로, 불순종 하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시나, 돌이켜 순종의 삶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다시 그 진노를 거두시는 모습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글쓴 이 /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 다음에 계속 >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