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예정교리

A man is not saved because he believes in Christ, he believes in Christ because he is saved.
Loraine Boettner
PARTⅠ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4)
시작하는 말
예정교리(豫定敎理, Doctrine of Predestination)란 무엇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인데 쉬운 것 같으나 오늘날 어렵게 생각하는 교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신학이 거의 100%라고 할 정도로 예정교리 무효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타락한 신학은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며 만민구원을 옹호하고 있다. 그 결과 정통 장로교회의 성도들이나 일부 목회자들까지도 예정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오늘 한국교회 현실이다. 이는 신학의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신학자들이 교리를 바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교회가 세속화 되어 성경 말씀보다는 이단의 주장을 포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번역자로서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의 ‘개혁주의 예정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1932)라는 책을 가능하면 문구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혁주의 예정교리’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번역자 김남수 목사>
제1장 서 론
(Introduction)
로마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강제적으로 판매할 때 많은 신부들이 반대 했는데 그 중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점을 95개 항으로 정리 발표함으로 당시 교황청과 로마가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 사제이며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선행의 복잡한 체계에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선물이 얽매여 있음을 개탄했고 95개항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성인(聖人) 공덕 교리는 말씀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교황청의 면죄부를 공격했다. 이것이 교회의 윤리적 신학적 개혁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즉 성경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riptura)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에 의해서만 죄인(罪人)이 의인(義人)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처음에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단절까지 원하지 않았지만 교황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루터는 결국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파문을 당했다. 같은 시대의 독일의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취리히에서 교회와 국가가 연합 된 신정정치를 했고 프랑스에서는 칼빈이 로마가톨릭의 교리를 거부하며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 후에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를 출판했다. 이처럼 당시 3대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루터, 츠빙글리, 칼빈은 모두 예정론(豫定論)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았고 예정론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루터의 ‘노예 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이라는 논문을 보면 루터도 칼빈과 같이 예정교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오늘날 루터파교회는 수정된 형태의 예정교리를 믿고 있다. 영국 청교도들과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물론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와 프랑스 위그노교파역시 예정교리를 믿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도 한동안 예정교리를 지지하였고 공공연하게 반대한 적은 없다.
오늘날에 와서 비(非) 성경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은 많으나 칼빈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이는 시대적 흐름 속에 성경이 경고하는 말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칼빈주의를 시대에 뒤진 낡은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칼빈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사도들의 계보를 잇는 가장 훌륭한 신학자였다. 칼빈주의는 칼빈이 만들어 낸 신학사조가 아니다. 칼빈이 예정교리를 비롯한 성경의 신학사상을 매우 논리적으로 체계 있게 설명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여 ‘칼빈주의’라고 한 것이다. 즉 칼빈이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를 창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제시하는 바를 그가 조직적으로 명료하게 우리에게 해설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뉴턴이 탄생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뉴턴이 그 자연원리를 명료하게 논증했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칼빈주의 신학체계 역시 칼빈이 탄생하기 전부터 성경에 있었다. 이 체계는 사실 창조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연구한 칼빈이 이 원리를 밝히 깨닫고 체계화 하고 조직화한 것이다.
칼빈의 가장 위대한 점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가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을 넘어 가지 않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수용했기 때문에 칼빈의 신앙은 결정적이며 적극적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득력 있는 논리적 분석은 그의 적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관한 탐구에 있어 일찍이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성경의 신비들을 통찰하여 밝혀내는 위대한 공을 세웠다. 그 결과 그때까지 가려져 있던 성경의 여러 면이 사람들 앞에 밝히 드러났고 또한 종교개혁 이전 교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을 들어내었다. 칼빈은 또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렸던 사도 바울이 가르친 성경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를 밝히 들어냈는데 그 교리가 바로 예정교리(豫定敎理)이다.
예정교리(豫定敎理)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인데 사람들이 성경의 예정교리가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교육이 부족한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예정교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해 이해가 된다. 예정교리는 성경에 계시된 그 어떤 교리보다도 깊고 심오한 진리이다.
어떤 사람이 이 예정교리를 신중하게 연구해 보지도 않고 거부부터하려고 한다면 그는 예정교리가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나도록 많은 신실한 성도들과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지지를 받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한 번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예정교리가 성경의 참 진리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예정교리가 지극히 복된 성경의 진리이며 모든 개신교 교파의 근본 교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혁주의 신앙의 총화(總和)거나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이 점을 이렇게 말했다.
“예정교리나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교리들은 칼빈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지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무성한 잎이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있음을 증거 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뿌리는 아닌 것과 같다. 만약 성경의 다른 진리들과 필연적 관계가 있는 이 예정교리를 분리시켜 독자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면 필경 이 교리의 효과는 과장되고 그 체계는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원리의 서술이 참이 되려면 그것과 연관 된 체계의 다른 요소들과 조화롭게 제시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전체적으로 체계의 총화를 이루어 서술했다. 즉 예정교리와 함께 다른 진리들 곧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성령의 영감, 이적, 예수님의 속죄, 부활, 재림 등을 동등하게 강조하고 있다.”
제2장 교리의 서술
(Statement of the Doctrine)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정교리를 이렇게 서술(敍述)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신의 가장 현명하고도 거룩한 뜻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체의 사건을 자유롭게 불가변적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가 되신 다든지 피조자의 의지에 압력을 가하는 존재가 되신 다든지 제2원인 (인간의)자유와 (모든 일의)우연성이 무시된다든지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정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체의 조건하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다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미래에 어떤 조건하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지(豫知)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예정(豫定)하신 것은 아니다.”
예정교리는 이 같이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유한한 피조물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작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자연의 운행을 작정하시고 역사의 과정을 가장 세미한 부분가지 지배하시는 위대한 능력의 왕으로 나타냈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불변하며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이 결정은 단순히 자연계의 운행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인류역사의 전체 사건에 미치며 또한 성도와 천사와 사악한 자와 음부에 있는 악귀의 전 활동까지 포함한다. 이 결정은 그 원인, 조건, 지속(持續) 및 관계에 있어 일찍이 있었고 또한 장래에 있을 일체의 사건을 동시에 포괄하며 시간과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전 활동범위를 포함한다. 하나님 자신 외에 모든 것은 이 결정 안에 포함되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력과 지지력을 힘입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유한한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며 또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피조물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을 제한하거나 방해하는 어떤 상태도 발생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지금 그가 하고 계시는 일 그대로를 하시려고 목적하셨다. “그는 우주의 주재시오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은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주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유지도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 어느 부분이나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관할 안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았거나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발생할 수 없다. 이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주권적 예정으로 표시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결과적 사실이나 변화의 조건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미래의 모든 사건에 관한 그의 예지의 기초는 되지만 결코 예지나 장래 사건들 자체에서 기원된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作定)을 우리는 예정(豫定)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영생을 얻기로 어떤 이는 멸망에 이르도록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개인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영생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도 칼빈과 같이 절대적 예정교리를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이 루터의 로마서 주해에 나타나 있다. “모든 사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도에서 발생하고 또 그것에 의존한다. 이런 관계로 생명의 말씀을 받을 자와 그것을 받지 못할 자, 그들의 죄에서 해방될 자와 그 죄 가운데서 강퍅해질 자, 칭의 받을 자와 정죄 받을 자가 다 예정되었다.”고 말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루터의 친구인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은 “모든 일이(우리가 외면적으로 행하는 일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사고하는 사상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되어 진다.”고 했으며 “기회나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깨닫는 길만이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의 첩경이다.”라고 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어떤 주인이 한 종을 어떤 일을 위해 어느 곳으로 보낸 후에 또 다시 다른 종을 같은 일로 같은 장소에 보냈을 때 이 두 종이 그곳에서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주 우연한 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이미 그들을 보낸 주인이 작정하고 예지했던 당연한 만남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발생이 인간들에게는 맹목적인 듯하고 의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태의 추이를 미리 알고 계시며 또한 의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거나 사소한 것이 원인이 되어 중대한 사건이 발생되는 예는 많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신적 지배가 크고 작은 모든 사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연한 사소한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건이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 중에 그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다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비교적 큰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은 무한히 복잡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단순한 것이다. 소요리문답은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규정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그의 영원한 목적이니 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발생할 것은 무엇이든지 작정하셨다.”
하나님이 창조 된 모든 것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 즉 어떤 것은 산나물이 되고 어떤 것은 미나리가 될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두견새가 되고 어떤 것은 까마귀가 되고 어떤 것은 사슴이 되고 어떤 것은 돼지가 될 것을 결정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남자 혹은 여자, 부자 혹은 가난한 자, 우둔한 자 혹은 총명한 자, 백인 혹은 유색인, 가인 혹은 아벨과 같이 태어나도록 결정한 것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예정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전(全) 포괄적인 예정을 사람의 손이나 맹목적인 자연의 힘에 맞기시지 않고 천지의 창조주시오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두셨다. 성경은 이를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해 나가시는 하나의 조직인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롬 8:29,30)
개혁주의 신앙은 우주의 창조자이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이다. 칼빈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베인(Peter Bayne, 1830–1896)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모든 일에 하나님보다도 사람은 높이고 하나님께는 극히 제한된 것들만을 높여 드리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자연히 예정교리도 축소시키거나 왜곡 시킬 수밖에 없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종종 올바로 신앙을 지키려는 성숙한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불신앙에 기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참 성도들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지 모든 생각과 행위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려고 애쓴다. 이런 성도의 믿음과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여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려 하지만 그러나 그 결국은 하나님의 뜻(예정)대로 된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참 성도의 길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정 속에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는데 내 안에 도적같이 스며든 악한 영은 오히려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는 성도의 연단(鍊鍛)만 길어지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물론 모든 천지만물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여 복 받는 자가 될 것인가 불순종하여 멸망 받을 자가 될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
제3장 하나님의 계획
(God has a Plan)
1.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창조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극히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셨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도 계획을 가지고 운행해 나가신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 즉 하나님의 예정(豫定) 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
여러 가지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인간도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지혜로운 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한다. 또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예정론을 반대해도 모든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는 다 예정론 자들인 것이다.
스미드(Edwin William Smith, 1876–1957)의 말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결정한다. 그 다음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과 방법을 정한다. 건축가는 건축을 시작하기 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작성한다. 건축공사의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건축가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건물이 완성 되어 있다. 그와 같이 상업, 농업, 법률 등 판단력과 지성을 갖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세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 다음에 그들은 이미 세워진 목표를 따라 행동하며 그들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에서 계획했던 일을 성취한다.
일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사전계획이 더욱 중요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배를 만들고 철로를 놓으며 국민을 통치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신없는 사람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리가 인간에게 보편적이라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1836-1895)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주가 아무런 법칙도 없이 운행 된다면 그것은 마치 기관사도 없이 불도 켜지 않은 채 캄캄한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는 기관차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는 우리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적(攝理的) 통치가 온 우주만물에 미치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계획 또한 포괄적임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의 절대적인 계획대로 우주만물을 운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예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일하다. 어떤 일의 수행에 있어 한 사건의 원인은 다른 사건의 결과가 되고 그 결과는 다시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이해가 된다. 즉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상호 교호(交互)하여 무한히 내려간다. 그리고 전체의 복합적인 결과는 모든 부분들의 집성(集成)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주에서 한 개의 유성이 제거된다면 다른 모든 별의 평형과 궤도가 다소라도 변경될 것이라는 것이 천문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같이 어떤 계획도 한 사건의 실패는 직간접적으로 전체를 혼란케 할 것이다.”
<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
-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終末)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하였노라.(사 46:9,10)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 1:20)
-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하였노라.’(렘 31:3)
-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2.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우발적 사건
만일 하나님의 계획이 전(全) 과정이 아니고 어떤 부분은 확정되지 않은 어떤 조건의 성취나 결과를 기다려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한 것도 아니요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오류가 없고 또 예상 밖의 어떤 방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나는 일도 없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은 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전(全) 과정에 있어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아주 작은 사건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된 것으로 그 존재의 사명이 있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나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은 어떤 우발적 사건이 있다. 이 우발적 사건의 결과가 또 다른 우발적 사건을 야기 시켜 그 영향력이 계속적으로 확대되어 나가면서 그의 인생 역사의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로마가 적의 기습을 당했을 때 거위 한 마리가 큰 울음소리를 내자 잠든 파수꾼들이 깨어 적의 침입을 발견하고 즉시 본영으로 연락하여 로마를 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군대의 사령관이 전쟁터에서 적군이 쏜 총탄이 불과 1인치 차이로 빗나가서 죽지 않고 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후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다. 1871년 시카고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절반이 탔다. 원인은 암소 한 마리가 호롱불을 차 깨뜨리면서 불이 났다고 한다. 만일 그 때 암소의 뒷다리 동작이 잠간만 지체되었어도 대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지극히 작은 사건이 발단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경시할 수 없는 데 그 이유는 지극히 작은 일이 종종 중대한 사건을 일으키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발적 사건도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었다는 성경의 증거들 >
-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요나에게 당한지라.(욘 1:7)
-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시옵소서.’ (중략)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행 1:24-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
3.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영원성)
펠라기안(Pelagian)은 하나님에게 그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알미니안(Arminian)은 하나님의 총괄적 계획은 있어도 특정계획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에게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을 포함하는 특정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이 모든 사건을 예정하신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오 유한한 인간과 달리 모든 일에 전혀 자유하신 분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행위가 목적을 갖는다는 점은 인간과 같지만 그의 계획이 전지(全知)하시고 그의 실행이 전능(全能)하시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같지 않은 인격적 존재이심을 믿는다. 칼빈주의는 또 온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의 영광과 완전하심을 드러내 보이는 극장(劇場)으로 보고 또한 그 모든 형태와 역사에 있어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피조의 목적과 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믿는다.
19세기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 하나인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는 그의 예정에 관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기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전 우주의 사물을 포괄할 만큼 광대할 뿐 아니라 세미한 부분까지 관계할 만큼 치밀하여 장래 발생할 모든 사건에 있어 불가피적 확실성을 가지고 그 자체를 실현할 것으로 보았다. 천지의 주재이신 그의 무한한 예지(豫知)에 있어 각 사건은 명확히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전개와 당연한 위치에 맞아 떨어진다. 아무리 미소(微小)하고 아무리 기이(奇異)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명령 없이 그의 계획에 있어 그 독자적 위치에 합치하는 일이 없이는 발생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의 일체의 귀결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우주론(宇宙論)이니 시간 세계에서 발전하고 발생하는 일체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 절대적 목적, 절대적 계획안에서 구체적인 통일을 이루는 세계관(世界觀)이다.”
철저한 유신론(有神論)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주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창조하실 만물의 행동을 예지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의 전 포괄적 섭리로 우주전체를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고립된 사건만을 예정하셨다면 자연계나 인간계에 혼잡한 사태가 발생됨에 따라 그는 자기의 하시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시기 위한 부단히 새로운 계획을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마침 임기응변적 땜질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막연하게 통치할 수 있을 뿐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무식한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신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본래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할 여지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부단히 그 마음과 생각을 바꾸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과 영원성이 부인된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을 저지할 장벽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
-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 하는 것을 이루리라.’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명령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 나 여호와는 변역(變易)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4.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인간의 죄행(罪行)
하나님의 계획에는 천지창조라는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우주창조는 필연성이 때문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이었다. 많은 계획 중에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런 세계를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창조를 결정하셨을 때 그 세계 질서 안에 포함 될 온갖 종류의 사건들을 완전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을 명확히 예정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결정을 가리켜 ‘예정’(豫定) 혹은 ‘예지’(豫知)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범죄도 이 계획안에 포함 되었으나 이 범죄들은 예지된 동시에 허용이 되었다. 다만 이 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되고 처리가 된다. 성경을 통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 중에 정확하고도 필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행 2:23, 4:28) 이러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방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실패하시고 낙심하신 후에 생각 해 내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 예정하신 목적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엡 3:11)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희생이 창세 전에 예지되었다고 했고(벧전 1:20), 또 에베소서 1:4에는 성도들이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1:9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속죄의 희생 사역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면 이 희생을 필연적으로 있게 마든 아담의 타락과 기타 인간의 죄과(罪過)들이 비록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장세 전부터 포함되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인간의 죄행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 21:42)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
인류역사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전개하는데 불과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발적 사건이 발생하는 것에 따라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전(全) 포괄적 계획을 형성하는 각 부분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에 생각지 않으셨던 것들을 새로 내놓으신 다거나 또는 어떤 일을 불시(不時)에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의 어떤 한 목적이 이미 성취된 다른 한 목적의 성과 혹은 인간의 행위의 부산물처럼 보이는 묘사를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정론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통속어(通俗語)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문구상에는 그런 것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땅의 사방’(사 11:12) ‘땅의 기초’(시 104:5)와 같은 것에서 지구를 의미하는 땅이 정사각형이라거나 혹은 지구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해가 뜬다, 또는 해가 진다’는 말은 태양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 현상으로 이해한다. 또 “하나님이 뉘우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어떤 과오를 뉘우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의 행위의 과정을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마치 하나님께서 뉘우치는 것같이 보인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눈’ 등의 묘사도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하여 말하는 ‘의인화법’(擬人話法)이다. ‘후회’(後悔)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라고 했으며, “이스라엘의 지존 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되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숙고해 볼 때 이것을 작성하시고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능력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우주의 전(全) 과정이 천국을 건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풍성히 받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성도에게는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제4장 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누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주권(主權)이 자신의 생명을 관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출생하고 싶은지 아닌지 혹은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출생하고 싶은지의 질문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누가 백인으로 출생하고 싶은지 흑인으로 출생하고 싶은지, 미국에서 출생하고 싶은지 중국에서 출생하고 싶은지의 질문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대대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시오 통치자로서 피조물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능력의 궁극적 원천이심을 믿어왔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발생할 수 없다. 이 진리를 깊이 살펴보면 그것이 칼빈주의 입장을 확정하고 알미니안 주의의 입장을 반박한 이유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빈주의 교리 | 알미니안 교리 |
1. 전적 타락(자유의지 무) | 1. 자유의지 잔존 |
2. 무조건 선택 | 2. 예지 예정 |
3. 제한 속죄 | 3. 무한선택 속죄 |
4. 불가항력적 은혜 | 4. 가항력적 은혜 |
5. 성도의 견인 | 5. 성도의 견인 |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혹은 궁극적 지배자가 되신다. 단순히 총괄적 영향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하신 세계를 실제로 통치하고 계신다.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성에 비해 볼 때 티끌만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이나 사업이 저지되기 보다는 오히려 태양의 운행이 중지되는 것이 쉽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하고 모수된 것 같은 인간사(人間事)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심에 있어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신다.
인간의 사악한 행동 역시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타의적 허용이 아니고 자의적 허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목적하신 것에 반드시 일치할 것이다. 이런 진리가 부인되면 부인될수록 하나님은 우주 통치에서 제외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현 지식 상태로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과 이성이 증거 해 주는 진리를 거부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 세상 왕의 권력이 그 나라의 법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율법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성도들은 말세에 각 사람이 싫든 좋든 간에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혀가 그리스도는 주(主)가 되신다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큰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고 있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우주를 통치하시는 전능의 신(神)이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상 종말을 아시고 종말에 이르게 할 수단도 알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게 응답해 주신다. 불가능이란 만사를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는 있을 수 없다.(마 19:26, 막 10:27)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도 행하실 수 있다거나 또는 하나님이 모순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망령된 말이나 다른 어떤 도덕적 비행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2+2=5를 만드신다거나 차바퀴를 회전시키면서 동시에 정지시키는 일 등은 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세계의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해 준다.
신약에서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꼭 같이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철저하게 강조되어 있다. 워필드 박사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주권교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유의 전능하신 창조주는 또한 그 창조한 만물의 절대적 통치자로서 표시된다.” 성경기자들은 ‘비가 온다.’와 같은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고 표현했다. 즉 우연이나 요행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 제비뽑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결정을 얻어내기 위해 지정된 방법이었다.(수 7:16, 14:2, 18:6, 삼상 10:19, 욘 1:17)
모든 일은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배치(配置)되고 하나님의 뜻이 발생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이유이다.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에 불과하다. 자연도 국가도 각 개인의 운명도 그 전체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은 하나님의 사자이고 불길은 하나님의 종이다. 모든 자연적 발생사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번영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어떤 사람에게 재앙이 내렸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암 3:5,6, 애 3:33-38, 사 47:7, 전 7:14, 사 54:16)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렇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을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그 마음을 열거나 강퍅케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창조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죄인도 회개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전능하신 분 즉 우주의 전능하신 통치자께서 그가 지은 피조물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하시겠는가! 그분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셨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회개시키셨다. 문둥병자는 “주여!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시리이다.”(막 1:40)라고 말했으며 그의 문둥병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깨끗이 나았다. 이처럼 주님은 인간의 육체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수한 목사 선교사 전도자 등 각양의 사역자를 홍수와 같이 일으켜서 삽시간에 전 세계를 회심시키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만일 하나님이 실제로 전 인류를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셨다면 그들을 교육하고 또한 지상에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기 위해 천사의 무리를 보내실 수도 있고 또는 친히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실 수 있다. 악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원하시면 악을 단숨에 말소해 버리실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이런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살육하셨고(출 12:29), 또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천사를 통하여 죽이셨고(왕하 19:35), 땅이 열려 고라와 그 당시의 반역자들을 삼켜 멸망시킨 일과(민 16:31-33),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엎드러져 즉시 죽은 것(행 5:1-11)과 또 헤롯 왕이 무서운 죽음을 당한 일(행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불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최선을 다하여 인류의 죄와 투쟁하시지만 죄악으로 인해 그의 목적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이지만 그저 맹목적인 힘의 주권이 아니며 무한한 예지와 성결 및 사랑이 결합된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를 바로 알기만 하면 가장 큰 위로와 확신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누가 자기의 인생을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거룩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보다 운명이나 우연 또는 자연 법칙이나 천박사곡(淺薄邪曲, 지식이 얇고 가벼우며 간사하고 바르지 못함)한 자아(自我)에 맞기겠는가? 그러므로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들이 달리 택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주의 만물은 어떻게 통치되며 어떻게 인도 되는가? 자기의 아름다운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되어 나간다. 그럼에도 현대는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허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교리를 거부하거나 파기하는 경향이 심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교만과 자만 또 한편으로는 무지와 타락이 인간으로 하여금 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인간의 자리를 고양(高揚, 높이 올림) 시키려고 한다. 이 두 가지 경향이 합하여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칼빈주의 교리보다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더 따르게 한다.
하나님의 의도가 때로는 어떤 방해로 실패될 수 있고 또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의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약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완전하신 분으로 무한히 높이고 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는 계획이 많지만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시므로 하나님에게는 예견되지 않은 불의의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변경해야 할 원인(原因)도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수 있다든가 혹은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헛수고가 되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피조물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사람이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
-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豫定)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 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 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4-27)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 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 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9-11)
-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經營)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행하셨도다.(시 135:6)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제5장 하나님의 섭리
(The Providence of God)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활동이란 그의 피조물과 그 일체의 행동을 가장 거룩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능력 있게 보존하시고 지배하시는 일이다.”(소요리문답 제11문의 답)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존속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보존된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행 17:28) “곧 마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성경은 전체를 통해 자연법칙과 역사의 과정과 또한 개인의 모든 운명을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귀속시키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스랍(천사)들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된다.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는 사려가 깊지 못한 성경 독자들은 범신론적 결론으로 인될 수도 있을 만큼 긴밀하다. 그러나 각 개인의 인격과 제2 원인(原因)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자기 위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성경기자들은 또한 이 내재적 교리와 아울러 신(神)의 초월적 교리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사와 자연의 운행에 있어 아주 작은 일까지 긴밀하게 관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지배 안에 포괄되기에는 너무 크다든지 혹은 그에게 인지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라든지 혹은 무수히 많은 특수 사건이 하나님의 주의력을 교란시킨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망각한 소치이다. 태양 빛을 어느 한 지점에만 그 빛을 비추는 일이나 전 공간에 그 빛을 가득 채우는 일이나 양자(兩者)가 다 한가지로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장소에 계시는 것과 같이 모든 곳에도 계시며 오직 한 일에 유의하시는 것과 같이 모든 일에 유의하신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풀잎 하나하나에 계시는 동시에 북두칠성의 행로를 인도하시고 별들을 큰 군대와 같이 통치하시며 또한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아신다. 또한 각 개인의 영혼에 내재하시어 그에게 오성(悟性)을 주시고 재능을 부여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의욕(意慾)을 갖게 하시고 작위(作爲)하게 하신다. 인간의 심정은 그의 수중에 있어 하나님은 마치 유수(流水)를 변동시키듯 그것을 변동시키신다.”고 하였다.
우리 각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환경에서 백인으로 혹은 흑인으로 또는 지혜자로 혹은 우매자로 또는 남자나 여자로 출생하고 생활하다가 사망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주권적이시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으신 것을 하신다. 어떤 사람에는 부요를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를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을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 웅변, 예술, 상업, 정치의 재능을 각각 부여하신다. 어떤 사람은 빈곤, 무명, 비천하게 태어나서 질병에 걸려 비참한 생활을 보내게도 하신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출생하여 복음의 모든 특전에 참여하고 어떤 사람은 이교적 암흑 가운데 출생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 믿음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자가 있고 또한 믿지 않는 가운데서 멸망하는 자리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 개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이 사람의 생애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성경과 우리 인류의 일상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는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하나님은 왜 전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는가?”라고 누가 질문 한다면 이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예수께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인류의 타락과 구속에 관한 성경의 교리만이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다.
어떤 선물 즉 영적 선물이든 육신의 선물이든 받는 자는 순전히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받지 못하는 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수여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부여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거주 한계를 정하시며 그들의 흥망성쇠도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막대기나 지팡이를 조종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국가나 개인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그들을 토기장이의 그릇과 같이 깨뜨리기도 하시며 혹은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도 하신다. 그분은 평화, 풍년, 행복을 주시기도 하시고 혹은 전쟁, 흉년, 한발, 질병의 황폐를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신 우주의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셔서 활동하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해 주는 근원(根源)이시오 지배력이시다.
참새는 그 값이 싸고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새가 어느 나무 가지에 앉으며 무슨 곡식을 쪼아 먹으며 어디에서 자며 어디에 깃들며 무엇을 먹고 살며 어디에서 죽을는지 일찍이 작정하셨다.(참고 마 6:25)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빗방울이나 눈송이와 움직이는 모든 곤충과 자라나는 모든 식물들과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 이 모든 것이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발생되었으며 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하나하나가 사건 연결의 한 고리로서 역사상 큰 사건의 대부분은 이런 무의미한 듯한 일들로부터 발생된 것이다. 모든 사건은 예정된
목적을 향하여 전진해가고 있다. 그래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의 종을 영접하기 위하여 리브가를 우물로 나오게 하신 것이나(창 24:15), 혹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나(창 45:8, 50:20), 혹은 바로의 딸을 갈대 사이의 상자로 인도하신 것이나(출 2:5),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리게 하신 것이나(삿 9:53), 어떤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을 쏜 일(왕상 22:34) 등은 모두 우발적 사고가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질서정연하게 수행하기 위한 한 항목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번개 빛을 명하여 적군을 격퇴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욥 36:32)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예민하게 감지(感知) 한다.”
맥카트니(Clarence Edward Noble Macartney, 1879-1957) 박사는 “제군은 큰 정거장 게시판에 금속성 연필이 나타나서 벽에 큰 글자로 기차의 발차 시간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금속성 연필이 저 혼자서 글을 쓰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무실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손이 그 연필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작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다른 손길이 있어 우리의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중대한 사건의 결과에 그 일익을 담당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섭리적 지배가 보편적이고 능력이 있고 지혜롭고 성결하다고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섭리적 지배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유행동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물을 통치하신다는 것과 그것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창조물의 성질을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순결하심과 우월하심에 일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외부적 유인(誘因) 수단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정확히 행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책임과 관계된 것이므로 앞으로 인간의 자유행동에 관한 글에서 다시 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과 의존감 또는 위험에 부딪히면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것 등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신념이 얼마나 보편적이고도 구체적인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우리 인생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아래 있음은 인정하면서 동시에 무수한 영혼의 운명은 맹목적 기회 혹은 나약하고 죄 많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불확실한 우연성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 주장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대한 성경적 증거 >
(1) 자연계와 물질계
-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6)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애굽의 흉년과 풍년은 자연 법칙으로 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요셉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일을 작정하시고 이루신 것이라고 하였다.)
-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며(암 4:7)
-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7)
(2) 동물계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중략)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단 6:22)
-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시 104:21)
-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창 31:9)
(3) 민족의 생활과 역사
-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느니라.(단 4:17)
-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 40:15)
-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라다.(대상 16:31)
-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시 47:7)
-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담 2:21)
-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시 33:10)
-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수 21:44)
-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부치시니(삿 6:1)
-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 1:6)
(4) 개인의 전 생활
-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31
-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 이는 만물이 주께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롬 11:36)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단 3:17)
-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시 118:6)
-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8:8)
-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스 8:31)
-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느 4:15)
-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출 11:7)
-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행 18:9)
(5) 인간의 자유행동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6)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스 7:6)
-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스 6:22)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6) 인간의 사악한 행동
-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 19:11)
-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삼하 16:10,11)
-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로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출 14:17)
(7) 우발적 사건 또는 요행적인 사건
-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요나에게 당한지라.(욘 1:7)
-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왕상 22:3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
제6장 하나님의 예지
(The Foreknowledge of God)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반대는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예시(豫視)하시는 것은 그 성질상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확정이 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이 된다면 예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정과 예지의 차이점은 예정은 사건의 확정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예지는 사건이 확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로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마치 기관차가 철길 궤도를 달려감과 같이 역사는 그 결정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교리를 부인하는 알미니안교리는 예지의 유신(有神)론적 근거도 부인한다. 아무 사건이나 그것이 물리적으로든지 아니면 심리적으로든지 혹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예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을 결정하는 것이 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예지인가? 아니면 맹목적인 자연적 운명인가?”하는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6세기의 이단 중 소시니안(Socinians)과 유니테리언(Unitarians)이 있다.
소시니안은 삼위(三位)가 동일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先在)까지 부정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 충만이 받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니테리안과 현대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니테리안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으로 단일(單一) 신론과 아리우스주의(Arianism) 중 그 선구자이다. 유니테리안은 신조(信條)를 부인하고 다양한 신앙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자유, 이성, 관용을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종교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한 후 하나님이 자유행동자의 행동을 예지하신다는 것까지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하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견해는 성경의 예언을 기껏해야 기민(機敏)한 추측쯤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성경의 영감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는 한 번도 공인된 기독교회의 지지를 받은 일이 없다. 어떤 소시니안 사람과 유니테리안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의 미래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를 부인하게 된 이유는 만일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한다면 칼빈주의의 예정교리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알미니안이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유니테리안의 변론의 위력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니테리안을 추종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 할 수만 있으면 부인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예정교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 그것을 믿든지 말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예정을 시인하는 것보다 예지를 부인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행동 중 어떤 부분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 간과(看過)하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전(全) 지성(全知)을 파괴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전능(全能)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슨 일든지 다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아실 수 있다는 단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고 또한 다 아실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의 성질상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고 현실이며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을 가능성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전지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해 ‘전지(全知)하지 못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라는 불합리를 말할 뿐이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의 예지교리에 대한 변론에 직면할 경우 미래사의 확정성 혹은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행동 문제를 논하게 될 경우 인간의 행동들은 불확정한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분명 모순이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만일 영원 전(前)에 인간의 행동이 그 자체에 있어서 불확정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인간이 행동하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영혼을 회개시키려고 하실 때에는 마치 나폴레옹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상태 즉 여러 개의 계획을 복안으로 가지고 첫째 계획이 실패하면 둘째 계획으로 둘째 계획이 실패하면 셋째, 넷째 계획으로 연이어 시도하려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일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주 통치도 확정성이 없으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와 그 불변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창조 주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로 말미암아 자주 좌절하시고 패배를 당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어떻게 행동을 할지 아실 수가 없어 인간이 행동하기까지 기다리고 지켜보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하는 이 같은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대해 극히 논리적인 칼빈주의 앞에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래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는 그 사건들의 정확성을 포함하고 예지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예정의 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종말(終末)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에 일어날 일을 확실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은 불변하며 완전하다.
또 시편 139:2에 말하기를 “당신이 멀리서부터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15:8에는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며, 히브리서 4:13에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다.
이 같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간의 이성이란 일시에 몇몇 부분 밖에는 깨달아 알 수가 없고 또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관관계 중 일부분 밖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도 우리 인간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분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생들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시공(時空)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 편에서는 항상 현재뿐이므로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한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여 영원히 거하며’(사 57:15),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이다.”(시 90:4)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 안에서 생기는 사건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지정하시고 또한 자기 앞에 제정하여 놓아두셨던 것이 틀림없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특성일 뿐이지 여원하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고 시간을 보시기는 하시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으신다. 공간은 다만 유한한 피조물의 또 하나의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도로의 일정 구간을 지날 때 사람은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전체를 한 눈에 보신다. 그처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상 모든 사건들을 한눈에 그리고 일시에 다 보신다. 그러므로 역사의 전(全) 과정이 하나님께는 영원 가운데 현재로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한한 존재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하나님의 예정은 창세 전에 있었으며 영원 불변하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미래의 사건(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 관한 작정(作定)을 하시지 않았다면 창조 전에는 그것에 관한 확정성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작정하실 때에만 사건들은 비로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범주에서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실현에의 범주로 옮겨진다. 이 불변성 혹은 확정성은 하나님의 뜻에만 그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영원에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목적이 하나님의 가능성의 환영(幻影)으로부터 실제의 예지(豫知)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수행하기로 뜻(意志)하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케 하시려고 작정(作定)하신 어떤 능력 있는 요인에 의하여 그것을 수행할 것을 임의적인 목적으로 정하시는데 있다. 이것은 다음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다. 가능성(Posse)에서 생각되는 어떤 결과는 하나의 동력원인(動力原因) 또는 다수 활동원인(活動原因)의 힘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본원적 절대적 예지(豫知)의 견지에서 장래를 내다보셨을 때는 오직 한 원인 즉 하나님 자신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다른 원인이나 능인(能因)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력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다른 능인들이 산출하려는 결과들이 하나님의 예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그들 모든 능인들을 존재케 하려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데서 이미 그 모든 결과들을 존재케 하려고 뜻하시며 기도(企圖)하신 것이다.”
침례교 신학자 스트롱(Augustus Hopkins Strong, 1836-1921) 박사는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창세 전에는 우주의 미래적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와 그 법칙의 제정이 세계의 실제 역사를 가장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확정성이 되게 할 것을 예견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의 제정을 결정하셨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미래의 일체를 결정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결정하셨으므로 우주의 전(全) 미래적 사건 일체를 확정적으로 예견하셨다. 그런데 이 창조의 결의는 창조의 모든 실제적 결과에 관한 결의까지고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전(全) 결과를 결정하셨다.”
예지(豫知)와 예정(豫定)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트롱 박사는 “논리적으로(시간적으로가 아니라) 결정은 예지 전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 바를 안다.”고 할 겨우 내가 벌써 무엇을 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 또는 내 지식이 결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의에 수종하고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예지(豫知)는 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아셨다. 하나님의 예지란 다만 현세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창조 이전부터 인간의 운명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원을 받을 자나 유기(遺棄)할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자들의 유기를 계획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유기할 자들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교리는 하나님의 예정교리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예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불변적이요 확정적인 사건이다. 영구적 결정의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역사의 사건들을 확정시킬 수 없다. 문제는 자유행동자의 행동이 확정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지만 이 확정성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예지에 있어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이다. 알미니안들의 변론은 만일 정당한 근거가 있다면 예정이나 예지나 다 같이 부인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논증을 하기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7장 대표적 기독교 신앙체계들
(The Outline of Systems)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표적인 기독교 신앙의 체계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만인구원주의(Universalism)
이것은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전 인류는 금세(今世)에서나 내세(來世)에서나 모두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견해는 우리 인간의 감정에 대해 가장 강한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非) 성경적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고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 어떤 교회도 지지한 적이 없다.
2.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이것은 “그리스도는 인간 각 개인을 위해 구원 받을 자를 위함과 같이 멸망 받을 자를 위해서도 공평하고 차별 없이 죽으셨다.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한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다.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제공된 것이다. 다만 그 은혜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고 싶다면 성령의 중생의 능력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한 자라도 자신이 원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영원히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알미니안주의의 근본은 자력구원(自力救援)의 한 형태인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칼빈주의를 추적하면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에 이르는 것 같이 알미니안주의를 추적하면 펠라기안주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알미니안주의를 펠라기안주의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알미니안주의의 제 원리가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가 출생하기 무려 1,200년 전에 이미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로부터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펠라기안주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효과적 은혜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하나님의 의지(意志, 하나님의 뜻) 위에 놓고 있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타락교리를 배척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이 흠 없이 성결해 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온 교리이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 교리에 미혹당하고 있다.”(Warburton, Calvinism, p.11)
알미니안주의는 기껏해야 이렇게 펠라기안의 체계와 어거스틴의 체계의 중간을 방황하면서 양자의 조화를 꾀해 보려고 하는 애매모호한 시도이다. 핫지(A.A. Hodge) 박사는 이에 대해 “알미니안주의는 양다리를 걸치는 융통성을 발휘한 타협적 체계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회심(悔心)과 성화(聖化)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협력하여 공동으로 달성하는 것이고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미니안주의의 주요 사상이다. 그것은 타락의 결과 인간은 무능력자가 되었지만 모든 능력을 전부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적인 노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병들었지만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라는 의사의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이때도 자기의 뜻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같이 인간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하나님과 협력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있다. 이 같은 알미니안주의는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성경해석의 견해 중 하나가 아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非) 성경적이며 반(反) 기독교적이다. 이런 알미니안주의가 복음적인 근거로부터 점점 타협과 일탈(逸脫)로 성경으로부터 멀어진 사실은 역사가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논리적인 체계가 전혀 발전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알미니안주의가 감리교회에서 하나의 간단한 비공식적 ‘25개조 신경’을 이룬 적이 있었으나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는 현저히 반대됨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3. 칼빈주의(Calvinism)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하나님은 이들 중에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선택(選擇)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遺棄)하셨다. 그리스도는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救贖)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유효하도록 적용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의 주장인데 오직 이 견해만이 성경과 일치하며 또 우리 인생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칼빈주의는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은혜로만 오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인정하고 높인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지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적 무능을 깨닫도록 택함 받은 자를 은총의 날개에 태워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원의 세계로 비상(飛翔)시키시기 전에 먼저 굴욕과 깊은 절망의 골짜기로 내던지신다. 알미니안주의가 인간의 능력을 찬양함으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생태적(生態的) 자만을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칼빈주의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게 하는 죄인들의 복음이다.
인간을 깎아 내리는 것보다 인간을 추켜올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 환영받게 된다. 오늘날 알미니안주의가 대중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냉혹하고 비타협적인 것 같이 보여도 분명히 성경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언제나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 유익하고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은 입에는 꿀처럼 달지만 배에서는 쓰기 마련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러나 택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과 의식을 도덕적 공리(公理)라고 믿음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만일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신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에 죄가 많은 것을 보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영원토록 죄와 비참 가운데 고통당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영벌(永罰)을 부인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기독교가 자기를 죄인으로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기만하는 것은 용납할 수도 없고 비(非) 이성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인간은 성경을 떠나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기독교사상을 발전시킬 권리가 없다.
열정적인 칼빈주의 옹호자였던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박사는 이 같은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여러 가지 신앙사상 체계 중 어느 것이 참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 우리 인간의 감정에 보다 더 공감이 가고 인간의 이성(理性)에 보다 더 적합하게 생각되느냐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느 것이 성경말씀에 근거하고 있으며 우리의 실제적 경험과 보다 더 일치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자는 자기의 이론을 반드시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거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것만을 단순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모든 신학자들의 의무이다. 만일 개인적인 확신이 어떤 교리의 진위를 결정하거나 성경을 재단(裁斷)하도록 허용한다면 각 개인의 확신에 따라 동일한 진리도 서로 의미를 달리하여 쟁론이 끝이 없고 어떤 진리도 확증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사상체계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칼빈주의 교리 또한 성경 어느 곳에도 꼭 같은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체계적으로 정리 된 조직신학 책이 아니다. 거기서 성전을 지을 석재(石材)를 채취할 수 있는 채석장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완성 된 신학체계의 서술 대신에 우리가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 유기적 관계로 조직하여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신학의 재료들을 제공 해 준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나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교리의 체계적인 서술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발전 또는 기독교의 발생에 대한 역사적인 전말(顚末)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교리적 사실이 비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이처럼 성경에 모든 교리가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 된 성경 해석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교리적 사실을 분류하고 논리적으로 정리 배열하여 성경적인 올바른 신학적 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성경에 있는 재료들이 신학체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연계와 기타 영역에서 하나님의 조치와 일치한다. 하나님은 생물학이나 천문학이나 정치학 등에서 완전한 체계로 주시지 않았다. 다만 인간이 자연에서 또는 경험으로 유기적 조직이 없는 모든 사실들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여 이것을 하나의 체계로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제8장 성경은 신앙체계 판단의 최종권위
(The Scriptures Are the Final Authority by Which Systems Are to Be Judged)
크랙(Samuel G. Craig, 1874-1960)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 간의 모든 논쟁에 있어 최종 판결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은 누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은 조화 있고 완비된 하나의 교리적 체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성경의 전 부분은 상호일치 한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의 각 구절을 신중히 연구함으로써 이 조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는다.”
워버톤(Warburton)도 교리에 대한 시비를 이렇게 말했다. “성경만이 최고의 최종 법정이다.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경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우리들의 신념의 진위(眞僞)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감 된 무오(無誤)한 그의 말씀을 통해 판단되어야 한다. 칼빈주의에 대한 시비도 알미니안주의나 펠라기안주의도 말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적인 지론(至論)이든 과학적인 지론이든 모든 지론은 성경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만약 주장하는 지론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와 축자영감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이 교리 판단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권위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근거가 없는 교리는 무엇이나 참되지 않으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정교리의 진위 또한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판정되어야 한다. 자기의 관찰과 판단만 쫓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계획의 기본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철학적 사변(思辨)이나 추상적 추리(推理) 역시 먼저 성경의 증거를 듣기 전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적 증거가 확실 할 때는 누구나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과연 그러 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기 위해 매일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본서에 서술한 교리마다 성경의 증언들을 제시했다. 칼빈주의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칼빈주의 구원교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에게 전혀 의문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을 만큼 명료하다. 이 교리들은 인상적으로 설명되었고 또 표현이 단순해서 누구나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하늘에 별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있다.”(시 8:3,4)고 대답할 것이며, 누가 바다에 고기가 얼마나 있느냐고 묻는다면 “바다에는 무수한 고기가 있다.”(시 104:25-27)고 대답할 것이며 또 산림에 나무가 얼마나 있느냐고 묻는다면 “산림에는 무수한 나무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예정교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이 예정교리로 가득 차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인간의 유죄, 미래 심판의 실재와 같은 교리들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교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까지도 부인하지 않는다. 합리론자나 고등비평가도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칼빈주의 교리가 성경주석의 규칙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같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도들의 권위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뿐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은 ‘미개한 시대의 그릇된 관념’이라고 사도들을 폄하(貶下) 한다. 그러나 저들의 이 같은 말이 성경에서 칼빈주의 교리들이 발견되는 구절들을 비평적으로 해석해 볼 때 이 교리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는 그들의 증언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은 또 “성경이 이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교리를 믿으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이 말은 성경을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면서 성경의 논증의 능력을 교묘히 회피하는 성경 고등비평가들의 반(反) 성경적인 역설(逆說) 보다는 훨씬 낫다.
우리가 칼빈주의 교리로 알미니안들이 반론으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가지고 칼빈주의 자들이 반론으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설명하려면 억지 해석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칼빈주의 교리는 알미니안들이 모순이라고 제시하는 성경의 장절(章節)들 쯤으로 는 전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미니안들이 성경적인 칼빈주의 교리들에 대해 성경과 모순된다는 그런 장절(章節)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국 성경 자체에 모순이 있다는 오류에 빠지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석은 주석상의 반대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적인 또는 철학적인 반대임이 분명하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른 성경해석에 만족했다면 성경적인 여러 신조(信條)와 신앙고백 간에 더 많은 조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컨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 반대자들은 성경의 단편적인 구절들만 근거하여 어떤 논제의 가능성을 말할 뿐 문제 전체를 지지해 주는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특성, 원인, 결과를 제시해 주는 성경의 진술을 종합적으로 또는 상호관계를 고려하면서 관찰한 후 공정하게 평한다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이 제시하는 전반적 결론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Historical Theology, II, p. 298)
교리에 관한 유일의 최종적인 권위서로 오직 성경만을 믿는 개혁주의 신앙원리를 기초로 하는 칼빈주의는 하나님과 인간과 구속을 논하는 유일한 성경적인 신앙체계로 계속 존속할 것이다.
제9장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A Warning Against Undue Speculation)
나는 부당한 사변(思辯)과 호기심을 갖고 예정교리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지는 칼빈 자신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 자체가 극히 복잡한 주제인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관한 논쟁은 인간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매우 복잡해졌고 따라서 위험성을 띠게 되었다. 인간의 호기심이 하나님의 비밀 중 어느 것이나 탐지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금단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그 한계를 넘어 침범하는 것은 어떤 제방으로도 방지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연구하고자 할 때는 첫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심오한 곳을 침입하려는 침입자임을 알고 부주의하거나 자신만만하게 난입했다가는 거기서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선을 넘을 경우 오류와 실패와 타락으로 피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것은 통행이 불가능한 도로를 보행하고자 하는 것과 같고 불빛이 전혀 없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물체를 보고자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어떤 비밀스러운 주제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일종의 학문적 무지(無知)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Institutes, Ch. XXI, sect. I, II.)
우리에게는 성경의 비밀스런 진리들까지 해명할 의무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성경에 계시 된 대로 말하고 또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 말씀을 오해와 반대로부터 옹호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설사 우리의 이성적 사색(思索)으로써 그 깊이를 다 규명(糾明)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참되고 믿을만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이 같은 깊은 진리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는 성령이 이런 진리들을 그렇게 계시함이 적당하다고 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예정의 상호 관련된 목적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조언자가 될 자격이 없다. 시편 기자는 “주의 판단은 신묘(神妙) 하나이다.”라고 했다. 피조자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판단을 통찰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태평양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려 함과 같은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칙의 비의(秘義)를 알기에는 너무나 비교조차 불가능한 적은 지식의 소유자이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본 주제가 중요한 만큼 자연히 우리는 깊은 경건과 주의를 가지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비의(秘義)는 신중히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거룩한 사건에 관한 부당하고 주제넘은 사변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복음을 복음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려면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성경의 선언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조금도 숨겨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예정교리가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남용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아무리 명백하게 가르쳐져 있을 지라도 성령의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나 그의 예지에 관한 진리도 그의 계획이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포함한다는 도리와 같이 불합리하다고 하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만큼만 알 수 있는 동시에 계시하신 것만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그것만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만큼도 계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데까지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가도 좋을 것이다.(*) 글쓴 이 /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 ‘칼빈주의 예정론’(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로레인 뵈트너 지음, 김남식 번역, 베다니, 535p, 1996.5.15.
본 원고 출처 / http://cafe.daum.net/haengham/Kfpe/10
개역판 서문 / 이 땅에 간행된 수많은 책들은 그들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학서적들은 그 책이 주는 의미를 통해 우리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의 아름다운 열매 가운데서 본서의 가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예정론’을 말하면서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본서는 고전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초역본, 원제목대로 하면 ‘개혁주의 예정교리’라고 하여야겠으나 1930년대에 박형룡 박사에 의해 논역본이 나왔을 때에 ‘칼빈주의 예정론’이라고 하였기에 우리들에게 그대로 정착되었다.
본서의 한글 번역은 1930년대에 박형룡 박사의 초역본, 1970년대에 홍의표 박사의 번역이 나왔다. 그러나 번역의 내용이나 신학용어 사용 등에 문제가 있어 1990년에 역자가 새로 번역하여 김남식, 홍의표 공역으로 출간하였다. 1996년에 다시 문장을 가다듬어 재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본서의 참 뜻을 바로 깨닫고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정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서를 통하여 ‘예정론’의 실상을 정확하게 하는 역사가 있어지기 바라며,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드린다. 2002년 9월 김남식
로레인 뵈트너 / 1901년 미국 미조리 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미조리 주 타키오대학을 거쳐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핫지 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32년에는 그의 명저인 본서를 저술하였다. 뵈트너 박사는 켄터키 주 파이클빌 대학에서 성경과 신학을 교수하다가 고향 미조리 주로 돌아와 개혁주의 신학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기독교개혁파교회 목사로서 한 평생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하다가 1990년 11월 3일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