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고린도전서 14장을 중심한 방언의 은사 사용원리

고린도전서 14장을 중심한

방언의 은사 사용원리

시작하는 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당시 고린도교회의 난제 중 하나였던 방언(方言, tongues) 문제를 해결했다. 필자도 오늘날의 현대 방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이 고린도전서 14장을 중심으로 논증(論證) 하고자 한다.      

제1장 방언과 예언의 비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豫言, the gift of prophecy)을 하려고 하라. 방언(方言)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靈)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1-5)

사도 바울은 여기서 방언이 무엇이며 예언이 무엇인지를 비교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 방언(方言)은 무엇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중략) 그 영(靈)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면 ‘영(靈}으로 비밀을 말한다’함은 무슨 뜻인가?

  •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이것을 영적 은혜로서 남들이 일아 듣지 못하는 외국 말을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칼빈의 고전 13:10 해석)
  • 그로솨데(Frederik Willem Grosheide, 1881-1972)는 듣는 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영적 언사(言辭)로 일정한 내용이 있는 말이라고 했다.(F.W. Grosheide, kommentaar Op Het Nieuwe Trstament, Eerste Brief San Korinthe, pp. 451- 452.)

위의 어느 해석이 옳든지 간에 그것이 이적(異蹟)으로 되는 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고린도전서 14:22에서도 그것을 가리켜 ‘표적’(表迹, 세마이온, σημεῖόν)이라고 했으니 기적(奇蹟)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이적이 오늘날의 교회시대에도 있을까? 교회시대란  계시시대(啓示時代) 곧 사도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시대는 표준적인 이적(異蹟)과 계시(啓示)가 있었다. 사도들은 이 같이 하나님께서 교회시대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기 위해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기본적인 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이 사도시대의 이적이나 계시는 실상 주 재림 때까지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들의 사역을 가리켜 터를 닦는 일로 비유했다. 고린도전서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 두었다.”고 했고 11절에서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된 것이다.(엡 2:20, 계 22:14)

이렇게 생각할 때 사도들의 사역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한번 일정한 자리에 자리를 잡으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에서 돋아 난 나무는 그 요소에 있어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經綸, οίκονομία, economics)은 사도시대와 교회시대가 다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의 교회시대를 생각해 볼 때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줄기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 다시금 뿌리 형태로 자체를 거듭 나타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사도적인 사역을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시대에도 사도의 증표(證票)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 할지라도 특별 섭리(攝理)는 있다는 것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168)

특별 섭리란 것이 계시사(啓示史)에 속한 것은 아니나 역시 하나님의 특수 간섭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병자를 위해서 기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實例)를 들어 말하면 이런 점이 다르다.  

  •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은 취급된 병자가 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시대의 신유(神癒)는 그런 것이 아니고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고 치료되지 않는 자도 있다.
  • 그 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침 받은 병은 재발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 되는 경우도 있다.
  • 예수님과 사도들이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지나 교회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다.

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 준다. 이런 특징들이 있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시대는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역 경륜(經輪)의 이 같은 차이점은 특별히 교회의 터가 되는 계시시대(예수님과 사도시대)의 표준성을 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들의 전도 내용(성경)을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安息) 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시대에도 역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 역시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계시도 받는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성격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사역으로 나타났던 ‘사도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운동에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줄 생각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預言)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2)

(2) 예언(預言)은 무엇인가?

예언(預言)이란 ‘맡을 예’(預), ‘말씀 언’(言)으로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예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안위한다. 그러나 사도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豫告)했다.(행 11:28, 21:11)

이 같이 사도시대의 예언자들(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시(啓示)의 사역을 하였으며(고전 14:3),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했다.(롬 12:6) 이처럼 사도시대 예언자들의  사역도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신약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엡 2:20, 고전 12:28) 이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의 미말(尾末)에 속한다.(고전 12:10,28)   

그러나 예언(預言) 사역은 사도들의 사역처럼 계시시대(사도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시대에는 예언의 후신(後身)으로서 설교(說敎)가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 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인 만큼(고전 14:3) 설교 또한 그렇다. 다만 사도시대 예언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 왔으나 교회시대의 설교자의 경우는 그 자신이 하나님 말씀(성경)에로 나아가야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라는 말이다. 설교자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해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고전 4:1,2, 딛 1:7) 다시 말해 설교자는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들이 아니다. 설교자는 사도시대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언과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또 맡겨진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파수(把守) 할 책임이 있고 또한 그 터와 그 자재(資材)를 가지고 집을 지을(교회를 세울) 책임도 있다. 설교자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을 전파 할 때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설교할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현대교회에도 사도시대와 같은 예언(預言)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아주 부인(否認)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 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그 예언(豫言, 預言)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척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符合)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拒否)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신 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 영들을 시험(試驗)하며 지나 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나보는 일이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異蹟)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하며 이적(異蹟)과 기사(奇事)가 그 말대로 이룰 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聽從) 하지 말라. 이는 너희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 사단의 사자(使者)도 복음을 높이는 체 하며(행 16:16,17), 또한 도덕이 있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다.(행 11:14,15, 마 7:15)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현대의 예언(豫言)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의 권위 위에 있으며 또한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5:4)

제2장 방언의 은사 사용원리

(1)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방언은 무익하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笛,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고전 14:6-10)

성도가 복음을 명백히 말(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에 무익(無益)하다. 생명 없는 악기도 분별(分別) 있는 소리를 내는데 어찌 생명 있는 인간이 교회에서 식별(識別) 되지 못할 소리를 하고 있으랴!(7절) 그뿐  아니라 짐승들도 소리를 뜻 있게 내는데(10절) 인간으로서 그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심각하게 주의(注意)를 주었다. 이 점과 연관(聯關) 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니 곧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올바른 신자는 교회에서 복음만을 명백히 나타내야 된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된다.

  • 기독교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에 치중하지 않아야 복음의 나팔소리가 분명해진다.

무슨 일에나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을 혼동하면 그 일은 틀린다. 고린도교회에서 방언하는 신자들은 방언을 지나치게 중시(重視)하여 남들이 모르는 말을 회중 앞에서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을 시정(是正) 시켰다. 그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은사(恩賜)인 방언을 지나치게 너무 내세웠다.  

  • 밝히 드러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복음의 나팔이 분명해진다.

우리의 구원과 직접관계 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밝히 드러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려졌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고후 4:3)했고 또 말하기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고 했다.

기독교는 가장 깊은 복음의 오묘(奧妙)를 분명하게 밝히 드러낸 사실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3:9에 말하기를 사도의 직분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려 하심이라.”고 했다.(벧전 1: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명확하게 나타난 복음의 사실들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기에 주력할 것이고 논쟁점을 가지고 지나친 노력을 할 것은 없다. 신명기 29:29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정말 우리가 중요하게 관계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벌써 나타낸 예수 그리스도 사건(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가르치는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이 밝히 드러난 하나님 말씀의 단 맛은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만이 느낀다. 우리가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위주(爲主)하지 않다가는 샘 곁에서 목말라 죽고 곡식이 가득한 창고 속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이 된다.       27

(2) 통역 없는 방언은 교회연합에 큰 지장을 준다.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 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 찌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고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1-16)

기독신자는 교회 상대로는 회중(會衆)에게 유익한 것만 내 놓아야 된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方言)을 교회에서 말하면 그 말하는 이와 듣는 회중과의 사이에는 야만(野蠻)의 관계가 생긴다고 바울은 말했다. 화합과 융통은 서로 주고받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방언하는 이가 자기도 모르는 말을 회중에게 하면 영적 은혜를 전달하지 못하고 도리어 피차 멀어진 느낌만 준다. 그런 식으로 방언을 함은 교회에 해롭다. 그것은 사랑(신자들끼리의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가리가 되고”(고전 13:1)라고 했으니 방언의 은사도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가 깨닫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에서 하면 도리어 사랑을 깨뜨리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하는 신자들에게 기도할 때 혹은 찬미할 때 영(靈)만이 아니고(영으로 하는 말은 알아듣는 자가 없음, 고전 14:2) 마음으로도 말하기(지각에 알려지게 말함)를 원한다.

(3) 교회 회중(會衆)을 상대로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사도 바울은 여기서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의 비중(比重)이 방언보다 얼마나 큼을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 방언은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말할 바에는 성령께서 주신 깨달은 마음으로 말할 수밖에 감히 방언으로는 절대로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에서 방언 위주로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이 친히 방언을 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도 없고 교회역사에 가장 빛나는 지도자들도 거의 전부 방언을 했다는 말이 없다. 그들은  방언 위주로 사역을 하거나 교회에서 방언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다.
  • 교회에서 방언을 위주로 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奇異)한 것을 탐하기를 즐겨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으로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할 찌라도 그 옆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는 그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노라.”(고전 1:22)고 했다.
  • 방언(方言)을 위주 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預言)하는 일도 고조(高調) 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啓示)를 본다하며 꿈을 숭상하고 기타 여러 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다.  이 같이 예언(豫言)을 위주 하는 곳에 필경은 그릇된 예언(豫言)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어 마귀 역사의 온상을 이룬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이 불건전한 틈을 타서 역사하는 법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했다.(딤전 1:10, 6:3, 딤후 1:13, 4:3, 딛 1:9, 2:1,2)

이 구절들 중에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 교훈’이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다. ‘건전한 교훈’이란 ‘건강한 교훈’을 말함이다. 사람의 체격이 건장(健壯)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머리 있을 자리에 머리가 있고, 손 있을 자리에 손이 있고, 귀 있을 자리에 귀가 있고, 발 있을 자리에 발이 있어서 질서와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가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바뀌지 않고 각기 제 위치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교훈이 건전하다.

(4) 깨닫지 못할 방언을 회중에게 하는 것은 교회에 벌을 줌과 같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하였으니”(고전 14:20,21)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은근히 꾸짖는다. 곧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方言)을 교회에서 하면 그것은 곧 회중에게 벌을 줌과 같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일찍이 이사야(율법이란 말은 이사야서를 의미함)의 예언(預言)에 “알아듣지 못할 말로 말하는 것은 벌주는 것이다.”(사 28:11)라고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의 교훈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필경 앗수르 사람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깨닫지 못할 말(앗수르 말)로 그들을 압제하며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예언(豫言)하셨다.(사 28:9-13)

(5) 통역이 없는 방언을 하면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2-25)

신자들에게 방언을 하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전 14:5,6)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22절)란 말이 그 뜻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방언하는 이의 방언이 불신자들에겐 표적(σημειον, 세마이온) 곧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것이라(눅 2:34) 비난거리가 될 수 있다.(고전 14:23, 미쳤다고 함)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란 말씀이 그 뜻이다.

(6) 교회에서 방언을 하려면 꼭 통역을 세우라.(고전 14:26-28)

사도 바울이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 당시의 초대교회의 실정대로 한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교회의 방언이 사도들의 사역으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 방언은 아님) 죄악의 영향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그 후에는 불완전하여졌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에는 중생의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비교적 현저하지 않은 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첫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량으로 나타났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138.)

  우리가 교회시대 특별히 현대의 방언운동에 대해 한 가지 주의해야 될 것은 위에서 카이퍼(A. Kuyper)가 말한 바와 같이 현대의 방언운동은 사도적인 사역의 완전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적인 이적은 그 취급된 병자를 고칠 때 병자가 모두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시대의 신유(神癒)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 고치는 정도이다. 오늘날 방언의 성격도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된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오늘날의 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성격의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해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의문점이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 134-135.)

(7) 그러나 교회가 방언을 아주 금할 것은 아니다.(고전 14:39)

교회가 방언을 아주 금할 것은 아니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4:6-28의 가르침의 모든 규례에 의해 교회의 공적 질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것뿐이다.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靈)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靈)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성경은 성령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존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를 참되이 보존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靈)들을 시험(試驗, test)하라!”고 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 얼마나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인가? 시험해 보기까지 분변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고 오히려 경건이다. 우리가 방언을 아무 분변(分辨) 없이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도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神靈)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변하기 위해 또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하기 위해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 해야 된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할 수 있겠는가? 진리 판단의 표준은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성경이다. 이적(異蹟)을 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반드시 언제나 진리를 바로 분변할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마귀도 어느 정도 이적(異蹟)을 행한다. “거짓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또 누가 병을 고친다고 하여 그는 언제나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라고 하지 못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기로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고 그들이 전도한 말씀은 모두가 다 진리이다. 오늘 교회 신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병이 고쳐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교회시대에 기도나 안수로 병 고치는 일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사도들의 행함과 같이 신임할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사람의 병이 이상하게 고쳐지는 수도 있다고 한다. 대단히 어려운 병들(위궤양, 반신불수, 신경통, 소경, 절름발이, 귀먹어리, 벙어리, 피부병 등)이 마음 깊이의 억압된 감정이나 죄책(罪責) 때문에 생기는 수도 있는데 이런 병들이 간혹 그 병자의 심리조절에 의해 고쳐진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병을 고쳐 준 사람의 말이라고 다 성경말씀의 권위와 같은 줄 알면 절대 안 된다.(C. Stegall, ‘The Modern Tongues and Healing Movement’, p. 27.)

또 누가 어떤 고상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하여 그는 언제나 진리를 바로 분별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체험에는 오착(誤錯)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어찌 그것을 성경 권위와 동일시하겠는가? 그러므로 진리 판단의 권위는 오직 성경 밖에 없다.(*) 글쓴 이 / 박윤선 박사(한국의 대표적인 주경학자, 1979년 신구약성경 주석 완간, 평양신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고신교수 및 총장 역임, 총신교수 및 대학원장 역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총창 역임)  

< 사도 바울의 방언의 은사에 대한 교훈 >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

  •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하라.(14:3-5) 
  • 다 방언을 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14:5) 
  • 통역이 없이 방언을 말하면 유익하지 않다.(14:6) 
  •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14:7-9) 
  •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야만이 된다.(14:11) 
  • 방언의 기도는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가 된다.(14:14) 
  •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가르치는 것이 났다.(14:19) 
  •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다.(14:22) 
  • 온 교회가 방언하면 불신자 무식한 자들이 미쳤다고 한다.(14:23)
  •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하라.(14:27) 
  • 순서를 지켜서 하되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이며 통역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서 잠잠하며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라.(14:28) 
  •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 그러나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14:40)
  • 사랑이 없는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13:1) 
  •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도 폐하여질 것이다.(13:8-10) 
  • 방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 방언은 수많은 은사 중 하나이다.(12:4-11) 
  • 신자라고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