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0)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0)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제4장 교부들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2)
2. 알렉산드리아의 동방 교부들의 신학

아프리카 대륙 이집트의 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지도)는 로마제국 제2의 도시며 국제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동방문화의 중심지였다.
일찍이 판태누스(Pantaenus, AD 120-216))는 여기에 기독교 초신자(初信者)를 위한 ‘교리학교’(敎理學校)를 세웠다. 이는 그리스 철학에 대항하는 기독교 대학인 셈이다. 학교는 당시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경향으로 기울어서 지성(知性)을 많이 강조했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Plotinus, AD 203-270)가 플라톤(Plato)의 철학을 종교적 구원론과 결합 재해석한 사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어거스틴신학에 연결을 시켜 주는 가교역할을 했고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신학자의 사고(思考)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판태누스는 학생들 모두 3년간 무료로 성경과 그리스 철학을 교과 과정으로 배우게 했다.
또 이곳은 영지주의의 영향이 큰 곳이어서 그리스 철학과 이방 종교를 혼합하는 헬레니즘 운동이 두드러졌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 AD 100-160)와 바실리데스(Basilides, AD ?-140)가여기서 가르쳤다.
오리겐(Origen, 184-253)과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는 ‘지식’(γνώσΐς)과 ‘믿음’(πίστις) 간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더 나은 기독 신자가 되려면 믿음에서 지식을 얻는 데로 나가야 한다고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보이려고 노력했다.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적 크리스천’이라고도 하겠는데 오리겐과 비교하면 비성경적인 데가 더 많았다. 두 사람이 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과소평가했으니 예를 들면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 부정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1)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150-215)는 AD 192년에서 203년까지 위에 말한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 로마 황제 치하 박해 때 클레멘트는 갑바도기아(Cappadocia)로 피신했다. 수사학(修辭學)과 논리학을 공부했으며 또 음악가이면서 문필가였다. 지식은 풍부했으나 조직적이지는 못했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인들을 향한 호소’(Προώπικος ττρος “Ελλβας), ‘가정교사’(Παιδάγσγος), ‘수필’(Παιδάγσγος)이다.
변증(變症)에 대한 관심보다 사색(思索)하고 종합하는 일에 관심을 더 많이 보였다. 신학자라기보다는 인생과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한 사상가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고 초월적(超越的)이며 불가지적(不可知的)이라고 했다. 로고스(Logos)는 항상 하나님 안에 함께 존재했으며, 창조와 보존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를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계시하는 분이시다. 아들이심은 영원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인식(認識)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은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分離)된 분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클레멘트는 아들은 아버지와 ‘호모우시오스’(同一本質)라고 했다. 로고스는 자신이 성육(成肉)을 결정했다고 하며 성육신 함으로써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하여 참된 연합을 말한다. 그러나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음식을 먹거나 배우거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등 가현설(假現說)의 경향도 약간 보였으나 클레멘트 자신은 가현설에 반대한다고 했다.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클레멘트가 아버지의 로고스와 아들의 로고스를 구별했다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저스틴에서 더 나아가는 진전이 없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2) 오리겐(Origen)

오리겐(Origen, AD 184-253)은 185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202-231년(또는 -215년)에 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215년에 가이사리아(Caesarea)를 방문하여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다. 오리겐은 데메트리우스(Demetrius) 감독에게서 신학 사상 문제로 경고를 받았으나 227년 가이사랴를 다시 방문했을 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데메트리우스는 이때도 교회가 오리겐에게 안수(按手)하는 것에 반대했다.
오리겐은 250년 데키우스(Decius, AD 201-251) 황제의 박해 때 투옥되었다가 253년에 죽었다. 228년에서 231년 어간에 쓴 ‘신학원론’(De Principiis)은 기독론을 다룬 주요 저서며 그 밖에 ‘요한복음 주석’(228-231년), ‘켈수스에 대한 변증’(Contra Celsum, 249)과 ‘헥사플라’(Hexap1a, 220년) 등의 주요 저서가 있다.
오리겐의 신학은 상당히 철학적이면서 성경적이었다. 대체로 말하면 정통적이었으나 정통 교리에 상치되는 생각들도 펼쳤다. 삼위일체에 관해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강조하는 한편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從屬)된다고도 강조했다.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문장이 명료한데 아타나시우스뿐 아니라 아리우스도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고 한다. 파악할 수 없고 불가지적인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시며 모든 사랑하는 것들 위에 계신 분이시다. 따라서 계시의 필요성이 수반(隨伴)한다. 그에게 있어 로고스(Logos)는 이 계시의 임무를 맡으신 존재이다. 그는 본질적(essentially)으로 하나님이시며 구별된 실체(ΰπόσπκης 또는 άύσια)이시고 다른 기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팜필루스(Pamphilus of Caesarea, 250-309)는 오리겐이 ‘동일본질’(ὁμοιούσιος)이라는 말을 썼다고 하며 인용한다. 하나님과 로고스 관계를 끓는 물의 수증기나 빛의 근원에서 나오는 빛처럼 본질(本質)이 같은 성질이라고 한다. 알비누스(Albinus)나 2세기의 플라톤주의자들처럼 로고스를 제2의 하나님(δευφος Θάς)으로 본 것 같다.
오리겐은 로고스의 영원한 출생(generation)을 가르친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출생(temporal generation)을 말하는 변증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인 터툴리안보다도 훨씬 발전한 견해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다.”(δαπρος Θκς)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도 존재할 수 없었다.”라고도 표현한다.
오리겐에게는 그리스도가 우주적 중보자라는 개념은 거의 없고 대신 계시의 중개(仲介)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속(救贖, redemption)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성육(成肉)과 교훈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오리겐은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보다 본질에 있어 열등(劣等)하다고 한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만물은 생성(生成)되었다고도 한다.
아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아버지는 원인이시고, 자존적 신이시며, 스스로 선하시며, 비(非) 탄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반면 로고스(Logos)는 ‘원인이신 이’,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피조물’(잠 8:22)이라고 한다. 천사들을 가리켜서는 신(神)들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점은 원인과 결과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성령에 대한 오리겐의 이해는 정통적인 견해에 아직 미치지 못한다. 성령은 피조물이며 아들보다 열등(劣等)하며 성도들을 다루신다고 한다. 성령은 신적인 인격으로서 아버지에 의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생성(生成)되었다고 한다.
오리겐에게서도 역시 신적인 ‘위계질서’(hierarchy)에 대해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특히 플라톤주의에서 온 사상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둘째 하나님과 하나님이라는 것, 존재의 ‘위게질서’라는 말로 사고하는 것, 하늘의 존재들을 신들이라고 부르는 것 등이다.
오리겐은 성육(Incarnation)에 관해 언급하면서 로고스를 그의 영혼관에 바탕을 두고 영혼들과 비교하여 말한다. 즉 모든 영혼은 영원하다고 하며 그것들은 영(靈)으로서 영원(永遠)부터 선재(先在)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들은 로고스에 의존적이라고 하며 한 분을 제외하면 다 타락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우주적 개혁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리하여 영들이 물질과 접할 때 회개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한다.
로고스는 마치 불 속의 금속처럼 동정녀 탄생을 통해 더럽혀지지 않고 몸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육은 ‘사람에게로 들어오는 것’이요 그 결과 ‘신인’(神人)이 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연합이라고 한다. ‘신인’(神人)은 두 성품(性稟)을 가졌는데 상호 교대로 역사하며 나타난다고 한다.
오리겐이 말한 두 ‘성품’은 터툴리안이 말한 ‘실체’(susbstanitae)와 같은 것으로 본다. 로고스는 여전히 우주적 기능을 간직하며 그 몸은 초인적이라고 한다. 부활 이후에 점진적인 교합(交合)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육은 구속을 위한 것이었는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한 구속을 말할 뿐 십자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성육의 목적은 우리가 상실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知識)을 회복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를 보면 터틀리안과는 달리 동일(同一)한 영원성(永違性)은 말하나 동등성(同等性)은 말하지 않으며, 아들 및 성령과 다른 ‘로기코이'(λογικοί)간의 구별이 분명치 않다. 그리고 ‘피조물’(κτίαμα)이라는 말이 아리우스주의 논쟁을 유발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오리겐의 이론에 따르면 어떻게 창조주와 지음을 받은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육에 관한 오리겐의 논의를 보면 헬레니즘의 신학 또는 로고스 신학의 한계점이 보인다.
(3) 두 디오니시우스의 논쟁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아들과 아버지의 본체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아들의 종속설(從屬說)을 견지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64)는 양태론적(樣態論的) 단일신론(單一神論)을 주장한 사벨리우스파(Sabellian)를 정죄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사벨리우스파는 디오니시우스가 가르치는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반격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을 지나치게 구분 분리하며 아들의 영원성을 부인하고,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 말하지 않고 아들은 피조물이요 나신 이로써 아버지의 본질과는 다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아타나시우스는 디오니시우스를 변호하려고 했으나 바실리우스(Basillius, 330년경-379)는 디오니시우스가 사벨리우스파를 반대하느라 다른 극단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평했다. 로마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64)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의 동명(同名)의 감독을 비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삼신론(三神論) 자들이므로 분리될 수 없는 한 신성(神性)을 세 능력으로 완전히 분리된 세 실체(hypostases)로, 세 신성(divinities)으로 분리한다고 비평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불가분리(不可分離)한 거룩한 하나이심(unity)은 지지(支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은 우주의 하나님으로부터 나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계시다면(요 14:11),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지혜요 능력이시라면(고전 1:24), 그리스도는 항상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일컬어 피조물이라거나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불경을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더 조심스러운 단어를 사용하여 이에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고 오해가 없게끔 변명하였다. 그는 세 실체(hypostaes)라는 말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고 시인한다. 아들의 영원성을 인정하는 한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는 성경적 용어는 아니나 그 말이 같은 성질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이심은 시인하되 세 위(位, Persons)이심을 추호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로마의 디오니시우스 비판을 거의 다 받아들여 자기의 주장을 수정했다. 두 디오니시우스의 논쟁은 실은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하는 서방의 삼위일체 사상과 존재가 위계질서(erarchy)를 이루고 있다고 믿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동방 사상과의 차이에서 즉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