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1) 기독론과 삼위일체론(4)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1) 기독론과 삼위일체론(4)

  4.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이후 기독론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라는 질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인데, 콘스탄티노플의 결정으로 아리우스파 논쟁이 종결되자 신학자들은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질(同一本質)이시고 동일(同一)한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하나님 되심(神性)과 사람 되심(人性)의 관계가 어떤 것이지 논의하는 것이 기독론의 관심이요 초점이었다. 그리하여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등의 잘못된 기독론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로 교회는 451년 ‘칼케돈신조’(Creed of Chalcedon, 451)를 얻게 되었다.

중세 이전 신학자들은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기능 보다 그의 인격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논의 가운데 삼위일체론에서처럼 잘못된 기독론이 대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이신데 그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그 둘을 잘못 강조하다 보면 두 인격을 말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인격을 강조하다 보면 신성과 인성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그리스도를 오직 신(神)으로 혹은 오직 사람으로 말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1) 잘못된 기독론의 대두

   ①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

아리우스파(Arianism)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靈)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로고스(Logos)가 영(靈)의 자리를 대치(代置)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는 로고스 육의 기독론서 출발하나 그에게서 그리스도가 영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아들의 전적인 신성(神性)을 믿으면서 또한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교리에 잘못이 없다고 인정했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of Laodicea, 310-390)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單一性)을 주장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인성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했다. 그는 요한복음 3:13의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15:47의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는 말씀에 근거해 선재(先在) 해 있던 하늘의 사람 혹은 둘째 아담이 성육(成肉)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교회(the Catholic Church)는 아폴리나리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교회는 그의 가르침이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심을 흐리게 하므로 가현설(假現說, Docetism)에 가깝다고 지적하는 한편 우리 인간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 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했다.

   ②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안디옥학파에 속하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l)는 아폴리나리스가 그리스도의 인격의 동일성을 주장한 데 반하여 신성과 인성의 구분을 강조했다. 그의 선생 테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350-428)는 그리스도가 사람이심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인간 그리스도 안에 거하였다고 하여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얻어 만물의 처음 난 자가 되었다고 가르쳤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을 지낸(428-431)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나스타시우스가 설교 중에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을 낳은 이’라고 하자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낳은 이’라고 하며 하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온 것이지 나신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을 부인했다. 인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지닌 자’이며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예배받기에 합당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를 위시한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God-man)이 하나라고 주장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신비로운 연합(strange commixture, wondrous mingling)을 말하고 상위의 성(性, nature)이 하위의 성을 지배함으로써 거의 흡수하다시피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양성의 구분을 조심스럽게 변호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Cyrillus of Alexandria)는 430년 알렉산드리아 노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431년 6월 22일 공의회에서도 네스토리우스를 ‘새 유다’로 정죄하고 감독직에서 면직시켰다. 그러나 440년경 네스토리우스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동양(東洋) 선교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는 7세기에 당나라에 전파되어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약 2세기 동안 왕성했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이 잘못되었다고 밝히는 일에 앞장선 카릴루스 역시 그리스도의 하나이심(unity)을 강조했다.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는 데서 기독론을 출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데서 출발한다. 키릴루스는 그리스도 양성의 구분을 논하면서도 그것은 단지 개념상의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인데 그것은 신적인 인격이라고 하면서 ‘단 하나의 성’(單性)을 말했다. 이런 카릴루스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그가 말하는 ‘푸시스’를 ‘휴포스타시스’로 이해했다. 즉 ‘푸시스’를 인성과 신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휴포스타시스’ 즉 인격을 두고 한 말로 이해했다.  

    ③ 유티케스로 인한 기독론 논쟁

444년 키릴루스가 죽은 후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이 다시 대두되었다. 디오스코루스(Dioscorus)와 유티케스(Eutyches, 378-456)가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주장한 장본인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수도원 원장이었던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산드리아파 신학을 대변한 사람이다. 유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고 키릴루스의 기독론을 지지한다는 것이 지나쳐 한 방울의 식초가 대양에 흡수되듯이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고 구세주의 몸은 우리의 몸과는 본질이 같지 않다(non consubstantial)고 했다. 그리하여 유터케스는 448년 도릴래움(Dorylaeum)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유티케스의 오류도 실은 네스토리우스와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 데 기인한 것이다. 즉 본성(nature)과 인격(person)을 분간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즉 신성과 인성이 두 인격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유티케스는 두 인격을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의 본성만 고집했다.

이단으로 정죄 받은 유티케스는 로마 교황 레오(Leo)에게 호소했다. 레오는 유티케스의 감독 플라비안(Flavian)이 보내온 유티케스의 호소문과 유티케스가 정죄 받게 된 경위를 보고받고 주저하다가 유명한 교서(敎書, lome)를 작성했다. 한편 유티케스 지지자 디오스코루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450)를 움직여 449년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게 했다. 135명 대표가 참석한 에베소회의는 폭력으로 주도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유티케스는 이단(異端)에서 정통(正統)으로 선포되었다.

(2) 칼케돈 회의와 칼케돈 신조

그러나 450년 테오도시우스가 서거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테오도시우스의 자리를 계승한 마르키안(Marcian)과 풀케리아(Pulcheria)는 451년 10월 칼케돈 제4차 세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 630명의 감독과 대표가 참석했다. 이에 레오는 플라비안 감독에게 유명한 교서(Tome of Leo)를 보내어 답했다. 칼케돈 회의는 레오의 이 교서를 ‘교부들과 사도들의 믿음’이라 말하고 또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했다.”라고 말했다. 이 칼케돈 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디오스코루스를 정죄하고 그의 추방을 결정했다.

둘째, 레오의 교서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는 키릴루스의 편지를 정통 신앙의 표준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셋째, 로마 가톨릭 사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새로운 정의(신조)를 작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칼케돈 신조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칼케돈신조(Chalcedonian Definition, 451)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한 분이신 성자(聖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시고, 사람으로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가진 참사람이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으로 말하자면 우리와 동질이신데,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면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 나셨으며, 인성으로 말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이시며 하나님을 낳으신 자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우리는 성자(聖子)시요, 주님이시요, 독생자이신 유일하신 한 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분은 두 본성으로 인식되는데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변화되지도 않으며, 분할되지도 않으며, 분리되지도 않음을 인정한다. 도리어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유하면서 하나의 인격과 자질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두 인격으로 분열되거나 분리된 한 분을 고백하지 않고 한 분이시며 동일한 독생자이신 성자요,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셨으며, 교부들이 우리에게 그와 같이 가르쳤고,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수한 신앙고백에서도 역시 그렇게 가르친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자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 두 아들을 가르치는 자,
  • 아들의 신성에 인성이 몰입되었다고 가르치는 자,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confusion)을 가르치는 자,
  • 그리스도의 몸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

그리스도에 대한 단성론 이단들

  •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연합 이전에는 둘이었으나 연합 이후에는 하나라고 가르치는 자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로는 다음과 같다.

  • 우리 주님의 신적인 인격이 하나라는 사실,
  • 인성과 신성이 영원히 실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 (양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성과 신성은 혼합이 없다는 것,
  • 양성의 분명한 본성은 변함이 없다는 것,
  • 그리스도의 인격에 분할이 없다는 것,
  • 연합된 인성과 신성에 조금도 분열이 없다는 것이다.

(3) 칼케돈 이후의 기독론

325년 ‘니케아 신조’가 작성된 이후 삼위일체에 대한 논란이 여러 수십 년간 계속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칼케돈 회의 이후 한 세기 이상 기독론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즉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의 논의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457년에서 56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어서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의 논의가 뒤따랐다.

451년 칼케돈의 결정에 불복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이었다. 피터 몽구스(Peter Mongus)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단성론의 신조’(The Henoticon)를 작성하여 이를 퍼트리자 로마의 교황은 이런 시도를 정죄했다. 그러자 484년부터 519년까지 36년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그것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 최초의 균열(龜裂)이었다.  

동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안(Justinian, 527-565)은 교회의 평화를 위해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단성론자 황후 데오도라(Theodora) 의견에 동조해 단성론으로 기울었다가 말년에는 다시금 ‘칼케돈 신조’를 지지로 되돌아왔다.

세 가지 단성론 유형 : 1) 피터 몽구스의 ‘신(神) 고난설’(Theopaschitism)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거나 삼위일체의 한 위가 고난 당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2)세베루스(Severus)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구별한다고 하면서도 주로 연합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3)할리카마수스(Halicamassus)의 감독 율리안(Julian)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와 동질임을 부인했다.

단의론(單意論)은 5세기경 이집트에 나타난 신비주의 문서(Pseudo-Dionysius Areopagita)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독교인들의 사변(思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문서의 저자에게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있어서 신(神)의 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단의론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신인(神人)의 능력’이었다. 수도사 카이우스(Caius)에게 보낸 넷째 편지에 “하니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신적 능력을 행하지 않았고 또 인간으로서는 인간적인 것을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에 그는 새로운 종류의 활동을 보이셨으니 곧 신인적(神人的)이다.”라고 말했다.

단의론자들은 마치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가 추구하듯이 그리스도의 의지와 결단력이 그의 신성이나 인성에 어떤 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사변했다. 단의론에 반대한 이들은 ‘칼케돈 신조’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완전한 이성(理性)을 가지셨기에 인간으로서 의지나 결정은 인간적이고 완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