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3) 중세교회 삼위일체 논쟁

초대교회 시대(AD 30년-590년)의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은 나사렛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이시라면 하나님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인지 하는 관심에서 삼위일체를 논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두고 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어떻게 그의 인격을 이루는 것인지 주로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중세(中世, 591년-1516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사변(思辨)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하시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중세에 접어들어서도 서방교회나 동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381년)’와 ‘칼케돈신조(451년)’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구원론(救援論) 중심으로 이해하는 데 반하여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에 더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논의하였다.
1. 서방교회 삼위일체론
서방교회에서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에 의해 삼위일체 교의(敎義 dogma)가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미 5세기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인 ‘칼케돈신경’(Definition of Chalcedon, 451)이 작성되기 이전이었다.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8세기에 이르러 삼위일체 논의가 거의 종결되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nes of Damascenus, AD 700-754)이 삼위일체 교리 논쟁을 매듭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ae)에서 그리스적인 논의와 개념들을 라틴 개념으로 정리하여 진술함으로써 서방교회의 교리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서방 신학자들은 ‘니케아신조’(Nicene Creed, 325)와 그것에 공헌한 신학자들 편에 서서 동요하는 일이 없었으며, 터틀리안(Tertullian, 160-220)의 논의를 따라 하나님의 하나이심(一體)을 강조하면서도 구별된 삼위(三位)를 견지하는 데 철저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삼위일체 논의를 후대 대다수 신학자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하나이심’(unity) 에서 출발한다. 삼위일체가 곧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며 한 창조주라는 뜻과 같은 의미에서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은 한 본체(本體), 한 성품(性稟), 한 능력(能力), 한 의지(意志)를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분리(不可分離)라고 한다. (그림, 잘못된 삼위일체론 아리우스주의)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경우를 보면 거기에 아들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아들은 성령과 함께 세상을 향한 그 자신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역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육(成肉)도 아버지와 아들의 분할(分割)될 수 없는 하나이요, 동일한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함께 하신 성령의 사역도 분할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같은 종(種)에 속하는 세 사람의 인격이 서로 다르듯이 그런 식으로 서로 다른 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각 위격(位格)은 본체(本體)나 신성(神性)에서 동일(同一)한 분이시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한 인격적인 하나님이 내적인 필요에서 서로 관계를 갖는데 인격적인 삶을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생명의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그 유추(類推, analogy)를 인간의 혼에서 찾는다. 그래서 사람이 보는 일에도 삼위일체의 유추가 있다고 한다. 즉 보이는 사물, 보는 것, 이 둘을 종합하는 의지라고 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기억, 내적으로 보는 것, 그 둘을 연합하는 의지라고 하며, 인간의 정신에는 기억(記憶), 지성(知性), 의지(意志) 이렇게 셋이 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를 삼위일체의 흔적 또는 모상(模相, vestigium trinitatis)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피조물의 유추로 설명하려는 것은 적절하지도 못하며 또 옮게 설명할 수도 없으나 하나의 신성(神性) 안에 있는 세 분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감행한 사변적(思辨的)인 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대 신학자들에게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신론적(有神論的)으로 접근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에 이르지 못하므로 우리 인간의 논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도 깊이 사색하고 사변했으면서도 역시 그 점을 인정함으로써 삼위일체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어거스틴은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하는 서방 교회의 전통(Filioque)을 확고히 했으며 그의 삼위일체 교리는 500년경에 나온 ‘아타나시우스신경’(Athanasian Creed, 500)에 반영된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의 신경은 서방교회의 신앙 특색을 띠고 있으며 칼 대제(Charles the Great, 742-814) 시대에 ‘보편적 신조’(fides catholic)로 인정받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아타나시우스신경(420년)을 사도신경(2세기), 니케아신경(325년)과 더불어 기독교의 3대 신경으로 여긴다.
2. 동방교회 삼위일체론
동방교회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가진 유대교(Judaism)와 이슬람교(Islam)에 가까이 접하고 있었으므로 삼위(三位)의 신(神)을 말하는 기독교의 신관은 옳은 유일신 신앙(monotheism)이 아니라는 비판을 그들에게 내내 받았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서방교회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논의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또 유대교가 기독교의 요람이었으므로 교회는 초기부터 구약성경의 해석을 두고 유대교와 대립적 입장이었다. 중세에도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유대인의 공동체를 의식하거나 그들과 접촉하는 동방교회신학자들은 유대교의 비판에 대응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 옳은 유일신 신앙(monotheism)이라고 변증했다.
유대교에서는 신명기 6:4의 ‘쉐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하는 말씀을 비롯하여 여러 구약 말씀들을 예로 들면서 기독교가 하나이신 하나님을 삼위의 하나님 즉 세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기독교 신학의 견지에서 볼 때는 전혀 모순되는 것이 없다고 변증하였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일찍이 왜 모세에게 그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계시하시지 않으셨는가?”라는 유대인들의 비판적인 질문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는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을 들어 말한 이도 있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하나님 신앙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교육적인 배려에서 일신론(一神論)으로 계시하셨으나 보다 성숙한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이라고 응답했다.
또 교회 내에서 아스쿠나게스(Johannes Ascunages of Constantinople)와 필로포누스(Johannes Philoponus, 490-570)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어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킨다면서 삼신론(三神論)을 주장했다. 이에 대응하여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676-749)은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재확인하고 이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하나이심(unity)을 강조했다. 다마스커스 요한은 이렇게 주장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한 실체(實體)이시나 한 분 인격(人格, person)은 아니시다. 또 이 한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세계를 보존하시고 다스리는 이시다. 세 분 안에서 한 실체, 한 신성, 한 권능, 한 의지, 한 능력, 한 자원, 한 권위, 한 권세, 한 나라로 인식되며 똑같이 한 예배를 받으신다.”
그리고 세 분은 혼합(混合)됨이 없이 연합하시면서 계속 분리되어 계신다고 한다. 따라서 로고스(Logos)는 아버지와 같은 본성(本性, naturs)이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 위격은 비록 실재(實在)하는 존재처럼 생각되지만 어거스틴의 말처럼 세 인간이 서로 관계를 갖는 그런 식의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다마스커스 요한은 아들의 종속설(從屬說)은 거부하나 아버지를 신성(神性)의 원천으로 기술(記述)한다. 따라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로고스를 통하여 나오신다고 한다. 제베르크(Reinhold Seeberg, 1859–1935)는 이러한 견해를 그리스도의 종속설 잔재로 보고 이것이 바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있게 된 오랜 논쟁의 불씨였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대응해서는 유대교 경우와 달리 구약성경 해석 문제로 논의하거나 일방적으로 성경 말씀만 호소할 수 없으므로 철학을 의사소통의 공동 근거로 삼았다. 아랍 지식인들은 그리스 철학을 배우고 그 영향을 받은 이들이므로 기독교를 보편적으로 인지하는 사상으로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그것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유대교와 이원적(二元的) 마니교도 헬레니즘에 대한 기독교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비잔틴(Byzantine)에서는 이러한 외적 요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철학적 해명은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비잔틴에서는 신학자가 되려면 일반 고전(古典)을 공부하고 수사학(修辭學)과 철학의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래서 비잔틴의 많은 지도적인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언어에 철학적인 요소와 영향들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총대주교 포티오스(Photios I of Constantinople, 810-891)도 그런 인물이었다.
12세기의 미카엘 프셀루스(Michael Psellos, 1018-1078)도 대표적인 헬레니즘(Hellenism) 신학자이다. 프셀루스는 플라톤에게서 사고의 방법을 찾아 영감을 얻는다고 하며 플라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신론(神論)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정통교리에 충실 하려 했다.
헬레니즘 신학자들은 모든 진리의 원천(源泉)은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라고 확신한다.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철학이든 신학이든 심지어는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참되고 명확한 가르침이든지 간에 그리고 그것이 유대교나 마니교와 이슬람교의 전통에 보존되어 온 것이든지 간에 이 모든 참되고 명확한 가르침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만 함께 어울리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가 외부인들에게는 비록 역설인 것 같아도 삼위일체 교리야말로 아주 설득하기 어려운 적들이 주장하는 일신론(一神論)에 대한 최종적 변증이라고 한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