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6) 은혜 교리와 칭의 교리

Artistic portrayal of Pelagius, for whom Pelagianism was named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이단으로 정죄한 529년 제2차 오렌지공의회(The Second Council of Orange or Second Synod of Orange, 529)

5. 펠라기우스의 은혜 교리 이해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는 아일랜드 브리튼(Britain)의 수도사였다. 390년경 로마에 와서 활동하다가 후에 카르타고(Carthage)에 정착했다.

그는 도덕주의자로서 인간성에 대한 비관적(悲觀的) 견해를 혐오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기 마련이라는 견해는 창조의 원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펠라기우스는 동방 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이성과 자유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창조의 은사에 포함되어있으며 우주적인 양육 과정에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계명과 언약과 교육 그리고 상실된 하나님 형상을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고 한 어거스틴(Augustin, 354-430) 기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렇게 기도하는 대로라면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 은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신학 사상의 핵심이 되는 무조건적 자유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아니 매 활동에 하나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은혜 개념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 개념과는 다르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自由意志)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심어 주신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 영원한 상급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율법 계시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모범적인 행위가 곧 은혜라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또 인간이 원하면 죄를 짓는 일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Caelestius or Celestius)는 한층 더 과격하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다. 인간의 의지(意志)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의 도움에서 오기보다는 우리의 자유 의지에서 온다고 말한다.

또 아담은 창조될 때부터 그가 죄를 범한 사실과는 관계없이 어차피 죽을 수밖에 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고 인간의 원죄(原罪)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않아도 영생을 얻을 수있다고 말하며 은혜와 자유 의지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유를 향유 할 수 있다고 했다.

캘레스티우스는 412년 카르타고에서 정죄 받았으며 416년에는 카르타고와 밀레붐에서 그리고 418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대회에서 정죄 받았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431년 7월 22일 에베소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정죄 받고 그는 출교당했다.

6. 어거스틴의 은혜 교리 이해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서방을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은혜 교리를 말하게 된 배경에는 세 가지가 있다. 로마와 동방과는 대조적으로 북아프리카에는 일찍이 원죄(原罪) 사상이 확고히 뿌리 내려 있었다.

첫째, 어거스틴은 그 점에서 터툴리안(Tertulian, 155-220)의 원죄론을 유산으로 받았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미 죄로 물든 인간의 성품을 언급하지 않고는 은혜를 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죄로 물든 인간의 성품이라는 개념은 인간 안에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도 다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시행되는 우주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다는 동방 신학 사상과도 다르다.

둘째, 어거스틴 자신이 은혜에 대한 체험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이 철학과 마니교에 탐닉했던 일과 자신의 힘으로는 육의 정욕을 이길 수 없었고 인간의 부패성과 죄의 세력에 대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통감하게 된 경험을 통하여 나름대로 은혜 교리를 말하게 되었다.

셋째, 성경 연구를 통해 특히 바울 서신의 연구를 통해 은혜 교리를 말하게 되었다.

주후 360년경 ‘바울 연구 열‘(Paulus Renaissance)이 고조되었다. 어거스틴도 이에 동참했으며 더욱이 자신의 문제를 더 분명히 해결하기 위해여 바울을 연구했다고들 말한다.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시 51편, 엡 2-3장, 롬 5:12) 

아담의 불순종 결과 인간의 성품이 손상되고 타락하게 된 것을 인정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담이 향유하던 자유 즉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유 의지(意志)로써는 삶에서 당면하는 유혹들을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 은혜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동하시는 내적이며 신비한 그리고 너무나 놀라워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이라고 한다. 예정과 자유 의지의 문제를 두고 어거스린은 세 단계로 해결책을 말한다.

첫째, 인간은 어디까지나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실제로는 정욕으로 찬 대기 속에서 숨 쉬고 있으므로 죄를 택할 뿐이라고 한다.

둘째, 어거스틴은 은혜로 우리의 의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모든 인간의 의지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를 전제한다.

셋째,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liberum arbum)와 ’자유‘(libertas)를 구별을 한다. “자유는 선한 일을 하는 자유 의지이며 죄와 유혹에서 해방된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하다.”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은 자유롭다고 한다.

7. 반(半) 펠라기우스 논쟁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논쟁에서 이겨 교회가 펠라기우스를 정죄하고 출교했으나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견해를 전적으로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사람이 선을 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교리와 예정교리에 의문을 가지거나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어거스틴의 말년에 이르러 그러한 의문이 공론화되었다.

이것을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가까운 사상을 가진 사람이란 뜻을 함축하나 그들을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s)라고 하기보다는 반(半) 어거스턴주의자(semi-augustinians)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면 그런 부류의 대다수가 어거스틴 영향을 받아 그의 교리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쟁이 오래 계속되면서 반(半) 펠라기우스 사상은 펠라기우스 쪽으로 더 기울게 되었다.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견해를 진술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였다. 카시아누스는 하나님 은혜에 관해 두 가지 원리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런 선한 일도 행할 수 없다고 하나님 은혜를 강조하는 한편 의지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意志)는 죄로 말미암아 마비되었으나 아직도 그 안에 약간의 자유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으며 비록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오시지만 먼저 율법을 주시고 필요한 능력을 주입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선한 일을 할 의지를 가질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죽은 건 아니고 상처만 받은 것이며 은혜는 하나님 홀로 역사하는 은혜(gratia operans)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역사하는 은혜(gratia cooperans)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리지(Riji)의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 of Riji, ?-495)는 그의 은혜론에서 원죄를 부인하고 은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를 신랄하게 비판하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를 대변했다. 파우스투스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있으므로 결국 죽게 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잃은 것은 아니므로 비록 인간이 타락했으나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파우스투스는 자유 의지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서 카시아누스보다 펠라기우스주의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 후 오랜 논쟁 끝에 529년 오렌지 공의회(Arausiacum)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양자 모두 모든 교회가 고백하는 보편적 신앙의 척도에 위배 된다고 판정했다. 이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자유 의지가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너무나 시들고 약화가 되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에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를 앞질러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도 없다고 설교하며 또 믿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은혜를 받는다고 믿으며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협력을 받아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일을, 만일 그들이 신실하게 노력을 한다면 실천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악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누가 이러한 악한 일을 믿으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증오하는 마음으로 저주한다.

그분은 공로가 선행하지 않는데 우리 안에 믿음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으셔서 우리로 믿음 안에서 세례의 성례를 추구할 수 있게 하시고, 세례 후에는 당신의 도우심으로 당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실천하게 하신다.

이같이 오렌지 공의회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의 교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기각되었다. 항거할 수 없는 예정의 은혜는 세례의 성례적 은혜에 밀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은혜 교리는 이를테면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목적으로 이해하는 잘 알려진 중세의 가톨릭 신학에 더 근접하게 되었다.(*)

글쓴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  

펠라기우스주의, 반 펠라기우스주의

교회사에서 2-3세기를 이단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정통 기독교 내에서 교리적인 확립을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행히 교부들과 변증학자들의 공헌과 각종 교회 회의들의 결과로 교회는 조금씩 교리적 기반을 다지고 순항의 닻을 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4세기는 교회의 빠른 성장기로 본다. 그러나 성장의 후유증은 반드시 병폐를 수반한다. 로마제국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갔다. 국경은 게르만족과 고트족과 훈족 등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고 제국의 위용은 붕괴가 되고 있었다. 오히려 붕괴는 국경에서가 아니라 로마라는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 펠라기우스주의

400년경 아일랜드 출신의 한 수도사가 로마를 방문했다. 당시 로마는 모든 수도사에게 이상향이었고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누구든지 로마를 한번 방문해보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 수도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의 눈에 비친 로마는 영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도시로 타락해 있었다. 로마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퇴폐로 물든 소돔이자 고모라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젊은 수도사는 고민했다. “왜 로마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 수도사가 바로 교회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그 유명한 인간의 자유 의지 주창자인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이다. 그는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을 부정한 이른바 ‘펠라기우스주의’의 원조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원인이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 의한 ‘운명론적인 결정론’에 있고, 이로 인해 로마 사회가 극도로 퇴폐하고 타락하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어거스틴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책임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 중요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 의지와 능력이 있다.

둘째, 하나님의 은총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아담의 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죄인은 이를 모방할 뿐이다.

셋째, 인간은 대부분 죄를 짓지만 신앙에 의해 죄를 용서받으면 인간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성령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단지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며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은총의 수락 여부는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어떤 협력도 할 수 없으며 신앙의 촉발도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고 정의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정반대로 본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412년과 418년에 카르타고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2.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한편 429년부터 남부 갈리아 지역의 일부 수도사들에 의해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일어났다. 수도사 카시아누스, 빈켄티우스, 파우스투스 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한 펠라기우스주의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주의를 절충하여 ‘영혼의 구원에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첫째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상호 대척점에 있는 주장들을 절반씩 취했다는 이유로 교회사에선 이들을 ‘반(半, semi) 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른다.

그들은 특히 어거스틴의 핵심적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예정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고 선포했다.

초기엔 예정론만 아니면 그들은 어거스틴의 추종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강하게 질타했다. 펠라기우스의 원죄 부정과 자력 구원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죄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이 타락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 그들은 어거스틴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어거스틴을 완전히 따르지 않았다. 타락도 완전 타락이 아닌 부분 타락으로 보았다. 결국에 그들의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대 구원이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이른바 ‘신인 협력설’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490년 파우스투스가 죽은 뒤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호응을 받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는 중세의 금욕적이고 율법 편중적인 신심의 태도와 융화되어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정착하면서 활발하게 살아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후기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펠릭스 4세 교황(526-530년)이 이 사상을 경계하자 세력이 약화가 되었고 마침내 529년 제2차 오렌지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은 여전히 죽지 않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후기에서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불어넣는 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밖에서 들려지는 복음처럼 순수하게 외적인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들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능력으로 구원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지 않으며 이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 입장으로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 아니므로 인간에게도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행위 구원은 이들에 의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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