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은혜의 교리와 칭의 교리
(83호에서 계속) 12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학자들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새로운 주제로 다루었다. ‘은혜’와 ‘칭의’ 개념에 대한 초기 스콜라 신학의 해석은 다른 많은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신학적 유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 1033-1109)나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6-1l60) 같은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은혜 사역’을 동방교회 신학처럼 대개 본성 회복으로 이해했다. 롬바르드는 고해 성사(告解聖事, Confessional)의 교리에서 ‘칭의’(justification)를 ‘사죄’(赦罪)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창조 당시에 자신에게 부여된 은혜에 의해 의(義)를 소유하였으며, 이 의(義)는 의지의 올바른 태도와 선(善)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자신이 가졌던 의(義)의 ‘올바름’을 상실함과 동시에 자력으로 의로워질 가능성도 잃고 말았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모든 일을 정당하게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의(義)가 인간 의지의 올바름 여하에 달렸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의 행위로써 의를 이를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의 사악함은 어떤 피조물로부터도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바뀔 수 없으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지의 올바름이 한번 회복된 이후에도 은혜의 도움은 여전히 필요하다. 왜냐면 인간은 의를 항상 의지적으로 원함으로써만 계속 보유할 수 있으며 이 의지의 올바른 태도는 바로 은혜의 사역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義)는 오직 은혜에 의하여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 이들은 믿음과 의가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피차 필요조건이 된다고 여긴다. 옮은 것을 의지하는 데는 믿음 즉 진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의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둘은 모두가 은혜의 산물로서 인간의 파괴된 본성을 치유해주고 본래의 의를 회복시켜 준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은혜가 주입(注入)되어야 하고 이 은혜의 주입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향한 의지의 전환이 일어나며 인간 안에 새로운 감동과 자극이 일깨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럼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는 과정을 밟는다고 한다.
제2기 즉 전성기의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초기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신학자들은 구원론에 대해 여러 가지 답변을 시도했다. 그들의 답변은 주로 전통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대체로 초기 어거스틴주의적 견해보다는 공로와 상급사상을 크게 강조하며 특히 프란체스코회 신학에서는 반(反) 펠라기우스주의 경향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인다.
은혜의 전달 수단으로서 성례전(聖禮典)에 상당한 의미를 부각하는가 하면 전성기의 신학자들은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사실로 인정받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자연적 은혜의 사역과 초자연적 은혜의 사역을 구별했다. 그 결과 인간이 본성적 차원 이상의 존재로 격상될 수 있다는 은혜 개념을 낳는다.
초기의 프란체스코 학파는 구원서정(救援序程, Ordo Salutis)을 발전시켰는데 그들의 칭의 교리에는 예비적 행위에 대한 사상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시행 단계에 들어가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예정을 통해 예수를 믿어 죄로부터 해방되어 복을 받고 영생을 얻을 자들을 선별하셨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생활 가운데서 그가 의롭다 함을 입는 칭의 과정과 은혜의 계속적 사역 과정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적 은혜의 영향 아래 영위하는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며 아울러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영원한 작정의 적시(適時) 집행이라고도 한다.
프란체스코 학파는 은혜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의지 또는 ‘창조되지 않은 은혜’로 생각하는가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구원을 위해 은사로 주어졌을 때 그것을 ‘창조된 은혜’로 인식한다. 이 ‘창조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인간에게 칭의와 선행을 가능하게 해주신다고 한다.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은사를 가리켜서 ‘은혜로 주시는 은혜’라고 한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예비적인 행위는 일반적인 자연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자 갈망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를 보아 인간의 이성과 의지 속에는 선한 것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성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주시는 은혜’는 인간이 보다 높은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은혜이다. 인간이 이러한 은혜를 받으면 그는 이제껏 태어난 믿음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예비적 회개와 보다 낮은 형태의 두려움과 그리고 무한한 소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이 은혜에 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에서 말씀 혹은 복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말씀은 어떤 사람이 성례전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와 함께 칭의를 입어야 할 처지에 있을 때 여기에 꼭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성기의 스콜라 신학에서는 말씀보다는 성례가 구원을 위해서는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말씀은 율법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인간들에게 무엇을 믿을 것과 무엇을 행할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복음은 무엇을 명령할 뿐만 아니라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 주는 ‘새 율법’으로 이해하며 이 능력은 말씀 자체를 통하여 공급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을 경유 해 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또 인간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그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급한 정도의 믿음이나 회개만으로는 인간이 의롭게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답하려고 프란체스코 학자들은 ‘합당한 공로’ 혹은 ‘상당한 정도의 공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이와 같은 행위를 자력으로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 행위 자체는 공로(功勞)로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상을 내리시리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인간이 받는 상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진정한 은혜 즉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로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고 그를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존계로 만드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이 선행을 쌓고 ‘당연한 공로’ 또는 ‘순수한 공로’를 얻는 데 꼭 필요한 뛰어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한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은혜는 주입하여 ‘보유하는 은혜’이요, 이미 ‘보유한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성례전을 통해 공급된다고 한다.
먼저는 세례를 통해서 오지만 참회와 성찬을 통해도 올 수 있다고 하며 은혜는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있으나 후에 참회함으로써 다시 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 이 ‘보유하는 은혜’는 인간의 본성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하며 ‘주입된 믿음’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순수한 공로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수 있고 이에 대해 영생(永生)과 영화(榮化)의 은혜를 상급으로 받게 된다고 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혜 교리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먼저 은혜가 왜 필요한지 묻는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상실된 존재라고 한다. 은혜가 없다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검토하며 할 수 없는 것을 열거한다.
즉 은혜 없이는 구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며, 이성과 자유가 미칠 수 있는 선을 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내용 면에서 불충분하게 이해할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라서 해야 할 일을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영생을 얻지 못하며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도 할 수 없고 죄를 항거할 수도 없다. 부패한 성품을 고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도 못하며 중한 죄를 낱낱이 피할 수도 없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은혜가 없이는 이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없다고 한다. 토마스는 또한 은혜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다시금 열거한다. 즉위에서 열거한 것을 긍정문으로 고쳐서 말하는 격이다.
토마스는 이런 논의를 계속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어 ‘형상’(form)으로서 은혜와 도움으로서 은혜 즉 ‘운동’으로서 은혜를 구별한다. 토마스는 인간의 본성을 ‘온전한 본성’과 ‘부패한 본성’ 즉 아담이 죄를 범하기 이전의 본성과 타락 이후의 본성으로 구분한다.
아담은 범죄 하여 타락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주신 ‘은사’마저 상실했고 온전함을 위한 근거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시고 초자연적으로 완성 시키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죄 아래 있는 사람이 아직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간결하게 답변한다. 즉 사람은 본성의 힘을 통하여 약간의 ‘개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집을 짓는다든지 포도원을 가꾸는 일 등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과는 달리 토마스는 죄인도 본성적으로 윤리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은혜의 본질을 논하면서 로마 가톨릭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는 ‘창조된 은혜’(gratia creata)에 관해 언급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만든 피조물이 아니라고 한다. 은혜는 하나의 행위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하심이다.
인간 안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가 결코 피조물과 창조주의 경우처럼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양면성을 지니지만 동일한 실재로서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토마스는 또한 은혜는 운동임과 동시에 머무는 질(質, quals)로 인식한다.
토마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행위 자체를 구분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 다른 색깔로 나타나 보이듯이 인간 안에 은혜의 역사가 달리 나타남을 인식할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거룩하게 만드는 은혜’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구분한다. 그리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恩賜) 즉 카리스마(charismata) 해당한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을 은혜로 다루심을 말하는 데 반하여 토마스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은혜를 또한 ‘역사하는 은혜’와 ‘더불어 역사하는 은혜’로 구분한다. 그리하여 죄인의 칭의는 ‘역사하는 은혜’의 일이고 ‘함께 역사하는 은혜’의 일은 공로라고 한다.
토마스는 또 은혜를 ‘선행하는 은혜’와 ‘후속적인 은혜’로도 구분한다. 게다가 은혜의 사역을 다섯 가지로 말한다. 즉 영혼의 치유, 선을 행하려는 노력, 선행의 완수, 선행의 지속, 영화에 대한 갈망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에 대하여 분석하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걸 논증하거나 증명하기 전에 추론 과정을 위한 명석한 출발점을 가져야 하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논의하고 있는 주제를 구체화해야 하며 문제의 구체적인 종류를 파악해야 하고 그 구체적 사물과 관련된 속성과 원인들을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범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토마스는 죄인의 칭의에 관하여 일단 은혜와는 별개로 논의를 시작하는데 은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석한다. ‘거룩하게 하는 은혜’는 곧 칭의를 주시는 은혜가 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임하심으로서 하나라고 한다. 그는 칭의를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오는 것으로 보고 그 과정을 은혜의 부으심, 하나님께로 가는 전향, 죄에서 떠남, 죄의 용서 등의 네 단계의 요소로 구분한다.
토마스는 이같이 칭의의 단계적 요소를 말하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선물로 받은 자유라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오류가 없이 특이한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감동시키신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그냥 인간의 의지를 ‘부자유한 의지’로 이해했다. 루터는 토마스가 말하는 바와 같은 자유의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다.
토마스에게 죄인의 칭의는 ‘역사하는 은혜’의 효과이다. 죄인의 칭의는 바울의 회개에서 볼 수 있듯이 기적은 아니나 그 이상의 것이라 한다. 이 칭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하신 역사라고 한다. 그것은 무로부터 창조보다도 위대하고 영원한 영광을 선물로 주시는 것보다 위대하다고 말한다. 왜냐면 죄 아래 있는 인간과 인간이 지향하는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의 신분과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게 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의 신분의 차이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토마스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공로를 은혜 즉 ‘더불어 역사하는 은혜’로 보는 점에서도 어거스틴과 견해를 같이한다.(*)
글쓴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