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3세기 스콜라 신학의 은혜 교리 이해

(84호에서 계속) 13세기에는 중세기 때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복음과 교회의 양립성 문제 같은 것은 없었다. 전통적인 은혜 교리 범위에서 이해하는 ‘칭의 이해’가 교회의 존립에 결정적인 주제가 될 수 없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믿음’과 ‘말씀’과 ‘죄 회개’와의 관계를 간과(看過)한다. 은혜 개념은 단지 죄를 간과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칭의는 단지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것이라는 이해는 전통적 은혜 교리에서 배제되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전통적인 은혜 교리가 인간의 협력이라는 가능성 덕분에 은혜의 절대적이며 절박한 필요성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전통적인 은혜 교리가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은혜 아래 있거나 은혜 가운데 있는 자유이지 은혜와 대립 관계에 있는 자유는 아니라고 한다. 전통적인 은혜 교리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말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알지 못한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tus, 1270-1308) 이후의 신학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인 힘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순간에 은혜에 내맡기는 일은 완성되며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걸 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으신 진실 즉 하나님의 정돈된 능력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은혜를 부어 넣어 주시며 이 은혜로 사람은 하나님을 계속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 종교 개혁자들의 칭의 교리 이해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오직 은혜’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게 신학의 중심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존폐가 달린 주제라고 한다.
루터의 표현에 따르면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비추는 태양이요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들과 구별 지어 주는 표지이다.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칭의를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했고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케 하는 결정적인 교리’라고 했다.
종교 개혁자들에 따르면 이같이 ‘칭의’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하는 것이요, 아들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교리이다. 율법과 복음을 분별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 구속(救贖)의 주님이시오, ‘은혜로만’(sola gratia)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 얻게 하는 것을 함축(含蓄)하는 교리라고 한다.00
종교 개혁자들은 아울러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마련인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자 과정이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 즉 루터나 멜란히톤이나 칼빈은 칭의의 어의(語義)를 한마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광범하게 다룬다. 칭의를 구태여 좁은 의미로 정의한다면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허물을 간과하시고 그리스도의 의(義)를 그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며 그 의로 인하여 죄인을 의롭게 여겨 주시는 것’으로 말한다.
루터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후기 스콜라 신학과 씨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책(罪責)을 물으시는 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결을 시킨다. 루터는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계속 칭의 교리를 밝히는 일에 몰두했다. 루터에게 칭의는 법정적 측면이 있음과 동시에 우리 밖에서(extra nos)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미한다.
멜란히톤은 칭의를 더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노력하면서 1535년의 ‘Loci’에서 “칭의는 죄의 용서와 사람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화해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라고 정의한다. 그런가 하면 1559년의 ‘Loci thologici’에서는 칭의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구원의 결정적 행위인데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과거부터 지은 죄를 없이할 뿐 아니라 아직 어둠 속에 놓여 있는 미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의미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칭의를 성화 즉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하나님의 새 창조에까지 관련시켜 말한다.
1577년의 루터교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칭의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칭의란 가련한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모든 죄와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심판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되었음을 선언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相續者)로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뜻한다.”
칼빈은 1536년 칭의를 하나님의 종말적인 심판과 관련해 법정(法庭) 측면에서 언급한다. 1539년에는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이런 의미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대에서 의롭다고 간주하시며 그 의(義)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흡족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1543년에는 더 포괄적으로 말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시면서 의인(義人)으로 간주(看做)하신다. 그리고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고려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리고 칼빈은 칭의를 멜란히톤과 마찬가지로 고린도후서 5:18-21에서 말씀하는 화해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칭의의
서정’(order of jus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 칭의의 시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은혜로 받아들이신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비로 접촉해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이다.
‣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에 얽매인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로 주신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 그럼으로써 종말을 향하여 힘차게 걸음을 내딛게 된다. 즉 이제 움트 게 된 순종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성을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 늘 새롭게 매장(埋葬)하게 된다.
12.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 교리
이상으로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은혜 교리와 칭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피상적으로나마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성경신학자들의 연구를 따라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칭의교리’는 ‘은혜교리’의 핵심이며 보완이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교리이다. 로마서에서 가르치는 중심 교리가 곧 ‘이신득의’(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것이 한 절로 표현이 돼 있는 곳이 로마서 1:17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우리는 이 교리를 너무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다 보니까 혹시 그 본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줄 안다. ‘이신득의’라는 말은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말이 포괄적인 넓은 의미가 있기에 믿음을 ‘경건’이라는 말로 대치한다든지 ‘믿음으로 사는 생활’ 혹은 ‘종교적인 신앙 행위’로 생각할 경우 그것은 로마서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고 할 때의 믿음과는 다른 뜻이다. 로마서 3장의 말씀은 이같은 로마서 1:17의 말씀을 오해됨이 없게 잘 설명하는 말씀이다.
로마서 3:21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한다. 원문에는 그냥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로 되어있다. 칭의 교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로마서 1:17도 실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성경 구절들은 칭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믿음에 ‘선행’(先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로마서 1:17의 말씀은 루터에 의해 드러난 성경 구절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루터는 치음에 이걸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이해해 온 대로 하나님의 ‘정의’(正義) 또는 ‘공의’(公義)로 이해하였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를 ‘justia’로 번역한 라틴어 성경에 익숙했기 때문에도 그러했다고 한다.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로우심’이라는 말고 이해하려니까 말이 되지 않았다. ‘디카이오쉬네’를 ‘justitia’로만 이해할 경우 자신은 심판을 받을 존재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주사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였다.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이 ‘하나님의 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칭의 교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칭의 교리는 오랫동안 가려진 교리로 내려 보아왔다.
우리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때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쓰는 척도로서 공의’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복음을 옮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루터는 그래서 평안을 찾지 못했다. 누구나 하나님 공의 앞에 서면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오랜 고민과 심적인 방황 끝에 ‘하니님의 의’가 죄인을 죄대로 갚지 않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으로 깨달았다. 그때 그는 희열과 평안을 맛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의 의라는 뜻이 무엇인지 나는 오랫동안 밤낮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에 불의한 자를 의롭게 다루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만 내내 생각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에 우리가 믿을 때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거듭났음을 느꼈으며 낙원의 활짝 열린 문을 들어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성경 전체가 새롭게 이해되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혐오스러운 말로 들렸으나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달고 사랑스러운 말이 되었다. 바울의 이 글은 나를 천국 문으로 인도하는 대로가 되었다.
여기서 ‘의롭다’라는 말은 ‘곧다, 바르다’라는 개념과 다르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끓고자 하여”(마 1:19) 정혼한 여자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임신한 사실을 알고 취한 그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표현한 말씀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법대로 처리하자면 돌로 쳐 죽임을 받도록 해도 그만이지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그는 법대로 냉혹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용서할 줄 알고 자비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고 하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義) 즉 ‘체데크’(צדק, Justice, 남성형) 혹은 ‘체다카’(צדקה, Justice, 여성형)도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범보다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자비(慈悲) 즉 ‘헤세드’(חסדי)와 동의어로 쓰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사울이 엔게디 굴속에서 자고 있을 때 다윗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살려 준 걸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 하니 너는 나보다 의(義)롭도다.”(삼상 24:17)
사무엘상에서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다윗도 의(義)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義)와 진실(眞實)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를 부음을 받은 자를 치기 윈치 아니하였나이다.”(삼상 26:23)
구원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는 이사야 후반부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의(義)가 구원에 대한 말씀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義)를 부어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義)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사 45:8) “내가 나의 의(義)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相距)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플리라”(사 46:13) “너희는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펴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義)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나의 의(義)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8)
시편에도 그러한 예를 많이 발견한다. “내가 주의 의(義)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아오니”(시 40:10) 로마서 3:20 이하에서 “그러므로 을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한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경건 생활로는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義)를 입혀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의’가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라는 말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의(義)로 악인과 죄인을 심판하시며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의(義)로 구원하신다.(시 9:4-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며 그럴 능력이 있으시나 그냥 임의로 하시지 않는다. 우리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로 더럽혀진 사람 그대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시궁창에 빠졌다가 건짐을 받은 사람이면 먼저 더러운 옷을 벗고 새로 갈아입어야 하듯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죄 씻음을 받고 정결함을 받아 의롭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마치 왕이나 통치자가 법을 초월하여 사면권(赦免權)을 발동하여 임의로 죄인을 면죄하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실 수가 없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대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아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어떠한 죄인도 그것을 비켜 갈 수 없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아들을 희생하심으로 죄인의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살리고자 구원하시고자 주신 율법이 오히려 죽이는 것이 되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즉 율법은 우리로 죄인인 것을 진단하게 할 뿐 치료는 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율법을 스스로 손상하지 않으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을 나타내신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심으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고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그 크신 사랑이며 신실하심이요 공정하심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義)를 위하여 순종하셨다. 예수께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의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다. 당황해서 만류하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은 허락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게 합당하다고 하셨다.(마 3: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 고난과 죽이심 당하시고 무덤에서 다시 사셔서 높이 들리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義)가 미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믿는 자들을 위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당신의 의(義)를 나타내려 하신다.
로마서 3:26에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독생자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삼으시고 그의 피를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잔치를 다 준비하시고 사람들에게 와서 잔치에 그냥 참여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예복만 갖추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흰옷만 입으면 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의(義)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 지극히 귀하고 무한히 값진 아들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가 달할 수 없는 구원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그대로 받고 그 자비를 입는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주신다는 것은 법정적 사죄의 선언 이상의 것이다.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는 말씀은 우리로 죄인임을 면케 해 주실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일러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삼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 그것이 곧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하는 공로와 업적을 내세우는 것도 구원을 얻는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산상보훈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나 그것은 결코 율법주의 견지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법률 조문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범하지 않으면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떤 것임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어김없이 지킨 의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의(義)를 덧입는 일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말씀이다.
우리는 선교와 봉사 등 믿음의 삶에 열심을 다 할 때 우리의 구원을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를 늘 되새겨야 한다. 교회 성장이나 병 고치는 은사를 추구하고 무슨 능력을 추구하는 나머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는 것임을 즉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면 중세적인 공로 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자력으로 구원 얻는 것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오직 믿음’으로는 믿는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말한 믿음은 막연한 믿음 행위가 아니고 내용 있는 믿음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이다.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인지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선한 행위를 동반하지만 의롭다 함을 받는 요건으로서의 믿음은 단순히 인지(認知)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으로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는 구원의 선언을 받은 것이다. 막연한 믿음과 믿음 생활의 강조는 결국 공로 주의와 율법주의로 떨어지게 한다. 공로 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할 때 사람들은 경건을 위하여 나름대로애를 많이 쓰지만 탈선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면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우리는 칭의 교리를 발견한 종교 개혁의 위대한 신학적 유산을 잘 보존하며 새롭게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롬 8: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의 뜻을 아는 신자는 흔들림이 없다. 또 성도들을 일종의 공로 주의로 몰아쳐 위협하고 미혹하는 시한부 종말론이나 여러 이단 사설에 현혹되지 않는다.(*)
글쓴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